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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이용준
너를 보며 내가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이야.
녀석은 눈치 없이 여전히 낑낑대며 나가자고 보챈다. 포장 닭고기를 봉지째 뜯어내 먹기 좋게 데워다 주었건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녀석을 바라보며 연신 담배 두 대를 피우고 나니 어지럽고 메슥거리기까지 한다. 나 스스로를 추스르기에도 부족한데, 맛있는 것까지 주는 걸로 산책은 건너뛰자고 메시지를 보냈건만. 인석아, 3년을 끊었던 담배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결국 화내듯 말하고 말았다.
“인석아, 오늘은 못 나간다니까.”
녀석은 내 말을 알아챈 듯 슬그며니 얌전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흥분해 있다. 어떡하나. 마음이 약해진다. 귀찮은 녀석. 냄새며 다리를 벌벌 떠는 꼴이 이뻐해 줄 구석이 없다. 그런데 바로 그 동정심이 내 심지를 흔들어 놓고 만다.
“에구, 그래, 나가자!”
내가 목줄을 가져오는 것을 보자, 녀석은 앞발을 내 가슴까지 올리며 식식거린다. 묶어놓은 사슬을 끊어내고 튀어나올 태세다. 하도 난리를 치는 통에 줄을 바꿔 매면 그날 산책은 이미 반은 이루어졌다고 봐도 좋다. 매자마자 치고 나가는 힘에 몇 차례 허리가 뒤틀리거나, 줄에 발이 꼬여 뒤로 나자빠지기도 했다. 내 목소리도 높이 올라간다.
“얌전히 좀 있어, 인마!”
녀석이 멈칫하는 사이, 이왕 시작한 거 좋은 마음으로 대하자고 스스로를 달래본다. 어쩌겠는가. 오로지 나가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 새 줄을 맸으니 목줄을 힘차게 당겨 일단 기세를 꺾어 놓고, 그런 다음 잰걸음으로 적당히 끌려가 주면서 조금씩 조절을 하면 된다. 그러고 나니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녀석아, 너, 너무 쉽게 보인다. 녀석의 노골적인 면이 이해가 가면서도, 그 노출에 은근히 화가 난다. 그렇게 티를 내서야, 어디. 사실 그 말은 내게 해당된다. 그러니 녀석에게가 아니라 내게 뱉어내는 야유다. 거의 모두 다 그와 나 사이의 재현이다. 그가 오케이 해야 나도 그를 안을 수 있다. 그럴 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나는 녀석과 판박이다. 그는 그걸 조절하느라 애를 먹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모텔로 가고 싶어하고, 급기야 그가 내 목줄을 쥐면 좋아 안달이 나는 것을 그는 내심 즐기고 있다. 나는 그가 거부하는 게 무섭다. 우리는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곤 했다.
“안고 싶어?”
“응.”
“절실해?”
“응.
대개 그런 식이다. 자기가 먼저 안고 싶다고 말하는 법이 없다. 나는 그가 나를 안고 싶다는 뜻인지, 내가 안고 싶어 안달하고 있어서 내 의사에 따라 못 이기는 척 들어준다는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맞으면 안으러 가는 거고, 그렇지 않을 땐 퉁방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한술 더 떠, 그는 맨날 자기 몸만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고 빈정거리기도 한다. 나는 모멸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헤어질 때 편하기 위한 포석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난 당신을 사랑했다기보다, 당신이 원해서 들어준 것뿐이지. 그래도 그건 뜨거울 때 이야기고 이제 식었으니 각자 제 길을 가자고. 여하튼 그를 안으러 가는 길에 들어서면 그동안의 불만도 사라지고, 나는 내가 너무 쉽게 보이는 줄 알면서도 번번이 그가 하자는 대로 나를 내버려 둔다. 그게 슬프게도 그와의 섹스에 중독된 자인 내 역할이다. 내가 강산이 앞에서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건,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힘들었던 것을 녀석을 통해 해소하는 메카니즘 같은 것이리라. 그래도 나는 그를 안는 게 좋다. 그의 품에 안기면서 망가진 몸과 마음이 치유되어 왔다. 생명의 은인 같은 그 역시 나와의 잠자리를 싫어하지 않는다. 모텔로 가는 길은 매양 불륜의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경주이긴 하지만. 그는 가정과 나 사이에서 늘 망설였다. 우리는 만남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다고 믿는 편이었다. 지금 위안이 된다면야.
녀석의 이름은 강산이고, 흰색 진돗개다. 처음에 먹이를 줄 때는 무서워서 엉덩이를 한껏 뒤로 뺐다. 녀석에게 먹이를 몇 차례 주고 쓰다듬어 주곤 했더니 어느 날부턴가 꼬리를 흔들어 댔다. 체신 없이 구는 걸 보면 녀석, 잡종이나 똥개가 분명하다. 으르렁대던 것은 내가 무섭다는 소리였고, 주인에게 자기는 이렇게 열심히 집을 지키고 있다며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나는 개가 무서웠다. 아니 싫었다. 어려서 개에 물리고 닭에 머리를 쪼였던 기억 때문이리라. 새로 마련한 집필실 뒤쪽에, 우리 집 경계 안에 녀석의 집이 있는데, 실제 주인은 윗집 남자다. 목욕이나 예방 접종 같은 건 받은 적이 없어 보였다. 눈 밑에 진물 자국이 콧잔등까지 흘러내리고 몸 냄새까지 진동해서 곁에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흰색은 어디 가고 말 그대로 ‘비루먹은 개’라는 표현에서 한치도 틀리지 않을 녀석이다. 암내 때문에 더 그렇다고들 했다. 장갑을 껴도, 그 냄새 손과 몸으로 바로 옮겨붙는다.
녀석에게 산책을 시켜줘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측은지심에서였다. 녀석은 그저 연명이나 하고 있었다. 나도 건강을 잃어 비관적인 생각에 젖어 있을 때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성도 붙여줬다. 내 성을 따라서 이강산. 처녀는 아니라 했는데, 그 뒷얘기는 아는 바가 없다. 산책시키러 나가면 대략 1시간가량 녀석에게 끌려다니다 들어오는 데 그게 중노동이다.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차도나 인도가 아닌, 인적이 드문 산길을 택하기로 했다. 마침 집 뒤의 산 중턱에 버려진 시설물이 있었는데, 산길로 1km 남짓 숲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면 유적지처럼 나타난다. 그곳에서 잠깐 쉬고 운동장도 돌면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산책길에 들어서자마자 줄을 놓아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편했다. 녀석은 나름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는 나대로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2년 정도 지난 지금은 거의 힘든 줄 모르고 산 중턱까지 그곳에 이른다. 한두 번 쉬는 것도 녀석과의 호흡을 맞춰주기 위한 것이다. 녀석은 숲속으로 들어갔다가도 결국 내 곁으로 돌아오는데, 그때마다 내가 뺨이나 목 주위를 만져주면 신나서 다시 뛰어나가곤 했다. 나가기 싫어도 녀석 덕분에 운동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내 몸과 영혼, 어떤 게 먼저 탈이 났는지 헤아려지기 시작했다. 산보는 녀석이 저 세상으로 가기 전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려니 여겼다. 녀석이 내 동반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곤 했다. 이 가을, 녀석처럼 모든 것이 낙엽으로 바뀌고 있는데.
녀석에게는 트라우마가 하나 있었다. 계단 앞에서는 네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낑낑대며 불안해했다. 그러더니 나를 따라 몇 번 오르내리다가 지금은 자기 혼자 오르내리고 나면 내게 다가와 자기 잘하지 않았느냐고 으스댄다. 꽤 많은 이들이 휴식을 즐겼을 텅 공간, 팬데믹 때문에 폐장된 그곳에서 우리는 주변을 산책하거나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한여름과 겨울을 빼고는 아예 숲속으로 들어가 한두 시간씩 쏘다녔다. 모습이 안 보이면 더 겁을 내는 건 녀석 쪽이다. 특별한 냄새가 나거나 동물의 흔적을 쫓거나 할 때가 아니면 부르기만 하면 달려와서는 몸을 들이밀고 슬쩍슬쩍 혀로 낸 몸을 핥는데 그때마다 나는 몸을 뒤로 뺐다. 얼마나 핥고 애무받고 싶겠는가만. 녀석, 그런 상황에서 보통 눈을 아래로 깐다. 내가 그걸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자제하고 있다.
그리워하면 진다는 걸, 동정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도 녀석이 알 리가 없다. 네 손 안의 카드가 다 보이는데 무슨 재미로 너와 놀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사실 그걸 알면 뭐하랴. 잘 알면서도 나도 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데. 널 보고 있다 보면 내가 보인단다. 너처럼 나도 그 음악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다 들킨 채 여전히 그의 바라기가 되어 버렸다는 건 이미 고백하지 않았더냐. 아프기 직전부터 알게 된 그였다. 3년여 사귀었는데 그가 그만 만나자고 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된 이별 앞에서 한참을 서성일 테지만. 그저, 고개를 끄떡여 주었지만, 돌아서고 나니 보고 싶어 심히 괴롭다. 사실, 그동안 여러 차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별 뒤에서야 나는 카톡도 끊고 전화번호도 지워버렸다. 며칠 보지 못하면 애가 탔는데 못 본 지 이제 두 달이 넘어가고 있다. 그리움으로부터 멀리하는 게 담배를 끊을 때보다 몇 갑절 힘들었다. 강산이도 참는 걸, 나라고 못 견디겠냐, 마음을 다졌다. 그 역시 마냥 행복하다고 할 순 없으리라. 가정불화 끝에 별거하다가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심정이 어떨까. 마지막 뒷모습은 처연했다. 모두 지워야 했다. 사랑도 지나쳐 가는 인연일 뿐이고, 세상만사 마냥 흐르고 있지 않더냐. 이미 마음을 다잡았을 터, 그에 맞춰 나도 마지막 선물로서 내 존재를 흘려보내리라.
그런데, 이미 아무런 흔적도 없다. 정말 깨끗하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니 우리 둘만 입 다물고 있으면 영원한 비밀이다. 깨끗해 보여 좋은 듯한데, 그런 상항에 정이 가지는 않는다. 둘만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아픔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다. 살았는데 삶이 없다. 떠나는 사람은 그걸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남는 자의 몫이다.
그 누군가가 내게 넌지시 귀띔해 주었다.
이 사람아, 진심을 다해 보게.
그럼······
저 애는 한 사람 곁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한다네. 또 언제나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불안해 한다네. 현재가 없는 거지. 자네 역시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던 거네.
예, 짐작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더 잡아보지 그러나.
예······
위로가 되었다. 그 역시 흔들리고 있지 않겠는가. 입술을 깨물며 견뎌내고 있을 터. 아, 다시 안아볼 수 있으려나.
대화 파트너는 이미 오래전에 작고하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그들은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살고 있었다. 그렇지, 나 혼자라면 그토록 그를 향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리 없다. 내 의지는 상당히 강하다. 나 혼자 말라비틀어질지언정 그에게서 사라질 각오가 되어 있다. 강산이와 그 덕분에 내가 그동안 다시 회생한 것이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했다. 강산이를 향한 동정은 그에게서 받은 것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하다. 그들은 틀렸다. 그들은 사랑이 식어 떠나간 그를 다시 돌려세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미련투성이다. 그 미련이 내게 집중된 것이리라. 도저히 그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아, 그들에게 내가 물었다.
이제 저를 떠나주셔야죠?
산 자들은 너무 잔인해. 좀 더 자네 곁에라도 있으려네.
그는 이제 제 곁에 없어요.
우린들 어쩌겠나. 왜 모르겠나. 자네 생각이 옳으이.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 심정도.
······그런데, 왜?
자네가 있어 줘야 멀리서나마 그 애를 보고 듣고 느끼지 않겠나.
······
자네에겐 그 애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 말일세.
······
자네, 온통 그 애 생각뿐이지 않은가.
섬뜩했다. 흔적이 없어지리라 믿은 건 낙엽이 지는 것을 보고 울적해하는 감상적인 뭇것의 착각이었다. 그들이 나를 통해 세상에 두고 떠나온 자식을 지금껏 보고 만지고 싶어했고, 이제 남은 흔적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우리들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구천을 떠도는 자라면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을 터, 나는 망연자실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하도 이상해서 물어물어 무당에게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매서운 눈매로 나를 찌르듯 말하는 거였다. 이미 나는 내게 몰려드는 냉기에 몸이 오싹했다.
“어허, 발은 둘인데, 셋이 들어오네!
등골이 서늘했던 건 이유가 있었다. 근래 보았던 <잠>이라는 영화의 데자뷔였다. 윗층에 살던 할아버지가 아래층에 사는 젊은 새댁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죽은 뒤에 새신랑에게 달라붙어 고통을 치르게 한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만신을 통해 할아버지를 떼어낸다는 이야기다. 그 할아버지는 그동안 구천을 떠돌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내게 그에게 가보라고 여전히 채근한다. 사랑이 식었는데, 이미 이별했는데 주변에서 얼쩡거리면 치근덕대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겠는가.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조금 더 다가가면 접근금지 명령을 내릴 테고, 감정이 잘못 터지면, 또 더 나아가면 너 죽고 나 죽자고 칼을 휘두르는 세태가 아닌가. 나는 무서웠다. 양쪽에서 나를 밀어내고 있으니. 어떡해야 하나?
그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봤자, 이런 반응이 짜증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내 부모를 놓고 푸닥거리라도 하라는 거지요?”
나는 이렇게 답하리라.
“그럼, 나를 푸닥거리라도 해야······”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상이다. 그들은 내 예상을 못 들은 척하고 그저, 나를 무연히 바라다본다. 하긴, 보이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사정을 나는 그에게 아직 입도 떼지 못하고 있다. 아마, 냉정한 태도로 일갈할는지도 모른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도 모자라 별 해괴한 망상을 벌이고 있다고. 떠난 자, 가차없다. 그에게 내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건, 이미 유언장이리라.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괜찮아졌을까? 나는 새로운 샘물을 찾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내밀한 일, 그들과의 대화가 나의 하루를 연장시켜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영혼은 시름시름 다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 몸이 다시 망가져 가는 영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버틴다. 예전에 영혼이 몸을 살려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 반대 상황이 되자 몸이 배반을 시작했다. 몸이 그러니 영혼도 마음이 상했는지 삐친 표정이 역력하다. 예전에 몸이 자기를 껄끄럽게 대했던 것조차 앙금으로 남아 있는 것이리라. 몸과 영혼은 이제 등을 돌리고 삐걱대고 있다. 그 중간에서 나는 우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그, 나와 그들 사이에서. 내 발걸음은 정처없다. 그러면 그와 그들 사이는 어떻게 될까? 어떤 신의 한 수가 기다리고 있을까. 몸과 마음 모두,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잘 구슬리며 사는 것도 참 힘들다. 그저, 내가 그것들을 먼저 한꺼번에 쳐내는 날이 살금살금, 아니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그 흐름이 감지돼 망연하게 놀랄 뿐이다. 포기하자, 아니다. 쉽게 그럴 수는 없다. 그 생각도 나 아닌 것들이 하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소름이 돋는다. 강산아, 미안하고 고맙구나.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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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준
2014년 심훈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피시스케이프』. 번역서 『푸른꽃』, 『아이누신요집』, 『독일 낭만주의 이념』, 『독일의 질풍노도』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