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문학은 어떻게 정치적인가?
- 문학이 아닌 모든 것 -
문학이 아닌 모든 것은? 문학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있지만, 또한 아무 곳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풍문과 지식들은 문학을 잘 향유하게 만들기보다는 어떤 틀 안에 가두고 문학을 납작하게 만든다. 문학의 적이 문학을 호명하는 제도와 교육이라는 것은 문학이 처한 불행이다. 이 연재는 문학제도 안에서 문학을 규정하고 나누는 방식으로 벗어나고자 한다. 이를테면 문학의 정의, 장르와 문학성을 둘러싼 익숙한 개념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문학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서 문학에 다가가는 방식을 취하려 한다. 그 속에서 문학을 만나는 일이 나날의 삶을 발명하는 일에 가깝다고 느낄 수 있다면.
인간과 동물을 대등한 존재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을 다른 존재로 개방하는 상상력이 될 수 있다. 생매장당하는 돼지의 상상력과 언어를 드러낸 「피어라 돼지」는 그런 관점에서 첨예하게 정치적이다. 그것은 생매장당하는 돼지처럼 말하지 못하는 자의 고통과 침묵으로부터 출발한 언어이다. 문학의 정치성은 단순히 사태를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태로부터 다른 삶과 언어를 생성하는 데에 있다.
말하지 못하는 여자가 선택한 언어 ‘피아노’
제인 캠피언의 영화 〈피아노〉는 19세기 말 척박한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온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홉 살 난 딸과 함께 재혼을 위해 뉴질랜드 오지에 도착한 여자는 언어 장애인이고 세상과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방식은 피아노를 치는 일이다. 보수적인 예비 남편은 해안에 버려진 그녀의 무거운 피아노를 운반해 주지 않고, 마오리족과 함께 사는 백인 남자가 피아노를 매개로 그녀에게 접근한다.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이고 그녀는 이 척박한 곳에 재혼을 위해 온 과부이자 장애인이며 남자들의 세계에서 언어를 잃어버린 존재이다. 그녀에게 피아노는 ‘여성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중요한 주제와 연결되어 있는 대상이다. 그녀의 피아노 연주는 억압적인 남성들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신체의 언어이다. 그녀의 피아노는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말하게 되는 매개이다. 그녀가 결국 원주민의 삶과 가까운 남자를 선택한 것은, 그 남자가 그녀의 ‘피아노-언어’를 돌려 주었고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낭만적이고 격정적인 러브스토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말하지 못하는 여자를 둘러싼 여러 겹의 억압 속에서, 여성의 욕망을 다르게 말하는 방식을 표현했다는 측면에서 매우 정치적이다.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는 양극단의 주장이 있어 왔다. 이를테면 예술은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완전한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과, 예술은 정치적인 이슈와 현안에 참여해야 한다는 양극단의 생각이 있다. 이 두 가지 가치는 뜻밖에 가까운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예술이 정치에 대해 무언가 ‘의식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 두 가지 생각은 동일하다. 하지만 예술이 굳이 정치와 멀어지기 위해, 혹은 가까워지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만 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다른 방향의 사유가 가능하다. 정치를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든 다루지 않든, 문학과 예술은 언제나 언어와 현실의 관계 위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문학의 정치성은 사태의 재현이 아닌 다른 언어의 생성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신문의 정치면에 나오는 공적인 정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정치의 영역까지를 포함한다. 미시 정치의 영역이란 권력과 언어의 문제가 발생하는 모든 사적인 영역에도 해당하며, 정치의 실천은 권력의 질서를 변형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국가와 사회적 집단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과 친구와 연인 사이에도 권력의 문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의 바깥은 없다. 정치적인 것은 오히려 어쩌면 좀 더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에서 실제적인 힘을 발휘한다. 심지어 사람과 동물,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힘과 시선의 위계가 작동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정치가 개인들의 삶의 경험을 나누는 문제라면, 실천으로서의 정치는 그 질서를 변형하는 문제에 해당한다. 정치적인 예술은 삶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몫을 갖지 못했던 것들에게 몫을 부여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시인 김혜순의 시집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 시인선480)(문학과지성사)』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려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 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울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중략)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 김혜순, 시 「피어라 돼지」 일부 (출처: 김혜순 시집 『피어라 돼지』, 문학과지성사)
구제역 파동으로 생매장당하는 돼지들에 대해 쓴 시는 ‘정치적인 것’과 무관할까? 이 시의 상상력은, 구제역으로 생매장당하는 돼지에 가해지는 폭력은 인간이 인간에 가하는 고문과 같은 잔혹한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돼지에 가해지는 폭력은 여성, 사회적 소수자 등 육체에 갇힌 사람들이 처해 있는 폭력적인 현실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은 ‘포승줄, 수갑, 고문’이라는 제도적 폭력이지만, 돼지에게는 그 과정조차 생략된 생매장의 방식을 쓴다. 고통받는 동물은 고통받은 인간의 몸과 먼 곳에 있지 않다. 인간이 고통 앞에서 동물과 같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공포스러운 진실이지만, 인간과 동물을 대등한 존재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을 다른 존재로 개방하는 상상력이 될 수 있다. 생매장당하는 돼지의 상상력과 언어를 드러낸 「피어라 돼지」는 그런 관점에서 첨예하게 정치적이다. 그것은 생매장당하는 돼지처럼 말하지 못하는 자의 고통과 침묵으로부터 출발한 언어이다. 문학의 정치성은 단순히 사태를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태로부터 다른 삶과 언어를 생성하는 데에 있다.
열네 살 하층민 소녀의 언어로 표현된 ‘가부장제의 균열’
소설가 김영하의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복복서가)』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김영하의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에 등장하는 일인칭 화자는 열네 살의 하층민 소녀이다. 이 소녀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궁핍할 뿐만 아니라 가족 관계가 극단적으로 파괴되어 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폭행을 당해 왔던 집 나간 오빠는, 미성년자인 어린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 아버지를 단숨에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가족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청소년 성매매 사범’으로 고발했다가 아들에게 물리적인 응징을 당한다. 이 권력 관계와 먹이 사슬 속에서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는 14세 소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족을 되바라지고 냉소적인 육성으로 야유할 수 있다.
이건 정말 큰 일이다. 우리 집 먹이 사슬은 이렇다. 오빠는 아빠를 이긴다. 아빠는 엄마를 이긴다. 그런데 엄마는 오빠를 이긴다. 나는? 엄지공주다. 나는 너무 작기 때문에 누구도 나 따위를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싸움은 그 셋 사이에서 늘 벌어진다. 어쨌든 엄마가 출동했다는 건 오빠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이상하게 오빠는 엄마한테 약하다. 그건 오빠가 데려온 그 계집애도 엄마한테 밥이란 얘기다.
- 김영하 단편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 일부 (출처: 김영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 문학동네)
이 가족 질서의 붕괴를 보면서 소녀는 “어른이 된다는 건 간단하군. 우선 부모를 제압할 만큼 힘을 기르고 짝을 찾아 집으로 쳐들어 오는 거야. 그럼 만사 오케이다.”라고 믿게 된다. 이 소설이 가부장제의 상징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압당하는 상황에서 엄마의 권력이 넓어지면서 가부장제의 균열을 보여 준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 사태를 14세 소녀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가부장제 권력 관계의 붕괴를 드러내는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완벽한 상류층 가족의 불안과 허위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손보미의 소설 「임시 교사」 도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P부인은 품위 있고 교양이 넘치는 젊은 부부의 아이의 보모일을 맡게 된다. “잘 생기고 예의 바른 젊은 아버지와 아름답고 우아한 젊은 엄마와 귀엽고 똑똑해 보이는 아이”로 구성된 완벽한 가족은, 소박한 혼자만의 삶을 사는 P부인의 세계와 대비를 이룬다. 한때 교사였던 P부인은 이 젊은 부부의 아이에게 완벽한 교양 있는 보모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교사였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임시’였다는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P부인의 삶을 규정한다.
‘임시교사’, 환대받지 못하는 비정상의 존재
소설가 손보미의 소설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문학과지성사)』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 정교하고 세련된 감각, 손보미의 신작소설집 젊은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수록
겉으로 완벽한 젊은 부부는 육아와 살림과 병든 시어머니의 수발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P부인은 그 결여를 메우는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은 붕괴 직전의 젊은 부부의 일상생활을 봉합하는 헌신을 의미한다. P부인은 이 가족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감싸주는 가족의 일원처럼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런 순간 역시 ‘임시’에 불과할 뿐이다. ‘임시교사’의 버릴 수 없는 긍지와 교양의 욕구, 타인에 대한 호의는 부르주아 부부의 현실적 결여를 메우는 데에만 소모되어 버린다. 비혼으로 늙어가는 P부인이 이 가족에 틈입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틈을 메꾸는 역할을 할 때뿐이다. P부인이 그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그 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 부부는 P부인을 진정한 가족의 일원으로 ‘환대’한 적이 없다.
왜 어떤 여자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은 채 그런 식으로 늙어가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곧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멈췄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런 삶과는 너무나 멀었기에 그녀의 상상력은 그곳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 손보미 단편 소설, 「임시교사」 일부 (출처: 손보미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문학과지성사)
아이 엄마의 P부인에 대한 태도에는 보이지 않는 혐오와 동정이 숨어있다. 정상 가족의 눈에 임시교사는 ‘그런’ 비정상적인 여자에 불과하다. 지켜내야 할 안전하고 안락한 가정의 사생활은 ‘그런’ 여자의 가사 노동 없이는 지탱될 수 없다. 가족 제도의 바깥으로서의 ‘임시직· 비혼’ 여성의 존재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위와 연약한 내부를 드러내는 존재이다. 제도에 ‘정식’으로 편입될 수 없고 상류층 가족의 생활의 틈을 채우는데 소모되는 P부인의 존재 자체가 예리한 정치적 질문을 포함한다. 삶에 가장 가까운 ‘정치적인 것’은 지금 여기 일상적 삶 안에서 작동한다.
[문학이 아닌 모든 것] 7. 문학은 어떻게 정치적인가?
- 지난 글: [문학이 아닌 모든 것] 6. 문학은 어떻게 윤리적인가
문학평론가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문학 평론가가 되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과 「문학과 사회」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20년 동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등의 문학 비평서와 『너는 우연한 고양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사랑의 미래』 등의 에세이를 썼다. 쓰는 사람이면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