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은 생명의 빛으로 하나 되기 위함이다.
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내면의 정과 욕심(몸과 마음)을 초월해야 한다.
다. 변하는 것에 맞대면하여 있을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빛(그리스도 예수)만이 유일하다.
2. 본론
가. 십일조와 헌물을 드림은 생명의 빛으로 하나 되기 위함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4~16)”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함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로서 십일조와 헌물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똑같은 아들만을 찾으신다.
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내면의 정과 욕심(몸과 마음)을 초월해야 한다.
하나님이 낳은 자녀가 되려면 내면에 있는 정과 욕심(몸과 마음)을 모두 초월해야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휘장을 찢기 위한 십자가에서 겉사람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 이것을 인생들에게 알려주시려고 그 많은 선지자들이 온 것이다.
십일조와 헌물을 바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나 어떠한 경우라도 종은 아들이 될 수 없다. 이에 속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베레쉬트(근본)로부터 나왔으며, 베레쉬트(엔 아르케)로부터 나온 자는 모두가 근원이며. 하나님과 하나로서 하나님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차별없이 하나다.
완벽하게 똑같은 하나님이다. 헬라인이나 히브리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똑같다. 아들은 종교 행위를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 변하는 것에 맞대면하여 있을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빛(그리스도 예수)만이 유일하다.
어릴 때는 몽학 선생 아래서 잠시 종교 행위를 할 수 있다. 그 아래서 반드시 훈련(과정)을 받아야 한다. 이때는 바로 자신의 실체를 모르는 때다. 인생들은 알 수 없는 수많은 인연을 거쳐오는 동안 술 취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뒤집어쓰고 이를 나 자신으로 알고 속아서 살아 온 것이다. 몸과 마음은 항상 변한다. 변하는 것은 모두 조건에 의해 나온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하는 것에 맞대면하여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빛뿐이다.
그 누구에게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은 내면에 계신다. 이를 발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이 내용이 창세기 1:1부터 계시록까지 이어진다. 술 취함에서 깨어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서 받으신다.
신앙인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신비한 일, 기적 같은 일들이 참인양 말한다. 하나님을 잘 믿으니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참 여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험난한 일이 생기면 어떨까?
성경은 이미 간음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조금도 없는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특히 황홀경이나 행복감에 빠지면 더욱 그러하다. 이때의 마음을 나와 일치시키는 것이 모두 간음 행위다.
참 여인이 된다는 것은 머리에 이고 있는 항아리가 비워질 때까지 이고 가야 한다. 아주 좁은 길이다. 겉 사람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