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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10)
우리는 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
롬 9:1~16
I. 서론
어거스틴이라는 초대 교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거는 하나님의 긍휼에 맡기고, 현재는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라. 그리고, 미래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라.” 이미 지나온 과거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하나님의 사랑에 맡겨야 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아까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삶을 맡길 때, 우리의 삶은 가장 안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여기서 섭리란 세계와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에이든 토저 (Aiden Tozer)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해 놓으신 시간보다 한 시간 앞서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데려가기 원하시는 때를 한 순간이라도 넘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눌 로마서 9~11장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부분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 주셨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바울은 궁금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바울의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구절은 로마서 9~11장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안다는 것입니까? 모른다는 것입니까?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11장은 해석하기가 어려운 본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다루면서 다른 때보다 조금 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의 감격과 확신을 보았습니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그 다음에 바로 이 말을 한 말한 것입니다. “나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8장과 9장이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모두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8장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확신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9장처럼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가진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은 자신의 형제이자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자녀와 손주들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을 자세히 보면, 한 가정에서 신앙이 3대 이상 전수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말고는 3대 이상 신앙이 전수된 가정이 거의 없습니다. 예를 몇 가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1) 아담의 첫 째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 다니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2) 노아에게는 셈, 함, 야벳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방주에서 구원받은 후, 모두 흩어져서 우상숭배자가 되었습니다. 셈의 후손인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성장했는데, 그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함은 가나안 땅에 정착했는데, 그들이 얼마나 우상을 숭배했던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을 진멸하도록 하셨습니다. 야벳은 유럽 쪽으로 흩어졌는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까지 그 곳은 복음의 불모지가 되었습니다. 3) 모세의 형 아론은 어떻습니까? 아론의 첫째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담아서 분향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4) 사무엘의 아들은 어떻습니까? 요엘과 아비야는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이어서 사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왕을 요구해서 이스라엘에 왕정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5)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은 어땠습니까? 다윗의 집안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맏아들 암논은 배다른 동생 다말을 강간했고,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암살했습니다. 아도니야는 반역을 행하여 처형되었고, 솔로몬은 말년에 완전히 우상 숭배에 빠져 나라가 두 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서 하나님을 잘 섬긴 아들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6) 분열 왕국 중에서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어떻습니까? 그의 아들 므낫세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고, 하나님의 성전 뜰에 일월성신의 제단까지 만들어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서 죽였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3대째 잘 이어지는 집안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손주들을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여러분의 가정은 정말로 복 받은 가정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도 바울이 가졌던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가졌던 감정은 가까운 혈육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4~5절에 나옵니다. 4~5절,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양자 됨입니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하나님께서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축복과 특권들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영광, 언약들, 율법, 예배, 약속들, 조상들,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나셨습니다. 이 축복과 특권들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이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축복과 특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양자로 삼으신 것이 실패했다는 말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진리 하나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다고,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6절,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여기서 핵심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7절부터 그 예를 들고 있습니다. 7절,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첩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아들로 얻었습니다. 이스마엘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본처 사라로부터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삭도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후, 후처 그두라와 결혼해서 그두라로부터 시므란, 욕산,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얻었습니다. 이들도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그런데, 오직 이삭의 자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여기서 “네 씨”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른 말로,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음 구절을 말한 것입니다. 8~9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정하신) 자녀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예를 하나 더 가지고 왔습니다. 10~13절,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과 에서는 같은 아버지 (이삭)과 같은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는 이삭과 이스마엘과 다른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는 같았지만 (아브라함), 어머니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갈, ,사라) 반면에 야곱과 에서는 똑같은 아버지, 똑같은 어머니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야곱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시점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습니다.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그래서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이었습니다. “무선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을 말한 것입니다. 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택해 주신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신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택해 주지 않으신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택해주신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설명을 한 후, 사람들의 반발을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을 말한 것입니다. 14~16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원한다고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달음박질한다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1)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종교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 철학을 깊이 탐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믿는 것으로 끝나거나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끝이 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2)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열심히 달음박질 합니다. 선한 행동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을 죄를 씻기 위해 열심히 고행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달음박질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피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열심히 달음박질하는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절대로 쉬운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구원의 핵심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핵심입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에크”와 “칼레오”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에크”는 “~로부터”라는 의미이고, “칼레오”는 “누구를 부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이고, 여러분과 저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성경구절이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입니다.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가장 먼저 선택이 나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가장 마지막에 긍휼이 나옵니다. “너희가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러니까, 진정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택해 주신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똑 같은 복음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바울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서 할례를 받아서 당연히 구원을 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달음박질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원함이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여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듣고,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반응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구원받을 사람을 선택하는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는 반응입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인본주의적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해야지 왜 신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로마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가 처음부터 말하는 메시지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무도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모두가 다 심판을 받을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긍휼히 여긴 사람은 어차피 구원을 받을 것이니 내가 굳이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반응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다룰 로마서 10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롬 10:13~1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러니까, 누군가 복음을 전해주어야 들을 수 있고, 복음을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복음을 믿어야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좋은 예가 나와 있습니다. 막 10:46~48,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불러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보면, 그가 들은 것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부르짖은 것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며,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고 꾸짖어도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누군가가 바디매오에게 나사렛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고, 자신의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 이전에 전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을까요? 아니면 우연이었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예전에 누군가가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에 관해서 말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두 가지 모두 다 인정해야 합니다. Warren Wiersbe, “Charles Spurgeon was asked how he reconciled divine sovereignty and human responsibility, and he replied, “I never try to reconcile friends —they are both in the Bible.”
마지막 반응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저는 세 가지 음성을 들렸습니다. 1) 아들아, 내가 너를 택했다. 2) 아들아, 내가 너를 긍휼히 여겼다. 3) 아들아, 내가 너를 택하고 긍휼히 여긴 것처럼, 너도 이웃을 마음에 품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다오. 여러분도 같은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아들아 딸아, 내가 너를 택했단다. 2) 아들아 딸아, 내가 너를 긍휼히 여겼단다. 3) 아들아 딸아, 내가 너를 택하고 긍휼히 여긴 것처럼, 너도 이웃을 마음에 품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다오. 만약 그들에게 기도가 필요하면, 기도해 주고, 만약 그들에게 섬김이 필요하면, 찾아가서 섬겨 주고, 만약 그들에게 복음이 필요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다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살아 가면서, 주님의 이 음성이 계속 여러분의 귀에 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음성을 우리의 이웃에게도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들려주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