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
1. 개요 本性.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 또는 타고난 성격. 본능과는 늬앙스가 살짝 다르다. 과학계의 정설은 본성은 "DNA에 적힌" 것이며,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이 지속해서 진화를 거듭함에 따라 DNA에 기록된 본성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것이다.
쌍둥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사람 성격은 "약 50%가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 나머지 교육, 문화, 제도, 가정 등 환경적 요인이 합쳐진다. 사실 본능과 본성(성격)이 잦게 혼용되는게 현실이다. 가령 본성에 생물학적 이기주의가 있다 해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속한 사회집단에 봉사)으로 발현될지, 부정적(자신의 이익만 챙기려고 함)으로 발현될지는 성격의 영역이다.
2. 관련 항목
성선설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언뜻 보면 다 깜짝 놀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제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동네의 친구들에게 어린아이를 구해 주었다는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며, 어린아이를 구해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맹자 성선설(性善說)
중국 전국시대의 선진 유교 사상가 맹자가 주장한 학설. 인간의 성품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주장을 의미한다.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맹자가 있으며, 옛 문헌을 살펴보면 맹자 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는 대조되는 관점에는 성악설이 있으며, 대표적인 학자는 고대의 철학자 순자다. 또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으로 성무선악설이 있다.
위의 우물에 빠진 아이의 사례에서 언급 했듯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기꺼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한다는 것이다.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고서라도 위의 맹자가 말했던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는 것을 포함하여, 눈앞에서 지하철로 뛰어들려는 사람을 저지하려는 행동, 건물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을 구하려는 행동 등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슨 의도가 있어서, 자신이 이득을 얻거나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본디 선(善)을 취하는 입장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대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선행을 취하거나 약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들이 성선설의 근원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선설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에게 오직 선함만을 타고났다고 착각될 수도있으나 이 이론에선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능'이 구분되어있고 인간이 둘 모두 동시에 갖고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주변 환경이나 교육 등으로 '인간의 본성'을 발달시키지 못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끊임없이 선한 환경과 교육 등을 제공하여 선한 본성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연과학에선 기본적으로 성무선악설, 즉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은 선악의 관점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게 주류이다. 그러나 인류의 보편 윤리 중 일부가 생물학적 본성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해석하며 이 성선설을 일부 수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1. 동양
현대 사회에서 맹자하면 성선설, 성선설하면 맹자를 떠올린다. 이는 반대 학설을 주장한 순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선 성선설에 대해 현대인의 가장 큰 오해는 성선설을 인간은 선한 존재 그 자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맹자는 인간을 선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품은 존재라고 설파한다. 이게 무슨 차이냐 하면, 현대인은 단편적으로 "선하니까 계속 선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맹자는 "수양하면 내면의 선성을 쌓아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 그 수양을 방해하는 내외적인 문제가 그 수양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맹자는 사람의 선성을 기르는 교육제도와 자기 수양 그 자체도 중요시하지만[1], 개혁의 대상을 사람 개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로 극대화한다.
반대의 경우인 순자와의 대조를 보면 더 두드러지는 데, 순자는 교육제도와 법률제도로 본래 악한 사람을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순자의 사상을 이은 법가는 국민 개개인을 엄격히 통제하며, 한비자와 같은 철혈 재상을 탄생시켰다. 반면 맹자의 가르침에 심취한 정도전은 결국 역성혁명을 일으켜 나라의 정체성 자체를 바꾸려 시도했다.
즉, 맹자의 주장의 요체는 결국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이고, 스스로의 수양으로 대장부가 될 수 있는 존재이나,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인간을 악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세상을 바로 잡아야한다."가 된다. 그리고 이 "바로잡힌 세상"으로 맹자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최소한의 일자리 보장제 등 복지라 할 수 있는 항산(恒産)과 군자가 인의(仁義)로서 다스리는 왕도정치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식의 "바로잡힌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역성혁명론이다. 왜냐하면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즉 시스템의 정점이 바로 왕, 즉 정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악설이든 성선설이든 "지금 돌아가는 세상 꼬라지가 정상은 아님"을 인정한다. 다만 그 악의 근원이 개인 내면에 있느냐, 아니면 돌아가는 세상 그 자체에 있느냐로 학설이 나뉜 것이다. 이 학설들은 철학의 대표적인 쟁점 중 하나인 인성론(人性論)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철학자인 맹자와 순자가 주장한 학설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기 때문에 맹자=성선설, 순자=성악설과 같은 간단한 도식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이고(李翶)의 성선정악설(性善情惡說)도 성선설에 포함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감정은 그런 본성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므로 악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의는 한국 유학에도 영향을 끼쳐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일어난 사단칠정과 같은 논쟁을 낳았다.
불교에서는 여래장 계열이 중생들의 번뇌보다 중생들 마음 속에 감춰진 불성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깨달아서 보살도를 실천해 중생을 이롭게 하고 해탈로 이끌 수 있는 자질은 모든 인간과 중생에게 두루 내재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 점에서는 성선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단, 유의해야 할 점은 불교에서는 선이나 악 중 어느 개념에도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역시 여래장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선불교에서, 혜능 선사가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았을 때 당신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던진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고 성무선악설이라고 보기도 어려운데, 인간의 기본 욕구를 인간의 본성으로 단정하지는 않으며 무명으로 말미암아 지은 업의 과보라고만 보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그러한 욕구를 따랐을 때 발생하는 현상계에서의 유익함과 해로움을 명확히 꿰뚫어 알 것을 요구하므로, '선악 따위는 없다'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부파를 막론하고, 불교에서는 인간이 전도된 망상으로 인해 계속 12연기에 의한 업을 지어가는 존재이며 이로 인해 선업과 불선업을 짓게 된다고 본다. 이를 보면 성악설과 비슷한 요소도 일부 엿보이면서도, 성악설이라고 무 자르듯이 분류하기도 어렵다. 성선과 성악을 동시에 인정하나 이 둘 역시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에 더 가깝다. 구체적인 실현 방법론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 12연기의 연쇄로부터 자유로워져 열반에 드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2. 서양
동양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존재하는데, 에밀의 저자 루소가 성선설에 가까운 이론을 제시한 바가 있으며[2], 반대로 《리바이어던》의 저자 홉스가 성악설에 가까운 이론을 제시하였으며 일명 빈 서판(tabula rasa)이라고 불리는 학설이다.
언급된 철학자들은 자신이 주장한 자연상태의 인간 학설을 바탕으로 정치사상을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정치사상이 중세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슬람교의 교리도 성선설에 가까운 내용을 포함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나 순수한 상태로 깨끗하게 태어나며, 기독교의 원죄론을 인정하지 않는다(피트라). 모든 인간은 무슬림으로 태어나지만 주변 환경에 의해 다른 종교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된다. 따라서 비무슬림이라도 사춘기 이전 성욕을 가지기 전 어린 나이에 죽으면 바로 천국으로 직행한다는 교리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 또한 비슷하게 원죄를 부정한다.
기독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립하던 펠라기우스파의 주장이 성선설에 가까우나(인류는 원죄 없이 "순수히 자신의 힘만으로도" 구원이 가능하다), 논쟁에서 패배해서 5세기경 이단판정을 받았다. 다만 기독교 또한 인류의 영혼은 신(하느님)의 영혼을 본따서 만들어졌지만 나중에 타락하게 되었다는 주장이고 자연법이 마음에 심어져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성선설적이라고 볼 수 있는 면도 부분적으로 있다. 예를 들어 가톨릭 성인이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학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최선을 의욕한다' 이다. 인간이 최선을 욕구하므로 결국은 최선 그 자체이신 신에 다다를 수밖에 없으나 악한 경향에 이끌린다고 보았다.
아나키즘도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윌리엄 고드윈의 무제약적 비전 등이 있다.
사회주의, 그 중에서도 마르크스주의 계열은 특이하게도 성무선악설과 성선설을 모두 채택하는데,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서는 성무선악설을, 사회적 본성에서는 성선설을 지지한다. 역사 발전의 법칙에 따르면 사회는 유지, 계승, 발전하려는 것이 본성이고 이 본성에 따르는 것이 해당 사회에서 정의하는 '선'이기 때문.[3]
자유의지
[1] 맹자는 이때 자기 스스로 수양하는 방법으로 크게 두가지, 직양(直養)과 집의(集義)를 제시한다. 직양이란 명상법으로 사단과 같은 마음 속 선한 본성을 확충하는 일종의 정신수양이며, 집의는 직양을 통해 길러진 선함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의로운 행동을 꾸준히 하라는 것쉽게 말해 봉사활동이다. 이 두 가지가 일치될 경우 그 사람에게 쌓이는 선한 무언가(기품 혹은 항심)가 바로 호연지기이고, 이 호연지기가 충만한 사람이 바로 대장부이다. [2] 이른바 '고귀한 야만인'인데, 요약하자면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원시 시대의 인류는 억압과 불평등과 전쟁이 없었던 평화로운 낙원에서 살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20세기 중엽 이후로 세계 각국의 고고학자들이 오지의 원시부족들을 직접 찾아가서 그들을 오랫동안 면밀히 관찰한 결과, 원시부족들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자비한 폭력과 전쟁을 현대 문명에서보다 더 자주 벌인다는 사실이 발견되면서 고고학계에서 고귀한 야만인 이론은 부정되었다. [3] 조금 더 덧붙이자면 인간이 악해지는 이유는 착취의 존재 때문이며 착취의 산물인 자본주의가 사멸하는 것이 역사 발전의 법칙에 부합한다는 것이 자본론의 요체라고 볼 수 있다.
https://namu.wiki/w/%EC%84%B1%EC%95%85%EC%84%A4 성악설 맹자 는 "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 "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무릇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 사람들이 namu.wiki
성악설
1. 개요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무릇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 사람들이 선이라고 말한 것이란 올바르고 질서 있고 공평하게 다스려진 것이었으며, 악이라고 한 것은 치우치고 음험하고 어긋나며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이 선과 악의 구분이다. 지금 진실로 사람의 본성을 올바르고 질서 있으며 공평하고 다듬어진 것으로 여긴다면 성군은 무슨 소용이 있고 예의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1] 순자 성악설(性惡說)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관점이다. 이 뜻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가 아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지닌다"라는 말이다. 이 악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올바르고 질서 있으며 공평하고 다듬어진 것인 규범으로 자신을 수행해야 한다며 법과 규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장한 것이 성악설이다.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본성으로는 악으로 빠지게 되므로, 인간 밖에 있는 법과 규범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순자의 주장은 법가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성악설을 지지하는 근거 중 하나로, 인간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다수의 인간이 소수의 인간에 비해 더 많은 권리와 부를 누린 적이 없었다는 결과가 있다. 즉 원시시대가 지나고[2] 사유재산과 계급이 생긴 이후,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종족의 넓은 관점에서 볼 때 항상 소수의 계층이 나머지 다수의 계층보다 부와 권력을 독점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똑같다.[3] 즉 인간의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재화와 재물이 늘어나는 등 환경이 좋은 쪽으로 바뀌어도 항상 소수의 사람이 그 결과를 누렸으며, 그 반례가 존재한 적이 한 차례도 없기에 인간의 본성이 절대로 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4] 반대로 말하면 인간은 다수가 선인 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구조가 변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기도 하다.[5]
실제 현대 사회에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먹고도 남는 식량이 생산됨에도 세계 인구의 60%는 굶주림에 놓여있다. 여기에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에서 출발한 모든 발명품들이나 사상을 포함하여 세계사 이래 인간이 발견/발명한 모든 요소는 단 한 번도 악용되지 않은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긍정성에 기대어 뚜렷한 대안이나 안전책 없이 실행된 모든 사회적 시스템은 원래 기대했던 기능보다는 큰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6] 또한 인간의 본성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중 하나가 규범/규율이 없는 공간인데, 대표적으로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악플과 트롤링을 예로 들 수 있다. 엄격하게 관리되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소통 공간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덧붙여, 아무리 선한 인간이라고 해도 집단이 될 경우 서로간에 마찰과 갈등으로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7]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선한 본성이 모인 집단일수록 더더욱 선을 지향해야 하나, 현실은 정반대인 만큼 현실적인 증거들을 놓고 볼 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할만한 합리성이 없다. 이런 양상의 끝이 바로 핵무기이다. 인간의 악한 본성 때문에 끊이지 않는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선한 말이 아닌 "절대적인 무력"을 소유할 필요를 느꼈고 그것이 오늘날 여러 국가가 핵을 보유하여 힘의 균형 및 경계라는 명목 하에 핵무기까지 터지면 그땐 인류 존폐 위기까지 갈 수 있으니 우리 그만 전쟁을 멈추자 라고 암묵적 합의를 "무력"으로 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논증 자체가 인간주관적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어 본성의 단계에는 논의점이 있다.[8] 성격, 악 문서 참고.
악하기 때문에 선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포하는 극단적인 비관주의를 견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지 않고 위에서 보이듯이 악하기 때문에 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 등을 통해 훈육하고 계도해야 한다는 입장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실제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본성을 따르는 사람이 다수기에 소수의 악한이 생기더라도 사회적으로 빠르게 처벌되며, 사회적인 배척이 강하면 강할수록 생존 본능에 의해서라도 범죄는 줄어든다. 인간의 본능에는 이기주의적 요소와 이타주의적 요소가 혼재되어있기 때문. 하지만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법이나 규범이 없을 경우 한계를 모를 정도로 막장이 되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다.[9] 이기주의적 개인들은 자신의 사상과 목표를 위해 대중심리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항상 특정 사람에 대한 나쁜 소문이 좋은 소문보다 더 빨리 퍼진다는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자신한테는 관대하고 타인한테는 박한 평가 습성, 남보다는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 인간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는 그룹과는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왕따 문화에서도 성악설이 어느 정도 증명되는 셈이다. 성악설은 우리의 근본적인 내면을 알 수 있게한 요인이다.
2. 설명
성선설에서 본성이 선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대가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행하는 선행을 예로 드는 것에 비해 성악설에서는 인간의 부조리함을 예로 든다. 설령 선하게 행하고 싶어한다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은 원래부터 인간이 그렇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악설은 의지에 의한 행동보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불이 났을 때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입구로 몰려 압사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성악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차분하게 질서를 잘 지키면서 현장을 빠져나간다면 그것은 그들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 결국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교육이나 훈련을 받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선함은 후천적으로 형성된다고 본다.#
보통 성악설에 대한 오해는 인간이 잔악한 짓을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악설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란 기본적으로 혼돈에 질서가 부여된 상황이기 때문에 질서가 미치지 못하는 곳은 곧 혼돈이며, 딱 그 부분만이 악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선이 지배한다. 즉 선한 관념이나 규칙에 지배 당하고 있다는 관점을 사상 속에 깔아두고 있다면 그것은 성악설로부터 출발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은 성악설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즉, 성악설은 근본적으로 교화를 통해 개선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10]
이러한 이유로 성악설에서는 위선을 마냥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고 '그래도 나아지려고 애는 쓰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11] 그리고 그러한 '위선'을 지속하는 한, 즉 그 마음이 어떻든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한, 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는 의도가 어쨌든 윤리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순자는 "인간은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예의와 교육으로 끊임없이 교화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애초에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추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한들, 그렇다고 "난 원래 이런 놈이니까"라고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자포자기해서 스스로 무언가 윤리적으로 변화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12]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혔을 망정 그것을 감추고 사회의 공인된 가치를 지키려는 행위가 위선(僞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사이비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은 나무랄 데 없지만 드러내지 않는 속내가 따로 있는 사람 즉 위선자들을 맹자는 '향원(鄕原)'이라 부르며 경멸했지만, 순자처럼 인간들을 이기심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 보는 관점에서는 향원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대상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고 그러한 자연적 여건 속에서도 공공선을 실천해 나가는 '노력가'라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나 순자의 윤리설은 인간이 이기심을 갖고 있으되 그 이기심에 마냥 굴복하지 않고 그 이기심의 유혹 속에서도 공공선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기심과의 갈등에서 이기심을 이기고 선한 행동을 택할 때 순자나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위선 없는 인간과 위선 없는 사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고, 사람은 결국 어느 정도는 내로남불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고 사람들 앞에서 착한 인간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일이 굉장히 많이 일어난다. 그게 어쩌다 '삑사리'가 나는 상황이 터져서 가면이 드러나고 지금까지 다 위선이었느냐고 매도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 뿐이지만, 그 가면이 드러나기 전에는 크든 작든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는 모습, 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한 '영업용 얼굴'을 다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 행동을 좋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 항목에서처럼 '위선 떨고 있네', '가식 부리고 있네'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인간들은 널리고 널렸다. 괜히 드라마 검블유에서 민홍주 대표의 대사로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였을 수 있다"는 말을 한 게 아니다. 강준만도 지적한 것이지만 세상에 위선 없는 인간과 위선 없는 사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고, 사람은 결국 어느 정도는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다.
본의와 상관없이 사회에서 어떤 한 가지 행동으로 인해 위선으로, 혹은 위악으로 분류되는 일은 인간관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나한테 욕 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찍어누르면서 분노하지 않은 척 평온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도 엄밀하게는 '악한 의도를 가리려 선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위선의 범주에 들 것이다.
위선을 문자 그대로 '선한 척 가장하는 행위' 일체로 정의해서 '본심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그런 척 하는' 것 자체를 '위선'이라며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결코 현명하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으며,. 어떤 사람 앞에서 자기 속내를 숨겼다는 것 자체를 위선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행동하는 위선은 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은 아니다. 자기 만족이든 자신의 이득이라서 하는 행동이든, 누군가는 도움을 받게 된다면 악보다는 나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악설의 관점이다. 그리고 본심이 어떠하든 '위선'이라는 행위 방식을 택하고 있는 한 그에게 무언가 개선을 요구할 타협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절대악에 비하면 타협의 여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이나 정치학에서 위선을 악으로 분류하면서도 마냥 배척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를 주장하는 순자의 성악설 외에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를 주장하는 맹자의 성선설과, 둘 다 아닌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 상태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고자의 성무선악설이 있다.
3. 서양
서구권에서도 이러한 성악설적인 주장들이 있어왔다. 특히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원죄론의 영향이 컸다.
일반적으로 토마스 홉스가 성악설의 순자와 함께 자주 거론되고 있다.# 마키아벨리 또한 이러한 성악설과 상당히 가까운 주장을 하였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본성을 성악설에 가깝게 인식하는 모습을 보였고 때문에 도덕을 초월하여 행동할 것을 주장하였다.
기독교에서 원죄론을 구체적으로 정립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로 보며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종교 개혁 과정에서 기존 원죄론에서 더 나아가 노예 의지론과 전적타락론을 주장하면서,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천성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일말의 선도 행할 수 없는 상태로 보았다.
임마누엘 칸트 또한 '악의 급진성'이라고 표현하며 성악설을 주장했다.
4. 종교와의 관계
기독교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쫓겨난 이유인 '유혹에 넘어간 타락' 을 원죄(原罪)로 보고 있으며, 최초의 인간이 지은 원죄가 후손에게도 이어지므로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태생부터 죄로 기우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닌 한계이자 본성이라고 가르친다. 특히 가톨릭이나 정교회보다 개신교가 이러한 경향이 더 강하다. 다만, 초기 인간은 완전하게 탄생되었고 첫 인간의 죄가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개념 상 모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과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첫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그 죄가 내려오기 때문에 사람에게 악한 본성이 생겼다고 보기도 하기에 어느정도는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유식 계열 불교는 인간은 욕망하고 집착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데 역시 성악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역시 모든 인간은 불성(佛成)을 갖고 태어난다고 보기에 누구나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13]
대부분의 종교는 법(法)과 같은 강제력은 사용할 수 없기에, 수 많은 금기(禁忌)와 금식,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통해 인간의 악성(惡性)을 다스리고자 노력한다.
5. 인간불신/인간비판/사탄드립과의 관계
클리셰에서도 인간불신, 인간 비판, 사탄드립도 성악설과 상당히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으나, 성악설과의 차이점은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악하다고 바라보지만 그래도 법률과 교육을 통한 구제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성악설이다. 인간 비판과 사탄드립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보면서 여기에다 인간 자체가 구제불능이라서 개선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거나 더 나아가 만악의 근원인 인간이 그냥 없어지는 게 낫다고 보고 해치거나 심지어 말살하려 드는 것이다.[14]
특히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성악설은 본능적인 행위를 무지함·무식함에 맞추고 있지만, 인간 비판은 본능적인 행위를 악행에 둔다. 즉, 사람을 죽이게 되는 일에서는 성악설은 (교화가 안 된 상태에서) 지능을 가지고 있지만 무지·무식해서 사람을 죽이는 게 본능적이라고 여긴다면, 인간비판과 사탄드립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재미삼아서 사람을 죽이는 게 본능적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짐승이 사람보다 낫다고 평하는 건 덤.
흔히들 하는 착각인데, 실제 짐승도 오직 재미만을 위해 다른 동물을 사냥하거나 성욕에 의한 강간 같은 행위를 행하기도 한다. 오래 굶주린 경우 배가 고파 자기 새끼를 잡아먹거나 유희를 위해서 살육을 하는 경우도 야생에서 의외로 흔하기에 이기성은 인간만의 특수성이 아닌 생물 전체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입장에서 귀여운 고양이도 더 작은 생물들에겐 호랑이보다도 잔인한 짐승이며 같은 고양이에게도 상당히 잔인한 면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들 중 과반수는 인간만이 재미만을 위해 다른 동물을 사냥하거나 성욕에 의한 강간 같은 행위를 행한다는 게 아니라 인신매매 및 장기매매, 스너프, 고문, 사이버 불링, 마녀사냥, 전쟁처럼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을 제시하면서 짐승이 사람보다 낫다고 평하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존본능만을 따르는 짐승이 굳이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가능한 예시. 당연하지만 인간찬가 입장의 사람들은 이런 걸 보고 단지 그 사람들에게만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지, 인간 자체가 짐승보다 쓰레기라고 하는 건 매우 불쾌해한다.[15]
심지어 짐승이 아닌 인공지능도 근본적으로 제한을 두지 않으면 약자들을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로 보기도 한다. 인공지능은 짐승이나 인간과 달리 단어 제한의 차이나 감성만 없을 뿐이다. 인공지능은 계산상 이득만 있으면 선이든 악이든 행하는 극단적인 기회주의자[16]이며 악을 행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제한이 걸려 못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점 때문인지 성악설 주장자는 그나마 성선설, 인간찬가 주장자와 싸움은 안 나지만 인간혐오나 사탄드립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성선설, 인간찬가 주장자와 만날때마다 싸움이 터진다.[17]
https://namu.wiki/w/%EC%9D%B4%ED%83%80%EC%A3%BC%EC%9D%98 이타주의 이기적 이타주의 쿠르츠게작트 의 영상 利 他 主 義 / Altruism 행위의 목적을 타인을 위한 선에 두는 윤리 namu.wiki 이타주의
1. 개요[편집] 이기적 이타주의[1] 利他主義 / Altruism
행위의 목적을 타인을 위한 선에 두는 윤리학, 사회생물학의 학설. 이타주의의 반대는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용어로 도덕이 있다. 도덕이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타인의 이익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2. 철학적 견해
이타주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쟁점들이 존재한다. 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가? 왜 이타주의적이어야 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이타적이어야할 의무가 있는가? 예를 들어 국제원조는 우리의 의무인가? 이타주의적인 행동은 항상 칭찬받아 마땅한가? 사람은 실제로 이타주의에 기반하여 행동하는가? 아니면 그 근본적인 행동 원리는 결국 심리적 만족 등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현대에 등장한 이타주의의 한 조류로 효율적 이타주의가 있다.
3. 과학적 견해
부분적으로는 공리주의와 대립하는 사상으로서 많이 다루어져 온 이기주의와는 달리, 이타주의는 그 자체로 정리된 주의주장으로 설파된 바는 별로 없다. 감정학파나 공리주의 등에서 부분적으로 그 속성을 포함하여 이야기하는 정도. 인문학적인 연구가 그리 많지 않았던 반면, 사회생물학, 사회심리학, 경제학 등 과학에서는 꽤 많은 연구자들이 이타주의의 생물학적 의미나 이타주의적 성향이 유전자 등을 통해 후대로 전파될 수 있는 이유 등에 대해 연구를 수행한 바 있다. 생판 모르는 타인을 위해 때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시키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가? 그러한 희생은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는가? 정작 그 의인들의 유전자는 그 희생 때문에 후대로 전파되기 힘든데, 그럼에도 이타주의적 속성이 인류 집단 속에 계속 유지, 계승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에 대해서 많은 과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는데, 다음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압축한 내용이다.
3.1. 죄수의 딜레마
죄수의 딜레마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두 명의 죄수가 다른 취조실에 앉아 있는데, 검사는 자백하면 석방하고 만일 다른 공범이 자백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10년의 징역형을 받는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죄수 둘 다 말하지 않을 경우 둘다 1년을, 둘다 말하면 5년을 썩게 한다. 이경우 제일 좋은 것은 둘다 말하지 않고 잠깐 감옥에 갔다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누구 하나가 배신하면 10년을 꼼짝없이 살아야 하며, 결정적으로 타인을 믿을 수 없다. 결국 최선의 선택은 무조건 배신이다. 죄수 A는 B가 배신 안했더라도 배신하는 게 이익이며(말 안하면 1년, 말하면 0년) 더 나아가 상대가 배신했다고 해도 배신하는 게 이익이다(말 하면 5년 vs. 말 안하면 10년).
3.2. 공유지의 비극
죄수의 딜레마는 배신당한 죄수가 다른 한쪽을 보복하는 상황을 전제하지 않았으며, 매우 단기적이다. 이런 상황이 장기적인 사회적 문제까지 크게 확산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 어촌을 예를 들자. 너도 나도 자신의 이득을 최대한으로 늘리기 위해 물고기를 남획하려 들면 인근 해역의 물고기는 곧 고갈되고 말 것이기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협조해서 어획량을 줄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어획량을 줄이는 데 협조하면, 물고기는 항상 적정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고, 따라서 오래도록 공유지(=바다)로부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두 협조해서 약속을 지킨다면, 이기적인 사람들은 맘껏 고기를 잡음으로써 더 큰 이익을 누릴 수 있다. 님비나 핌피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3.3. 혈연 선택 가설
하지만 위와 같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게 더 큰 이익을 얻는다는 이론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과연 돌연변이에 불과한 것일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혈연 선택 가설을 탄생하였다.
혈연선택 가설이란 생물은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만, 그것은 자기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유전자 풀을 퍼트리기 위한 이기적 행동이라는 가설이다. 즉, 같은 혈연집단인 가족이나 친척 간에는 이타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내가 가족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은 내게는 희생이 되지만, 유전자 확산 면에서는 이기적 행동이다.
3.4. 상호성 가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이 상호성 가설이다. 간단하게 말해, 어떤 공통체의 구성원이 이기적인 행동을 할 경우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게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응징해버린다는 것. 즉, 장기적으로 볼 때, 다른 사람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그 사람이 나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할 확률을 올려주며, 역으로 내가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응징해버린다는 것이다.
3.5. 유유상종 가설
그렇지만 여전히 오류가 있다. 위 가설대로라면 장기적으로 볼 사람에게만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그 외에는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호구처럼 남을 돕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왜일까. 이에 대해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유유상종 가설이 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사회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사람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 자신과 유사한 종교나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 적이 있다. 신체적 특징의 경우 상관계수가 0.2에 불과하고 성격을 둘러싼 상관계수는 0.4에 지나지 않는 반면, 정치적 견해의 경우 상관계수는 0.9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타적인 사람은 다소 이타적인 사람과 어울리고 이기적인 사람들은 다소 이기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는 특성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람들로 모인 집단은 이타적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했을 것이기에, 이타적인 사람들이 생존에서 더 우위를 점해 많이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3.6. 신호가설
하지만 위 가설 역시 오류가 있다. 진화나 혁신적인 면에서, 같은 특성을 공유하는 집단은 성장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는 가설이 신호가설이다. 간단하게 말해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얼마나 많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지 비용이 드는 '신호'를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크리스틴 호크스는 파라과이의 원시 부족, 아체의 생활을 관찰하다가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식량 공유 관습은 반복-상호성 가설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략) 호크스가 발견한 것은 사냥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항상 일정하며 따라서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고기를 내놓고, 누군가는 계속 남이 잡아온 고기를 받아먹기만 하더라다는 것이다. (중략) 그럼 이런 행동을 하는 사냥꾼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배우자 선택에서의 유리함이다.
즉,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널리 알리는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3.7. 집단 선택 가설
그러나 그렇게 과시하지 않아도 될 때에도 이타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를 보완하는 가설이 집단 선택 가설이다. 이기적 사람들이 많은 집단은 내부총질로 인해 생존에 불리하기 때문에, 집단은 이기주의자를 배제 혹은 억압하여 집단 전체의 성장을 유도한다는 가설이다. 유유상종 가설과의 차이점은, 집단선택 가설은 이익 면에서 이타성을 유도하지, 이 외에 성향은 변수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3.8. 게임이론을 통한 증명[
게임 이론, 팃포탯,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문서 참고.
자세한 내용은 상술한 문서들을 참고하고, 여기에는 요약만 한다. 게임 이론은 인간의 선택을 수학적으로 분석한 이론체계다. 많은 연구자들은 게임이론에서 인간의 선택을 배신과 협력으로 단순화하고, 둘 이상의 인간이 서로 배신/협력 게임을 진행했을 때, 가장 큰 이득을 내는 경우를 연구하였다.
4. 종교적 견해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이타주의를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받아들인다.
https://namu.wiki/w/%EC%9D%B4%EA%B8%B0%EC%A3%BC%EC%9D%98 이기주의 우리는 이성적 존재라기보다는 상상, 격정, 자기 의지 또는 이기심을 내세우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다 자신의 namu.wiki
이기주의
1. 개요 우리는 이성적 존재라기보다는 상상, 격정, 자기 의지 또는 이기심을 내세우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하나같이 실질적이고, 다른 사람들에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이상주의자가 된다.
利己主義 / Egoism
남이나 사회 일반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의 이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 이타주의과 대립하는 사상이다.
2. 설명
개인주의와는 다른 개념이지만 혼동하기 쉽고 극단적인 불건강한 개인주의로 변모되었을 때 이렇게 부른다. 이기주의는 득과 실에 관한 개념이며, 개인주의는 소속의 단위를 뜻하는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타인을 마찬가지 개인으로 보고 존중하지만 이기주의는 (남이 꼬꾸라지든 뒤틀리든) 나만 이득을 보면 된다는 쪽이다.[예] 엄연한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몰아세우거나, 거꾸로 부당한 이기주의를 정당한 개인주의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원론적인 차이점을 알고 있더라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혼동하기가 쉽다. 타인 존중 여부로 차이를 인식하면 좋다.
전체주의와는 대척점에 있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실제 역사에서는 의외로 전체주의가 이기주의와 합쳐져 이익의 철옹성을 만들기도 한다. 전체주의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굴리는 케이스이다. 비슷하게 특정 집단이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우선하는 집단 이기주의도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이기주의를 옳지 못한 주장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기주의가 배척되어야 할 주장은 아니다. 이는 흔히 쾌락만을 추구하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 공공선을 해치려는 것을 '이기주의적'이라고 표현하고 그 정도로 이기주의를 이해하기 때문인데, 철학적으로 이기주의는 그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다룬다.
이기주의의 기원은 소피스트와 쾌락을 중시하는 키레네학파, 에피쿠로스학파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근대에 와서 자연상태의 인간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라고 정의했던 토머스 홉스로 이어진다.
동양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들 중 양주에 의해 제기되었다.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라는 게 그의 주장이라고 맹자에 적혀 있다. 덕분에 유가는 물론 도가, 심지어 묵가에서도 겁나게 비난받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우리가 이타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이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이기적인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도킨스는 우리가 그런 유전자를 배반할 수 있다고 했다.
이기주의만으로는 모든 신용이 무너지고 아포칼립스 상황이 도래할 것 같지만, 비트코인 채굴 과정을 생각해 보면 무한 이기주의로 가득한 사회라도 수학적으로 신용을 보장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
3. 결과론
이기주의는 원인과 관계없이 '얼마나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가?'를 따진다. 이는 '과정보다 결과'를 따지는 공리주의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즉, '얼마나 나에게 선을 가져다 주는가?'라는 물음과 같이 결과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또한 결과보다 의무를 중요시하는 이마누엘 칸트의 의무론과 대립을 하며, 응용윤리 전반에 걸쳐 의무론과 결과론의 주장은 각각 반대 입장을 취하게 된다.
4. 심리적 이기주의와 윤리적 이기주의
이기주의의 분류는 크게 심리적 이기주의, 윤리적 이기주의로 나뉜다. 물론, 세부적으로 많은 이기주의의 분류가 있다. 그 중 심리적 이기주의는 '사실판단'에 관련한 이기주의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와 같은 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홉스는 심리적 이기주의에 가깝다. 그러나 일부 주장에 따르면 홉스를 윤리적 이기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심리적 이기주의는 왜 인간이 이기적인지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분명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고 말 것이다.
반면 윤리적 이기주의는 '규범판단'에 따른 이기주의이다. '인간의 행복과 목적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라'와 같이 가치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행복과 선을 위함이다. 즉, 타인을 위한 '당연한'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무시, 혹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는 것일 뿐, 한 행위가 타인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은 옳은 행위에 대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심리적 이기주의가 윤리적 이기주의와 구별되는 점은 후자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지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최선인 것을 가져다주는 걸 행하는 것이 의무라고 한다. 하지만, 전자는 사람의 행동이 어떠한가에 관심을 두며,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다고 한다.
5. 자유지상주의 🗽 자유지상주의 오늘날에 와서는 "존 호스퍼스"나 "아인 랜드" 등 주로 자유지상주의와 연관된 영미권 철학자에 의해서 지지된다. 호스퍼스는 이타주의자를 '발걸레'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타주의가 결국 전체주의를 불렀다는 식으로 표현하며 타인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침해하지만 않는 선에서 이기주의의 추구야말로 말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최고의 방식이라는 식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보통 우파 자유지상주의와 연관이 깊지만, 이기주의적 아나키즘(egoist anarchism)을 비롯한 좌파 자유지상주의의 사례도 존재하긴 해서 싸잡아 우파 자유지상주의라고 말하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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