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문단 사고일지
글 | 이우학(77학번)
25년 전의 건국문단의 일을 떠올리려고 하니 몇 가지의 에피소드와 인물들이 서로 순서 없이 단상으로 스쳐지나간다 마치 오래 전에 읽은 소설처럼…. 무엇부터 불러올까, 실제 사건인지 들은 이야기인지 모를 정도로 기억이 희미해진 사건, 사고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이런 고민과 문제를 뒤로하고 사건과 인물이 이야기를 물어오기를 희망하면서 시작할까한다.
77학번과 76학번
내가 문단방을 처음 들어선 것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나서였다. 대운동장 옆 구 학생회관 건물 이층, 작은 방을 들어서서 입회의사를 밝혔다. 방안의 얼굴들을 잘 분간 못할 정도로 담배 연기가 자욱한 것을 보니 작은 창 하나로는 환기시키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이다. 방안에 있던 이들은 마치 면접관이나 되는 듯한 태도로 입회원서를 작성하라고 내밀었다. 그리곤 그 주 토요일 입회시험이 있으니 다시 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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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감 보다는 기가 막혔다. 대학 써클을 들어가는데도 시험이라니, 백일장 같은 글쓰기를 경멸했던 내겐 제목을 주고 원고지 칸을 채우니 식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말에 당황하였고 은근히 화도 치밀었다.누가 누굴 테스트한단 말인가?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총 13명 지원에 9명이 입회 시험 당일 나타났는데 합격자는 월요일 아침에 중앙게시판에 공고한다는 것이다.이 모든 통과 절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다행히? 합격자 명단에 내가 있었다 시험을 본 9명 전원의 이름에 일주일 넘게 중앙 게시판과 각 단과대 게시판에 자랑스럽고 영광되게 붙어 있었다. 이리하여 대건국문단 77학번이 탄생되었다.
그 당시 시험관으로 지금은 목사님이 되었다는 낙농과 임준형 회장, 그리고 그 유명한 76학번, 류환, 임희근, 홍준표, 김중배, 조명희 등이 있었고 문단정화사업의 주축들이었다. 신입생 환영회에 막걸리 한 대접을 건배하면서 “너희들은 건국대학교를 들어온 것이 아니라 건국문단에 입학한 것이다.”라는 말에 알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나의 문단 생활은 시작되었다. 시를 쓰는 박상호(사학과), 박상규(축산), 박재환(사학과), 이기복(축산), 양원순(국문) 이미경(가정), 그리고 탈영병이란 단편 소설로 표상 필화사건에 휘말린 김수정(지리)과 배석봉(무역)과 필자가 77학번 뭉치들이었다. 1학년인 우리들은 76학번의 기에 눌린 것처럼 서로 각자의 일에 첫 해는 바빴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와 연애에 열심인 친구도 있었고, 술에 전념한 치들도 있었다. 술 먹는 스타일이 다른 박상호 그는 드라이진, 보드카 등 독주를 심심치 않게 마셨는데 그 친구도 취하면 일감호로 뛰어들어 가려해서 동기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런 술버릇은 임희근 선배로부터 배웠는지도 모른다. 77년 5월 시화전을 청심대에서 열고 있을 때 주머니를 털어 모은 돈으로 임 선배는 몽땅 소주를 사고 남은 50원으로 안주를 샀다. 소면국수 한 묶음. 소주 한 잔에 생 국수 한 가락. 그 국수는 1년이 지나도록 문단 책상 서랍 속에 뒹굴었다. 일감호 저편의 나무와 가로등이 건너오라고 손짓한다고? 주변 사람들 애써 먹은 술 다 깨게 하네. 그 날도 나는 일감호로 뛰어들려는 그를 붙잡았다.
▶ 배석봉과 배문성
옥다방 시대와 할머니 막걸리 집
옥다방과 건국문단의 인연은 내 윗대 선배들의 증언을 더 들어 보충해야하겠지만 나로선 늘 술에 취해 통금 가까이 들렸다가 쫓겨 난 기억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몇몇 선배들은 옥다방 누님의 배려로 다방 테이블이나 바닥에서 자고 아침에 라면까지 먹은 일을 무슨 영웅담처럼 들려주곤 했다. 늘 그랬듯이 사건의 배후에는 술이 있었다. 한번은 모두 술이 거나하게 취해 화양리에서 통금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만취한 영웅 임희근 선배가 단속하는 방범대원과 싸우는 통에 정작 당사자는 옥다방에 쓰러져 자고, 말리던 이들만 통행금지 위반죄로 철창차를 타고 동부경찰소로 끌려갔다. 회장인 류환, 박재환과 필자는 철창에서 밤을 새운 뒤 아침에 지도교수님이었던 고 정초시 어른의 전화 보증으로 즉심 직전에 훈방되었다. 옥다방이 더 이상 12시 이후의 우리들을 결코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던 사건이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선 많이 마시고 많이 쓰라는 선배님들의 천금같은 말씀을 반쯤 실천한 장소는 할머니 막걸리 집이었다. 왜 그리 가난했던지. 우린 늘 술이 고팠고 배가 고팠다. 할머니 막걸리집은 이 허기를 채워주었다. 한 그릇에 150원 하는 라면 대신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켰다. 70년대 후반의 문단인이면 고춧가루 양념으로 버무린 노란무 안주와 노가리 시체를 해부했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형편이 나으면 2차로 화양리 시장통의 순대국을 안주로 먹기도 하였다 아주 간혹. 그때 임희근 선배와 나는 개근상감이었다. 일요일에도 오후 느지막하게 출근하면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우리와 함께 술을 했던 고참들을 꼽는다면 위에서 언급한 76학번 말고도 나호열, 양경덕, 오창제, 김준식, 임유순, 홍성년, 전영칠, 김상우, 오만환, 박승렬, 박혜숙, 홍영숙 선배를 꼽을 수 있다.
건국문단에는 휴학도 졸업도 없는 듯이 보였다. 휴학한 사람도, 취업한 형들도 시화전, 문학발표회 때 참석하여 후배에게 술을 샀고, 표상 출간 비용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런 학교 행사는 졸업생과 재학생을 엮어주는 끈이었고, 안주와 함께 취할 때까지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79년 2월 군입대를 앞두고 필자는 류환 형, 동기 배석봉의 남도 순례에 동참하게 되었다. 류환 선배의 누님이 사는 대전에 들렸고, 배석봉과 신문사 동기인 강현직의 전주 단골집에서 푸짐하게 먹고 그의 형수집에서 아침까지 먹었다. 다음 기착지는 입담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김수정이 있는 광주였다. 우리 셋은 여학생 집에 민폐를 주기가 민망하여 얼굴만 보려고 했으나, 남도의 인심은 우릴 잡았다. 총각 셋을 재워준다는 것이 과년한 딸 삼형제가 있는 명망 있는 집으로서는 어려운 결정이었겠지만 수정이는 교감선생님이신 아버지께 우리가 자신의 한양 유학 생활에 큰 도움을 준 고마운 이들로 소개해놔서 더욱더 염치없게 만들었다. 남도의 풍성한 음식과 어머니가 직접 담근 매화주에 대한 답례를 우리는 새로 시쳐 놓은 이부자리에 여행 중에 얻은 꼬질꼬질한 때로 써 놓았다. 검은 때가 묻은 요와 베개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광주를 떠났다.
석봉이는 환이 선배의 고향 부산으로 함께 떠났고 나는 입대 송별회를 위해 서울로 향했다. 송별회 후의 필자의 기억은 잠깐 끊기게 되었다. 이미 ‘학우 분식’에서 소주 20여잔의 송별주를 마신 내게 막걸리집 할머니는 이례적으로 공짜 막걸리 두 주전자를 내놓으셨다. 그날 밤 나는 여관방 온 방바닥에 쓸개즙을 토해냈고 몸을 추스린 뒤 입대하였다. 그리하여 2년 동안 지속되었던 술 마시기 연속 행진을 잠시 멈추게 되었다. 81년 여름 제대하고 보니 할머니 내외분이 가게를 정리하고 떠났다고 한다. 문단인 들은 ‘오복집’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소주로 전향하였다.
▶ 이우학, 심재추, 문영숙, 구민자, 안두해
이우학,조명희,김준식,전영칠,이상수,,오창제,김수정,류환,문영숙 등
당한 것은 후배에게
78학번 후배를 우리가 경멸했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뽑았다. 심재추, 문영숙, 이상수, 김재숙, 김영철, 임한창, 현종섭, 정해순, 고석창, 이원익, 안두해, 구민자, 엄기두 등이었다. 이들 역시 문단 정화 사업에 대상이 되었고 우린 회원의 자격과 의무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하였고, 일부는 저항하였다. 문단 회원의 조건으로 내가 이해한 바로는 글과 술을 다 열심히 하던지 아니면 둘 중에 하나라도 성의 표시를 하던지였다.(이 부분에 대한 필자의 기억이 혼미하니 당시 논쟁에 참여자는 추후에 보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합평회 때 두둘겨 맞았던대로 후배들의 작품에 도리깨질을 해댔다. 서로의 삶에는 관대했던 우리들이지만 상대방의 작품엔 따뜻한 말을 할 줄 몰랐다. 글쓰는 일로선 서로에게 모질었던 것 같다. 여름 방학엔 가을 신문 문화상 작품을 준비하였고 서로 보이지 않는 경쟁심을 부추겼다. 그리고 찬바람이 들면 신춘문예 작품을 준비하라고 닥달 당했고 또한 후배들을 몰아세웠다.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취미활동으로 글쓰기 하는 것이 아니다. 건국문단은 친목단체가 아니다. (호우회로 가라는 말은 최대의 모욕으로 생각했다.) 우린 말 배우기 시작한 구관조처럼 들었던 말을 78학번들에게 되풀이했다.
발표 기회는 많았다. 매주 발행되는 건대신문의 시와 꽁뜨 수필란에 문단 사람 외의 글이 실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신문문화상에 문단 외의 인사가 당선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매년 나오는 표상에 대한 자부심은 자못 컸다. 표상 작품을 준비하면서 글쓰기와 글읽기를 배웠고, 편집 교정일도 배웠다. 건대문화를 기획 편집 출간하는 일도 문단 사람 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유신 정권 말기 사회, 정치에 참여하기엔 너무 어두운 시절이었다. 집회는 허가를 맡아야 했고 모든 글은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다.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술을 먹었는지 폭음으로 그랬는지 기억이 혼미하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래도 그 땐 치열했고, 진지했고, 순수했었다.
첫댓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는 71학번이고 건국문단 재창립 초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그때 학예부장을 지낸 고 김정규라는 친구가 저를 적극 추천한 때문입니다.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건국문단은 이제 종말을 고한 건가요? 많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