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엔 아르케’에 관하여
2) ‘엔 아르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호 로고스’ 하나님이 나타나는 내용이다.
3) ‘엔’ 동사에 관하여
나. 본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오역하였다.
(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 카이 호 로고스 엔 프로스 톤 데온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이 문장을 해석한다고 해서 그 의미가 풀리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두 비유(파라볼레)로 되어 있는 문장이라 한 단어씩 끊어서 해석하여야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 내용은 사도 요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였다.
1) ‘엔 아르케’에 관하여
새 언약의 헬라어 ‘엔 아르케’는 창 1:1의 히브리어 ‘베레쉬트’와 같은 뜻으로서 시공간이 전혀 없다. 성경에서 ‘베레쉬트’와 ‘엔 아르케’를 ‘천국’으로 표현하며, ‘에이스 투 아이오나스’로 설명하기도 한다. 모두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엔 아르케’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베레쉬트’를 전치사 ‘베’와 ‘레쉬트’를 따로 분리하면 ‘레쉬트’ 안에서가 된다. 마찬가지로 ‘엔 아르케’를 전치사 ‘엔’과 ‘아르케’를 따로 분리하여 ‘레시트 안에서’라고 해석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엔 아르케’를 우리의 몸과 마음 곧 휘장의 세계와는 결코 만나지 아니한다. 휘장의 세계(몸과 마음)를 넘어서 있는 곳이므로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휘장의 세계에서는 ‘엔 아르케’를 결코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다. 휘장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일어나는 현상들 곧 어떠한 느낌, 인식, 알음알이의 반응으로는 결코 결코 알 수가 없다.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엔 아르케’는 휘장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에도 결코 오염되는 일은 없다.
2) 우리의 마음이 ‘엔 아르케’를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엔’과 ‘호 로고스’가 등장하는 것이다. 창 1:1에 엘로힘 하나님과 같은 역할이다. 엘로힘 하나님이 베레쉬트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것이다. 구약에 1년에 한번 휘장을 넘어서 들어가 엘로힘 하나님과 베레쉬트 하나님 사이에서 대제사장이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모두 비유다. 엘로힘 하나님과 베레쉬트 하나님 사이가 떨어져 있다.
엔 아르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호 로고스’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이다.
‘호 로고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맞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이 ‘호 로고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성소 안쪽 곧 ‘엔 아르케’를 향하여 있는 것이다.
‘호 로고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겉 사람의 마음과 맞대면하고 있으면 겉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곧 정과 욕심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드러나게 되어서 십자가에 달리게 되어 마음 안에 거하는 그 죄들과 그 죄의 근원을 뿌리째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호 로고스’ 하나님을 성경에서 ‘말씀(진리)’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이 ‘말씀’으로 번역하고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은 그냥 하나님 ‘말씀’으로 오해하고 있다. ‘호 로고스’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 나타난 글자가 하나님 ‘말씀’이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말씀대로 읽어야 하며 말씀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잇다. 그래서 큰 오해를 낳는다.
성경 기록(그라페)은 신약은 모두 파로이미아(비사, 크립토)와 관련된 파라볼레(비유)로 되어 있으며, 구약의 히다(비사)와 마샬(비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큰일이다.
이것을 놓치면 몸 밖의 예수 그리스도 곧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되어 종교가 탄생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역사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내용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진다.
3) ‘엔’ 동사에 관하여
문법은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단수, 3인칭이다.
원형은 ‘에이미’이며, 1인칭 단수로 ‘나는 ~이다’ ‘나는 나다.’ 뜻을 갖는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되었다.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계시니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 말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 의미가 왜곡되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계시니라’가 아니라 우리 마음 너머 지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번역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이 쓰여 있는 곳부터 해석을 하여 이해하고 나서 다시 문장을 들여다보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계시록 1:4과 1:8에 하나님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엔’ 동사가 나오고 있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