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아직 컴컴한 새벽. 밤새 뭔 꿈을 그리 꾸었는지 잔상이 스친다. 한 번 깨면 다시 잠들기 어려워, 눈은 감고 있지만 머리는 점점 맑아진다. 어제 만났던 사람들. 혹시 내가 쓸데없는 말은 안 했나. 나도 모르게 어제 만남을 떠올리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모처럼 한 외출의 여러 장면들이 꿈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스쳐간 듯. 빗소리와 함께 한 만남의 여운이 새벽 잠자리를 푸근하게 한다. 빠져드는 잠을 느끼며 꿈꾸듯 어제가 밀려왔다.
모처럼 외출이다. 언제부턴가 웬만하면 집콕이다. 퇴직 후 한동안 건수만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외출했었다. 집에 있으면 큰일 날 사람처럼 핑계 만들어 나가곤 했다.
나이 드니 소심해졌는지 사람에 대한 조심성이 커진다. 실수할까 속보일까 상대방에게 상처주지나 않을까. 내뱉은 말을 곱씹고 되씹는 경우가 잦다. 사람에 대한 '흥'이 떨어져서 일지도. 나이 드니 웬만한 일에 멀뚱해지는 것과 비슷한 증상일 수도 있겠다. 혼자 지내는 법에 익숙해졌나. 집에서 내 할 일을 찾거나 시간 보내기를 조금 터득해서 그렇기도 하고. 외출보다 집콕이 편해진 건 확실하다. 요즘은 약속된 만남 아닌 번개 외출은 대개 사양한다. 친구나 지인 만나는 외출은 한 달에 많아야 두세 번 정도. 혼자 미술, 서예 등 전시회나 책방을 찾는 외출이 잔잔해서 좋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안개가 낀 듯 뿌옇다. 새벽부터 피어난 안개비가 조금씩 굵어진다. 우산을 펴며 중얼거렸다 모처럼 외출하는데 비라니. 청명한 가을하늘이었던 며칠을 떠올린다. 따사로운 햇살로 눈부셨던 그때 외출했었으면..
약속 장소의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오른다. 차양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왠지 경쾌하다. 제법 굵어진 빗줄기에 소리가 요란하다. 빗소리 리듬감이 상쾌하게 들린다. 가슴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간만의 외출이어서 아님 만날 사람들과 즐길 모처럼의 시간 때문인가.
굵은 빗줄기가 우산 아래 발걸음과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탁탁 후드득 저벅저벅 툭툭. 물 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흔들리는 우산에 맞춰 빗소리도 흔들린다. 바닥에 떨어져 튀어 오르는 빗방울이 초롱초롱하다. 가을을 재촉하는 빗소리가 시원하다. 청량하게 들리는 빗소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햇살 가득한 날 외출이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설레는 기분이다. 자칫 짜증 날 법한 빗소리마저 즐겁게 느끼게 해주는 가을비. 나이 드니 여유로워져 그런가.
돌아오는 길. 간만의 외출길 끝은 언제나처럼 나른하다. 비도 내 마음을 아는 듯 빗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도착역을 나오니 비가 그쳤다. 역 주변은 비가 멈춰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간다. 물결처럼.
모처럼 외출한 날엔 숙면해서 좋다. 나이 드니 나들이 뒤엔 피곤함이 따라온다. 마치 종일 목공작업 후 느끼는 성취감 가득한 나른함과 비슷하달까. 하고 싶은 걸 이뤄낸 후의 피곤함은 언제나 달콤하다.
다음 외출은 언제지? 하며 잠을 청한다. 눈이 확 떠졌다. 몇 시지 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침 운동에 늦었다. 근데 헷갈린다. 지금이 어제 아침인가 오늘 아침인가. 꿈을 꾸다 다시 잠든 건지 피곤해서 잠에 푹 빠졌던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