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밧#모쉐#출애굽
숨겨진 영웅(The Hidden Heroine)
그녀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영웅 중 한 명입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모세는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출애굽의 전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에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힌 것이 바로였다면, 결정적인 희망의 흔적을 구한 사람도 바로의 가족 중 한 사람, 바로 바로의 딸이었습니다.
성경 구절을 기억해 보세요. 파라오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에게 죽음을 명령했습니다. 암람의 아내 요게벳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석 달 동안 그녀는 그의 존재를 숨길 수 있었지만 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를 지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누군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길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를 바구니에 담아 나일강에 띄웠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예오르(나일)강으로 목욕하러 나갔고, 갈대밭에 있는 상자를 보고 그것을 가져오도록 노예 소녀를 보냈습니다. 그것을 열자, 그녀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울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것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 아이는 이브리인의 아이구나.”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출 2:6).
순서를 생각해 보세요. 먼저 그녀는 그것이 어린아이임을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며 자비로운 반응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누가 아이를 버리겠습니까? 그녀는 이브리인들에 대한 아버지의 법령을 기억합니다. 즉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아기를 구한다는 것은 왕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평범한 이집트인에게는 충분히 심각한 일입니다. 왕족의 일원에게는 몇 배로 그렇습니다.
사건이 일어날 때 그녀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녀의 하녀들이 그녀와 함께 있다. 그녀들 중 한 명의 단순한 소문으로도 그녀는 위험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멀리 있는 가족에게 숨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연민의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이제 특별한 일이 발생합니다.
그 아이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이브리 여인을 불러서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말했고, “가거라.” 바로의 딸이 대답했습니다. 그 어린 소녀는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데려왔습니다. 파라오의 딸이 말했습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여라.” “삯을 지불하겠다.” 그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젖을 먹였습니다. (출애굽기 2:7~9)
이 이야기의 단순성은 이 만남의 놀라운 사실을 감추고 있습니다.
첫째로 어린아이가 그것도 노예 계층의 아이가 공주에게 어떻게 대담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정교한 서문도 없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 쓰여진 우리에게 익숙한 형식도 없습니다. 그들은 동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파라오의 딸은 어린 소녀의 제안을 아무 의심 없이 순순히 따릅니다. 그로 인해 모쉐는 그를 낳은 어머니 손에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놀라움이 다가옵니다. 아이가 자라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습니다. 그녀는 그를 자기 아들로 입양하고 이름을 모쉐라고 지었습니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기 때문이다.”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2:10)
파라오의 딸은 단지 한 순간의 동정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 아이를 잊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책임감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를 위해 계속 헌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를 입양하여 자신의 아들로 키웁니다. 이것은 또 다른 높은 차원의 용기와 결단입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세부 사항은 마지막 문장에 나옵니다. 토라에서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이는 부모이고, 특별한 개인의 경우에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첫 번째 유대인 아이에게 이츠학이라는 이름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의 천사.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미 이집트에서 요셉의 알려진 이름인 Tzafenat Pa'neach라는 입양 이름을 접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전히 요셉이었습니다.
모든 선지자 중 가장 위대한 출애굽의 영웅이 지금까지 의심할 바 없이 사용했던 이름은 그의 양어머니인 이집트 공주가 그에게 준 이름 모쉐 그대로입니다.
미드라쉬는 다음 사실을 전해줍니다.
이는 선을 행하는 자의 보응으로 모쉐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었지만, 토라 전체에서 그가 알려진 유일한 이름은 바로의 딸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거룩하신 분, 찬미 받으소서 등 어떤 존귀한 뜻의 다른 이름으로도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모쉐-모세스는 람세스(Ramses –Ra(위대한 신)의 자녀를 의미합니다.)에서와 같이 “아이”를 의미하는 이집트 이름입니다.
모쉐의 이름은 그를 키워준 여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그가 자신의 삶을 이끌어온 방식을 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금송아지의 죄 이후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했을 때 모세는 "당신의 책에서 나를 지워주십시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동료 유대인들을 위한 자기 희생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어렸을 때 파라오의 공주가 대담하게 자신을 구출한 일을 통해 얻은 특성입니다.
그러면 파라오의 딸은 누구였습니까? 그녀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언급된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역대기 첫째 책(4:18)에는 비트야(Bitya)라는 이름의 파라오의 딸이 언급되어 있는데, 현인들은 바로 그녀가 모세를 구한 여자라 말합니다.
비트야(때때로 Batya로 번역됨)라는 이름은 "신의 딸"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현자들은 놀라운 말을 전합니다.
그녀에게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었는데도 당신은 그를 당신의 아들이라 불렀다. 너는 내 딸이 아니지만 나는 너를 내 딸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일생 동안 낙원에 들어갈 정도로 의로운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폭정은 인류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인 용기는 때때로 어둠의 중심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라 자체가 이야기를 그런 방식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사람에 관해 일반화하거나 고정적 관념을 심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집트인들이 모두 악한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파라오로부터도 오늘의 여주인공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토라가 민족 중심적인 텍스트만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나타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서 찾든지, 심지어 적들 사이에서도 덕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인간 가치의 기본 핵심인 인간성, 연민, 용기가 진정으로 보편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전합니다.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셈(Yad Vashem) 외부에는 의로운 이방인들을 기리는 거리가 있습니다. 바로의 딸은 그들이 행한 일과 그들이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최고의 상징입니다.
나일강둑에서 이집트 공주와 이스라엘의 어린아이인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만남 또한 나이, 문화, 지위, 국경을 넘어서는 깊은 인간애를 보여줍니다.
결코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모든 차이와 거리를 연결해 준 두 명의 히로인.
그들은 오늘까지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전해줍니다.
끝으로 바트야가 모세에게 붙인 이름, “물에서 건졌다”의 진정한 의미는 자비의 감정이 아니라, 생명을 구한 행위에 기초한 단어라는 것입니다.
월간샤밧
월간샤밧 니싼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월간샤밧을 통해 토라와 유대전승에 담긴 깊고 소중한 메세지를 접하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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