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광주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공원이 있었다. 남구 사동 사직산의 사직공원이 그곳이다. 당시 사직공원이 광주 시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것은 벚꽃과 동물원, 사직수영장 그리고 팔각정 때문이었다. 양림파출소 옆 가파르게 난 돌계단을 올라야 만나는 정자 양파정도 사직공원이 사랑받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자주 찾았던 최고의 벚꽃놀이 장소는 농촌진흥원(지금 상록회관)과 사직공원이었다. 태풍에 벚꽃나무가 쓰러지고 꺾이어 옛 명성을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4월 초쯤 벚꽃이 만발할 때의 장관은 여전하다. 사직공원이 벚꽃으로 유명하게 된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1924년 일본 왕태자 히로히토(뒤에 소화 천왕)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기념공원 명명 기념으로 사진 속에만 보이는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나무로 만든 전망대를 세운다. 나무전망대는 팔각정이 세워지던 1973년까지 존재했다. 당시 나무 전망대에 오르면 6만이 채 되지 않던 광주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오늘 팔각정에서는 광주를 한눈에 담을 수 없다.
왕세자의 결혼을 기념하는 공원이었지만, 이렇다 할 공원으로서의 환경은 조성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다가 1938년 “6만 광주 시민을 환락경(기쁘고 즐거운 경지)으로 만들겠다.”는 요란을 떨면서 벚꽃을 심어 댔다. 이 요란에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일제는 광주공원을 식민지 공원의 상징으로 가꿀 계획으로 1913년 광주 최초로 성거산에 광주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광주공원에 신사가 들어서면서 차질이 생긴다. 이에 일제는 사직공원에 요란법석을 떨면서 벚꽃을 심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내와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광주천에 다리까지 놓는다. 지금 양림파출소 앞 금교가 바로 그 다리다.
일제가 심어놓은 벚꽃은 일제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광주 시민들이 즐겨 찾는 유락처가 된다. 이에 1971년 사직단이 있던 장소에 동물원이 들어선다. 현재 복원된 사직단 장소가 예전 동물원 입구 매표소였다. 당시 동물원은 소풍과 휴식의 공간으로 인파가 늘 북적댔다. 오늘 초등학생 뿐 아닌 중·고등학생들도 동물원이 있는 우치 놀이공원으로 소풍을 가는 것처럼, 당시 사직동물원은 학생들의 소풍장소로도 인기가 꽤 높았다. 동물원이 개장되던 해인 1971년 사직공원에는 수영장도 들어선다. 사진으로만 보는 당시 수영장과 수영복이 참 재미있다.
오늘 사직공원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황토와 목재로 단장된 보행로와 산책로는 단아하고 아름답다. 고풍스런 난간과 예술성 물씬 풍기는 주변 가로등의 불빛은 100년 가까이 자란 나무숲과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밤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사직공원에 시비가 세워진다. 그러더니 지금 10개가 넘는 시비는 어느덧 사직공원의 명물로 자리 잡는다. 이젠 사직공원은 사직단 때문이 아닌 시인들의 시비공원으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광주를 포함한 남도는 예향으로 불린다. 판소리 등 민속예술이나 회화, 도자기적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시가 문학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특히 식영정·소쇄원·환벽당을 품고 있는 무등산은 가사문학의 발상지다. 그 가사문학의 전통은 근·현대시로 계승되고, 기라성 같은 시인들을 배출한다.
사직공원 시비 중 낯익은 시가 백호 임제와 면앙정 송순의 시다. 임제의 시비에 새겨진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고/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시는 백호 임제가 개성의 황진이 묘를 찾아가 읊은 것이다. 그 때 임제는 35세,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개성을 들러 가는 길에 평소 만나보고 싶던 풍류 여걸 황진이가 석 달 전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사들고 그녀의 무덤을 찾는다. 이 사건은 이후 임제가 중앙 관직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사대부의 체면을 구겼다는 당시 지배층의 괘씸죄 때문이었다.
호남 유림의 좌장이자 면앙정시단의 대부로 추앙된 면앙정 송순의 시비에는 자상특사황국옥당가가 새겨져 있다. “풍상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운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인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자신을 경박한 복숭아와 오얏꽃으로, 임금을 황국화로 묘사하고 있다.
오늘 남도는 굵직한 수많은 현대 시인을 배출한다. 그 중 휴전선 시인으로 불린 박봉우의 조선의 창호지는 내 발을 붙잡는다. “조선의 창호지에/ 눈물을 그릴 수 있다면/ 하늘만큼 한 사연을..../ 눈물을 흘리지 말고/ 웃으며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하늘만큼한 밤을...../ 조선의 창호지에 눈물을 그릴 수 있다면”
이수복의 봄비는 1984년까지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암송되던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다. 국어 교과서에 서 본 그 시를 시비에서 다시 보는 감회가 필자에게도 새롭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이 외에도 사직공원에는 많은 시비가 서 있다. 장성 출신 필암서원의 주인 하서 김인후와 남도 의로움의 정신을 세운 신비복위소의 주인 눌재 박상의 시를 새긴 시비도, 한국 국문학의 대표 시조 시인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를 새긴 시비도 서 있다. 충장로의 주인공 김덕령의 억울한 심정을 읊은 시도, 금남로의 주인공 정충신과 임진왜란을 극복한 영웅 이순신의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시도 만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현대 시인 이동주의 대표작 강강술래를 새긴 시비도, 가을의 기도가 새겨진 양림동 시인 김현승의 시비도 양림산 자락 호남신학대학교 교정에서 만날 수 있다.
오늘 사직공원은 면앙정 송순에서부터 이수복·이동주·박봉우 등 근·현대 시인에 이르기까지 10여기가 넘는 시비가 서 있다. 이 시비들은 팔각정 대신 들어설 ’빛의 타워’와 함께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가는 명소가 될 것이다.
백년 만에 부활된 사직제
기념공원은 해방 이후 사직공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태조 3년(1394)에 건립된 사직단 때문이었다. 원래 사직단은 토지의 신(社)과 오곡을 관장하는 곡식의 신(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말한다. 토지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므로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설치하여 왕이 친히 나아가 풍년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광주에서는 목사가 왕을 대신하는 제주가 된다.
사직산에는 옛 동물원 정문에 영귀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 옆에는 정사각형으로 된 두 개의 제단이 있었고, 주위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동물원이 들어서기 전 사직단의 모습이다. 사직단에서는 매년 정월에 그해의 풍년을 비는 기곡제를 비롯하여 음력 2월과 8월, 12월에도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가뭄에는 기우제를, 비가 많이 오면 기청제를, 눈이 오지 않으면 기설제 등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일 년에 몇 번씩 치러지던 사직제는 갑오년(1894) 이후 광주의 여제와 함께 폐지된다. 여제는 의탁할 곳이 없어 죽어간 귀신을 위로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여제를 올리던 여제단은 광주 객사(충장로 1가 무등극장 자리)의 정 북쪽인 지금의 계림초등학교 뒷산인 경호대 옆에 있었다. 또 정남쪽인 학동에는 서낭당도 있었다.
사직제는 폐지되었지만 사직단은 그 후에도 한참 동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직동물원이 들어서는 1960년 대 말 헐리고 만다. 그 뒤 사직단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게 되고, 1991년 사직동물원이 우치공원으로 옮겨지자 예전 동물원 입구 매표소가 있던 자리에 1993년 사직단이 복원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4년 사직제가 행해진다. 100년만의 부활이었다.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