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을 보다/김필로
그애가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장소를 불문하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옆에 분이 건네준 휴지가 물티슈처럼 축축해지도록 펑펑 울고 불고 눈이 붓도록
그날은 이종사촌 언니 아들 결혼식에 가는 날이어서 나름 신경쓰고 옷도 얼굴만큼이나 치장했다는 데
어떤 연유였을까?
깊이 묻기도 어렵고 조심스럽다.
무엇이 내면의 소리를 끌어 냈을까?
말없이 전답을 뒤엎는 소처럼
짐을 가득 싣은 달구지처럼
그냥 왜 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슬픈 감정이 태풍처럼 몰아쳤다는 단서를 가지고 검색을 하면서 <괴물>에 느낌이 왔다.
며칠 후 그 영화 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예매해 줄테니 혼자 보라고 한다.
포스터에는 두려움과 놀람의 모습을 담은 순수한 두 소년의 눈망울이 겁먹은 사슴처럼 서 있다.
더 이상의 정보는 생략하고 독립영화관 4층 G10좌석에 등을 기대고 긴장을 푼다.
도입부는 화재가 발생하는 내용으로 전개되지만 밉밉하다.
싱글맘과 초등학생 아들의 일상이 평범하게 지루하게 진행된다.
문제들이 나타나면서 아이의 시선과 웃음이 어른들의 시선과 웃음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배우게 된다.
거짓과 진실이 서로 엇갈리며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혼란이 온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하는 것과 말 하지 않는 것
왜곡과 편견,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인 확고성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고정관념으로 어른들의 메뉴얼이 된다.
영화를 자주 보지 못한 탓인지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처음부터 이해하기는 난해했지만 아이들의 천진성이 펼쳐지는 폐전차 공간의 웃음은 심장을 흔들기에 충분하면서 그 순수를 따라간다.
어른들의 눈을 피하지만 피하지 않은 '나 있다'의 팻말!
그 팻말은 어른들에게 희망을 준다.
잠시 폭풍을 피하는 두 소년의 일탈은 영혼의 안식처럼 편안하고 마치 해밀과 같다.
중간중간 나는 졸았다
하마터면 그냥 잘 뻔도 하고.
이중인격자로 보였던 교장이 어른의 눈과 아이의 마음으로 위로하는 장면이 음악실에서 악기를 다루며 이루어지는 반전은 감동적이라고 눈물을 찔끔하면서도 어둠은 졸음을 파고 들도록 가만두었다.
엔딩 장면이 화면에 가득 찼지만 줄거리를 놓쳐 벙벙하다.
두 소년이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감추지 않고 정체성의 갈등에서 깨어나는 기쁨은 틀에 박힌 비상식의 안대를 벗고 노루새끼마냥
뛰노는 모습만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끝났다.
나는 처음보다 더 궁금하다.
무엇 때문에 그애가 펑펑 엉엉 울었는지
내가 울었던 눈물이 다 저에게 흘러 다시 들어 간 것인지......
오래 전 한 사람에 대한 신뢰와 불신 사이에서 난감할 때 초월의 강을 건너며 다 쏟아버린 죄책감, 미안함,바보스럼 등을 다시 건져 보듬는다
그리고 두 소년을 말랑하게 품에 안는다
'괴물은 누구인가?'
너희들은 괴물이 아니야
너희들은 자연이야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