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 . 10
유재용 소설가
김 송 배
1980년 초반, 한국문인협회 봄 세미나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알자리에는 김동리, 조경희, 홍성유, 김시철, 조병화, 황 명, 성춘복, 오학영 선생 등 원로들이 앉아 있어서 끼이지 못하고 버스 뒤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소설가 오영석(작고), 유재용, 안장환, 김병총, 최미나, 김녕희 선생 등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이런 모임에서 이동 중에는 소주 한잔 마시고 소설가들 특유의 정담을 듣게 되는데 김병총 형이 많은 화제를 들고 나오지만 유재용 소설가는 간혹 던지는 음담패설이 인기를 집중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만의 유머나 정담은 얼굴 한번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재연하는 것은 계획적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채린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들은 장편이나 신문 연재소설을 쓸 경우, 장면 설정이나 전개과정, 특히 사랑하는 장면과 섹스의 장면이 필요한 경우, 미리 진실인양 얘기를 해 본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청중(참가자들이지만)들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가를 세심하게 관찰한 후 소설 속에 삽입하거나 아니면 폐기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좋은 방법이기는 하다. 어차피 대중 독자를 상대해야 하는 신문소설인 경우에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유재용 소설가는 그후 내가 『예술세계』주간직에 있을 때, 소설부문 신인상 심사위원으로 그를 위촉하면서 서로 만나게 되는 빈도가 잦았으며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얼마나 예민한지 신인상 추천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쩌면 까다롭다고 할까. 심사평에는 어떤 대목이 부실하고 어떤 묘사가 문장법에 매끄럽지 않으며 전혀 문학성이 신인답지 못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소설에는 시처럼 비유와 상징으오 애매모호한 언어들을 동원할 수 없어서 누구나 읽어보면 스토리와 문학성이 잘 연계되고 있는지 금방 나타나기 때문에 신인 추천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지당한 말이었다. 자신이 창작하는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신념으로 소설을 쓰기 때문에 그는 많은 문학상을 받게 된다. 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고 1969년『현대문학』에 「상지대(商地帶)」로 추천을 완료한 이후, 현대문학상과 이상문학상(1980), 대한민국문학상(2982), 조연현문학상(1985), 동인문학상(1987), 오영수문학상(2000) 등 중량감 있는 문학상을 휩쓸었다.
한편 그는 문단활동도 작품활동 못지않게 많이 했다. 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를 필두로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도 역임했다. 그가 문협 상임이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이사장과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던 같았다. 가끔 문협에 들리면 내가 있던 예총 편집실에 먼저 들려서 문단 돌아가는 이야기와 문학의 경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문협의 현 상황에 대해서는 못마땅한 눈치를 보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사장이 모든 심사권이나 예산 집행건을 상임이사와 상의없이 단독으로 처리하는데 대한 항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문협 4인방이라 불리는 분들이 문협을 사수하고 있어서 그들과 친하지 않으면 속절없이 외면당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는 KBS 시청자 의견수렴위원과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위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송파문화원장, 한국문화예술 저작권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고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을 끝으로 지금은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가 송파문화원장(6년간 재임)으로 있을 때 나를 만나자고 했다. 이유는 오랜만에 소주 한잔하자는 것이었다. 주로 안장환 소설가와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그날은 유금호, 이태원(작고), 김용우, 전경애, 권남희 등 송파문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들 특유의 익살과 재담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지만 소설가와 시인의 특수한 만남은드물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였다.
그와는 모스코바와 알마타를 거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 헝가리, 독일에 까지 함께 여행을 한 적도 있었고 그가 소설가협회 이사장 시정 중국 연변에서 세미나를 함께 참석한 적도 있었다. 또 그가 ‘여성과 문학’을 표방한 계간지『라쁠륨』주간으로 있으면서(1996) 나에게 창간호에 게재할 원고 청탁을 해왔다. ‘시인이 본 평론가와 우리 평단’이란 부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어떤 출판사에서는 계획적으로 평론가를 내세워 무명의 작가나 시인을 소위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끼이게 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는 현실이고 보면, 시집을 상품의 가치로 오도하는 그릇된 문학관이 횡행하고 이는 것 같다. 일간지나 문학지의 신간평에서 특정 시인의 작품을 미화시;키고 그냥 추켜세우는 일에 급급한 평론가가 아직도 우리 평단에 존재한다면 이는 분명히 디스레리가 혹평한 것처럼 창작에 실패한 사람이 비평가라는 수모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거침없이 평단에 쏟아 부었다. 편집 의도와 얼마간의 효력이 발생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후에 만났을 때 ‘속이 후련하다’는 말로 그에게서 인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는 다시 동덕여대와 대전대학에서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단편집『꼬리 달린 사람』『관계』『성하』와 중단편집『누님의 초상』『화신제』『아버지의 강』『한여름밤의 꿈』, 장편소설『성역』『비바람 속으로 떠나가다』『성자여 어디 계십니까』『그들만이 꿈꾸는 세상』『사로잡힌 영혼』그리고 수필집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사랑은 아름답다』를 발간하여 우리 문단 소설계에서는 작품으로나 문단활동으로나 어느 측면서도 많은 시선을 집중시킨 바가 있다.
그는 최근 어느 수필 잡지에 「속담 되새기기」란 짧은 수필을 쓴 일이 있다.
아이의 시기를 거쳐 어른이 되고 이윽고 노인이 되는 인생역정을 살아오면서 경륜과 지혜를 탐처럼 쌓는 일은 퇴화(退化)가 아니라 성화(聖化)로 일컬음이 제격일 것이다. 순진하고 정직하고 긍정적이고 가능성을 지닌 아이로 돌아온 노인의 모습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는 이제 ‘돌아온 노인의 모습’을 반추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늙으면 아이 된다’는 속담에 대한 해석과 의미를 바르게 고쳐야 한다는 그의 내심은 자신의 입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의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나는 매월 셋째 수요일 저녁에 만나야 한다. 그도 이젠 딱히 책임지고 할 일이 없고 나도 시간이 많아져서 옛날부터 만남을 갖던 ‘세수회’의 모임이다. 안장환, 김병총, 이광복, 김영두, 노수민 등이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저녁과 함께 소주도 한잔 나누는 일에 요즈음 서로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의 건강을 기원한다.
* 2009. 3월호 [문학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