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云何菩薩이 不受福德이나잇고
須菩提야 菩薩의 所作福德은 不應貪着일새 是故로 說不受福德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야, 보살의 지은 바 복덕은 응당 탐착하지 않음이니
이 까닭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說誼
了知福德이 元無性하면 不應於中에 生染着이니 貪求已泯徹底空이라
日入萬金渾不知니라
설의
복덕이 원래 성품이없음을 알면
응당 그 가운데 물들고 집착함을 내지 않으리니
탐하고 구함이 이미 없어져 철저하게 空하도다.
하루에 만금이 들어와도 혼연히 알지 못함이니라
六祖
菩薩의 所作福德은 不爲自己요 意在利益一切衆生일새
故로 言不受福德也니라
육조
보살의 지은 바 복덕은 자기를 위함이 아니요, 뜻이 일체중생을 이익케 하는 데
있음일새, 그러므로 복덕을 받지않는다 하느니라.
傅大士
布施有爲相이여 三生却被呑이라
七寶多行慧여 那知捨六根가 但離諸有欲하고 旋棄愛情恩이니
若得無貪相이면 應到法王門이니라
부대사
布施는 有爲의 相이여.
三生을 도리어 삼킴을 당하도다.
(一生은 복짓는데 一生은 복받는데
一生은 복을 다 쓰고 타락하는데 씀)
칠보로써 많은 지혜행을 함이여.
어찌 六根 버림을 알겠는가.
다만 모든 욕심을 떠나고
가끔 애정의 은혜도 버릴지니
만약 貪相이 없음을 안다면
마땅히 法王門에 이를지이다.
冶父
裙無腰袴無口로다
說誼
裙袴가 雖然在나 與無却一般이니 經云不受福이 其旨正如斯니라
야부
치마엔 허리가 없고 바지는 입구가 없도다.
설의
치마와 바지가 비록 있으나 없는 것과 같으니 이르되 복을 받지 않음은 그 뜻이
바로 이러하도다.
冶父
似水如雲一夢身이여
不知此外에 更何親고 箇中에 不許容他物하니 分付黃梅路上人이로다
說誼
只此一夢身이 似水無情하야 逐處方圓하며 如雲無心하야
捲舒自由하니 此外에 別無親이라
何物이 此中歸리오 曠然無人縛하니 解脫을 更何求아
信老가 曾將此消息하야 分付黃梅路上人이로다
야부
물과 같고 구름 같은 한 꿈의 몸이여.
알 수 없어라. 이것 외에 다시 무엇과 친하리오.
이 가운데는 어떤 것도 용납을 불허하노니
黃梅의 路上人에게 분부함이로다.
설의
다만 이 꿈 같은 몸음 물과 같이 생각이 없어서 곳에 따라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며
구름같이 무심하여 거두고 펴는 것이 자유로우니 이외에 달리 친할 것이 없음이라.
무슨 물건이 이 가운데 돌아오리오.
넓고 넓어 남의 속박이 없으니 해탈을 어찌 다시 구할 것인가.
信老(四祖 도신스님)가 일찍이 이 소식을 가져서 黃梅의 노상인(五祖 홍인스님)에게
분부함이로다.
圭峰
二는 明不受故로 不失이라 於中에 文二니 一은 正明이라
규봉
㉶二. 받지 않은 연고로 잃지도 않음을 밝힘이라.
그 중에 두 가지니 ㉷一. 正히 밝힘이라.
宗鏡
有求有苦여 八風五欲이 交煎이요 無着無貪이며 三明六通이 自在로다
便恁麽去하면 水邊林下에 月冷風淸이요 不恁麽去하면 橋斷路窮하야 別通消息이니라
還委悉麽아 老僧이 笑指猿啼處하니 更有靈蹤在上方이로다
說誼
有心皆苦요 無心乃樂이니 一得其樂이면 消息分明이요
樂亦不存이면 別通消息이니라
作麽生是別通消息고 行到路窮好轉身하니 十方無處匪通程이니라
是通程이여 鴈點靑天猿掛樹로다
종경
구함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음이여.
八風과 五欲이 서로 들끓음이요, 執着이 없으면 탐하지 않음이여.
三明과 六通이 자재함이로다.
곧 이렇게 하면 물가나 숲속에서 달은 차갑고 바람이 맑음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리(橋)가 끊어지고 길은 막혀서 달리 소식을 통해야 함이니라.
또한 자세히 알겠는가.
노스님이 웃으며 원숭이 우는 곳을 가리키니 다시 신령스런 자취가 위쪽에 있음이로다.
설의
마음이 있으면 다 괴롭고 마음이 없어야 즐거움이니 한번 그 즐거음을 얻으며
소식이 분명함이요, 그 즐거움마저 있지 않다면 달리 소식을 통해야 함이니라.
어떻게 달리 소식을 통할 것인가.
가다가 길이 막히는 데 이르러면 좋게 몸을 굴려야 함이니,
시방 그 어딘들 통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통하는 길이여,
기러기는 푸른 하늘에 점찍는 듯 날아가고 원숭이는 나무에 걸렸음이로다.
宗鏡
數行梵字雲中鴈이요 一曲無生澗底琴이로다
德勝河沙渾不用하니 淸風明月이 是知音이로다
說誼
雲中鴈寫數行字하고 澗底琴彈一曲歌로다
此中에 無德爲可用하니 自有風月是知音이로다
종경
두어 줄의 梵字는 구름 속의 기러기 같고
無生의 한곡조는 시냇물의 거문고로다.
德이 항하사보다 수승하여도 혼연히 쓰지 않으니
淸風과 明月이 知音者로다.
설의
구름 가운데 기러기는 두어 줄의 글자를 쓰고 시냇물 밑의 거문고는
한 곡조의 노래를 타도다.
이 가운데 德은 가히 쓸 것이 없으니 저절로 風月이 있어서 소리를 알도다
무비
보살이 반야를 행하면 자연히 복덕이 따르고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게된다.
그러나 보살은 無相이며 無我이며 반야의 삶을 사는 사람이기에 어떠한 복덕을
바라거나 菩提를 바라지 않는다.
바라지 않으니 달리 받을 것도 없고, 다만 일체법이 텅 비어 我가 없을 뿐이다.
참으로 소중한 것은 구하지 않고도 얻는 것이요,
탐하지 않고도 갖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로 "산 있고 물 있는 곳에 영화도 없고 욕됨도 없는" 그런한 몸인 것이다.
圭峰
第二十四는 斷化身出現受福疑라 論에 云若諸菩薩이 不受福德인댄
云何諸菩薩福德을 衆生이 受用고할새 斷之니라 文二니 一은 遮錯解라
규봉
㉴二十四. 化身이 出現한 것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疑心을 끊음이라.
論에 이르되 만약 모든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모든 보살의 복덕을
중생이 받을까 하므로 그것을 끊음이라.
글에 두 가지니 ㉵一. 잘못 아는 것을 막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