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이시여, 선한 남녀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으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마음을 항복 받습니까?"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服其心
"아상 ego이 없어야 한다." <금강경, 제2, 제3분 에서> |
1. 선한 남녀가..
기독교는 선과 악이 있어 선함을 따르고 악을 물리치는 종교다. 따라서 선을 대표한 천사와 악을 대표하는 악마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조금 냉정히 본다면 그렇게 끝없는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을 법한데.. 만일 선과 악이 천사와 악마처럼 존재하는 것이라면 결코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한번 존재하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법칙이므로..
불교에서는 말한다.
선과 악은 본래 존재가 아니므로..
세간에서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라 하고,
자기에게 손해라고 보면 악이라 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더욱 치밀히 하여
성불로 나아가는 것은 선이라 하고,
성불에서 멀어지는 것을 악이라 한다.
그런데 <금강경. 제2분>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마치 선한 남녀가 존재하는 것처럼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산스크리트어 <금강경>은 선한 남녀가 아닌 양가집 남녀 정도 뜻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표현으로 하면.. ‘누군가가’ 하는 정고의 뜻이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과 수보리 장로 대화를 수집기록하는 자처럼 <금강경>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자라면..
해서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심[줄여서 보리심]을 일으킨 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양가집 자녀 또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선한 자가 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알고 있다.
주위를 보라. 양가집 남녀나 보통 사람들은 수두룩이지만 선행이 바탕인 보리심을 내던가?..
그러기에 보리심을 일으킨 자라면 그는 선한 남녀가 틀림없다.
하여 주어 자리에 선한 남녀가 있다.
2.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줄여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먼저 뜻을 살펴보면..
아뇩다라 anuttara는 더 위가 없고,
샴먁 sammyak은 평평하다는 것으로..
무상 정등..
더 위가 없으면 평평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샴보리 sambodhi에 샴 은 함께 하는, 완전한이란 뜻, 보리는 깨침으로.. 샴보리는 완전한 깨침이란 뜻이다.
석가세존께서는 평소 열반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셨는데.. 45년 동안 설하신 내용을 살펴보니 대략 9개 정도의 열반 단계가 나온다.하여 그것을 9차제정이라 하였다.
마지막 최고 단계는 멸진정이라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멸진정을 더 세분한 설명이 나오니.. 불자들은 그렇다면 참 마지막 열반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대승불교에서는 마지막 열반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득정각..라고 가르치니..
대승경전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여 마지막 열반인 깨침으로 설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 마음을 일으키다[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심]라고 하고 있다.
'발심'이란 말도 종종 보고 듣는데.. 그 말 역시 바로 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심을 줄인 게 된다.
그것을 보면 발보리심은 대승불교 특유의 표현으로 최고 열반을 지칭하는 게 된다.
한편 <금강경>에서 수보리 장로의 질문은..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을 잘 보호하고 잘 격려하신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선한 남녀가 발 보리심 했을 때 어디에 머물며 무엇을 실천하는지를 묻고 있다.
왜 수보리 장로는 부처님께서 보살들을 중요시 여긴다는 말을 시작으로 삼고 있는 걸까..
대승불교의 중심은 4성제나 12연기법을 수행하는 자가 아닌 보살이요, 보살행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법화행자나 화엄행자 역시 보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보살행을 하면서 닦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3. 아상 atman, ego이 없어야 한다..
수보리 장로 질문에 부처님의 답변은 매우 심플하니..
아상을 없애라.
먼저
실천은 기독교처럼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타행이 중요한 것은 이기심을 양보하는 행위이기에 그렇다
불교에서 이웃 사랑의 핵심은 보살이 그러하듯이 모두 각자의 아상이 없음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아상이 없다는 것을 애둘러 <금강경>에서는 일체 중생을 열반에 들도록 실천하였어도.. 열반에 든 중생은 하나도 없다고 하고 있다.
왜 없는가?. 아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아상을 네 가지 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네 가지 상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는데..
시중에 나와있는 설명이 틀릴리 없지만.. 핵심을 보면 <금강경>이 나올 당시 인도인들이 나[아상]라고 여기는 것이다.
곧 아상은 힌두교의 아트만이요,
인상은 상좌부에서 주장하는 아상이요,
중생상은 대승불교에서 가르치는 아상이요,
수자상은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는 아상이다.
불교이든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이든 나라는 상을 세우고 있다면 그것은 무아에서 벗어난 게 된다는 것으로..
불교의 목표는 무아상인 무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으로
이것 하나만 보아도
대승불교가 특히 반야부의 <금강경>은 석가세존의 핵심을 그대로 온전히 전승하고 있는 게 된다.
이미 우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은 익히 들었는데..
무상정득정각인 열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