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숭례문의 변천사
숭례문 (崇禮門, 남대문)
종목 : 국보 제1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 : 1동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중구
동국여지비고에 실린 기록
태조 5년(1396년)에 돌로 쌓았는데 평양 감사(平壤監司) 조준(趙浚)이 공사를 감독하였다. 세종 4년(1424년)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 4천 9백 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이다. 문 8개를 세웠다. 정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는데, 이층 지붕이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김학수 화백의 조선시대 칠패시와 함께 그린 풍경)
(김학수 화백의 조선시대 칠패시와 함께 그린 다른 풍경)
(김학수 화백이 그린 여름 풍경)
(김학수 화백이 그린 겨울 풍경)
임진왜란과 남대문: 도성(都城)의 남대문(南大門)에 숭례문(崇禮門)이라는 이름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讓寧大君) 의 글씨라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왜적들이 그 액자를 떼어 버려 유실되었는데, 왜란이 평정된 후 남문(南門) 밖의 못[池]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光線)을 내쏘므로 그곳을 발굴하여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
. 현재 숭례문(崇禮門)의 편액은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다. 그렇다면, 국초(國初)에 걸었던 편액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어째서 다시 썼단 말인가. 난리가 평정된 후 괴이한 광선으로 인하여 다시 찾아 걸었다고 하였으니, 정공(鄭公)은 또 어떻게 해서 그를 써서 걸었단 말인가. 하물며 정공은 세조(世祖)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어명에 의해 많이 썼으니, 숭례문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바로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때에 왜노(倭奴)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게 됨으로써,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와전된 데다 괴이한 광선에 대한 설(說)까지 다시 부회(傅會)된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중에서 발췌)
병자호란과 남대문: 병자년(1636) 병란 때에 임금님께서 강화(江華)로 피신하기로 의논을 정하고는 늙고 병든 사람을 먼저 보내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부군이 먼저 도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조 판서의 신분으로 대궐에 있다가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따라서 먼저 길을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임금님이 타신 대가(大駕)가 출발하였는데, 대가가 남대문(南大門)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의 기병을 만났다. 그랬으므로 길을 피하여, 다시 수구문(水口門)을 통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포저집 선부군 행장 중에서 발췌)
(1770년 목판인쇄본 지도에 실린 숭례문)
(1880년 사진)
(숭례문 바로 안쪽) 기와집들이 많이 있다. 당시에도 한양에는 인구밀도가 무척 높았다고 한다.
(19세기 말엽 사진)
(1900년 사진)
(영국에 소개된 자동차가 출현했을 때 시민들의 놀람을 그린 그림)
(20세기 초 무렵의 사진)
(20세기 초 무렵의 사진)
(20세기 초무렵의 사진)
100년 전의 숭례문은 이렇게 장하고 아름다웠다. 펜화가 김영택씨가 그림으로 되살린 불타기 전 숭례문은 새삼 조선의 기백을 생각하게 만든다. 김씨는 1904년 호주 사진가 조지 로스가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까운 숭례문을 복원했다.
남산 쪽 기슭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이라 왼쪽이 성문 바깥, 오른쪽이 도성 안쪽이다. 문화재청은 불탄 숭례문을 복원하면서 그림 속에 보이는 성벽 일부를 되살리겠다고 밝혔다.
(1910년대 남대문)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남대문 앞에 세워진, 한일합방을 환영하는 기념문)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가는 일본군)
(전차 개통 당시)
(숭례문 근처 모습)
(숭례문 칠패(시장))
(1897년)
(1900년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후 성벽이 헐린 직후 무렵 사진)
(일제시대의 사진)
1933년에 찍은 사진. 일제가 도로 확장을 하고 전차 선로도 놓고 성을 헐어내고 남대문을 현재 모양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위 3장의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홍남)이 현재 개최 중(3월 2일까지)인 기획특별전 -‘宮-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 궁궐사진’전에서 처음 공개한 일제강점기 사진이다.
(일제시대 교과서 그림: 한일합방을 즐거워하는 두 나라 사람들 이라는 내용의 설명과 함께)
(일제패망 직후, 서울에 진주하는 연합군을 구경하는 시민들과 환영 행렬)
(대한민국 정부 수립 무렵 1946-1948년경)
(1950년)
(한국전쟁 중의 사진)
(공산당 점령하의 서울, 미군 철군을 주장하는 시위대 사진)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에 서 있는 사진)
(한국전쟁 직후 사진)
(보수 공사가 끝난 모습)
(50년대 지폐)
(4.19 이전 이승만 대통령의 선거 홍보 사진이 붙은 모습)
(60년대 초의 남대문)
(1962-63년 개보수 공사 직후 사진)
(60년대 지폐)
1970년대 모습.
(언제나 지겹도록 지켜보던 20세기 후반의 풍경)
(60년대판 대괴수 용가리 영화에서 용가리가 남대문 앞으로 접근하는 장면)
(1970년대, 박노식, 최지희, 안인숙 주연, 설태호 감독, 영화, "남대문 출신 용팔이" 포스터)
(1987년 민주화 시위 당시 사진)
(1988년 서울 올림픽 기념 주화)
(90년대초 일본 비디오 게임 아랑전설 시리즈에 등장하는 장면)
(2006년에 나온 성벽 복원 계획)
[ 2008. 2. 10 ]
남대문 폐허를 곡함 - 고은
머리 풀고 울어에야 하리 옷 찢어 던지며 분해야 하리 오호 통재 이 하루아침 남대문 페허를 어찌 내 몸서리쳐 울부짖지 않으랴
동아보라 6백년 연월 내내 한결이었다 이 도성 남녀노소들 우마들 이 나라 이 겨레붙이 모진 삶과 함께였다
혹은 청운의 꿈 안고 설레어 여기 이르면 어서 오게 어서 오시게 두 팔 벌려 맞이해 온 가슴인 나의 남대문이었다
혹은 산전수전의 나날 떠돌이 하다 여기 이르면 어디 갔다 이제 오느뇨 활짝 연 가슴 밑창으로 안아 줄 너의 남대문이었다
단 하루도 마다하지 않고 단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지켜서서 숙연히 감연히 의연히 나라의 기품이던 저 조선 5백년 저 한민족 1백년의 얼굴이었다
온 세계 누구라도 다 오는 문 없는 문 온 세계 그 누구라도 다 아는 만방 개항의 문 정녕 코리아나의 숨결 서울 사람의 눈빛 아니었던가
이 무슨 청천벽력의 재앙이냐 이 무슨 역적의 악행이냐 왜란에도 호란에도 어제런듯 그 동란에도 끄떡없다가 이 무슨 허망의 잿더미냐
여기 폐허 땅바닥에 엎드려 곡하노니 여기서 주저앉지 말고 멈추지 말고 떨쳐 일어나 다시 바람 찬 천년의 남대문 일으켜낼지어다
여봐란듯이 저봐란듯이 만년의 내일 내 조국의 긍지 우뚝 세워낼지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