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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지는 설교이기 위해서
나쁜 설교, 악한 설교 (bad preaching)
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청중들 앞에 섰다. 그리고 설교를 그렇게 시작했다: "오늘 설교는 악의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선한 사람들에게 자행되고 있는 극히 악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청중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사님의 설교요!"
위의 조크와 함께 그의 책을 시작하면서, 미국의 설교학자 데이빗 쉬라퍼(David J. Schlafer)는 오늘의 청중들이 "전혀 식욕이 없어서 느끼는 배고픔"(Hunger without Appetite)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설교에 식상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식욕을 전혀 느끼지 않으며, 보다 좋은 설교에 대한 희망 마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설교에 대해 기대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온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들려지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설교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게 했으며, 설교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악한 일을 자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강단 앞에 앉아 있는 청중들이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과 말씀에 대한 갈증마저 결핍되게 하는 것은 한 두가지 요소 때문이라기 보다는 여러 요인이 작용해서 일어난 일이다.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라는 영화를 보면 미국에서 한참 반전 데모 현장에서 월남전에서 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은 포레스트 검프가 우연히 반전데모를 하는 곳을 지나게 된다. 정복에 훈장을 차고 반전데모장에 나타난 그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으면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안 주최측이 월남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기 위해 그를 단상에 세운다. 약간 지능이 부족한 그가 전쟁의 실상을 그대로 알리게 될 것을 두려워한 데모 반대자들이 마이크 줄을 뽑아버린다. 소리도 나지 않는 마이크 앞에 서서 그가 경험한 전쟁의 참상을 한참 동안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전달되지 않는다. 주최측이 서둘러 선을 다시 연결시켜 놓았을 때는 포레스트의 말은 다 끝이 난 상황이었다. 그의 전쟁 경험들을 열심히 나누었지만 그가 전하려고 하는 말은 한마디도 전달되지 못하고 만다. 다만 마이크가 다시 연결되었을 때 청중들의 반응은 "꺼지라!"는 반응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해서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들려지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무관심한 설교자가 이와 같다. 사실 이러한 일은 강단에서도 얼마든 일어날 수 있다. 아무리 잘 준비된 설교라 할지라도 소리가 나지 않는 마이크를 통해서 말하는 것과 같이 청중들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는 설교가 되어질 수 있다. 설교는 행해지고 있지만 말씀에 대한 아무런 갈급함도 없이 청중들로 하여금 깊은 굶주림 가운데 있게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경각심을 갖게 하는 상징적 메타포를 사용하여 웨렌 워어스비(Warren Wiresbe)는 "강단에서 춤추는 해골, 회중석에 너부러져 있는 송장"들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설교들은 "상관성(relevance)"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설교자로부터 인해 생겨진다고 그는 간파한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청중들에게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나쁜 설교"이다. 청중들을 실망시키고, 말씀의 사역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실망시킨다는 점에서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악한 설교"이다. 그러므로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라고 할 수 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Faith comes from hearing, 히10:17). 다시 말해서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으며 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면케 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설교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말씀의 능력과 역사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도전은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본문"으로부터 받아,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청중"들에게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가 커다란 과제로 대두되어진다.
무기력하게 만드는 시대를 살면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말씀 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많은 설교의 장벽들에 의해 가로막혀 있을 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는 결코 중단할 수 없는 사역임을 천명하셨다. 이것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보여준다. 오늘도 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설교를 이해할 때, 이 사역은 교회가 포기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부르심(calling)이요, 거룩한 위임(commission)이다. 그러므로 이 사역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사역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이며,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시는 신인협력의(synergistic)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역이 바로 행해질 때, 생명이 부여되어지며,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권능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어떻게" 이 사역을 감당해 갈 것인가이다.
그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오늘의 문화는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드는(dumbing down)"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의 예배와 설교가 그러한 문화적인 특성에 의해서 깊이 도전을 받고 있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문화 사회적인 변혁의 물결은 설교 사역을 무기력하게 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향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산업(entertainment industry)과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중들의 관심과 혼을 앗아가 버리며, 전통적인 가치 체계를 벗어나 포스트모던 가치체계로 나아가는 오늘의 문화는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며, 종교 다원주의와 해체주의적인 경향을 띠면서, 말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급격하게 변화되어가는 커뮤니케이션의 환경 역시 설교 사역에 있어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인간의 지각기관(sensorium)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메시지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지고 있으며,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사용되는 매체 역시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교회의 복음적인 과제는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해 신실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현대인의 정신과 지성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기 위해 계속적인 방법론의 개혁을 요구한다.
다시 돌아보는 "새로운 설교학 운동"
70년 이후 북미의 설교학계에서 태동되어 발전을 거듭해 온 "새로운 설교학 운동(the New Homiletics)"은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오늘의 청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보다 효과적으로 들려지게 할 것인가에 관심하면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을 추구해 왔다. 앞의 글들에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은 무기력하게 만드는 문화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진행되어 가는 설교 사역에 활기와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해 주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형태라기 보다는 문화 사회적인 변화가 계속되는 한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해야 하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는 방법이기에 우리는 결코 그것을 절대화시키는 누를 범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모든 설교 방법론들이 그 나름대로의 가능성과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한 설교의 형태를 절대화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설교 방법론이 만능일 수는 없고, 어느 누구에게나 그 치수는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신데릴라의 유리구두와 같이 그것을 신기만 하면 저절로 "왕자비"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변화하는 시대에서의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을 관심하게 해주며, 특별히 기독교의 설교가 오늘의 시대에도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들려지게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변화하는 문화 사회적인 상황을 고려하면서 청중들의 삶의 자리와 의식(consciousness)의 변화를 고려하여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설교의 틀을 제시한다. 이러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은 주로 설득(persuasion)보다는 청중들의 영적인 차원의 형성(formation)에 초점을 맞추며, 단순한 말씀의 전수(transformation)보다는 말씀의 경험(experience)에 대해 깊이 관심하면서 방법론적인 틀을 구축해 나간다.
특별히 전통적인 가치관이 붕괴하고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문화 유형들이 포스트모던화 되어가는 오늘날의 문화 사회적 상황 가운데 서있는 한국 교회 강단을 고려할 때,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많은 도전을 한국 교회에 던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난 1세기 동안 누렸던 설교의 영광의 시대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지가 과제로 남겨진다. 지속적인 설교의 영광의 시대를 위해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의 추구할 때, 북미의 교회가 30여년전 우리와 비슷한 문화 사회적인 변화를 경험하면서 추구했던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을 위한 좋은 유비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설교 방법론에 대한 관심과 청중의 역할,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 그리고 설교의 언어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한국 교회 강단에도 많은 도전과 유비를 제공해주는 것이 사실이다.
들려지는 설교이기 위하여
이러한 현대 설교학에서의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을 추구는 새로운 문화 사회적 변화의 시대 가운데 서있는 한국 교회 강단에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을 부여해준다. 급격하게 변화되어가는 시대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들려지는 설교가 되어지며, 설교의 영광의 시대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사항들을 절대화시킬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변화하는 시대를 향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 추구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설교에 있어서 청중의 역할에 대해서 깊이 고려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청중은 수동적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존재(passive receiver)로 이해되어져 왔다. 설교자가 준비한 말씀을 잘 전달해주면 청중들은 그 말씀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말씀이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의 최종적인 종착지이며, 그들의 역할은 단지 귀를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러나 단순한 청취자가 아니라 청중은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여정을 함께 가는 동반자(partner)이다. 설교를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the event of encounter)으로 이해해 볼 때, 그리고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보다 강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보다 깊은 헌신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청중 이해에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현대 설교학의 중심적인 관심의 하나는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청중들이 수동적인 수령자들로 여겨졌다면, 설교자들은 청중들보다는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말씀에 대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원천(source)이었다. 그는 높은 위치에서 말씀을 배설하는 권위자였으며, 메시지의 원천으로서 군림하는 동안, 청중들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단순히 말씀을 받아들이는 존재였다. 청중들은 설교가 전달되어 가는(transmit) 설교의 기착지(the destination of the sermon)였다. 이러한 설교자와 청중들의 관계는 "수도관의 메타포"를 통해서 가장 잘 설명되어질 수 있다. 수원지에 가득 담겨 있는 물이 수도관을 통해서 물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전달되어진다. 설교자는 수원지와 같이 말씀의 풍성함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빈약한 하위 장소로 옮겨 보내진다. 설교자의 권위를 중심으로 한 이 관계의 구도는 자연히 명령적이고 권위적이며, 수직적인 설교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 패러다임은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단절을 야기하며, 기존의 권위에 대해서 저항하는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는 이러한 권위적이고 명령적인 체계는 배척받게 될 것이며, 비효과적인 방법이 되어질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발전과 함께, 현대 설교학자들은 설교자와 청중들의 위치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설교자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청중들의 자리인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나아왔다. 그들은 청중들과 같은 지체이며,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회중석으로부터 올라와 서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도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존재이며, 청중들은 설교자와 함께 말씀의 여정을 함께 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 여정을 함께 해 가면서 서로 돕는 존재들이며, 서로 영향을 주는 자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는 서로 작용하는 공동 작업이 되어가야 하며 청중의 역할과 관련하여 상호 작용적인 설교(interactive preaching)가 되어야 한다. 단순한 말씀의 수동적인 청취자가 아니라 말씀의 여정을 함께 해가는 파트너로 새롭게 청중들의 위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예술작품이 보는 관객들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처럼 설교는 청중들에 의해서 완성되어진다.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볼 때 설교는 공동적(communal)이며, 상호 작용적(interactive)이어야 한다. 상호 작용적인 설교는 설교의 완성을 위한 책임을 함께 공유하도록 청중들을 초청하며,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한다. 먼저 청중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여정을 함께 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와 문화에 대해서 관심하며, 설교의 목표는 청중들의 귀에 말씀이 들려지게 하는 것이다. 상호작용 설교는 복음을 함께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함께 서며,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보좌 앞에 청중들과 함께 서있는 존재이다. 피동적인 청중으로서가 아니라 역동적인 존재로, 설교자의 권위로 말씀과 그 결론을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설교가 아니라, 그 말씀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게 하며 그 메시지의 결론에 함께 도달해 가는 청중의 참여가 있는 말씀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설교의 언어에 대해 깊이 고려해야 한다. 언어는 존재를 형성하며(to form), 창조하며(to create), 변화시킨다. 언어는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커뮤니케이션 하시는 도구이며, 복음 증언의 가장 중심적이 도구이다. 복음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어진다. 또한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어의 메카니즘을 그 핵심으로 한다. 설교에 있어서 어떠한 언어가 사용되느냐 하는 것은 설교의 결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언어는 단순하게 설교(자)의 생각을 담아 전달하는 것 이상의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의 실체(reality)에 이르도록 도와주며, 사람들의 세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준다. 적절하게 사용된 언어가 인지기관과 영성을 터치할 때, 말씀과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experience)하게 해준다.
다른 비언어적인 요소의 영향력도 배제할 수 없지만 설교 사역에 있어서 언어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의 형태를 통해서 전달되어지며,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무엇인가를 일어나도록 하는 가장 직접적인 동인이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중대한 세계를 형성하도록 만들며, 언어를 통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의 의식 속에 구현되어 간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는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역이다. 다른 비언어적인 요소의 영향력도 배제할 수 없지만 설교 사역에 있어서 언어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이다.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중대한 세계를 형성하도록 만들며, 언어를 통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의 의식 속에 구현되어 간다. 특별히 현대 설교학은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설교에 있어서 언어 신학적인 측면에 깊이 관심한다. 오늘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communication)할 것인가를 깊이 관심한다면 오늘의 청중들이 어떻게 듣는가와 어떤 언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되어지는 가를 깊이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전통적인 설교 이론들은 교리나 명제를 전달하는 명확한 언어(clarity) 사용에 대해서 관심해 왔다면, 현대 설교학은 참여(engagement)의 언어를 중요시한다. 전자가 논리적 합리성을 가진 언어의 메카니즘을 선호했다면 후자에서는 플랏의 언어로의 전환을 꾀한다. 사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서구 신학은 명확한 논리와 명제를 통해서 메시지가 가장 잘 전달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세계는 화랑과 같음을 외면해 왔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현대 신학에서는 이야기와 같은 언어구조를 통해서 신학함에 깊이 관심 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들은 명제적이고 논쟁적이며, 명령적인 산문(prose) 언어 스타일에서 이야기, 메타포, 상상력, 이미지 등이 중심을 이루는 시적 언어로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여기서 시적인 언어라 함은 흔히 문학에서 말하는 운율이나 리듬, 박자를 맞추는 정형화된 시나 정형화되지는 않았더라도 시적인 형식을 갖춘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에 있어서 움직임이 있는 언어를 의미하는 말로 쓰여진다.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고, 조직화되고, 이성과 합리성의 흐름을 뛰어넘어 생동감이 넘치는 살아있는 언어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월터 브르그만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고 시적인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이러한 시적 언어는 포괄적으로 설교 안에서 이야기 언어와 형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공헌을 하게 된다. 은유적(metaphorical)이고 상상력이 담긴(imaginative), 보여주는 언어들을 사용함으로서 설교자는 청중들이 우리 주변의 세계와 우리 안에 있는 세계를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하게 해준다.
그 동안 한국 교회 강단에서 사용되어온 설교의 언어들은 전통적인 설교 이론이 추구하는 형태인 논리적이고, 논증적이며, 명령적이고, 분석적인 언어가 주종을 이루어왔다. 이러한 언어는 좌뇌를 자극하여 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쓰여지는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는 어떤 정보에 대한 지적인 지식의 축적을 돕는 언어이며, 지성에 호소하는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진리의 세계를 형성하여 변화(transformation)를 일으키는 데에는 약점을 가진다. 그러나 우뇌 접근방식은 감정에 호소하며, 보여 주고, 느끼게 하는 언어이다. 즉 귀로 듣는 말을 마치 눈으로 보는 듯 보고 느끼게 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응답하게 만들어 주는 언어이다.
오늘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 위해 어떠한 언어의 메카니즘이 사용되어야 하느냐는 설교자의 깊은 관심사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듀크 대학의 설교학 교수인 리챠드 리셔(Richard Lischer)는 설교를 교회의 언어로 정의하면서, 설교가 사건(event)에서 구성(formation)으로, 예화에서 이야기로, 단순한 본문의 해석(translation)에서 본문을 보여주고 체험하게 하는 퍼포먼스(performance)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설교의 언어와 깊이 관련하여 종합적인 이해를 제시한 것인데, 설교 언어가 구성(plot) 되어야 하며,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언어, 또한 단순한 성경에 대한 해설이나 정보 제시로 보다는 언어를 통한 퍼포먼스가 일어나는 언어체계를 갖추야 함을 시사해주고 있다. 설교 언어의 갱신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말씀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는 현대 설교자들에게는 가장 시급한 과제중의 하나이다. 잘못된 언어사용은 복음의 전달자들이 오히려 복음의 능력을 쇠진케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설교의 형태를 고려해야 한다. 설교의 형태는 설교 가운데서 무엇이 일어나게 할 것이지, 설교를 통해서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조직적인 계획(organizational plan)이며,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 지배받아야 하는 것이다. 설교의 형태는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설교가 흘러가는 방향을 결정지어지고, 그 흐름을 결정짓는 강의 제방과 같은 역할을 한다.
설교자들은 그 동안 무엇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관심해 왔지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렇지를 못했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설교 방법론에 대한 학대"라고 지적한다. 어떻게 듣게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설교의 효과성을 높여 주지만, 설교 방법론에 대한 무관심은 설교에 있어서 지루함과 설교에 대한 권태감을 야기하는 주원인이 되어진다. 이것이 단순히 단조롭고 재미없는 설교자를 꼬집는 말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루함과 권태감은 설교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하며, 믿음의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항하고 거부하는 세력이 되게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설교에 고착되어 왔다. 전개방식은 주로 연역적인 방법을 널리 사용했으며, 논증적인 방법의 울타리 안에 안주해 왔다. 적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 교회는 이러한 방법론적인 틀에 묶여왔다. 서구 교회도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이래 거의 300여년 동안 이 설교의 틀에 안주해 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의 형태는 설교의 흐름과 방향을 결정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설교에 있어 틀을 가져다주고, 또한 활력을 갖다주는 요소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려는 설교자는 마땅히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어떻게 말씀이 들려지는가를 관심해야 할 것이며, 인간의 의식 속에 "어떻게" 작용이 일어나는지를 관심 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현대 설교학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방법론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는데, 귀납적 설교, 이야기 설교,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 등은 방법론에 관심한 현대 설교학계가 내놓은 결실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새로운 설교 방법론과 패러다임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말씀이 전달되게 하는 일에 관심해야 할 것이다.
설교의 완성: 설교자의 기도와 영혼에 대한 열정
우리는 지금까지 설교학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혹자는 이러한 요소들만 고려된다면 설교는 "완성"되는 것이며, "들려지는 설교"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만족되어지는 것인가를 묻는다. 학문으로서 설교학은 경험과학적인 측면과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모든 연구와 노력을 경주한다. 그러나 설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고, 증거하지만 그것을 자라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설교는 이 땅에 생명을 가져오며, 그 생명을 자라게 하며, 풍성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이다. "설교가 설교자보다 더 생명력이 있을 수는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설교를 하고, 죽은 설교는 듣는 사람을 죽인다. 모든 것이 설교자의 영적 성품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들려지는 설교이기 위해서 설교자는 최종적으로 설교자의 영적 준비에 관심해야 한다. 복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파되느냐와 복음의 영광이 얼마나 잘 드러나느냐는 설교자의 영성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 경주한 설교자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참된 설교는 골방에서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골방을 통해서 완성되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기도를 강력한 힘으로 삼고 있지 않는 설교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사역에서 연약한 도구이며 이세상에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무기력할 뿐"이라는 바운즈의 주장은 옳다.
기도와 함께 설교자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복음과 영혼에 대한 열정이다.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없이 설교자는 풍성한 식탁과 같은 설교를 할 수 있다. 위대한 설교자들은 한결같이 설교와 영혼을 향한 거룩한 열정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거룩한 열정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도 흉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임의로 생성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거룩한 열정은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영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느냐로 결정되어진다. 즉 설교자의 영성이 이를 형성해 준다. 거룩한 열정은 언제나 골방에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거룩한 열정은 하늘에서 기름부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심도 깊은 설명들이 주어지고, 뛰어난 짜임새로 설교를 구성한다고 해서 능력있는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좌우의 날선 검"과 같은 능력을 설교에 부여하는 것은 설교자의 가슴에 복음과 영혼 때문에 타오르고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설교자의 말에 힘과 예리함,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설교자의 열정이다. 죽어 있는 회중들에게 그러한 충격과 자극을 일으키는 것도 바로 설교자의 열정이다. 이런 거룩한 열정을 통해서 설교는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져 나가게 될 것이며,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구루펠 선교사 일행이
북극에 도착했을 때
짐을 내린 후
타고 온 배를 불질러 버렸습니다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 위해서
죽음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북극 선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능력은 땅에서 오지 않습니다.
더욱 머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만 옵니다.
변화하는 오늘의 삶의 세팅 속에서도 하나님이 말씀이 보다 효과적으로 들려지는 설교이기 위해 연구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설교자가 최종적으로 고백할 것은 능력은 땅에서도, 머리에서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가는 말
작금에 이르러 한국 교회 설교는 급변하는 문화 사회적 변화 앞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전통적인 가치관은 붕괴되고, 전혀 새로운 상황이 태동되고 있으며,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 그리고 오늘의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의 변화는 설교 사역이 점점 어려워지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오늘의 청중들은 메시지를 받는 방식이 달라지고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틀, 즉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세대는 자기 부모 세대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전통과 예배, 그리고 설교 스타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며, 또한 그들의 취향과 즐거움(entertainment)을 따라 행동하는 세대이다. 현대 전자매체의 영향하에 있는 오늘의 청중들은 무조건적으로 강요하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권위적인 스타일, 직선적이고 신학적인 메시지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해 주는 메시지를 원한다. 이러한 변화하는 설교의 상황은 설교의 변화된 위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변화와 함께 우리는 "설교의 위기"들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으며, 한국 교회 강단은 회복되고 개혁되어야 할 설교 갱신의 강력한 요구 앞에 서있다.
한국 교회의 지난 한 세기는 설교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해 온 설교 영광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에도 설교의 영광은 계속될 것인가? 변화하는 새 시대는 그에 걸맞은 새 틀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의 쉬프트(paradigm shift)를 요청한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 교회는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존의 틀을 벗고 새로운 틀을 입어야 할 당위성 앞에 서 있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한국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의 현장을 앞서 경험하여온 북미 교회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다. 급격하게 변화되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설교자들과 설교학자들의 몸부림은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의 형성과 전환이 이루어지게 했다. 지난 40여년 동안 북미의 교회들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와 설교의 위기를 함께 경험하면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움직임들과 논의들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설교의 혁신하여 이 시대 속에서 들려지는 설교가 되게 하려는 노력들이었다. 청중들과 교회가 믿음 위에 세워지며,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설교학의 중심 흐름인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들려지는 설교이게 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설교의 형태와 구성, 그리고 설교의 언어와 보다 효과적인 매체들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새로운 패러다임 추구에 대한 당위성과 유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 설교 패러다임 형성을 위한 좋은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설교는 그 사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 신학(contextual or local theology)의 관점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 상황을 위한 적합한 설교 패러다임 형성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기독교 사상' 2000년 10월호에 실린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