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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시집
물의 언어학
(2013. 10. 25. 시원 )
* 시인의 에스프리 / 「물의 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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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시인의 말
물의 진리는 오묘하다.
물은 생명수요, 활력의 원천이다.
물이 포괄하는 진실은
우리 인간들과 만유(萬有)의 자연들에게서
생사의 한계를 결정하는 신의 선물이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물도 그 흐름이나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유형이 다르고
생멸(生滅)의 구분도 달라지지만,
물은 언제나 나에게 안온한 시혼을 안겨준다.
물의 탄생은 곧 나의 출생과 동일한 맥락으로 보았다.
그 행로도 나의 삶의 궤적(軌跡)과 비슷하다.
이를 토대로 지금까지 써 모은 작품을 모았다. 물의 진정한 의미와 시적 진실을 음미하면서 무려 90여편이 작품을 완성하고 이게 또 한 권의 시집을 상재할여고 한다. 계속되는 시업(詩業)에 채찍과 격려를 바란다.
2013년 가을 어느 날
聽松 金 松 培
물 詩 . 1
-탄생의 물
어둠의 먼 여로
지금 깨어나는 자만이 환희에 젖는다
어머니 자궁을 빠져나온
생명의 신비
산 속 옹달샘에서 마침내
이 세상 바람소리를 붙잡는다
지하 칠흑의 혼돈에서
더러는 용암의 분노에서
만유의 섭리를 깨우친 작은 몸짓
오물오물 젖먹이 부드러운 입술로
또 다른 생명의 잉태를 위해
광명의 먼 여로
지금 환희에 젖은 자만이 신비를 맞는다
물 詩 . 2
-꿈꾸는 물
어둠의 강을 건너간다
밤마다 펼쳐지는 영혼의 강
이른 봄인데도 물살이 차다
오늘을 건너 내일에 동행해야 하는
시간의 물길은 언제나
꿈으로 분주히 세속을 떠돌다가
저 편 어디쯤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녀린 생명의 빛을 예비한다
만물이 모두 잠들기 전에
경건한 축배의 잔을 들고
맑은 도랑물소리를 듣는다
이승에서 저승을 건너가 듯
장중한 의식은 없지만
영혼의 강물은 오밤중에도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물 詩 . 3-분노의 물
폭우는 무섭다강풍에 이미 망가진 우산을 버리고내장까지 젖은 채 빗속 시오 리 산길을 걸어간다 시뻘건 황톳물은 금방 저수지 뚝을 무너뜨리고대지의 평화를 휩쓸어저주의 땅에서 넘실거린다아, 누구의 울분이었나산길 끝머리에서찾아 들어가야 할 집이 없어졌다아아, 빗속에 섞이는 저 울음들이 지상에는 홍수라는 이름으로무섭게 평정되고 있다. 이럴 때구원의 기도는 하늘도 듣지 못한다.
물 詩 . 4-허공의 물
새벽 이슬길을 가다가풀잎의 잔잔한 웃음을 보았다온몸 생기 감도는 이파리--꿈이었다무작정 먼 길 떠나다가따가운 태양을 만나면 맞이해야 할 지극히 허무적인 한생그것은 소멸이 아니었다온몸 씌워진 허물 모두 허물고잠시 창공 어디쯤에서 몸 푸는 사랑비가 되랴 눈이 되랴꿈속에서만 영롱한 이슬이 되랴어느 날 문득, 이 지상의 환생.
물 詩 . 5-죽음의 물
청둥오리 한 쌍 물살 가르며 한가롭던그 소년의 저수지는 옛 가슴으로만 흘러흘러 넘치는데수초 깊이 산란하던 피래미 송어떼들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인간들이 재앙을 부르고스스로 그 재앙에 휩쓸려검게 혹은 붉게 저수지 물과 함께 말죽어가고 있었다어느 날 인성(人性)이 고갈된 지상에는 아침 꽃잎에 도르르 구르던영롱한 이슬이 보이지 않았다바람과 함께 쓰던 나비의 편지도 없었다먹구름 한 떼 어둡게 하늘을 덮고 아아, 그 소년은 다시파아란 물수제비를 뜰 수 있을까 세상 만물들 마지막 숨소리상여소리로 풀풀 흩날리고 있었다(2007.11.청시동인지)
물 詩 . 6-잠자는 물
가끔 비단개구리 한 마리그를 흔들어 깨우는버려진 웅덩이그의 잦은 잠꼬대에서 찾는 건역시 도달해야 할 먼 바다였다--나는 흘러야 해. 그리고 스며야 해.온갖 소망 풀섶에서 웅성대지만오늘은 바람도 불지 않는다어쩌랴, 잠 깨면 햇살 따라허공으로 증발할 수밖에........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잠꼬대 같은 것웅덩이에 잠든 하잖은 모습 같은 것 --올챙이 물방게 소금쟁이 미꾸라지 그 친구들은 내 곁을 떠났는가다시 빗물이 고이고 가끔물풀이 내 안에서 밀어를 그리지만 그는 하얀 구름 한 점만 껴 안은 채깊은 꿈마저 기척이 없었다.
물 詩 . 7
--상징의 물
너의 정체는 항상 애매하다
물안개였다가 이슬방울이었다가
더러는 만유의 웃음이다가
문득 험상궂은 폭력이다가
앙, 천태만상의 반전이다가
입엽편주 온몸으로 감싸는
그 평온의 정체
너는 언제나 질곡의 시간을 거슬러다가
가을 햇살에 젖은 옷을 말리다가
더러는 영혼을 만나러 떠나다가
다시 환생의 계곡에서 한 음절 선율로 흐르다가
호수이거나 바다이거나
한 줄기 미풍에 밀려
수줍은 듯 얼굴 묻어버린
최후의 그 정체
내 온몸을 관류하는 생명수였다가.
물 詩 . 8
--운명의 물
그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
바다를 향해 달렸다
출발지점에서부터 그는
암담한 먼 허공으로
졸졸졸 한 줄기 절망을 흘렸다
깊은 산골짝에서는 바람소리
작은 도랑에서는 풀꽃들 노래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지만
어쩐지 그는 불안했다
작은 생명에게 스미지도
또 다른 세계로 비상하지도
못한 채 허어,
벌써 이순을 넘어선 물길
아직도 못다 한 사연이 남았는가
그 바다를 채우기 위해
그 길이 그의 운명인 듯
작은 물꼬를 틔어 스스로 노래하고 있었다.
물 詩 . 9
--예감의 물
이슬 맺힌 풀포기 사이로
흔들리는 여린 꿈
아직도 꿈만 꾸고 있거늘
개울에서 강으로 다시 바다로
눈물나게 흐르다가 어느 날
무지개를 볼 수 있을까 모르겠구나
꽃잎 하나 띄운 채
60 몇 년을 푸르게 흐르면서
하마하마턴 그 꿈은
하구(河口)에서 파편으로 떠돌거늘
언제까지 출렁이다가
먼 하늘로 증발할지 모르겠구나
--나에게 남은 물은 얼마 만큼일까.
물 詩 . 10
-은유의 물
-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학자이며,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
프랑스의 사상가 ‘가스통 바슐라르, 1884~1962’
그를 만났다.
『물과 꿈(물질적 상상력에 관한 시론(試論))』에서
물의 생명력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는 물을 사랑한다
맑은 물과 봄의 물 그 흐르는 물, 사랑스런 물
거기에는 부드러운 물의 우월성이 있고
모성적인 물과 여성의 물은
순수성과 물의 모랄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저주(詛呪)도 보내고
난폭해지기도 한다.
잠자는 물, 죽은 물, 난폭한 물
아, 물도 꿈을 꾸면서 흐르는가
바슐라르여, 선악(善惡)이 명징(明澄)하게
구별되는 이 세상에는
호수가 있고 폭포가 있으며
산사태로 휩쓸어버린 홍수도 있다
그는 지금도 물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 물은 가장 충실한 ‘목소리의 거울’이다
*트리스탕 차라의 『늑대들을 어디서 물을 마시나)』에서
물 詩 . 11
-폭포의 언어
절규였다. 아니다 환희였다
낙법에 따라 혹은 낙차에 따라
애환이 엇갈리는 장중한 연주회
연주회가 끝나면 다시 어디론가
침묵으로 험로(險路)를 떠나야 한다
예비하지 못한 삶의 행로에
옥양목 치마폭 펄럭이며
온몸 던지는 마지막 사자후(獅子吼)
그 포효(咆哮)가 선율로 다시 바뀌는 시각
마침내 대해(大海)를 꿈꿀 것이노니
펑 펑 펑 분노였다가
문득 관조(觀照)였다가
언제나 내밀한 언어로 목이 쉰 낙하.
(한울문학 2007. 여름호)
물 詩 . 12
-물의 시학
찰랑찰랑하던 물이 갑자기 잠잠해질 때
무의미가 넘실거리네
졸졸졸 흐르던 물소리 들리지 않을 때
환청(幻聽) 속 이미지가 풀풀 넘치네
가끔 구름 한 무리 물위에 떠 있고
밤이면 무수한 별들이 노니는 곳
물벌레 화음들이 물거품으로 일렁일 때
여기는 생명이 영롱한 낙원인가
아, 사계절로 변하는 그 생명의 의미
그것은 이 세상 만유(萬有)의 시학이다
만물이 함께 동화(同化)하는 영혼의 창
순정한 묵언(黙言)으로 떠가는 눈짓은
허다하게 잊고 또 잊어버린 사랑인가
개울물이 흘러 바다로 가는
이 웅대한 우주의 암시(暗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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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13
-물의 미학
물가 바위틈에서 물총새 한 마리
잔잔한 수면(水面)을 응시하고 있다
순간에 흑색 부리를 물속에 내리꽂으면
한가롭던 피라미떼들 혼비백산이다
다시 침묵이다
많은 생명들을 안고
또 흘러가야 한다
이젠 물오리 한 쌍
수면을 배회하고 있다
그믐달 자지러지는 대화 속
놀란 피라미 한 마리 삼킨다
응시한 수면 위로
부상(浮上)한 생존법
물은 침묵으로 외면한 채
다른 광활한 신세계를 꿈꾸노니.
물 詩 . 14
- 물의 공학
혜화동 네거리에 분수가
분노의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분수로
이 세상에 토해질 때
어느 찻집에서 시인들은
그 울분을 시로 읊어내고 있었다.
-<분수> 동인들
박희진 이생진 윤강로 신 협 신용대 시인들
가끔 초대된 정한모 조병화 성찬경 성춘복 시인들
분수가 퍼올리는 묵언의 울부짖음이
실내를 숙연하게 했지만
아, 80년대 초반에 성행했던 동인운동
삼선교로 넘어가는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혜화동 분수도 갈아엎어 큰길로 변했다
그날 이후, 대학로에서 자주 뵈었던
정한모 조병화 성찬경은 이승을 떠나고
<분수> 동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물 詩 . 15
-물의 역학
3월 22일은 UN총회에서 제정한
‘세계 물의 날’이다
우리가 일용할 물이 부족하고
수질 오염을 예방하는 것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물의 소중함을 잊었던가
전 세계적으로 이 심각한 문제가
지금 우리의 위기로 당도하고 있다
지구촌 인구가 하루에 소비하는
물의 양은 얼마일까
깨끗한 물을 마시기 어려운
저 안타까운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현재 지구에 남아 있는 물
마실 수 있는 양은 얼마일까
이 지구촌에서는 매일
6천 명의 어린이들이 물과 연관된
질병으로 사망한다는 통계
아아, 물은 언제나 만유(萬有)의 생명수
언제쯤 고갈될지 알 수 없는 물 자원
인간도 자연도 공멸(共滅)의 시간이
시커먼 폐수로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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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16
-물의 생명학
1.
수원지에서 흘려 보내
먼길 상수도로 도착한 물
우리들 생명을 보전한다
팔당댐 상수원 취수장에서
간택(簡擇)되어 몇 고비의 과정을 거치면
청정한 수돗물
음용수(飮用水)로 사람들은 반긴다
2.
먹고 마시고 닦아낸
물은 하수도로 버려진다
하수처리장으로 가서 정화가 되어
다시 우리들의 생활용수로 만나지만
폐수(廢水)로 변하기도 해서
기형 물고기가 탄생한다
수초가 썩어 악취가 나도
정화하지 못한 한강에서
사람들은 코를 컹컹대며
물을 외면한다
3.
물의 여행은 계속된다
물이 오염된 지상에는
말라버린 시간이 폐허를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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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17
-물의 언어학
깊은 산골 옹달샘에서 태어나
실개천에서 졸졸졸 조용한 화음으로
한 소년의 새벽을 깨우다가
훌쩍 자라버린 개울에서
제법 자신의 말로 이야기를 전한다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새소리를 기억하고
계곡의 청순함도 한 자락 선율
아직 냇가를 지나 강에 도달하기엔
많은 말과 노래가 필요하다
어느 날 봇도랑 지나 도착한 강물엔
갈대숲 속에서 물새떼가 담론하는
별천지의 언어가 들린다
아, 저 멀리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의 절규와
문득 지나가는 뱃고동은
유속(流速)을 잊은 채
한생을 달려온 우리들의 애환이다
물 詩 . 18
--물의 경제학
시간과 공간의 분별없이도
산간(山間) 계곡 숲 그림자 곁에서
한 송이 참나리꽃을 피운다
시간을 잊어버린 피라미
공간을 탓하지 않는 도룡용
참으로 한가로운 유영(遊泳)을 한다
가끔 산꿩이 푸드덕거리고
바람소리 어디론가 지나가지만
아직 강물이 되기까지는 적요(寂寥)하다
원대한 꿈을 위해 곧 떠나야 하지만
허탈로 가슴 쓰다듬는 증발(蒸發)도
감내하는 미덕이 있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을 분별해도
청정수와 오수가 무분별로 합류하는
지구상의 물 경제학은 위태롭다.
물 詩 . 19
-- 老子의 물
침묵의 향연(饗宴)이다
비록 험준한 세파에 부대끼면서도
맑게 하나로 버티디가
아래로만 내려가는 나는
다시 위를 쳐다보곤 한다
--쳐다보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라
겸손의 원행(遠行)이다
내가 염원하는 것은 대양(大洋)을 향해
류속(流速)만 조정하는 게 아니라
갈증난 만유(萬有)를 찾아가는 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흘러라. 적셔라
그러나 바람으로 울지는 말라.
물 詩 . 20
-- 다시 老子의 물
물이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은 물보다 못한가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헐벗은 자에게도
가장 더러운 곳에서도
가장 비굴한 처신에도
생명의 신비를 함께 하는 물
물을 깨우친 사람이 물을 따라 간다
이 지상 닿는 어느 곳에서나
분명히 물보다 사람은 어리석다.
--아아, 물이여, 老子여
여과(濾過)할 수 없는 노래여.
(2007. 11. 심상사화집)
물 詩 . 21-공자의 물
종이배를 띄운다나침판도 없이 그냥 떠가면 된다그것이 정도(正道)이며그 길이 내가 떠도는 순한 눈빛이었다물살이 순조롭지 않다요즘 세간살이는 바람을 탄다순탄하지 않는 종이배의 항해는설령 그것이 나에게 던져진 운명일지라도순종을 강요하고 있다어느덧 산그림자 길게 늘어진 황혼녘 찢어진 종이배와 물살이 멈추었다수백 년 전 노친네 헛기침이 들리고 추스리지 못한 영육은문득 바람 한 줄기 붙잡아 초서체(草書體) 붓글씨를 쓰고 있다.(2007. 12 숲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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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22-어머니의 물
늦은 밤 별빛으로 부르던 자장가젖꼭지를 문 채 잠든 새 생명포근함과 매서움이 함께 고인영원의 영천(靈泉)이었다아마 내가 중년을 넘고서야 보았던, 이미 말라버린 젖샘 갈래갈래 제 갈 길을 가듯이모두들 그의 품안을 떠나고양지바른 고향 뒷산에 잠들어육탈된 그의 물길은 멈춘 지 오래다 하지만, 그 물줄기는 지금도 내 온몸에 질펀히 흐르고 있음에야.-------------
물 詩 . 23-바슐라르의 물물이 꿈을 꾸고 있었다봄물 호수에는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별들이찰랑찰랑 춤춘다잠자는 물은 언제나 평화롭다그의 생애에 악몽은 없었을까가을 물새 한 마리 한가롭다 하늘도 파아랗다그는 물에서 세상을 읽었다여름 난폭한 물은 우주를 뒤흔들고사람을 재앙으로 파묻는다세상은 언제나 위험하다다시 얼어붙은 얼음장 밑으로어렵게 물길을 트며그에게 점지된 운명을 헤쳐 떠난다절망과 희망을 바다에서 모두 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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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24
-성철 스님의 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먼 산에서 범종소리 들리고
내 가슴에선 죽비소리 울린다
산을 내려갈수록 하루 종일
법고소리, 운판소리, 목어소리
귓전에 아물거리지만
내 온몸 깊게 흐르는
물소리마저 듣지 못한다
다시 산중에서 울리는 범종소리
내 가슴으로 거두지 못하고
속세에 떠도는 나의 영혼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로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사홍서원(四弘誓願)의 원력(願力)
아직도 산과 물을 배회하고 있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로다.
(2008. 여름호 ‘참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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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25
--아버지의 물
일제시대 현해탄을 건넜던 육신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전에
할아버지의 물과 합류했다
만신창이(滿身瘡痍)를 휑구어
논펄에 버려진 역사를
떨리는 몸짓으로 바느질하면서
잘못 만난 시간을 둘러메고
속쓰림만 키웠던가
백약(百藥)이 효험을 잃었을 즈음
그에게는 한 모금 물이 필요했다
경북 영천 어느 산골 유황천(硫黃泉)
황수(黃水) 한 사발 마시고
할아버지 곁은 먼저 떠나갔다
애비보다 먼저 간 불효보다
남걎;ls 주름살
떠도는 한숨은
모두 어머니의 눈물이 되었다.
물 詩 . 26
--형의 눈물
형은 먼 길을 떠났다
가는 날 비가 쏟아졌다
형의 눈물이었다
고향 앞산에 유택(幽宅)을 지었다
--나는 죽어도 묻힐 땅 한 평 없다
더욱 서러워 눈물을 장맛비로 쏟았다
일제시대 현해탄을 돌아와서
아버지 고향에 정착했으나
역시 눈물의 세월만 흘려보냈다
농사를 짓고 호구(糊口)를 세웠지만
운명의 강물은 비켜가고
일찍이 침투한 병마(病魔)로
한많은 시대를 살다간
영혼의 파편은 어느 산천을 헤매면서
오늘도 비로 내리고 있는가
--죽어서도 삭히지 못한 한우(寒雨)였다.
물 詩 . 27
--왕방연의 물
청령포 소나무 숲속에서
그가 전해준 사약을 마시고
쓰러졌을 노산군의 얼굴이
서강 푸른 물 위에 떠 있었다
--천만리 마나먼 길에 고온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티업서 냇가에 안쟈시니
뎌 물도 내안곳도다 우러 밤길 예놋다
그의 운명도 참으로 얄궂다
의금부도사로서의 직무 수행이
이처럼 괴로울 줄이야
아, 함께 독배(毒杯)를 들지 못한 눈물
강가에 앉아
내장 훑어내는 한숨만
눈물로 강물에 띄운다
--지금도 그 강가에 시비(詩碑)로 서서
단종 임금의 한을 함께 달래고 있었다.
물 詩 . 28
--역류(逆流)에 대하여
아버지가 꽃상여를 타고 천국행을 했다
아버지는 병석에서 불효라고 했다
꼭 보름 후
할아버지가 화려한 꽃상여도 떠났다
모두들 호상(好喪)이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장손이 병원에서 숨졌다
문상객들이 불효라고 수군댔다
아직도 그의 아버지는 아들 사망도 모른 채
노인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 중이다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는
아 시대의 슬픔들, 아아
늙은 상도꾼들 구성진 가락
이 험난한 세상에는
물이 거꾸로 흐르는 일도 많다고 했다.
물 詩 . 29
--징검다리
앞개울 건너 할머니, 증조할머니가
희미하게 서성거리고
어머니가 애타게 서 있다
모두들 내가 무사히 건너오기를
손짓하고 있다
징검돌 하나씩 건널 때마다
가슴 조이는가보다
갑자기 물살이 거치어 진다
급류(急流)가 닥치기 전에
대지에 널린 환한 꽃들을 만나야 한다
문득 어지러운 나의 몸짓
어제나 내 손을 잡아주던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먼저 건너간 사람들은
포근한 꽃향기와 어울리다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폴딱, 폴딱 뛰어 피안(彼岸)에 이르는 길
이미 물에 잠겨버린 징검돌
애당초 앞개울은 건너기 힘든 삶의 큰 강이었다.
물 詩 . 30
-木月의 바다
넓게 깊게
그리고 푸르게
상상의 물결은 은빛으로
우주 공간을 유영한다
술익는 향기가 은하계에 스며들고
청노루의 냉냉한 울음소리
인간들의 향수를 잡매지만
어느새 울컥울컥 눈물이 맺힌다
원효로 첫 골목길 시의 바다에서
유익순 사모님을 찾는 행인이
윤사월 ‘눈먼 처녀’로 노래하면
불현듯 성큼성큼 지나가는 그림자 하나
--박목월 시인.
물 詩 . 31
--가족의 물
어머니는 밤 늦도록
사립문을 닫지 않았다
이 세상 떠난 아버지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 열어두고 대청마루 끝에 앉아
밤하늘 저 별들을 세고 있었다
나도 형도 잠이 들지 못했다
사랑방에서 멈춰버린 장죽 터는 소리
아 어머니의 기다림은
사립문 밖에서 어른거리고
밤 이슥하도록 우리들은 초롱한 눈빛으로
핏줄의 아픔을 참고 있었다
서울의 밤에도 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아들 딸
그 기다림은 어머니의 물로 흘러
홀연히 문 밖에서 서성이던
별빛의 행방을 걱정하고 있었다.
물 詩 . 32
--마중물
그대 그리워 하매
암흑 골방에서 눈물로
긴 시간 기다리지 못했다
무시(無時)로 온다든 그 약속
오늘은 이렇게도 더딘가
어느 때쯤 그대 방문 기별 들려
맨발로 나가 얼른 대문 열고
그대 반가이 맞을 준비 해야겠다
그대 따수운 한 모금 감로수
내 지친 목구멍으로 부어 주겠니
기다림과 그리움이
아 함께 몰려오는 별천지에서
대문 바깥에서 너를 부르고
안채에서 너는 외출할 채비를 마쳤노니
그 광활한 세상으로 너를 불러
내 생명의 질긴 인연을 이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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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33-합천호반에서고요하다달빛 받아 깊은 잠에 빠졌나댐 상류(上流)에는 떠날 수 없는 물고기 몇 마리아직도 수런거린다수몰(水沒)된 집들이달빛의 안부를 물었다잠시 물거품이 솟고수면(水面)에 일렁이는 달빛 떠난 자들의 침묵은 하얗다
물 詩 . 34
- 다시 황강에 와서
댐을 막아 사는 일들이 편리해졌다만,
동네 꼬맹이들과 함께 헤엄치던
모래밭엔 무성한 갈대로 뒤덮혔다
은모래 보이지 않고
은어떼는 왔다가 갔는지
한 나그네가 떠듬거린다
아직도 흐르지 못한 그리움 한 자락
강물 속에 빙빙 돌고 있는데
거기에 얼비친 고향 이미지
다시 황강에 와서
너의 품에 안기노니
맑은 시혼(詩魂)은 예대로 남았느니.
이젠 반백(半白)의 회상이
흘러흘러 아득히 꿈길로
함벽루 물길에서 영혼을 만나고 있다.
물 詩 . 35
--천지(天池)에서
태초에 물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구름이 온몸을 감싼 채
바람소리인지 아니 흐느낌인지
하늘로만 피워 올리는 선녀들의 노래
반동강 난 호수에는 물결이 심상찮다
햇살 가려진 백두산 정상에서
문득 들리는 통일의 함성
누가 이 분단의 통한을 허물 것인가
누가 이 역사를 바로 세울 것인가
기다림 끝에 햇살이 열렸다
태초의 웅녀(熊女)가 소복 차림으로
물위를 사뿐히 걸어오고 있다
--朝中境界線
표지 빗돌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물 詩 . 36
-의상대(義湘臺)에서
저 멀리 동해 심해선(深海線)에서 바람 불어와
참선중인 의상대사의 눈시울을 적신다
절벽 아래 잔잔한 파도는 의미 있는 절규를
나의 가슴에 관류(灌流)시키고
주위의 소나무는 그을린 채
그날의 아픔을 풀어 놓는다
물이 필요했다 부처님이시여
낙산사 절채가 모두 화염에 휩싸였는데도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지척에는 바닷물이 출렁여도
번진 산불에 의상대사는 눈물만 흘렸을까
원통보전 앞 연지(蓮池)에도 물은 있었다
종루가 불타 범종은 녹아 흔적 없는
아수라(阿修羅)의 해변 언덕에서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아파도 아프지 않는 미소로
중생들이 지은 죄업을 물로 씻으소서
오늘도 의상대에서 대사는 의연히
동해 먼 해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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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37
-청령포에서
노산대(魯山臺)에 올라
북쪽 찌푸린 하늘을 본다
육육봉(六六峰) 아래 물 맑게 굽이치는데
비극의 바람 줄기 한으로 울어 댄다
관음송 적시는 비가 내렸다
독배(毒杯)에 얼비친 단종의 어린 눈물
육백년 시간을 외면한 채
북향(北向)으로 뿌리고 있다
사공이여, 어서 노를 저어라
영원히 잠들지 못한 그의 영혼이
울창한 솔숲에서, 더러는 서강에서
아아, 아직도 떠돌고 있나니
다시 북녘을 바라보며
망향탑에 가지런히 돌 하나 얹는다
역사의 회한(悔恨)을 침묵하는
저 소나무들 그리고 저 푸른 강물.
물 詩 . 38
-- 두만강에서
강 건너
한반도 최북단 남양(南陽) 땅
민둥산 아래 듬성듬성 나무 몇 그루
중국 도문(圖們)에서 건너다보는
우리 표정들을 살피고 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은
이미 보이지 않은 지 오래고
그 노래 한 자락 풀어 흐르는 물살이
문득 달려온 바람 앞에 검게 엎드린다
강가에서 멈춰버린 시간은
한 무더기 풀꽃들을 흔들고
먼 하늘 바라보는 나의 영혼마저 떨리는데
아아, 핏빛 얼룩진 역사의 파편이었나
지금도 풀지 못한 매듭의 한(恨)이었나
어쩌면
내 생전에 부를 수 없는 통일의 노래
이제사 허기진 언어로 흘러 보내노니
방향 잃은 시간 속 햇살 한 줌
유령처럼 물가에 걸어두고
그냥 돌아 왔느니.
물 詩 . 39
--겨울 홍제천
겨울 산책길은 항상 고독해야 했다
한 마디 말없이 흐르기만 하는 시간과
퇴색한 눈짓으로 흔들리기만 하는 갈대와
가끔 젖은 깃을 말리는 청둥오리 한 쌍
겨울 홍제천엔 하얀 응시만 쌓였다
그래, 알겠구먼
마른 갈대잎이 저들의 언어로 웅성이고
얼어붙은 개천길에 나뒹구는 삶의 파편들
연희동, 남가좌동, 홍은동, 홍제동
동서로 연결하는 찌든 정감의 바람줄기
해거름 우수의 여린 햇살이여
얼음장 밑에서 얼비친 푸른 물빛이여
그래, 알 수 없는 빈 가슴 하나
헉헉, 이 겨울 노을 속을 뛰고 있다.
물 詩 . 40
--홍제천 산책
홍제천 산책길은 언제나 붐빈다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
건강에 관심이 높아졌나
자전거를 타거나
양깐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사천교에서 연가교 홍남교 홍제교 지나
폭포마당에 도착하면
산정에서 쏟아지는 폭포수 아래
활시찬 분수가 장관인데
세월의 물레방아 저 혼자 돌고 있다
팔뚝만한 잉어떼와
정갈하게 빗어넘긴 청둥오리떼
잠시 발걸음 멈추게 하지만
황포돗배 사공은 어딜 갔나
우거진 갈대 곁에서
바람만 한가롭게 머물다가 떠난다
오수와 폐수가 말끔히 정비된
북악에서 한강까지
틈만 나면 홍제천을 걷는다.
물 詩 . 41
--청계천의 달
서울이 깊은 숨을 쉰다
물이 생명이 듯
도심을 맑게 적시는 사랑의 물소리
모전교에서 고산자교까지
각시붕어 민물검정망둥이를 안고
달빛 속에 유유하다
하루를 끝낸 발걸음들이
서로를 위안하듯
손잡은 밀어들로 촉촉한데
비오리 한 쌍
달빛 흠뻑 머금은 채
깊은 휘파람 한 자락
사랑의 노래로
서울을 호흡한다.
물 詩 . 42
--한강 선유도에서
살다가 더러는
신선들 춤추는 모습을
깜박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신선이 노닐다가 비상한 그 자리
우아한 그림자만 남았는가
고운 자태 살포시 흔들리며
사라지는 물새를 닮았는가
황혼녘 공원 벤치에는
연인들의 밀어가 신산을 불러오고
강물은 다시 사랑을 부른다
살다가 어떤 때는
춤추는 신선들을 그리워하며
그를 닮고 싶어 한다
어디론가 신선도 사라지고
연인들도 떠나버린 숲에서
바람 한 줄기 떠도는 선율이여
온몸을 물안개로 감싼다
살다가 보면.
물 詩 . 43
-박연폭포에 와서
분단 몇 년 만에 나선 개성 여행길
우리 공장 들어와서 북한 동포 도움 주고
이젠 통일로 가는 길이 빠르겠구나
민둥산을 돌아돌아
마주한 박연폭포
송도(松都)삼절(三絶)은 어디 갔나
몇 백년을 한으로 펑펑 쏟은 눈물
그 흐르는 화음은 예대로인 채
불변의 강산에 전설로 남아있다
황진이 누님이여,
서화담 선생을 모셔와 그날의 흥취를
노래하소서. 사랑을 나누소서.
폭포여,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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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44
- 선죽교에 와서
이방원의 철퇴소리와 포은 선생의 비명이 아직도 들린다. 검붉은 혈흔(血痕)이 길손을 붙들고 한이 맺힌 충절의 노래 ‘단심가(丹心歌)’를 들려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황해북도 개성시 선죽동-한석봉의 글씨로 새긴 빗돌 ‘善竹橋’-어머니의 말씀대로 까마귀 싸우는 골에는 백로가 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또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리’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도 아예 듣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아아, 이젠 전설로, 역사로 남았으나 분단선 저 너머로 다시 찾아갈 수 없는 슬픔만 풀풀 날리는데.
물 詩 . 45
- 백담계곡에서
여름 백담계곡은 서늘하다
백옥(白玉) 비단결 출렁이며
자비(慈悲)의 독경을 들려준다
선녀들이 풍진(風塵)을 씻어내고
신비한 신선의 세계로 비상한
백담(百潭)의 전설은
마알간 표정으로 속세까지 흐르고 있나니
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여
찌든 영육(靈肉)이 참회하오니
백옥의 물길로 인도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 대선사의 침묵이
이 세상 광명으로 불성이 밝으면
선녀들의 웅비를 따라
청정(淸淨) 영혼이 안식하고 있으리
물 詩 . 46
- 금강산 가는 뱃길
동해항에서 부웅 뱃고동이 울린다
참으로 기적처럼 열린 금강산 뱃길
민족 분단선을 넘어 북쪽으로 간다
어둠에 휩싸인 동해의 물결
저 멀리 집어등이 가끔 반짝이는데
문득 유성(流星) 한 무리가
갑판 위를 날은다
생전에 갈 수 없었던 금강산
그러나 쏟아지는 별빛 위로
북쪽 동포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동족상쟁의 비극을 치유하는
남북 왕래는 이루어져야 하리
밤새도록 달려온 장전항
설레이던 심정 가라앉히고
새벽 금강산 절경에 혼을 잃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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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47
-금강산 구룡연에서
관폭정에 올라서면
구룡폭포,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장관이 펼쳐진다
우레 소리 천지를 진동하며
쏟아지는 물보라
장중한 유곡(幽谷)의 대연주
백옥(白玉) 구룡연에서
속진(俗塵)을 닦아내고
정갈한 몸으로 하늘과 교감하는가
구슬알들이 한없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비단폭
오늘도 회개하지 못한 인간들은
이곳에서 깊게 속죄하노니
펑펑 분노의 함성으로 참회하노니
아아, 이곳을 품은 금강산이여
어서 통일을 이루면 어떠하리.
물 詩 . 48
- 어라연(魚羅淵) 지나며
오래전 젊은 혈기의 한 무리가
동강 문산나루에서 레프팅을 출발했다
‘고기가 비단결 같이 떠오른 연못’
절경이다. 천길 단애(斷崖)의 절벽 아래
청정수(淸淨水)에 비친 신비감
옛 신선이 놀던 곳 삼선암에서
저기 옥순봉에 안긴 괴암괴석 쳐다보면
물에 잠긴 너럭바위가
물살에 밀려가는 보우트를 잡았다
어름치, 수달이 1급수에 몸 담그고
천태만상의 바위 사이로
곡예하는 황조롱이가 장관이었다
영월읍 거운리 거운교까지
레프팅 행락은 끝나고
동강 비경에 낛을 잃었다
굽이굽이 지나온 강줄기
어라연은 전설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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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49
--두물머리
물의 만남은 깊이를 더한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서로 합쳐
서울을 지나 서해로 나아간다
<두물머리 새벽하늘에 신비롭게
피어오른 물안개를 보셨는지요>
아직 보지 못했으나
무엇인가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문구
그래, 두 갈래 물이 합쳐지는 곳에는
연인들의 천국인가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검용소에서 발원한
남한강 대망의 위용이
북한땅 금강군 옥밭봉에서 몸을 풍
불한강 그 그리움의 몸짓이
이제 하나로 안고 사랑의 길 떠난다
--사랑하는 남녀의 포옹이 길다.
물 詩 . 50
-월아천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실크로드를 만난다
명사산(鳴砂山)에서
모래알들 울음을 듣고
초승달 모양 오아시스로 간다
거대한 사막 한가운데서
인간들 생명을 위해
천년 세월의 생명수여,
오늘도 낙타 한 무리는
관광객을 태우고
모래가 들려주는
현악기의 선율 속으로
바람이 수를 놓는다
황막한 사막에서도
인간은 살아남도록
누군가의 지혜가 고여 있다
실크로드에서 펼쳐졌던 그날의 영화
승려와 상인 모두들
훈훈한 정감의 궤적(軌跡)으로 흘러
마를 수 없는 무지개로 떠 있다.
*돈황에 있는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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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51
-바이칼호(湖)에서
울란바트로를 날아
이르크추크 앙가라 강물 따라
자작나무 숲 헤치면서
거대한 너를 만나러 갔다
시베리아의 진주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호(淡水湖)
바다냐, 호수냐
너는 태초 신비의 전설을 감추고
투명한 내장으로 바람을 유인하지만
넓고 깊은 속마음은 일러주지 않는다
출렁여라, 파도처럼
남쪽 이방인의 영혼을 흔들어라
시린 물속에 발을 담그고
바람이 전해주는 밀어를 음미하라
물보라가 세차다
유람선이 고동소리 울리며
시베리아의 사랑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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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52
- 갠지스 강에서
인도의 어머니
성스러운 갠지스 강
그를 보기 위해 새벽잠까지 설쳤다
복잡한 바라나시 거리를 지나
강물에 몸을 담궈 주술을 외우면서
죄를 씻는 무리들이 벌써 만원이다
강가에서는 힌두인의 마지막 장례
연기가 하늘로 솟는다
육신은 불사르고 영혼은 승천한다
강물에 뿌려진 타고 남은 재
더러는 시신도 함께 떠다니고 있었다
그 성스러운 강물이 더럽고 오염된 채
새 생명의 환생을 염원하는 종교의식
하수구로 변한 성스러움 앞에서
시바 신의 요염한 초상화가
갠지스의 일출을 맞고 있었다.
물 詩 . 53
- 로키 루이스 호수
캐나다 로키에서 루이스 호수
두 번의 인연과 함께
청옥(靑玉)의 장엄한 자태에 머문다
빅토리아 빙하의 녹은 물이
세계 10대 절경(絶景)으로
우리들 심중을 흔들고 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딸
루이스 캐롤라인 앨버타 공주의
이름으로 명명된 호수
저기 보이는 만년설의 위용도
호수에 비춰 그림 한 폭으로 반짝인다
여왕이여, 공주여
그날의 영광이 지금까지
영혼들을 흡인(吸引)하고 있나니
청정한 객심(客心)이
둥실둥실 햇살 속으로 떠간다
샤토레이크 루이스에서
휴식을 취하는 세계의 관광객들
로키의 향훈을 흠뻑 담는다.
물 詩 . 54
- 나이아가라 폭포
캐나다 몬트리올 쪽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아 갔다
우선 파란색 우비를 착용하고
유람선 ‘안개속의 숙녀호'를 탔다
갑판 위에서 물보라에 흠뻑 젖으며
폭포 아래 가장 가까이 다가가면
우람한 모습에 매료된다
캐나다 원주민이 ‘니아가드’라 부르면서
‘천둥소리를 내는 물’이 되었다
높이 54m, 폭 670m-
12,000만년 전 빙하기에 형성되었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나이아가라 강을 빠져 나왔다
미국과 캐나다가 강 중심에
국경을 그어놓고 관광객을 맞고 있다
폭포 위 거대한 이리 호에서 온타리오 호로
흘러가는 물의 향연
지금도 장엄한 위용(威容)에 주눅이 든다
이 지구상에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많다.
물 詩 . 56
--하롱베이 풍광(風光)
베트남 북부 통킹만 북서부
국립공원 하롱베이는
3천 여개의 미려(美麗)한 섬들이
장관으로 함성을 자아낸다
용이 바다로 내려와
외세의 침략서 하룡(下龍)-
한 무리의 용들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인민들은 구하기 위해서
내뱉은 보석들이 섬이 되었다는 전설
명작 조각품을 감상한다
북적이는 각국의 관광객들
조용한 물결 위 유람선을 타고
주변 풍광을 가슴에 담는다
하노이로 돌아가야 하는 시각
조각배들 선상에서 삶이 이어지고
저녁 해는 이국 나그네의 심혼(心魂)을
그들과 함께 저물어가고 있다.
물시 . 57
--야성의 바다
잔잔한 척 하지만
공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갈매기 끼륵끼륵 음률(音律)로
사위(四圍)를 유혹하지만
파도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모래톱에 무너진 사랑이 이미지
아, 떠나가서 침잠(沈潛)하는
어떤 화자의 목쉰 아우성
다시 그는 잔잔한 척
사랑의 메아리로 출렁이지만
숨겨진 칼날이 언제 재현될지 모르겠다
파도여, 갈매기여
검푸른 사랑의 언어여.
물 詩 . 58
--장마철
잠깐 비친 햇볕에 젖은 옷을 말렸다
언제나 눅눅한 방안에서
세찬 빗줄기 창문을 두드리면
대지가 울고 있는 어느 공간
온 세상이 잠긴지 오래지만
계속해서 수문(水門)을 열어야 했다
폭우를 피해 우산도 없는 몸뚱아리
젖은 허물 씻어내는가
역류하는 하수구에서
건져 올린 우수(憂愁) 한 묶음
눈물과 빗물이 세차게 섞여지는
이맘때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여름이여, 난폭해진 빗줄기여
하늘이여, 잔뜩 찌푸린 인상이여
우기(雨期)의 새 한 마리
내장까지 젖어버린 몰골에서
아, 어눌한 영혼들의 함성이여
이제 수문은 닿아도 되겠나.
물 詩 . 59
-결빙기
엄동설한에
매화꽃이 피었다고
사람들은 웅성인다
햇살 기울 무렵
동파(凍破)된 수도꼭지 주변에서
매화나무도 얼고
나도
하얗게 얼어 있었다.
물 詩 . 60
--검은 바다
서해 학암포구에서
그는 숨조차 쉴 수 없었네
솨아솨아 귓전을 스치는
유수의 화음만 밀려오고 있었네
누군가 까맣게 뿌린 재앙
그의 옴몸에 스민 채
겨울바다는 얼어 있었네
그 푸르던 웃음 속 해초들
아니 그 품속에서 노래하던 바닷고기들
막숨 몰아쉬며 멀리 떠나버렸네
지금 불어오는 해풍에 그을린
어민들 풀죽은 얼굴들이
푸석푸석 모래톱에서 부서지고 있네
포구에 묶여있는 검은 어선 두어 척
여전히 기도만 하고 있었네.
물 詩 . 61
--신(新) 요산요수(樂山樂水)
1.
평일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산은 지금 중병(重病)으로 누워 있었다
2.
물가에도 만원이었다
오염된 사람들의 언어를 휑구고 있었다
3.
인자(仁者)도 지자(知者)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오류(誤謬)의 메아리만 산천(山川)을 떠다녔다.
물 시 . 62
-물소리
언젠가 들은 듯 귀에 익었다
산촌의 밤을 몰래 흔들면서
길게 전율하는 신음이었다가
불면의 첫사랑이 꿈으로 보내 온
유혹이듯 설레임이었다
그것은 어느 소년의 노래였다
실버들 낭창낭창 춤추게 하고
이따금씩 산새들 합주가 시작되면
가녀린 사랑의 선율로 들린다
밤마다 깨운 적막은 켜켜이 쌓여
아직도 풀지 못한 그리움 한 자락
멀리서 전해주는 귀에 익은 목소리
그것은 차라리 동심을 풀어
흘려보내는순하디 순한 흐느낌이었다
어디에선가 낯이 익은 듯
빛바랜 시간의 여백에서
온몸 적신 채 투명한 연가가 들린다.
물 詩 . 63
--저수지
굵은 빗방울에 몸을 뒤틀며
퍼져나간 원형(圓形)의 작은 소망
두 근처를 지금도 배회한다
아직 세상 밖으로 나갈 때가 안닌가 보다
득 너머 논펄의 갈증보다
먼 바다를 그리는 무언의 저항
피라미 몇 마리 빙빙 돌고 있다
지금 세상 밖에서는 천둥 번개가 멈추지 않았나보다.
물 詩 . 64
--물길
어제까지 내가
길을 물어물어 예까지 찾아왔는데
이제 조금 세월에 익숙해졌다고
내게 길을 묻는 사람도 있다
--그냥 저냥 흘러왔지요
어디까지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갈 길을 흘러가고 있는데
아직도 뚫리지 않는 길이 있다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지요
빠르지 않게, 느리지도 않게
아래로만, 낮은 고승로만 곧장 가야하는데
살아가는 일에 제법 능숙하다고
과속으로 추월하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앞을 똑바로 보고 가야지요.
물 詩 . 65
--수초에서
잠시 순수가 머물던 수면에서
청남빛 하늘 응시하던
이 세상은 참 밝게 빛난다
흐르는 시간의 무게만큼
모두가 떠나가고
다시 또 오지만
남아 있는 연약한 생명들이
이 세상 밝게 살기 위한
순정의 명상에 잠긴다
물풀 곁에서 잠시 몸을 숨겼던
피라미들의 목쉰 절규를
지우고 먼 하늘 쪽으로
아니 먼 바다 쪽으로
행로를 수정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 세상의 그리움을
풀잎 여린 일렁임으로 쌓아간다.
물 詩 . 66
-- 파도
절벽에 온몸 부딪혀
부서지는 하얀 파편
그러나
도저히 삭일 수 없는 절규
처절한 분노의 발성법
아아, 다시
우련하게 사라져가는 흔적
잔잔한 바람으로 잠드는 독백.
물 詩 . 67
-호수의 언어
적요(寂寥) 온몸으로 껴안고
누워 하늘만 쳐다본다
가끔 산들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리지만
안온한 햇살에 감싸인 채
미동(微動)도 없는 그대여
그 영롱한 눈빛은
참회의 언어인가
조잘조잘 연인 한 쌍 지나다가
물수제비를 뜬다
사랑의 온기가 모락모락
물안개로 피워 오른다.
(2013. 9. 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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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68
-늪의 언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들판에 버려져서도
나는 미물들 생명을 껴안은 채
막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개구리밥풀이 나의 전신을 감싸고
햇살 한 줌 쬐이지 못했어도
나의 품에는 피라미 미꾸라지 붕어 메기....
사랑하는 생명들 모여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아, 그러나 나의 이 좁은 세상은
강물로 흘러흘러
언제쯤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사는 일들이 원대한 꿈으로 퍼져 나갈
기다림으로 묵언(黙言)이다
부평초(浮萍草), 그것이 나의 외형이라면
수초에서 자라는 물풀을 보았는가
아무도 듣지 않는 변방의 언어.
물 詩 . 69
-해안선
무시로 출렁이며 얼굴 쓰다듬는
모래톱은 바다의 합창으로
울적한 표정을 정리한다
빙빙 돌아온 한 떼의 물새들
다시 먼 바다로 떠나는데
해식(海蝕)된 모래의 낟알들
수륙 양용의 갈래에서
파도에 밀려 흔적을 지울 것이냐
뭍으로 올라 햇살에 말릴 것이냐
길게 휘돌아 어지러운 차안(此岸)
아아, 피안(彼岸)의 길은
아직도 멀리 있나보다
지치지도 못하는 물의 선율
몸 담그고 그 경지를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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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70
-마중물
그대 그리워 하매
암흑 골방에서 눈물로
긴 시간 기다리지 못했다
무시(無時)로 온다든
그 약속, 오늘은 이렇게도 더딘가
어느 때쯤 그대 방문 기별 들려
맨발로 나가 얼른 대문 열고
그대 반겨이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그대 따수운 한 모금의 감로수
내 지친 목구멍으로 부어 주겠니
기다림과 그리움이
아아, 함께 몰려오는 별천지에서
대문 밖에서 너를 부르고
안채에서 너는 외출할 채비를 마쳤노니
그 광활한 세상으로 너를 불러
내 생명의 질긴 인연을 이어리라.
(2013. 9. 한국시)
물 詩 . 71
- 약수터에서
새벽 등산길에 만나
시원한 감로수 한 바가지로
목덜미 땀을 씻어냈다
더러는 아침마다
물통을 들고 줄 서서
약숫물과 건강 상담을 했다
--오염 되었어. 마시지 마.
측정한 오염도 표시
이상기온에 산성비가 내리고
지구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등산로에 콸콸 솟던 생명수
옛 노래 한 소절로 바람만 지나가고
상큼하던 새벽 젖은 그림자들이
오염된 육신을 말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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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72
-옹달샘
깊은 산골 홀로
태초의 생명 탄생으로
이 세상을 숨 쉬노니
암흑에서 예상했던
청산(靑山) 그림자
바람 속 정경으로
구름 한 점 베고 누었다
나의 미세(微細)한 정한(情恨)은
천대(千代)를 흘러흘러
대망(大望)의 천지를 노니노니
운명인지, 온몸으로
불결(不潔)함을 씻으면서
계곡 지나 또 다른 세계를
정복해야 하리
드디어 청산 우러러 여망했던
한(限)의 웅덩이 벗어나
개천을 지나고 강을 지나
바다로 향하고 있는가
한 생명이 모질게도
태초의 모습으로 남아
대지를 적시고 대양(大洋)을 맞는다
--
물 詩 . 73
-수로에서
밤새도록 불면으로 물길을 틔운다
동행해야 할 실재들을 데불고
먼 여로를 예비한다
더러는 흙 속에 스미고
더러는 허공으로 날리고
살아남은 자들만 이 길을 가리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불면의 여로
대양의 장대한 축복을 맞기까지는
그 물길에서 만나는 무수한 사물들
그들의 눈물을 마셔야 하리라
밤마다 틔운 물길에는
더불어 살아가야 할 햇살과 바람이
춤추고 노래하지만
마냥 그 길로만 흘러 환상만 커지는
미물들의 아우성
칠색 무지개를 그리며
아직도 불면에 몸부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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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74
-해자(垓字)
고성(古城)에는 어디에서나
성을 감싸는 외호(外濠)가 있다
성벽은 높고 성문은 굳게 잠겼지만
물 찰랑찰랑 넘치는 물굽이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나의 성(城), 나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지혜로 흐르게 한 물길이
지금도 그 성을 사수(死守)하고 있는가
저기 망루에서 감시하는 병사가
성 밖에서 와와 들리는 민초들의
함성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다
우리는 외침(外侵)이 아니야
성 밖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지혜의 북소리 둥둥둥
깊은 물길 건너 공존하는 거야
성곽 높이 화해의 깃발 펄럭이고
성문은 활짝 열려
높낮이 없는 평화의 선율이 들리는 오늘.
물 詩 . 75
- 물레방아
수로를 따라 도착한 물의 위력은
대형 물레를 돌리면서
나의 임무수행이 시작되었다
한 입 가득 희망을 품었다가
푸우- 토해내는 기원의 여력이
다시 물레를 돌리면서
새로운 상상력을 재생시켰다
나의 막중한 힘으로
벼를 빻거나
전기도 생산하는 환희도 넘쳤다
--함양 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도는데
우리 집 낭군님은
나를 안고 돈다
나의 낭만은 이제 퇴색되어
물소리 물레소리 멈춰지고
일흔의 시간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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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76
-물수제비 뜨기
둥글고 얇은 돌멩이
담방담방 물에 띄우면
동그란 물수제비가 된다
어릴 적 물가에서
동심을 그리던 그리움
돌팔매질로 담방담방
동그라미 추억이 그려진다
누가 길게 멀리 많이 뜨나
서로의 꿈을 던져 가늠하던
소년들의 소망은
아직도 물 위에서
긴 잠만 가고 있는가
강가에서 다시
긴 수제비를 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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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77
-샘물
마을 앞 산 밑에서 콸콸 솟는
새벽 샘물가 물깃는 아낙들
동네 길흉 소식 전해 진다
웃마을 삼동댁은 손자를 보고
아랫마을 단성댁 아들이 아프고
우리 동네 애환이 샘물로 솟는 곳
물 한 동이 이고 돌아서면
희움하지만 싱그러운 아침
산촌(山村)의 하루가 시작된다
우리 아버지와 형님들
염천(炎天)에 보리타작하다 목마르면
큰 주전자에 가득 길어온 샘물로
차갑게 목축이는 활력수(活力水)
아, 지금은 그 샘물이 말라버렸다
지하수의 고갈인가
아침마다 이고 가는 물동이 새악시도
보이지 않는 샘물가
세월이 남기고 간 바람만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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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78
-어심수심(魚心 水心)
너는 내가 오래 머물었으면 좋겠지
나도 네 품에서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
미끼 하나로 천국과 지옥이 뒤바뀐다
너의 맑고 깊은 속내에 반해버린
내 삶의 터전이 왜 이리 위태롭기만 한가
바깥 세상이 그립다고 떠나지 마라
너와 나는 영원한 공존(共存)을 염원한다
날마다 낚싯바늘이 드리워지고
촘촘한 그물이 깔려 위협하지만
자유롭게 유영(遊泳)할 수 있는 별천지
더러는 통통배가 지나면서 던져지는
죽음의 위험신호는
날마다 불안에 떠는 약자의 삶인가
오늘도 네가 펼치는 생명의 환호에
현재의 삶을 만끽(滿喫)하는 우리들
수면(水面)에서 반짝이는 저 햇살만큼
멀리 혹은 깊이 살고픈 욕망.
물 詩 . 79
-어선
풍어제를 올린다
평생 몸 바쳐 이룩한
어부의 환희를 맛본다
통통배 한 척에 몸을 싣는다
어군(魚群) 탐지기의 안내로
그물을 내린다
만선(滿船)을 꿈꾼다
거센 물결 헤치고
그물을 거둔다
만선의 깃발을 올린다
뱃노래 흥얼거리며
뱃고동을 길게 울린다
때마침 마파람이 불어온다
오늘도 선장의 시야에는
한가롭지 못한 갈매기들
생존의 아우성이 펼쳐진다
귀항(歸港)하는 뱃길에는
간간히 파도가 거세지지만
만선의 풍요로움이
가족들 얼굴들 속에 투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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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80
-해변시인학교
여름날 시의 축제가 열린다
뙤약볕에 줄지어선 시인들의 열정
황금찬 시인은 항상 교장선생님이시다
포항 죽도해수욕장에서부터
강릉 경포대해수욕장
몽산포해수욕장 등
전국 어디에서나 학생은 만원이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더러는 풍덩풍덩 바닷물에서
시의 향연이 밤낮 없이 진행되고
모두들 여름 추억을 만들고 있다
‘시=사랑+꿈’이었던 심상해변시인학교
시인과 독자가 비로소 말문을 트고
그래, 이 바다에서 영근 꿈 조각을
소중하게 간직하리라
캠프파이어 마지막 날 밤
피어오른 불꽃만큼 꿈이 각인되는
시혼(詩魂)은 열사(熱沙)에서 영원하다.
물 詩 . 81
-계절의 물-봄
친구여, 싱그러운 바람을 맞을꺼나
새 빛, 새 희망이 벌써
버들개지 눈 뜨는 개울에서
봄물의 화음으로 알려주는데
친구여, 촉촉한 봄비에 젖을꺼나
물여뀌, 질경이, 명아주, 돌나물, 돌미나리
이미 겨울잠 깨고 기지개 켜는
생명의 선율로 생기를 돋우는데
친구여, 겨우내 얼었던 개울물
가재, 피라미, 중태기, 미꾸라지, 물방개
활기찬 유영으로 한 마당 향연이
온화한 들판에서 어우러지는데
친구여, 아직도 잔설이 녹아 흐르는
마을 앞 냇가에서 봄 마중하는 새싹들
오, 천상에서 전해지는 향훈의 엽신(葉信)
동화(同化)하는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는데.
(2013. 가을 한국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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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82
-계절의 물-여름
번쩍 번개와 우르르 꽝 천둥
빗발 거세지고 암흑의 세상
여름 물은 무섭다
장맛비가 계속되고
어디서는 홍수가 나고
연일 떨리는 아나운서의 일기예보
어휴, 덥다. 열대야다
무서운 여름에도
위험한 계곡에 몸 담그거나
열사(熱沙)의 해수욕장은 만원이었다
희비(喜悲) 엇갈리는 세상 만사
부채질 하고 선풍기를 틀지만
또 어느 마을은 산사태가 덮치는
저 비명(悲鳴)의 계절이여
벼락 치는 시간에도
성하(盛夏)의 잎들은 심호흡으로
한 생애를 무성하게 마감한다.
물 詩 . 83
-계절의 물-가을
물은 고요하다, 풍요를 기리며
물은 춤추지 않는다
결실의 계절, 맑은 미소로
화답하는 수덕(水德)
계곡에서는 산새들 축가(祝歌)를 듣고
들판에서는 오곡백과의 생기를 대하고
이제 다시 새로운 길로 떠나야 하리
인(仁)-만물을 깨끗이 하고 소통시킴
의(義)-맑은 것을 추구하고 더러운 것을 말끔히 씻어 줌
용(勇)-부드러운 것 같으나 범하기 어렵고
약한 듯하면서도 강한 것을 이김
지(智)-나쁜 것을 겸손하게 포용함.
초(楚)나라 사상가 시교(尸佼)의 가르침이
가을 강, 바다, 하늘을 수놓는다
노란 낙엽 몇 잎 가을 물길에 떠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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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84
-계절의 물-겨울
이제 좀 쉬어야겠다, 그러나
영원히 잠자는 것은 아니다
대지가 얼어붙어 다른 계절만큼
나를 필요로 하지 않나보다
설한풍(雪寒風) 휘몰아치는
어느 작은 마을에는
동심의 썰매가 흥겨운데
지난 여름 땀의 댓가로 저장한 풍년
엷어진 햇살 온몸으로 받으며
한 해의 고락(苦樂)을 담론한다
나를 기다리는 어느 곳
생명수 한 모금 뿌려주고
동면으로 다시 내년 봄을 기약하지만
눈발이 하루 종일 날리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샘물에서
춥다, 덜덜덜 떨면서도
부상(浮上)하는 겨울 이미지
헐벗은 나목의 간절한 기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다만, 기다림이 차갑게 쉬어갈 뿐.
물 詩 . 85
-천렵
친구여, 아직 그 물에서 물장구 치느냐
농약 치고 버려진 앞 개울에서
모두 떠나버린 물고기들
친구여, 이젠 마실 물도 귀하구나
친구여, 족대와 어항을 들고
천렵을 가자꾸나
그 시절 그 낭만은 없어도
동심의 추억은 회상할 수 있겠지
밤에는 관솔불 밝혀 들고
잠든 피라미 징게미 뱀장어
개울가에서 편안한 밤을
깨우는 친구여,
바다에는 적조(赤潮), 강에는 녹조(綠潮)
우리들 동심의 천렵은 끝났는가
오수(汚水)와 폐수(廢水)가 흐르는
생명의 물가에서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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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86
-빙하
만 년을 하얗게 앉아 있다
태초의 명상이 그렇게 길다
만년설의 거대한 풍모가
캐나다 로키 재스퍼 국립공원에서
해맑은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스노우 코치를 타고 빙원을 오른다
설풍(雪風)이 얼굴을 때린다
영하 몇 십도의 얼음물을 마시며
신비의 언어로 들려주는
몇 억겁 지구의 전설을 듣는다
그가 명상하는 지구의 모습은
빙하 녹아 흐르는 물로
웅장한 풍모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언젠가 모두 녹아 없어질 수 있다는
우리 인간들의 작은 불안으로
더 넓은 호수로 변모하는 오늘
로키의 빙하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치부를 들어내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다가
태양이 쨍쨍 내려 쬔다
스노우 코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물 詩 . 87
-물안개
아침 호수가
밤새도록 사랑한 온기를
조금씩 피워 올린다
아침 햇살에 엉기는
사랑의 호소
저 멀리 시나브로
사라져 가는 뒷모습이다
모락모락 아롱아롱
수면에 얼비치는
영원의 그림자
아, 떠나자. 먼 기다림
속삭임으로 남아 있는
무지개를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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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88
-는개
너는 안개인가
아니면 이슬비인가
저 산 아래에서 어른거리는 정체
사람이나 자연이나
애매한 형상에서 당황한다
희미한 장막을 두른 채
시야를 흐리게 하고
햇살 한 줌으로 사그라지는
아, 그 무정형(無定型)
그래, 사람이나 자연이나-.
물 詩 . 89
-해저(海底) 통신
용궁은 보이지 않았다
전설의 용왕도 만날 수 없었다
산호초 우거진 암흑세계에서
어류들이 유영하는 장관만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침몰한 군함이
그들의 쉼터요 보금자리였다
상어 몇 마리가 지나가고
고래 몇 마리도 무엇인가 바쁘다
이 평화로운 별 세상에는
간혹 잠수부나 해녀들이
그들의 일을 위해 깊은 잠수를 하고
문어, 소라, 전복, 해삼, 멍게들이 풍년이다
언제부턴가 용왕이 떠나던 날
어뢰(魚雷)가 터져 물고기가 수난을 당하고
잠시 후 잠수함이 지나 간다
해상에 무전으로 송신한다
핵 스위치를 누를 준비 완료-
냉전시대의 해저가 불안하다
해도(海圖)에도 표시되지 않은
우리의 삶이 위태로운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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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詩 . 90
-조수(潮水)
중천에 둥실 뜬 달이 나를 부르면
나는 끌려나가듯이 바다를 비운다
썰물(干潮)-
하루 종일 감춰진 속살을 내 보이고
공생(共生)한 미물들이 햇살을 받는다
와와, 환호성이 물길 따라 내가
멀리서 다시 돌아오는 시각
밀물(滿潮)-
서둘러 삶을 챙기는 바다 사람들
얼굴빛 희미해진 낮달의 인력(引力)
밀려 나갔다가 밀려오는 신비의 조화
비우고 채우는 해수(海水)의 섭리
이제야 눈치 채는가
삶의 해법을 찾는 간만(干滿)의 화해
마파람, 하늬바람 함께 불어오는
이 바닷가에서 넋을 잃고
달빛 얼굴을 찾아 먼 수평선을 응시한다
물 詩 . 91
--천수답
농사꾼 아버지의 한이었다
하늘만 쳐다보고 기다리는 천등지기
눈 빠지게 기다리던 비
내려 논바닥 적시고 모내기를 했다
--이 논배미 모를 심어
모야 모야 노랑 모야
언제 커서 열매 열래
무논에 울려 퍼져야 할
한 판의 구성진 노래 자락은
허공 맴돌아 들리지 않고
논두렁에 앉아 곰방대만 피워대는
아버지의 한이 물꼬를 흐르고 있었다
--이 달 크고 저 달 커서
칠팔월에 열매 맺지
아버지는 모를 심지 않고
둥실 떠가는 구름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아, 내뱉지 못하는 속울음만 끓였다.
물 詩 . 92
--해빙기
혹한(酷寒)이 너무 긴 것 같다
아직도 좀 차가운 봄바람 불지만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
그 속에 숨었던 생명체들
훈풍에 모두 춤추지 못하고 있다
어디선가 해동(解凍)하는 웅성임이
간간히 바람 따라 들려오지만
너무 깊게 움추려든 사유(思惟)들
냉기(冷氣)를 햇볕에 말리지 못하고 있다
모두들 ‘이상기온’ 한 마디 던지고
옷깃을 다시 추스르는 봄날의 정경(情景).
물 詩 . 93
--日出
동해바다에 도착한 우리들은
올해도 새해 아침
일출을 맨 먼저 보는 일이었다
밤새도록 달려와 푸석해진 얼굴마다
밤새도록 빨갛게 달궈진 햇덩이에
또 한 해의 소망을 비는 일이다
미명(未明)을 밀어내며 솟는 전율
바다는 이글거리고
모두는 환성으로 가슴 여는 일이었다
그러나, 옹달샘 떠나와
더러는 수로(水路)를 따라가다가
물방아를 돌리면서 허공으로 증발하고
더러는 물벌레와 어울려 몸을 숨긴 채
이 바다에 이르는 망망(茫茫)함
인고의 시간을 마름질하며
한 소끔 꿈을 불태우는 일이었다
작년 이맘때 새겼던 새로운 그 꿈
오늘은 지쳐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고
바다와 햇덩이 하나 되는 장관(壯觀)에서
다시 기원 하나 붉게 간직하는 일이었다.
ㅁ 시인의 에스프리
물의 언어학
1.
언젠가 노자(老子)의 도덕경 중에서 제8장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를 읽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거의 가까운 것이다. 사는 곳으로는 땅 위가 좋고, 마음은 못처럼 깊은 것이 좋고, 벗은 어진 사람이 좋고, 말은 믿음이 있어야 좋고, 정치나 법률은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것이 좋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능숙한 것이 좋고, 행동은 적당한 시기를 아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물은 이에 제일 가깝다.
우리들 주변에 널려 있는 물, 그냥 지나치기 쉬운 물이 간직한 내면의 교훈은 미리 짐작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깊은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의 미흡(未洽)한 식견(識見)에 놀라면서 물의 오묘한 의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라 알란이란 분이 저술한『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에서도 이 물에 대한 동질의 메시지가 감명 깊은 간접체험으로 남아 있었다. 자고(自古)로 옛 성인이나 치자(治者)들은 이 물에서 많은 사유(思惟)와 그 사유를 통한 정의의 실천을 도모했던 것으로 하나의 교본(敎本)처럼 현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스통 바슐라르의 유명한 저서『물과 꿈』을 읽고 물의 이미지는 무궁무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물이라는 사물에서 시간과 공간개념을 대입시키면 우선 다양한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주제의 메시지를 명징(明澄)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물과의 교감은 더욱 깊어졌고 새로운 의미의 투영(投映)을 위한 다변적인 사유의 폭을 확대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자질구레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소재로 하여 물의 이미지를 최대한 우리 인간들과 밀접한 상관성을 탐구하는데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
2.
이 세상에 물과 연관되지 않는 삶은 없다. 물이 말라버리면 인간을 비롯한 생물은 모두 죽는다. 그리하여 물에 관한 이미지는 다양하게 발현된다. 시간적으로 사계절을 우선 생각한다.
봄물은 탄생과 생명의 물이다. 그래서 튼실한 악궁(樂弓)이 필요하다. 한 해를 아니 한 생을 연주해나갈 준비는 막 깨어난 봄물과 함께 펼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새 생명의 환희를 음미한다.
여름물은 왕성한 생명의 청춘이다. 봄물이 사랑으로 넘겨준 열매가 무르익도록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새벽부터 매미가 목청을 돋운다. 노래인지 울음인지 분간키 어렵다. 머지않아서 귀뚜라미 합창으로 바뀌겠지만.
가을물은 결실의 풍요를 상징한다. 그러나 가을물은 고독하다. 마지막 남은 낙엽을 보노라면 어쩐지 서글픔이 앞선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잎새보다 이미 낙하(落下)한 몰골 위에 늦가을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데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짓밟고 자나간다. 우리 인생도 저러하듯이 풍요 이후에는 천천히 겨울을 준비하는가.
겨울물은 춥다. 얼음이 얼고 눈까지 내린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를 정리하고 모두들 아랫목에 앉아서 내년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린다. 땀으로 가꿔서 거둬들인 풍년을 나누면서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연년유여(年年有餘)’라는 연하장과 함께 기다림은 아름다운 약속이기 때문이다.
물의 공간 개념은 어떠한가. 호수는 잔잔하다. 바로 적요(寂寥)다. 간혹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어쩐일인지 가슴 설레인다. 비오리 한 쌍 물살 일으키며 지나가고 밀어(密語)를 풀어 놓는다. 햇살이 눈부시다.
강은 어떠한가. 버들강아지 몽실몽실 가슴 부풀리는 봄. 물안개 몽글몽글 피워올리는 여름. 낙엽 몇 잎 둥실둥실 떠가는 우수(憂愁)와 살얼음 깔리고 이미 말라버린 갈대의 싸늘한 독백(獨白)이 강물의 이미지를 더해 준다.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발원한 옹달샘과 계곡 그리고 실개천, 냇물, 웅덩이, 저수지, 늪, 댐, 마지막 바다는 어떠한가. 모두가 생명을 위해서 흐르고, 스미고, 적시고, 삼키고, 날아 흩어지고 다시 비가 되고 눈이 되는 변화무쌍(變化無雙)의 자연 섭리가 여기 물에서 생성한다.
3.
물에 대한 시를 쓰면서 많은 사물들이 물과 상관한다. 물가에서 볼 수 있는 외적인 사물들과 물속에서 숨 쉬는 내적인 사물들이 다양하게 자신들의 절규를 내뱉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픈 내면의 울부짖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체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ㅇ 장소 : 갠지스 강, 구룡연, 금강산 뱃길, 나이아가라 폭포, 남한강, 동강, 두만강, 두물머리, 로키 루이스호수, 옹산포 해수욕장, 바이칼호수, 박연폭포, 백담 계곡, 북한강, 서강, 선죽교, 약수터, 어라연, 월아천, 의상대, 천지, 청계천, 청령포, 팔당댐, 하롱베이, 학암 포구, 한강 선유도, 함벽루, 합천호반, 현해 탄, 홍제천, 황강,
ㅇ 물 : 강, 개울, 급류, 냇가, 는개, 늪, 대양, 대해, 도랑물, 마중물, 물꼬, 물길, 물레방 아, 물보라, 물살, 물소리, 물수제비, 물안개, 물줄기, 바다, 바닷물, 분수, 빙하, 상수원, 샘물, 수면, 수문, 수원지, 어선, 얼음장, 오수, 옹달샘, 용궁, 웅덩이, 유황천, 음용수, 이슬, 잠수함, 장마, 저수지, 조수, 징검돌, 종이 배, 천렵, 천수답, 청정수, 파도, 폐수, 폭포, 하구, 하수처리장, 해녀, 해 도, 해자, 호수, 황톳물
ㅇ 물고기(동물 포함): 가재, 고래, 도룡용, 멍게, 문어, 물방개, 물벌레, 미꾸라지, 민물검정망둑이, 바닷고기들, 뱀장어, 비단개구리, 상어, 소라, 송어떼, 수 달이, 어군, 어름치, 올챙이, 은어떼, 잉어떼, 전복, 중태기, 징게미, 피라 미, 해삼,
ㅇ 나무, 풀 : 갈댓잎, 관음송, 개구리밥풀, 꽃잎, 돌나물, 돌미나리, 명아주, 물여뀌, 물풀, 부평초, 수초, 오곡백과, 질경이, 참나리꽃
ㅇ 새(곤충 포함) : 갈매기, 나비, 물새떼, 비오리, 산새들, 산꿩, 청둥오리, 황조롱이
이러한 사물들이 직접 나에게 접맥(接脈)하면서 툭툭 던져준 이미지는 평소에 내가 체험하면서 느끼고 간직한 소중한 진실이 화자의 어조로 발현되고 있다. 참으로 살아가는 일과의 갈등요소들이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약간은 어눌한 감이 있으나 어쩐지 후련하다.
또 하나는 물과의 정서적인 교감을 통해서 동심(童心)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유년시절을 궁핍(窮乏)하게 보냈던 고향과 부모형제 등 가족과 연관된 이미지가 연결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체험의 현장을 재생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제9시집 『여백시편』을 낸지 꼭 7년만에 상재하는 시집이라서인지 애착이 간다. 그동안 잡사(雜事)에 허둥댄 시간이 아까울 뿐인다. 누군가 말했다. 가만히 사물을 정관(靜觀)하여 보라. 유(有) 속에는 항상 무(無)가 움직이면서 흐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有)가 영영 무(無) 속에 떨어지고 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무에서 다시 유가 생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도 생성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나는 알았다.
다시 임어당이 들려준다. 시인은 분석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또한 이론적인 설명도 하지 않는다. 시인은 다행히도 이론적인 정연한 문구나 논쟁해야 할 학리(學理)를 모른다. 그는 단지 결단하고 말해 버린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인간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고통, 상심, 동경을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속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물과 우리 인간의 이야기. 참으로 생명과 연관된 것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마하게 큰 명제(命題)가 다양한 목소리로 진실을 투영하고 있어서 그동안 고뇌해온 그 고통을 치유하는 행운을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물에 관한 탐구는 이것으로 마무리 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친자연적으로 접근해서 우리 인간들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서 숭엄한 상관성의 해법을 탐색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