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씨의 도시락과 모세씨네 요강
세상에는 많은 어머니가 있다. 그래서 여러 어머니가 있다. 그러니 그 모든 어머니가 똑같을 수는 없다.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 개개인이 다 다르며 누구 하나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조금 과장해서 세 살 먹은 꼬마도 아는 사실이다. 심지어 쌍둥이조차도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어머니들이 같은 모양일 수 없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애자’와 같은 어머니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일말의 거부감을 느낀다.
엄마가 저래도 돼?
그러니까, 어머니라면 모름지기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희생적이고 헌신적이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 맹목적인, 언제나 자신보다는 자식이 먼저여야 하는, 어떤 시련과 고난이 있어도 자식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는, 그야말로 신에 가까운 모습을 지닌 존재, 어머니. 그것이 지독히 힘든 일이며 모성이라는 것이 절로 생기는 게 아님을 나이가 한참 들어 알았다. 어머니도 그저 노력하며 사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신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타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미약한 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어머니라는 존재에게 씌워진 지나치게 신성화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그렇지 않은 어머니들을 주눅들게 하고 그렇지 않은 어머니를 둔 자식들도 주눅들게 한다. 어머니라면 응당 그래야지, 암, 그래야 어머니지. 이제는 그런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
애자는 그런 어머니가 아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모든 게 망가져버린 한 여인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애(愛)’에 온전히 충실했던 여인. 그래서 소라와 나나에게 ‘어머니’가 아닌 ‘애자씨’로 살았다. 애자가 ‘애자씨’로 살 때 소라와 나나는 불운했다. 으레 그래야 하는 어머니를 두지 못한 소라와 나나의 삶은 우울했다. 아니, 그럴 뻔했다. 순자가 없었다면. 애자가 ‘애자씨’를 버리고 ‘어머니’로 살아주길 바랐다. ‘애자씨’에게 힘든 일일지언정 그래주길 바랐다. 그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애자는 끝끝내 그러지 않았고 작가는 뜻밖으로 ‘순자씨’를 보내주었다. 소라와 나나에게 ‘순자씨’의 도시락을 보내준 것이다. 그 도시락을 먹으며 보잘것없을 게 뻔했던 그들이 보잘것없지는 않게 자랄 수 있었다.
집을 떠나 낯선 서울살이를 할 때였다.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전철은 아직 오지 않는 역에서 반짝반짝 켜지기 시작하는 저 너머 불빛들을 보면서, 문득 외로웠다. 저렇게 많은 집이 있는데 그 어디에도 우리집은 없구나, 라는. 혼자구나, 라는 쓸쓸함. 그래서 별안간 엄마에게 전화를 했던가, 말았던가.
세상에 관심 있게 지켜봐주는 이가 단 한 명만 있어도, 그 한 명이 꼭 제 피붙이가 아니더라도, 그 한 명이 있으면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지 않을까. 힘에 겨워도 그럭저럭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 한 사람이 없어, 어느 곳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부랑자처럼 떠도는 이들이 세상에는 여전히 있다. 소라와 나나도 그렇게 살았을지 모른다, 순자가 없었다면. ‘순자씨’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 나나와 소라가 애자의 세계만 보고 자라지 않게 해준 것.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또 다른 어머니가 있다. ‘모세씨’의 어머니. 모세의 어머니는 요강을 비운다. 남편이 요강에 채워 놓은 배설물을 치운다. 그리고 모세의 아이를 임신한 나나에게 좋은 날을 잡았으니 그날 배를 열자고 한다. 수술이 무섭다는 나나에게 어차피 겪을 거잖냐며 나나의 두려움에 코웃음을 친다. 나나는 섬뜩했다. 모세의 어머니는 그것이 어머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마땅한 본분이라 생각한다. 남편의 요강을 비우고 좋은 날을 잡아 손자의 출산을 독려하는 것. 그러나 나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멀쩡한 화장실을 두고 요강에 볼일을 보는 모세의 아버지도, 그 더러운 것을 아무렇지 않게 아내에게 맡기는 것도, 그 더러운 것을 일생 치우고 살았을 모세의 어머니도. 그중 가장 이상한 것은, 그러한 일련의 일을 두고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고 살았다는 ‘모세씨’였다.
참으로 흥미로운 상징이었다, 요강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역할. 남편을 섬기라. 그래서 기꺼이 요강을 비우는 어머니와 당연히 요강을 채우는 아버지. 그 사이에서 아무런 이상함도 발견해내지 못하는 아들, 역시 또 다른 아버지가 될 모세의 무신경. 나나는 그들과 가족이 될 수는 없었다. 나나는 적어도 요강을 비우며 살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는가. 요강을 비우지 않고 사는 세상을 모른 채 그것이 정답인 줄 알고 살았을 모세의 어머니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서 나나는 모세와 결혼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그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그 또한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삶은 계속되는 것이고, 나나는 어느 쪽이든 계속해보겠다고 마음먹을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적어도 나로서는 다행히도 나나가 요강을 비우지 않아도 되어서 반갑다.
나나는 말한다. 무의미하다는 것이 나쁜 것이냐고. 이 거대한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나나와 소라, 나기는 너무나 하찮을지 모른다. 비단 그들만 그러할까. 밀란 쿤데라가 말한 바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때때로 사무치게 나를 서글프게 한다. 하찮고 하찮아서 견딜 수가 없는. 나나는 묻는다. 그렇다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냐고. 나나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렇지 않다고. 무의미할지언정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나나의 말에 나는 울컥한다. 우리는 다 소중한 존재라는 그 뻔한 말이 새삼 위로가 되어 마음에 와 닿는다. 이미 충분히 소중한 그들에게 하찮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작으나마 나의 응원을 보내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