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의원의 남편인 방국진씨(1999년 당시 4·1 9혁명연구소 대외협력위원장)가 있었다는 4.19혁명회에 실린 글중 일부입니다...,
아래의 글은 2004년 7월달 4.19 혁명회 회보에 실린 글입니다..,
그 쪽에 모여있는 사람들과.., 현 열린우리당 김희선의원의 대한 민국 역사에 대한 인식에 많은 참고가 될듯하여.., 글을 올립니다... 4.19 혁명회 주소 : " http://rev419.jinbo.net/ " 입니다...
==== 다음 : 7월 달 4.19 혁명회보에 실린 내용중 일부 ===== 《시론》 7.4 공동성명에서 6.15 공동선언 이행으로
기 세 문 (이사)
지난 반 세기동안 온 겨레가 감격하여 환희에 넘쳤던 역사전 대사변이 대여섯 번 있었다. 맨 처음은 1945년 8.15 해방인데 일본의 패망과 조국광복,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게 되고, 우리 글과 우리 노래와 우리 역사를 처음 배우는 그 벅찬 감동은 지금도 우리들의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다음은 1950년 6.25 때다. 8.15 해방의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의 아픔을 고민해야 했던 순진한 청소년기에 또 다시 천지개벽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도 순간처럼 지나가고, 삼천리 금수강산은 외국군대에 짓밟히고 피로 물들었다. 그 다음은 4월혁명이다. 그때 우리는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트린 시민 청년학생들과 함께 4월혁명의 물결 속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춤을 추고 싶은 감격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5.16 군사쿠테타가 민주주의의 4월혁명을 짓뭉게 버렸다. 네 번째는 7.4 남북공동성명이다. 1972년, 전쟁이 곧 터질 것처럼 온 사회를 전쟁 분위기로 몰아가던 박정희 정권이 갑자기 남북 화해와 단결의 7.4 공동성명을 발표한다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의 귀를 의심케 할 만큼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박정희는 6.23 선언으로 배신하고 유신독재체제로 전변하였으며, 형무소의 비전향 특사에서는 살인적인 전향공작으로 인한 수많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희생과 강제 전향이 있었다. 1979년 김재규의 총격에 의한 박정희의 죽음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으로 탄압 받은 수많은 운동가들에게 통쾌한 쾌거였으나 전두환의 등장으로 군사정권이 계속되고 5.18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학살 만행으로 역사는 다시 얼어붙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민중의 끊임없는 저항과 투쟁은 또다시 6월 항쟁으로 폭발하여 전두환 군사정권의 퇴진과 노태우, 김영삼의 기만적 집권 등 많은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마침내 김대중 정권의 6.15 공동선언 시대를 맞이하였다. 2000년 6.13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은 7천만 전 민족의 가슴에 벅찬 감동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