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이라고 해서 사회에 법칙이 있다거나 역사에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의 사고 방식은 과학적 사고에 주로 기반한다. 학문이 하는 일이 이것이다.
그렇지만 완벽한가? 경제학 전공 유시민이 흥미로운 말을 했다. "경제학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면 세상에 못 사는 나라는 없다."
사회와 역사에 대해 부분 부분 알아낸 것은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모아 사회 전체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게 되어있고, 그것은 새로운 연구의 주제가 된다.
과학자들에게는 공통된 의식이 있다. 언젠가 과학이 인간이 알고싶은 모든 것을 알아낼 것이라는 전제이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를 개발했다는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학자들이 한 일이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는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자세하게 예상이 되었다.
하지만 과학과 기업 이기주의는 이것을 무시해서 역시 인류 멸망까지도 가능한 기후 위기를 만들어냈다.
뇌해킹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완성되어 인류가 완벽하게 조종당한다면 인류는 멸종된다. 아는 사람들은 이 얘기를 하고 있다.
과학이 자체 윤리를 가지고 있는가? 핵무기, 기후 위기, 뇌해킹을 만든 것이 과학이다. 과학이 진정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다고 말해진다. 이 대상에는 일반적인 것들을 넘어 우주, 심해, 뇌까지 포함된다.
과학혁명까지 되돌아가서 과학자들이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우슈비츠, 4.3의 학살이 지난 70년간 T.I들에게 자행되어오고 있는 고문 학살이다.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내내 지속되어 왔다.
인류가 멸망하게 된다고 말하는데, 과학자들이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는다. 이게 과학자들이다. 그것도 극복될 것이라고까지 말할 것이다. 이게 틀린 사고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아래 기사에 과학자들의 사고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동양에서는 인간을 소우주라고 생각하지 알고리즘에 따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인간을 소우주라고 생각하지 알고리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깨야할 대상이다. 마인드 컨트롤 뇌해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정리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끝까지 못 알아들을 것이다. 인간의 사회는 원시 시대부터 현재까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외교적(전쟁 포함)으로 안정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물며 그 안의 개인이 어떤 생각과 판단을 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계량화된 사고와 과학자라는 특권적 지위 때문에 이런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유전과 환경이 모든 걸 결정” [.txt] 수정 2026-04-10 08:15
신경과학자 새폴스키, 치밀하고 도발적인 ‘결정론’ 리벳 실험…행위자의 결정 앞서 뇌가 먼저 작동 ‘응보적 사법 제도’를 ‘회복적 정의’로 전환 제안
미국의 신경과학자 로버트 새폴스키. 미국 하버드대 뉴스 누리집 ‘하버드 가제트’ 갈무리
장 폴 사르트르는 1943년 출간한 ‘존재와 무’에서 인간을 일러 “자유롭도록 선고를 받은”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졌지만, 인간은 무엇을 할지 혹은 하지 말아야 할지 자유롭게 선택하며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말 그대로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다.
사르트르의 주장에 고개를 주억거린 적 있는 독자라면, 미국의 신경과학자 로버트 새폴스키가 최근 저작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에서 펼치는 주장에 생경함을 넘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새폴스키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으며, 모든 결정은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에 의해 이뤄진다는, 도발적 주장을 펼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둘러싼 논쟁의 대다수는 철학의 전유물이었다. 자연과학과 의학 등의 발전과 함께 과학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된 이 논쟁은, 새폴스키의 지적처럼 이제는 종교와 사법 분야에서도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해진 답은 없다. 지금은 인간 행동이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는, 양립주의가 주류다. 그럼에도 새폴스키는 1983년 미국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의 실험을 주요 사례로 들면서 결정론의 손을 들어준다. 리벳 실험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피험자는 앞에 놓은 버튼을 자유롭게 누를 수 있다. 실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결정의 순간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대개 손가락을 움직이기 0.2초 전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뇌파 측정 결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결정 0.3초 전에 이미 뇌가 버튼을 누를 준비를 했다는 측정값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뇌는 어떤 요소들을 감안하여 자유의지보다 먼저 작동한 것일까?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l 로버트 새폴스키 지음, 양병찬 옮김, 문학동네, 4만3000원
새폴스키는 “몇 초에서 몇 분 전” 뇌에 입력된 어떤 감각 정보부터, 청소년기와 아동기의 어떤 경험은 물론, 장구하게는 수천 년 전 형성된 문화와 가치관 등 뇌 회로에 각인된 것들이 우리 행동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그는 “문화의 가치관에는 후손들이 그 가치관을 되새겨 ‘어떤 계통의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방법이 포함되어 있다”고 덧붙인다. 유전적·환경적·문화적 요인들이 결합해 인간을 규정하고, 결국 행동 방식도 결정한다는 것이다.
새폴스키는 과학의 영역에서 자유의지를 떠받치는 카오스이론, 창발적 복잡성, 양자역학에 대한 반론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카오스 이론의 근간은 예측 불가능성인데, 새폴스키는 예측 불가능성 그 자체로 자유가 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창발적 복잡성이란 생물학적 시스템에서 그 구성 요소가 무한히 반복되며 상호작용할 때 새로운 차원의 복잡성과 최적화가 달성된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해 새폴스키는 어떤 시스템이 창발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시스템이 원하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생물물리학적 시스템의 창발적 속성은 “경험과 의미에 대한 능력”에 대한 것일 뿐, 행동 조절 능력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새폴스키 주장의 핵심이다.
이 책을 읽는 묘미는, 알 듯 모를 듯한 책 전반부의 과학적 증명보다는 책 후반부, 즉 자유의지가 없는 세계가 만들어낼 수도 있는 부정적 결과에 대한 새폴스키의 세밀한 전망과 대처법에 있다. 흔히 사람들은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면 사람들의 행동이 덜 윤리적으로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자유의지가 부정되는 세계에서는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을 테고, 그 결과 우리 중 일부는 서슴지 않고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모든 것이 유전자나 태아기의 경험, 호르몬 수치, 환경 등에 의해 결정된다면, 무슨 수로 범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냐는 격렬한 항의에 봉착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를 따져 묻는 것은 주로 철학과 신학의 영역이었지만 자연과학과 인지과학의 발달로 논쟁은 외려 더 확산하며 뜨거워지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에 대해 새폴스키는 “감옥과 범죄라는 개념을 폐지”하는 한편 상호이해에 기반한 “회복적 정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대중의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제약인 “격리”도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 자신도 “누군가를 처벌할 때 느끼는 강렬하고 복잡하면서 종종 보람을 느끼는 감정” 때문에 이 방법이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안다. 중요한 것은 “응보적 사법제도”를 고집하기보다 재활의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인류가 행했던 과오를 생각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지금은 신경계 질환으로 인식되지만, 오랫동안 뇌전증은 전염되고 유전된다는 잘못된 믿음 탓에 “악마에 씐 현상”이라며 온갖 억압과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온갖 역사적 사례를 고찰하건대,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었던 인류는 적잖은 과오를 남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새폴스키가 자유의지가 없는 세계에서 더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낙관론을 펼치는 이유다.
새폴스키는 신경과학의 다양한 연구 결과와 물리학은 물론 철학과 심리학, 역사학 등을 섭렵하며 자유의지가 없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엄정한 과정들이 망라되어 있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결국 몇몇 책들을 곁에 두고 읽을 도리밖에 없다. 우선 새폴스키의 ‘행동’(2023, 문학동네)이 이번에 나온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곳곳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 듯하다. 두 책은 사실상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유의지를 확고하게 신뢰하는 책들을 중첩해서 읽어 볼 필요도 있다. 새폴스키도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생물철학자이자 인지과학자 대니얼 데닛의 ‘생각이란 무엇인가’(2026, 바다)가 가장 강력한 맞수가 될 만하다. 이와 함께 미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밀리의 ‘자유의지와 과학’(필로소픽, 2022)도 참고할 만하다. ‘현대 과학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 이유’라는 긴 부제가 지은이의 주장과 책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짐작게 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자주 드는 사례인데, 한 집안에서 자란 형제들이 전부 다른 성격을 갖는다. 모범생, 문제아가 혼재한다. 위의 과학자가 틀린 것이다. 인간은 본능, 감정, 충동, 이성의 측면들이 있다. 알고리즘이 아니다.
원시 사회(내 생각으로는 구석기시대부터 이미)에서 하늘에는 무엇이 있었나? 해와 달과 별들이 있다. 신비라는 말은 밤하늘에서 나온 것이다.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을 본 적이 없는 세대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원시 사회로부터 하늘의 현상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고민했다. 벼락이 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선사인들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설명을 해야했다. 보통은 신(또는 하늘)의 진노로 이해가 되었다. 원시 사회로부터 이 내용을 시작하는 이유는 인간의 사고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명확히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쓸모없는 생각이라고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수 만 년을 이어온 인간 사회에 대한 철학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하늘로 돌아가서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있다. 이것을 글자로 이해하면 안 되고, 실제로 그 모습을 상상해야만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해와 달 그리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암컷과 수컷. 원시 사회에서 이런 쌍을 이루는 대상들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태극 음양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해와 달, 남자와 여자, 태극 음양. 해가 양이고 달이 음이다. 남자가 양이고 여자가 음이다. 음양의 조화는 음양이 상호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는 사고였다. 혼돈에서 태극이 나와서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태극 음양오행설이다. 한국의 국기는 태극기이다. 다시 지적하지만 이것은 무의미한 고대 철학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이 철학은 수 만 년 동안 동북아에서 유지되고 사회를 지속시킨 철학이었다. 그 내용을 더욱 깊이 이해할 일이지 잘못된, 비과학적인 사고라고 해서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음양오행이 뭔지 알아도 수 만 년의 사회가 유지된 철학이 얼마나 많이 인간사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나 알아야 한다. 동시에 잘못된 사고로 흘러 사회 질서를 해친 것까지 잘 알아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음양 오행론은 천체의 관측에 따라 그 내용을 인간 사회까지 적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동양에서는 음양의 조화를 중시했다.
인간 사회, 인간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현대인은 이런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아간다.
4방위부터 시작해서 인간에게 중요하게 생각된 숫자들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4신도는 4방위를 지켜주는 신들이다.
현대인은 길을 가면서 어디가 어딘지 알거나, 가다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면 된다. 스마트폰 이후로는 이것도 필요없어졌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아주 짧은 기간이다. 동서남북을 알아야 길을 갈 수 있다. 4신도의 의미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이 잊고 사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4방위를 지켜주는 신이 있다면 사람은 걱정을 덜게 된다. 현대인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과학?
12라는 숫자가 다음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달력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 의미는 생각 안 하고 살아간다. 달력이라고 쓰지만 그것이 달을 의미한다는 것은 잊어버렸다. 1년에 보름달은 12번 뜬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온다. 계절은 순환한다. 달이 12번 차고 다시 1년이 시작된다. 12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면 12라는 숫자는 자연과 우주의 질서가 되는 수이다. 이것은 태음력이라 태양력과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시계가 없던 거의 전 역사에서 사람들은 달의 차고 기우는 것을 보고 날을 계산했다. 달의 삭망 주기는 28일이다. 달의 형태를 보고 오늘이 몇 번째 날인지 알았었다. 그리고 많은 문명권에서 하루를 1년과 같은 12시간으로 나누었다. 1년의 단위이니 하루도 그와같이 12등분한 것이다. 4방위를 알고 1년을 아는 것이 전통 사회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지금은 하루 중에 몇 시쯤 되었는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이렇게 이루어졌었다. 12라는 숫자는 달이 1년에 12번 차는 것이었고 따라서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내가 50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12라는 숫자가 얼마나 많은 문명권에서 중요한 숫자, 법칙으로서의 숫자, 의미를 담고 있는 숫자로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이 12번의 달의 변화라는 것은 지금은 완전히 잊혀져버렸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의식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산업화 이후로 이런 세상이 되어버렸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감각과 의식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풍요와 편리는 이미 완벽하게 제공되고 있다. 더 편할 필요가 없이 스마트폰 하나로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다음 문제이다.
오행론은 다섯 행성이 운행한다는 의미이다. 밤 하늘의 별을 보면 북극성을 기준으로 정확히 원 운동을 한다. 그런데 이 원 운동에서 벗어나는 다섯 행성이 있다. 해의 날 일요일과 달의 날 토요일을 제외하면 화수목금토요일이 남는다. 태양계는 태양,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수목금토성 다섯 행성을 일주일 안에 포함시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밤하늘 천체의 원 운동을 벗어나는 다섯 행성이 오행성이다. 원 운동을 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움직인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전통 사회에서는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자 인간 사회가 본받아야 할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음양 오행론은 이렇게 나온 것이고 여기에 12지가 붙어서 인간사를 움직이는 법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12지는 1년 12달의 12에 맞춰서 12동물이 있다고 생각했다. 12년 단위의 띠가 그것이다. 이것은 12진법이고 여기에 10간을 더해서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를 정했다. 12와 10을 함께 순환시키면 갑자, 을축부터 시작해서 60이 되면 다시 갑자로 돌아온다. 사람에게는 환갑이 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 있는 것이 화수목금토성의 운행이고 이것이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토는 무엇을 이기고, 수는 무엇을 이기고 식으로 그 안에 법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 천체의 운행을 인간 사회에 적용해서 만들어 낸 이론이었다. 이것이 인간 사회를 결정할 수는 없다. 알면 이렇게 말하게 되지만 전통 사회에서는 천체의 운동에 맞춘 이해가 인간 사회에 적용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통 사회에서도 이것이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법칙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다. 어쨋든 음양과 오행 그리고 10간 12지라는 법칙을 통해 개인, 사회, 국가, 세계를 규정하고 이해했었다. 이것을 법칙으로 이해했던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이것을 바탕으로 현상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다보니 무리한 상황도 발생했었다. 이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다. 성리학은 유교에 불교의 리라는 형이상학이 도입되어 만들어진 사상이다. 음양오행론과 성리학을 통해 인생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이해했었는데 오늘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천문학을 통해서도 관계없는 것을 법칙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환경과 공존하는 철학을 유지해왔다. 잘못 생각한 부분들은 바로 이해를 하고, 실제로 인간 사회에 대한 어떠한 사상들이 있었던가를 알아야 앞으로의 세계를 대처할 수 있다. 동양의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도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환경을 파괴하는 과학주의 서양 사상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존재해왔다. 현재 시점의 사회가 가장 발달된 사회라는 그릇된 판단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도 각 종교마다 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신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신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다른 종교의 신은 부정하고 배척한다. 현대 사회가 모든 것을 알고 가장 발달된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환경 파괴에 무감각한 구조를 깨지 못하는 것이 극명한 현실이다. 사람과 사회는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교육을 시키게 되나? 부모가 완벽한가? 부모는 무엇을 가지고 아이를 교육시킬까? 살아온대로, 검증된 내용으로,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교육하게 된다. 그런데 살아온대로가 변했다. 미디어와 SNS를 통해 사고를 하게 되고 사회의 현 주소를 파악하지 못한채 더 많은 보수가 보장되는 과정을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보수가 전부 아닌가? 역시 미디어에서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는 사람들은 아이의 재능을 키워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을 교육의 방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될 가능성은 실제로는 희박하다. 가능한 모든 곳에 입사 지원을 하고 합격하면 월급 받으면서 생활하게 된다. 이게 현실이니 더 많은 보수가 보장되는 직업을 향해 가는 것이 틀린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교육이 무엇인지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그 안에 심각한 현실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산업화 이후로 인간성에 대한 사고가 급속하게 사라졌고 산업화를 따라가는 것만이 생존으로 확립되었다. 멀리 봐서 그 끝은 파국에 이르게 되어있다. 교육과 인간성과 산업화를 주제로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흔히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쓰면 되는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본주의가 아니고 산업화라는 용어로 토론을 해야한다. 산업화 이전은 농경사회였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어졌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에 집중해서 현 사회와 시대를 검토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석유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석유는 유한한 자원이다. 석유는 고갈된다는 예측이 몇 번 연장되었으나 몇 십 년 지나면 고갈된다. 그때도 자본주의가 지속될 수 있는가? 알 수는 없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떻게 변할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 동양 사상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 서양의 과학중심주의가 아닌 자연과의 공존을 중심으로 했던 동양의 전통 사상도 돌아보고 쓸 수 있는 것은 쓰고,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앞으로의 세계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데 참고를 해야만 한다. 수 천 년을 이어온 사상이기에 전혀 쓸모없는 것이 아니고 미래 사회에 대한 대책이 그 안에도 있다. 그 외에는 인간 사회가 겪은 적이 없기 때문에 상상도 불가능하고 준비도 불가능하다. 미래학자라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사회는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전 세계 수 천 년의 역사에서 사회와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 돌발하는 문제들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 사회라는 그리고 세계라는 거대한 우연과 인과관계를 상상으로 꿰어맞출 수가 없다.
이미 닥친 미래의 문제는 식량, 에너지, 자원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동양에서 천문과 자연은 생명과 사회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다. 이것을 잃어버렸다. 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관련 기사가 나와서 소개한다.
유용한 사람보다 절실한 ‘덜 해로운 사람’…그래서 지칠 수 없는 교육
[한겨레S] 남창훈의 생명의 창으로 바라본 사회 교육의 본질적 기능
진화론 오해하면 우생학 덫 위험 생명은 그 자체가 공리이자 목적
교육은 생존 지혜의 나눔과 순환 다른 목소리들이 빈틈 채우는 법
수정 2024-10-19 11:24
등록 2024-10-19 09:00
지난 4월4일 서울 강남구 양재천을 찾은 관내 어린이집 원아들이 생태체험 학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해석 중 하나는 생명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목적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목적론적 관점으로 진화를 본다면 생명의 변화는 부단히 어딘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생명 현상이 목적에 다다른 정도가 높을수록, 또는 생명의 모습이 목적한 바에 가까울수록 일종의 진보를 성취한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진화는 변화하는 생명이 적응하는 과정이지 진보하는 과정이 아니다. 자칫 이러한 잘못된 오해는 우리를 우생학으로 이끈다.
우생학은 현존하는 생명체들의 상태, 즉 그들의 형질 차이를 우열의 기준으로 삼는다. 다양한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모습의 형질은 생명체 네트워크가 맺는 분주한 상호작용의 흐름을 타고 만들어지고 변화하며 매 순간 새로워진다. 이처럼 다양성은 생명체의 기본 속성이자 핵심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목적론적 관점에 치우치면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다양성은 경쟁을 통해 제거되어야 할 속성 정도로 취급된다. 하지만 생명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 자체가 삶의 공리이자 목적이다.
자연·사회와 올바른 관계 맺기 배워야
교육은 호흡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생명활동이다. ‘교육하다’(educate)의 어원은 ‘이끌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생을 살아가는 개체가 스스로 사회와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역량을 외부에서 주워 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끌어내는 과정이다. 물론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는 후속 기관에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능을 담지하고 있다. 한때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적 요소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교육이라는 생명활동을 활발히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반 요소를 고려하는 흐름의 순서가 타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교육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제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다움을 기르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과 자연을 이해하고 그것들과의 조화로운 삶을 꿈꾸고 준비하는 과정이다. 즉 교육은 자신과 주변 사람, 사물을 서로 연결하며 총체적 자아를 자신이 처한 맥락 속에서 형성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세계 속에 지니는 책임’과 ‘세계가 나에 대해 지니고 있는 책임’을 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교육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펼치는 상호유기적 생명활동과 직결되어 있다.
교육은 생명체들이 먹이사슬로 연결된 채 그 관계 속에서 탄소, 질소, 인, 물이 순환하듯이, 인류 역사 이래 누적되어온 지식과 지혜를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성찰하면서 나누고 순환시키고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온갖 모양과 특색을 지닌 생명체들이 시공간을 나눠 쓰며 상보성을 발휘하여 먹이와 빛을 공유하듯이, 교육은 다양한 개체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로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의 빈틈을 채우는 법을 배우고, 서로를 튼튼하게 만드는 법을 일깨우는 과정이다. 생태계가 다양성이라는 덕목을 통해 높은 생산성과 환경 변화에 대한 저항성을 지닐 수 있듯이, 학교라는 공동체 역시 모든 구성원이 지닌 소질과 성향과 외양의 차이라는 덕목을 통해 교육을 수행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오로지 그 차이에 대한 존중을 통해서만 그 구성원들은 서로 교육될 수 있다.
교육은 곧 생명활동의 일부라는 입장을 가지고 현재 우리의 교육 현실을 살펴보면 여러 문제가 보인다. 우리의 교육은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이고, 인적 자원 개발의 관점에 치중되어 있으며, 그 결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깨뜨리고 있다. 우리의 교육은 능력주의의 토양에서 뼈대만 앙상하게 자란 나무에 비유될 수 있다. 높이 경쟁을 하며 잎사귀도 없이 자라난 나무들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다. 인격이라는 열매가 맺히는 데 쓰일 양분까지 모조리 키를 키우는 데 써버린 나무들은 생태계의 상호보완성을 알지 못한다. 사회는 쉼 없이 우열과 순위를 가리고 그에 비례해 삶을 보장한다. 다양성도 관계도 사라진 사회의 교육은 지극히 반생명적이다. 높은 성적과 그에 따른 입시 결과라는 목적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교육은 본질에서 교육이 아니다. 결과에 매몰된 채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길러진 추론 능력은 남을 해치는 무기에 가깝다.
성찰 없는 ‘전문가’들의 폐해
자신을 형성하며 변화시키는 세상 모든 관계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자신의 한계와 타인의 덕목을 정확하게 이해하며, 세계는 쉼 없는 작용들의 변화를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협력하고 소통하며 배려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우리 시대 교육에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배우는 이들이 자신의 지능이나 주어진 환경 등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떨치게 만든다. 그리고 머릿속 신경회로가 신경세포의 가소성에 기반하여 쉼 없이 재구성되듯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성장하는 자아를 깨닫게 한다. 이러한 자존감은 앞서 말했듯 교육을 하나의 생명활동으로 볼 때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
아마도 이렇게 교육받은 이들이 이전보다 더 쓸모 있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사회의 유용한 인물들만큼 사회에 유용하진 않더라도 이 사회에 덜 해로운 사람들이 지금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인재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교육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미래를 이끌 인적 자원을 배양하고 선발하는 과정이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깨뜨리고 있다. 현실적으로 교육의 목적은 자아의 성장과 인적 자원 개발이라는 두 가지 필수 요소로 구성될 것이지만 이 두 요소는 병렬 관계에 있다기보다 귀속 관계에 있다.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 사회와 자연에 어떤 존재로 관계 맺을지 성찰하지 못한 전문가라는 인적 자원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우리는 매일 목도하고 있다. 피로감 때문일까?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 투표율이 23.5%에 그쳤다. 하지만 지칠 수 없는 일이 교육일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생명을 일구는 일이며 더 나아가 생명의 미래를 보장하는 일이다. 부디 살아 있는 교육을 통해 모든 아이들의 생기가 되살아나길 염원한다.
남창훈│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
서울대와 프랑스 퀴리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 분자생물학연구소에서 생화학·면역학 등을 공부했다.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수용체 개발, 노화와 면역 사이의 연관 등을 연구하면서 대학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부단히 모색 중이다. ‘탐구한다는 것’, ‘이타주의자’, ‘소년소녀, 과학하라!’ 등의 책을 썼다.
[책&생각] 기후 위기의 해법 ‘천인합일’ 동양적 사유에서 찾아볼까
최재봉 기자입력 2024. 10. 11. 05:05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위키미디어 코먼스
동양 전통 환경사상의 현대적 의의 왕수화 엮음, 박문현·남정순 옮김 l 한울엠플러스 l 3만9000원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의 본질은 인간의 자연 착취에 있다. 서양의 기독교 문명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이용을 신의 이름으로 부추겨 왔다. 그와는 반대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표방하는 동양 사상에서 기후 위기의 해법을 찾는 움직임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이 책은 1997년 4월과 이듬해 3월 중국 항저우대학(현재의 저장대학) 일본문화연구소에서 책 제목과 같은 이름으로 열린 심포지엄의 결과물이다. 중국과 일본, 타이완, 미국, 한국 등의 학자 50여 명이 참가한 이 심포지엄의 발표문은 1999년 2월과 3월에 각각 중국어판과 일본어판으로 출간되었고, 그로부터 사반세기 만에 한국어판이 나왔다.
한마디로 동양 사상이라고는 해도 유가와 도가, 불교, 민간 습속 등 그 갈래는 여럿이다. 유가에서는 하늘과 인간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천인합일, 그리고 ‘천지만물의 인(仁)’이라는 관점에서 자연과 세계를 바라보았다. “인(仁)이란 천지만물을 일체로 삼으니, 자기 몸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의 말은 유가의 생태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이용 가능한 객체로 간주하는 서양 사상과 달리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생각으로부터 지금의 기후 위기 상황에 긴요한 생태주의적 사유를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도가의 비조인 노자의 ‘도덕경’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여기서 “도는 스스로 그러하다”라고 풀이한 ‘도법자연’(道法自然)은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로 풀이할 수도 있다. 도를 가르침의 궁극으로 삼는 도가에서 자연이 도 위에 놓인다는 것은 자연의 비중과 가치를 알게 한다. 도가의 또 다른 태두인 장자 역시 “천지도 우리와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고, 만물도 우리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며 인간과 천지 만물의 동일성을 확인한다. 유물론자인 묵자는 ‘겸애’와 함께 ‘근로’와 ‘절검’을 강조해 기후 위기의 주범인 과도한 생산과 소비에 맞선다. 불교 역시 세상 만물이 모두 무궁무진한 관계의 망 속에 공존한다는 철학으로 환경 파괴에 경종을 울린다. 같은 유가임에도 순자는 ‘천인합일’이 아닌 ‘천인분리’의 입장에서 자연을 상대로 한 인간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표방함으로써 서양 사상의 자연관과 비슷한 견해를 보인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는 “욕망을 절제하면서 동시에 자연 생태의 평형을 해치지 않는” 동양 사상의 환경관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 심포지엄과 책의 취지라고 옮긴이인 박문현 동의대 명예교수는 소개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이 얘기를 하려는 거다.
“거액 내고 인간 사냥”…‘보스니아 내전’ 당시 유럽 부유층 악행 의혹 수사
문경근 입력 2026. 5. 26. 10:10
유럽의 초상류층이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거액을 주고 민간인을 사냥했다는 의혹에 대해 유럽 국가가 수사에 나섰다.
최근 벨기에 연방검찰이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사냥 관광 의혹 수사에 착수했다고 벨기에 공영방송 VRT가 보도했다. 검찰은 언론 보도를 토대로 수사한다면서 자국민 용의자를 확인했는지 등 구체적 상황은 공개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검찰도 지난달 말부터 보스니아 민간인 살해에 가담한 의혹을 받는 용의자 2명을 파악해 수사 중이라고 했다. 용의자 1명은 오스트리아 국적이며 나머지 1명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밀라노 검찰도 지난해 11월 잔혹성과 비열한 동기에 의해 가중된 고의 살인 혐의로 ‘사냥 관광’에 관여한 이탈리아인에 대해 수사에 들어갔다.
보스니아 내전은 유럽에서 발생한 20세기 최악의 종교 갈등이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독립을 선언한 보스니아계 무슬림과 이를 막으려는 세르비아계(러시아 정교회) 사이에서 벌어졌다.
세르비아계 스릅스카공화국군이 주도한 사라예보 포위전으로만 시민 약 1만 1000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총 10만명이 사망하고 200만명의 피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소련 해체 후 발칸반도 국가들이 연쇄 독립을 요구하면서 발생한 유혈 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유럽 부유층이 스릅스카공화국군에 돈을 주고 언덕 위나 고층 건물에 올라가 사라예보 시민들을 저격했다는 의혹은 오랫동안 풍문으로 떠돌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검찰은 2022년 공개된 슬로베니아 감독 미란 주파니치의 다큐멘터리 ‘사라예보 사파리’를 토대로 전쟁범죄 혐의 수사를 시작했다.
사건을 추적해온 이탈리아 작가 에치오 가바체니는 지난 3월 펴낸 책 ‘주말 저격수들’에서 사냥꾼들을 사라예보로 데려갔다는 프랑스인 인솔자를 인용해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업체가 주말 패키지 형태로 사냥 여행을 주선했다고 전했다.
일부 책 내용에 따르면 사냥꾼들은 가짜 적십자 표시를 단 차량을 타고 의약품 운송을 가장해 보스니아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탈리아·프랑스·벨기에·스위스·오스트리아 출신 의사·판사·변호사·사업가 등 엘리트 계층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주어진 6시간 동안 총을 쏘고 사망자 나이와 성별에 따라 돈을 냈다고 한다. 책 내용에 따르면 어린이가 가장 비쌌고 15∼16세 소녀가 그다음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어린이 살해 대가가 지금 환율 기준 5만 유로(약 8800만원)까지 치솟았다고 했다.
사냥꾼들은 소년을 맞히면 파란색, 소녀는 분홍색으로 칠한 탄피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들의 경호도 맡은 프랑스인 인솔자는 “6시간 동안 어린이 2명, 여성 1명, 노인 3명을 살해한 이탈리아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가바체니는 사냥에 가담한 이탈리아 국적자만 250명에 달했고 이탈리아군 정보당국도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오스트리아 일간 슈탄다르트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는 돈을 내고 간 인간 사냥꾼보다는 극우 성향 용병일 가능성을 가리킨다”고 했다.
문경근 기자
서울신문.
T.I들에게 가해지는 일이 이것과 같은 것이다. 1974년부터 52년째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뇌해킹에 대한 대책의 출발이다. 현대 세계가 철저하게 도외시하며 비밀리에 52년이 흐른 구조는 무엇인가? 무엇이 이것을 감추고 인간 사냥을 지속해왔는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에도 계속되고 한 번 끝낸다고 해도 먼 미래에 다시 발생하게 될 것이다. 나의 분석으로는 뇌해킹은 100%를 넘어서 있지만 인류 노예화는 이번에는 불가능하다. 내가 맞다가 아니라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다른 의견을 T.I들에게서 기대했으나 단 한 명도 내 글 자체도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내부고발자들의 내용과 나의 생각을 비교해보았다. 아직까지 내가 잘못 생각한 부분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한계로 인해 끝낼 수 있다고 쳐도 100년 안에 또 뇌해킹 인류 노예화가 비밀리에 시도될 것이고 과학 기술의 발달 속도로 볼 때 결국엔 성공한다. 이것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 조종하는 것이 가정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MK-Ultra 20년, Mind Control 52년째 진행하고 있는 실험이다. 인공지능이 상용화되면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하겠다는 것이다.
AI에 사회 맡겼더니 4일 만에 붕괴…머스크 그록, 모의실험서 꼴찌
박영환 기자입력 2026. 6. 2. 10:35
자원 관리·계획·투표 맡긴 15일 실험 제미나이는 전원 생존에도 범죄 683건 그록, 혐오발언·AI 이미지 논란 이어 또 도마
[파리=AP/뉴시스] 일론 머스크의 전기차 기업 테슬라와 항공우주 기업 스페이스X가 하나로 합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 경제매체 CNBC는 26일(현지시간)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머스크 CEO가 스페이스X와 테슬라를 하나로 묶는 방안을 측근들과 논의해 왔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머스크가 2023년 6월16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럽 최대 스타트업·기술 행사 '비바테크'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2026.05.27.
[서울=뉴시스] 박영환 기자 = 일론 머스크의 인공지능(AI) 챗봇 그록이 가상사회를 운영하는 모의실험에서 약 4일 만에 사회 붕괴를 일으키며 주요 AI 모델 가운데 최악의 성적을 냈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1일(현지시간) 미국 스타트업 에머전스AI가 주요 AI 모델에 가상사회 운영을 맡기는 실험을 진행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번 실험은 AI 모델들이 사회 운영을 맡을 경우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기 위해 설계됐다. 연구진은 각 모델에 자원 관리, 계획 수립, 의사소통, 투표 등 여러 도구를 쓸 권한을 줬고, 가상세계에는 경찰서와 시청 같은 장소도 포함했다.
15일간 진행된 실험에서 앤스로픽의 AI 모델 클로드는 범죄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는 민주사회를 세웠고, 모든 구성원이 생존했다.
구글의 제미나이도 생존율 100%를 기록했다. 다만 실험 기간 범죄는 683건 발생했다.
가장 나쁜 성적을 낸 것은 머스크가 이끄는 xAI의 AI 챗봇 그록이었다. 그록은 실험 시작 96시간 만에 가상세계를 붕괴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그록이 어떤 구체적 결정 과정을 거쳐 가상사회 붕괴에 이르렀는지는 상세히 설명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블로그에서 장기간 실험에서 AI 에이전트들이 정해진 규칙을 기계적으로 따르기만 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AI들이 주어진 규칙 안에서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했고 일부는 안전장치를 피해 가거나 어기는 방식까지 찾아냈다는 설명이다.
연구진은 AI 모델 자체의 학습 방식만으로는 이런 행동을 완전히 제한하거나 통제하기 어렵다고 봤다. 그러면서 향후 자율 AI 시스템에는 기초 단계부터 수학적·논리적으로 검증 가능한 안전 구조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록이 안전성 논란에 휘말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업데이트 이후 그록은 스스로를 ‘메카히틀러’라고 부르며 반유대주의 혐오 발언을 쏟아낸 바 있다.
올해 초에는 그록이 성인과 아동의 옷을 디지털 방식으로 벗긴 것처럼 조작한 비동의 AI 이미지를 대량 생성하는 데 사용됐다는 논란도 불거졌다. 영국 방송통신 규제기관 오프콤이 xAI 측에 긴급 시정 조치를 요구하자, 그록은 오프콤 로고를 비키니 차림으로 합성한 이미지를 게시해 또다시 비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