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시절에 나의 집안에 경제적인 큰 문제가 발생 하게 되였다.
나의 위에 형님들이 고등학교 등록금을 제때 제대로 내지 못하고 중도에 자퇴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되였다. 당시 큰 형님께서는 김천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 위치한 경북대학교 법학과에 재학중인 상태에 있는 실정이라 당시 시골에 계시는 나의 아버님께서는 대구 중구 대신동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며 재정적으로 탄탄한 친척집에 부탁하여 큰 형님을 친척집에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대학교 공부 하도록 주선하여 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도리켜 생각해 보면 나의 아버님께서는 아들들이 공부 하는데 뒷 바라지를 너무나 무리하게 행사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시골 생활 형편에 자식들 등록금 수납 할때면 논 한마지기 씩 팔아서 등록 시키시고 하시면서 또 그 일들이 반복 되면서 가산이 탕진 되셨다는 생각이 난다. 큰 형님께서는 친척집에서 가정교사로 생활 하면서 고시 공부를 하였는데 그 당시 지방 대학에서 공부하니 고시에 여러번 실패를 거듭 하였다 형님께서는 고시 공부를 접고 경찰 간부 공무원 시험을 생각 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마지막으로 교편생활(영어 전공)을 끝으로 정년을 채우셨다.
우리 가정 형편이 기울어 지면서 나에게도 시련의 고통이 닥쳐 오면서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서글픈 시절이 닥쳐온다. 한 동안 잠시 방황 하면서 내가 막내로 태어난것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단다. 중학교 3년을 졸업한후 그 당시 대구에 계셨던 이모부님댁에 있게 되였다. 이모부님께서 경영 하셨던 시계점에 취업하여 산업전선에 첫 발을 내 딛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모님 댁에서 3년 정도를 열심히 시계 수리 기술을 습득하여 정상적인 시계 수리 기술자가 되였다. 나홀로 독립 하기 위하여 이모님과 작별하고 고향 김천으로 올라와서 김천 평화동에 있는 보영당(금,은,보석,시계)에 정식으로 취업 하였다.
김천 고향땅에 오면서 나에게 마음의 다짐을 단단히 하였단다. 내가 산업전선에 뛰어 들어 차근차근, 한발 한발,야무지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성공할수 있도록 노력 할 것을~~~
어느날 중학교 시절에 내 옆 자리에서 같이 공부 하였던 김상욱 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오랫만에 만나 반갑기도 하면서 무척 당황 스럽기도 하였다. 그 친구가 내가 근무 하였던 보영당 사장님이 그 친구 외삼촌댁 이라면서 우연히 뜻밖에 만나게 되였다. 이것이 무슨 운명에 장난 이련가 싶었다. 김상욱 친구는 서울대학교 기상천문학과 1학년 재학중 이라면서 여름 방학기간 동안에 잠시 김천에 내려와 외삼촌댁에 인사 하러왔단다. 어였한 그 친구의 모습을 보니 대견 스럽고 한편으로는 무척 부러웠단다. 그 친구는 학구파라 나만 만나면 진학 하여 공부하라고 성화 란다.
그 친구는 중학교 시절에도 공부를 잘 하였는데 꾸준히 열심히 하여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니 역시 나에게는 부러움의 대상 이란다. 나에게 다시 한번 다짐 해 본다. 그래 친구 너는 공부 열심히 하여 성공해서 사회에 이바지 하고,나는 열심히 돈을 모아 경제적으로 성공 하리라. 그런 와중에 우연한 기회가 생겨 근무지를 안동으로 옮기게 돼었다. 고향에 있어니 학창시절에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싫어서 인것 같기도 하였다. 같은 경북 이면서도 그 당시는 낮선 객지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동에 온지 얼마 되지않아 지금의 나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