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미소
찬불가 " 당신의 미소" 가운데 나오는 가사로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내 인생을.. 내 영생을 받칩니다.'라는 부분을 보며..
먼저 영생 eternal life 이란.. 영원한 생명으로 불멸이란 뜻이니.. 불자라면 곧 불생불멸을 떠올릴 것이다.
불멸이란 단어는 불자인 우리에게 친숙한 언어인데, 영생이라 하면 그건 기독교 언사가 아닌가?
그렇다. 영생은 기독교적 언사다.
우린 관셈보살.. 하지만 기독교인은 아멘 하듯..
그런데 노래 가사로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내 불멸을 받칩니다' 하면 어색하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독교에서 영생은 여기서 구하는 게 아니라 죽어서 얻는 선물로 여기듯.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라 하면 천국이난 여호와를 생각하며 거기에 영생이 자연스럽게 들어가지만..
그러나 냉정히 바라보면 저 가사는 찬불가 가사로 전혀 어색하지 않다.
거룩한 이름의 당신은 아미타 부처님으로, 우리는 죽어서 가는 극락정토에 계시는 부처님이시다.
불자가 죽으면 더 이상 행복이 없는 최고인 극락을 누리는 정토에 가서 영원히 살고 싶지 않은 자가 있을까..
그러기에 6도윤회를 한다고 하지만 극락정토에 가면 윤회한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 선행을 쌓아 왕생극락정토하면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고 싶다는 것은 불자의 목표요, 꿈이라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불교 안에는 이미 영생인 분들이 있으니..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이 그렇다.
다만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보며 영생이라 하지 않고, 불멸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있는 분[여여]으로 중생을 가엾이 여겨 실천하고 있는 분으로
중생이 있으면 항상 있는 분을 관세음보살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중생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보살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불멸이니 영생이란 말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찬불가 '당신의 미소'에서 당신은 부처님으로 특히 아미타 부처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 보면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정토는 우리가 보기에는 극락정토이며 영생하는 곳으로 보이니..
왕생극락을 바라는 우리라면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내 인생을.. (내 영혼을..) 내 영생을 받칩니다.'라고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영생이란 단어는 불자에게 아직은 어색하다. 영생이란 단어는 기독교적 언사로 기독교안에서 빛을 발하는 언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생에 대해 말할 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로마서 6:23) 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이 선물은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죽음”과는 대조적입니다.
영생의 은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
이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나타냅니다. 이 생명은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 퍼옴
해탈이나 열반 정토가 불교적 단어이듯 영생은 기독교적 단어다.
그러면 불교에서 가르치는 해탈과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영생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질량이 있는 존재 곧 몸은 의미가 없고 마음에 집중하고 있다. 그에 반해
후자는 몸과 정신을 하나로 보아 가르친다. 하여 영생이라 함은 지금 이 몸과 정신이 함께 움직인다. 천국에 간다고 할 때 이 몸과 정신이 함께 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건 아니건.
그렇기에 마음을 강조하고 몸은 사라진 해탈이기에 몸을 포함하는 영생과는 다르게 여긴다.
다만 왕생극락은 마음뿐 아니라 몸도 마치 함께 극락에 왕생하는 것처럼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사실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법당 하단에는 돌아가신 이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영가를 모신 곳으로, 몸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유교식의 제단과 다르다.
영가란 몸은 흩어져 사라지고 마음인 영만 있는 것인데..
중생인 우리는 은연중 몸도 함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단을 향해 재를 올릴 때 우리는 돌아가신 분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때 모습은 질과 양이 있는 존재가 아닌 그렇게 보이는 색이련만, 평소 알고 있는 질량이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몸과 영혼이 함께인 뜻으로 알고 사용하는 언어인 영생이라면 그것은 불교에 합당한 언어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아미타 부처님인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받치려는 것이 정토에 왕생한 것이라면 영가가 될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여기서 나라고 알고 있는 자 곧 아상을 받친다고 하면 어떨까.
'당신의 거룩한 이름에 내 인생을.. 내 아상을 받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