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비유는 시제가 없으며, 시상에 있어서 현재 상만을 드러내고 있다.
2)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자신에게 그리스도 예수로 임하신 후에야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다.
3) 진리는 깨어난 이후에 반드시 뱀의 유혹에 넘어가는 체험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한다.
4) 종교인들은 풀무 불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종교생활에 집착하여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본론
1)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비유는 시제가 없으며, 시상에 있어서 현재 상만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비유는 시제가 없으며, 시상에 있어서 현재 상만을 드러내고 있다. 말씀(천사)이 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누구도 종교행위를 할 수가 없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이를 갈게 되어 종교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성경말씀을 좀 이해하니 나를 따르라 하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매인 채로 두는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케 하기 위함이며, 자신 안에서 이를 발견한 자는 모두 흩어 버리신다.
이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비유는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지금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2)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자신에게 그리스도 예수로 임하신 후에야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마 13:51)”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깨달았느냐(쉬니에미 : 이해하였느냐)’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이후에 자신 안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고 난 이후에야 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실제적인 체험에서 오는 것이다.
나의 내면의 속성 중에서 어느 부분은 골방 안에 들어와 있으며 어떤 속성들은 여전히 겉 사람의 아이온의 속성인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으로 들어간다. 貪瞋痴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가리키는 세 가지 독(번뇌)으로 규정하고 있다.
마음이 조용할 때는 골방 안에 들어와서 문을 닫고 있다가도 어느 때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들어오는 촉수(觸手)에 끌려 나가 애착(愛着)이 일어나 취(取)하게 된다. 전 남편에게 끌려 나가게 된다.
이래서 촉수애취(觸手愛取)가 일어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해야 하는데 관찰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 속성들에 빠지게 된다. 하아담이 아담이 되고 하잇솨가 이솨가 되는 내용이다. 뱀의 실상을 모르고 유혹 당하였기 때문이다.
3) 진리는 깨어난 이후에 반드시 뱀의 유혹에 넘어가는 체험을 다시 한번 거쳐야 한다고 말씀한다.
성경말씀은 깨어난 이후에 반드시 뱀의 유혹에 넘어가는 체험을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래야 더욱 정신을 차린다. 반드시 풀무 불안에 들어가 울며 이를 갊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나온 제자가 착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칭찬을 받는 참 과부가 되는 것이다.
이래서 광야길 사십년을 가야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아의 방주를 짓는데 백여 년이 걸린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깨달음의 길은 많은 생을 통해서 그 열매를 맺는다. 내면의 세계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종교인들로부터 무시를 당한다.
4) 종교인들은 풀무 불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종교생활에 집착하고 만족하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은 풀무 불안에 들어가 있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종교생활에 집착하고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행위는 특정 종교에서 행해지는 행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 아내 자식을 위한 모든 개념들 모두 자신이 행하는 종교행위들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개념들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사람이다 하는 것도 자신의 개념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개념들이 이름을 지어준다. 계속 업을 쌓는다. 모두 몸과 마음을 입고 나왔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