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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樣年華의 季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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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이란 “ 榮辱의 삶 속에서 오고 또 어디로 흘러 사라져 간다. 또한 세월이란 永劫의 線上에서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자서전이란 명제를 말하기조차 미혹하지만, 지내온 삶의 끄트머리에 서서 省察과 補贖으로, 告白 聖事를 보는 심정으로 지내온 삶을 回顧하여 이 글을 쓴다.
나의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시! 상주시에서도 奧地에 속하는 중동면 금당리 235번지, 속명으로 “질 말”(길마을)이란 동네가 나의 安胎고향이다. 낙동강이 가로 놓여 상주에서는 “섬나라”라고 이름한 외진 곳이다. 東으로는 의성군과 서북쪽으로는 예천군과 접하고 있는 산골 마을이다. 금당리는 이웃 동네 “동작”과 “다래”를 합하여 “금당리”의 행정구역이다.
하지만, 마을 앞으로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그 갯가에는 복숭아, 살구나무가 있어 봄이면 도리행화(桃李杏花) 만발하여 홍난파 곡의 “고향의 봄” 노래만 불러도 아득한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잊을 수 없다. 또한 마을 입구에는 80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마을의 수호신으로 어릴 때는 매년 정월에 소를 잡아 제물로 하여 洞祭를 지냈으며, 단옷날에는 그네를 달아서 그네뛰기 대회를 열었던 곳이다. 아낙네들은 치마폭을 날리면서 담 넘어 있는 샘(우물)이 보이면 그네가 멀리 올라갔으니, 그네를 뛰면서 “샘 봤니”라고 하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바로 내 집 우물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에서 한 채 밖에 없는 기와집을 사 이사 오고, 살던 집은 형님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이곳 느티나무 아래에는 여름철엔 어른들의 쉼터였고,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다. 지금은 아이들이 없으니, 어른들의 쉼터일 뿐이다. 느티나무는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여름이면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비하면 인생 100년도 수유(須臾) 이던가! 그리고 뛰어놀던 뒷동산, 물놀이하던 앞 시냇가, 비가 많이 와서 홍수로 집안이 온통 물바다가 된 일들, 앞동산에 모여 단체로 줄지어 학교 가든 追憶은 그때 그 시절에만 있었던 풍경이리라. 질 마을(길마을)에는 礪山(여간)宋가 일족만으로 60여 호가 30 世를 이어져 사는 전통적인 씨족 마을이다. 씨족사회의 단면은 이웃하고 있는 “신암리”에는 순흥안씨 집성촌이며 웃마을 “다래”에는 “김 씨”의 집성촌이다. 그래서 모두가 할아버지, 아저씨, 형 조카 등 혈족으로 항렬을 이룬다. 항렬로 돌림자는 증조부는 “會”. 조부는 “必”. 父는“燮 또는” 達“字를 썼으며 나는”善“字이니 할아버지께서는 끝 자” 祥“字를 제게 지어 주시어 내 인생을 宋善祥으로 살아오게 하였다. 농촌의 생활은 농사가 전부였으니 당시로서는 가난을 면치 못했을 뿐 아니라 春窮期를 겪어야 하는 困窮한 생활 그 자체였다. “동무 동무 씨동무 - 2 -
보리가 나도록 사세”라는 노래를 부른 것도 그때쯤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동네 공사”라 하여 마을 총회가 열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크게 싸우듯 고함 요란하여 회의 진행도 무질서 하여 서로자기 주장만을 앞세우다보니 결론없는 말 다툼으로 회의를 끝내곤 하였나 보였다. 어린 나에게 비추어진 단상이다. 닷새 만에 한 번씩 열리는 시골 장날에는 별 볼 일 없이도 장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이 장가니 거름 지고 장관 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듯 이웃집 “철수” 할아버지는 “라이터 돌” 사러 장 간다고 하며 사람들은 놀려 대곤 하였는데 아마도 장날이면 으레 두루마기 걸치고 장 보러 다닌 것이다. 또 看過 할 수 없는 장면은 장이 서는 날 저녁 풍경이다. 해 질 무렵 장을 보고 돌아오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취객들의 행태 또한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요란스레 소란을 피웠다. 평소 삶에 지친 촌부들은 술의 힘을 빌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술 좋아하시던 아저씨 할아버지들 육십도 되기 전에 일찌감치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음력 정월의 세시 풍습은 일 년 중 가장 풍성하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농악놀이였는데 꽹과리, 징, 북 등 악기가 동원되어 동네는 시끌벅적 큰 잔치를 벌인다. 아이들 좋아라! 그 뒤를 따르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福을 빌고 豊年을 祈願하는 한바탕 풍악 놀이를 펼친다. 농악꾼 중에는 재주가 뛰어나 열두 줄 상모 줄을 돌리는 것은 단연 인기 독차지다.* 할머니를 추억하다.
나에게 있어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거의 없다. 아버지가 나의 배다른 형님을 낳고 또 여자아이를 출산 했다는데 아마도 출산과 함께 아이도 아내도 잃어버린 슬픔을 겪었다. 그래서 막내아들인 나의 아버지를 돌보느라 할머니는 우리 집에 계셨고. 나는 아버지가 서른여섯 살 나이에 태어나 온갖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
내가 아장아장 걸을 나이에 할머니 등에 업혀 놀다가 입에 물고 있든 꼬챙이에 찔려 울었던 기억은 어렴풋하다. 할머니는 朱 씨 집안에서 시집와서 할아버지 宅號를 “반말에”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할머니 사시던 동네의 俗名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네다섯 살쯤 되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喪輿가 집을 나가 저만치 갔을 무렵 울면서 뒤 쫓아갔는데 고종사촌 누나인 “순자” 누나가 나를 업고 달래준 기억은 아득한 전설이 되고, 나의 할머니는 지금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잊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할머니 산소에 벌초하고 성묘하기를 나의 할머니에 대한 작은 孝心이라 생각되어 實踐하려 자기만 맘대로 되질 않음은 나의 정성이 부족함이라 자책하곤 한다. - 天主敎 信仰과 幼年 시절 - 할아버지는 30대 나이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아버지에게서 들어 왔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세례를 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할아버지는 삼 형제분이었는데 위로 형님이 한 분 있으며, 아래로도 동생이 있었는데 형님인 큰 할아버지는 상주시니, 근교에 살고 있었는데 아마 형님으로부터 세례를 권유받으시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먼저 세례를 받고 큰할아버지가 나중에 세례를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할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거의 같은 무렵에 세례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형제를 비롯하여 자녀들은 당연히 세례를 받았으며, 할아버지 출생이 1870년생(?)으로, 어쩌면 30세 되시기 전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해 본다. 나의 아버지가 1906년생으로 幼兒 洗禮를 받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의 가족들은 아들 며느리 할 것 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교리 공부는 물론 신앙생활로 엮인 가족공동체로서 정서적으로도 信仰은 중요한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 바쁜 농번기에도 주일(主日)이면 할아버지 사랑채에 모여(30~40명) 주일 첨례(瞻禮)를 바치곤 하였으며 겨울철에는 사랑방에 모여 “要理問答”(교리서의 하나)을 외우느라 골몰했다. 글 모르는 며느리가 시집을 오게 되면 할아버지 사랑방에 와서 늦도록 한글 공부(당시에는 언문이라 함)를 해야 했다. 어머니께서도 무학이었지만 한글을 어느 정도 해독하신어 그 긴 기도문을 잘 잘도 암송했다. 저녁기도는 식구들 다 함께 잠들기 전에 했는데, 기도 중에도 졸음이 와서 꾸벅꾸벅 졸기 일수 였다. 특히 아버지는 舍廊 채에서 나와 함께 기거(起居) 하였는데 새벽 일찍 나가서 소죽을 끓이면서 아침기도를 하곤 하였는데. 새벽의 고요를 깨우는 祈禱 소리는 나의 자장가였으며 아버지를 追憶하는 鄕愁로 남아있다. 주일마다 公訴(공소-神父가 없는 곳)에는 기도문 朗誦이 이웃에게 들릴 만큼 크게 들려서 이웃 비신자들은 “신구 믿는 소리”라 비아냥대기도 했다. 공소에는 신부(神父)가 없기에 봄가을로 판공성사(判功聖事)를 하였는데 그때 공소신자(公所信者)들은 큰일을 치르는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擦考라 하여 교리시험을 구두로 치려는 형식으로 교리에 대한 지식을 묻는 것이다. 어른, 아이 다들 가슴 두 근 하여 신부 앞에서 초조했던 것은 아득한 그때의 초대 교회 풍습으로 신앙생활의 한 斷面이었다. 나는 신부가 오는 날에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신부님의 뒤를 따라다녔다. 왜냐하면 신부님은 사냥총을 가지고 와서 뒷산으로 사냥하러 가곤 하였다. 물론 저녁때에 가서 “판공성사”를 주었으니까, 또래 사촌들과 함께 꿩사냥 하는 신부님의 뒤를 쫓으며 한 마리 잡기를 기대해 보지만 잡은 기억은 없다. 판공성사가 끝나고 저녁에는 어린이들을 불러 놓고 “나비야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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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리 날라 오너라”의 동요를 가르쳐 주시던 그때의 기억은 아득하지만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信仰生活 속에서 자란 나로서는 객지 생활인 중학교 留學 시절(고향 집에서 40여 리 떨어진 상주시내) 에서도 週日이면 성당에 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때 堅振聖事(견진성사)를 보았다. 견 견성사를 집도한 이는 대구교구“서정길” 대주교였는데 키는 육척장신에 깡마른 체구로 주교 복장으로 미사를 집전했던 모습은 한마디로 偶像이었다…. 철없던 나이에 견진성사가 무엇 인도 모르고 성사를 보았으니, 지금으로는 가당찮은 일이기도 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원서를 서울에 있는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에 지원했다. 시험일을 며칠 앞두고 나보다 13살 위 형님께서 나의 하숙집으로 오셨다. 그 당시 사촌 형님께서는 面議員을 하셨고, 정치적으로 천주교 탄압이 심했던 터라 큰집에는 경찰서의 형사가 거의 날마다 찾아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집안의 동태를 살피곤 하였다. 이에 怯을 먹은 형님은 신학교 가는 것은 집안에 큰 禍가 될 것이라고 만류하셨다. 나 역시 신학교에 대한 進學의 확신이 없었기에 쉽게 형의 뜻을 따라 시내 가까운 고등학교로(지금의 상주대학) 진학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온 신앙의 뿌리는 130여 년의 시간 속에서도 綿綿이 이어져 와 후손들은 물론 많은 지인들로, 하여금 신앙으로 인도 하였으며 몇 해 전에는 從孫 子가 神品을 받아 聖職者가 되는 榮光도 얻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사랑채에 書堂을 열어 젊은 청소년들에게 천자문, 소학 명심보감 등 가르쳤다. 내가 유치원 다닐 나이쯤 되었을 무렵 할아버지 서당에는 글 읽는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웃 몇 개 동네에서 젊은이들이 몰려왔으며, 수업료로는 여름철에는 보리 한 말, 가을에는 나락 한 말 정도였다. 저녁 후에는 손자들을 불러 천자문과 붓글씨를 가르치시곤 하였는데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들에게 먹(墨)을 갈게 하거나 담배를 넣는 일을 곧장 시켜서 나는 먹 가 는 것이 엄청이나 지루하고 싫었던 것이었다. 천자문을 공부할 때도 붓으로 쓰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공부가 끝나고 나면, 으레 숨겨둔 과일
(배,감)이나 먹을것을 주셨는데 나보다 2살위인 사촌형을 더 많이 챙기곤 해서, 어린 나이에 기분이 별로 였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사촌집은 사는게 우리보다 어렵게 지내는 것을 어여삐 본 모영이다. 나는 6-7세 무렵 천자문을 다떼고 나니 어머니 께서는 책걸이 떡을 해서 할아버지 서당으로 가져왔다. 그이후 할아버지 서당에서 더 이상 배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또 할아버지 년세도 80고령이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국어 시간에 한글을 가르쳤는데 이 시간은 나에게 엄청이나 지 - 5 -
루하고 따분한 시간이었다. 천자문을 다 외운 것은 한글 공부도 덤으로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국어 시간은 또래들과는 배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삼 학년 때 8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 소꿉친구들- 날이 새면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이란 한 살 위 혹은 아래 형 조카들이다. 놀이터는 뒷동산, 앞 시냇가, 겨울철이면 앞 논에서 얼음지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손에 凍傷 걸리기도 하였는데, 동생과 함께 늦도록 스케이트 타고 와서 화롯가에 손 녹이니 손이 뚱뚱 부어 凍傷이 甚
해져서 아버지는 온갖 민간요법으로 동상치료에 고생 하였다. 콩주머니에 넣기도 하며, 소의 胃 주머니에 담그기도 하였지만 완치되지 않아 손가락이 굵어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원인지 동생은 관절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새로운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新東국민학교”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남쪽 동네는 신암리, 동쪽으로는 우물리(이곳은 하회 류씨가 살던 곳), 그리고 북쪽의 내가 사는 금당리이다. 아마 금군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인가 했지만, 금 굴은 없는가 보니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우물리에 사는 친구들은 학교에 올 때 “자라”를 잡아 오기도 하였는데 강을 건너서 오기 때문에 강가에서 잡아 온 것이었다. 학교생활은 즐거운 놀이터였지만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가서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수꼴을 뜯는다거나 소를 몰고 소먹이로, 들로 가는 것이 유일한 일손을 돕는 것 중의 하나였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수꼴을 베여오거나 소먹이로, 야산으로 가서 방목하였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집으로 오는 것이다. 우리 집 소는 큰 황소로 아주 잘생긴 멋진 놈이었는데 친구는 자기 소가 더 좋다고 자랑하다 그러면 싸움 붙여 보자고 해 정말 “청도 소싸움 못지않은 싸움을 붙였는데 결과는 친구 소가 도망가 승리의 기쁨을 맛 보았다. 친구는 나보다 한 살 위였는데 싸움도 잘하고 친구들 사이에 대장 노릇을 한터라 그날은 자존심이 엄청이나 상했는지 애무한 소에게 화풀이로 회초리로 갈기며 사라졌다.
학교에서 2km 떨어진 곳에 비행기 사격장이 있었는데 비행장 가까이 사는 친구들은 그곳에 가서 美軍 人들이 쓰다 버린 물건들을 가끔 보여 주곤 하였는데, 도루코 면도날이라든가 쪼크렛, 껌 등 생활용품들을 가져 오기도 하였다. 가난한 시절이라 그들이 쓰다 남은 것도 한국 사람 둘에게는 당시에는 귀한 것들이었다. 어느 날 安某 한 반 친구는 조그만 쇠뭉치를 가져와 두드리다 폭발해서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후 담임 선생님은 비행장 근처에 가는 것을 말라셨는데, 어느날 낙동강 모래 사장에 경비행기가 불시착 하여 점심시간에 7-8명이 구경갔다가 돌아와 담임 선생님께 엎드려 뻣쳐해서 엉등이를 몽둥
-6- 이로 두들겨 맞은 것은 “선생님 무척 禍 많이 나셨구나 ” 돌이켜 보면 철없든 시절이였다. * 나의 아버지 ! 나의 할아버지는 슬하에 사남삼여를 두었는데 나의 아버지는 네 아들중에 막내로 태어 났으며 위로는 형님 세분과 누나 한분이다. 아래로 여동생 두분이 나의 고모님 되는 분으로 “예천고모”님과 “풍양고모”이다. 우리들(사촌들) 끼리는 그렇게 고모님의 호칭을 불렀고, 언제나 다정하게 이뻐해 주시는 고모님을 잘 따랐다. 어느날 사촌 누나인 “정선(선숙)”이 누나는 나보다 4-5세 위인데 십여리 이상이나 되는 풍양 고모댁에 놀러 가자는 것이였다. 나는 그냥 철없이 따라 나서 고모댁에로 간적이 몇 번이나 된 듯 하다. 그때마다 고모님은 몇푼의 용돈을 주었는데 우리는 그 돈으로 가게에서 군것질을 하거나, 포켓 깊숙이 간직 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사촌누나는 고모님의 용돈 주시는 것 때문에 고모를 잘 따른것도 같다. 장터 입구에 자리한 고모님댁은 시장보러온 사람들과 장사꾼들이 오고가는 길목이어서 장날이면 더욱 붐비는 곳이다. 구석에는 마소들이 꼬삐메어 여물통을 흩고 있는가 하면, 대청 마루 봄볓에는 아지랑이, 벽에걸린 괘종 시계는 정오를 알리는데 열두번의 치는 소리를 나는 세워보고 시계가 신기하기도 했다.
또 예천의 큰고모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불행한 젊은 시절을 사신분이다. 20세쯤 결혼 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 고모부가 돌아 가서 靑孀寡婦로 살게 되었다. 생계가 막막한지라 친정집에 자주와서 도움을 요청 했는데, 아마도 나의 아버지께서도 사랑하는 여동생의 안타까움 때문에 물심 양면으로 약간의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내가 세네살 무렵 고모님의 외아들인 고종사촌 형님은 방학동안은 으레히 외갓집인 우리집에서 보냈으며 심지어는 대학(고려대학교) 친구들까지 데려와 며칠간을 묵고 가기도 했다. 대학 등록금 때문에 고모는 아버지께 많은 도움을 바랐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모님은 집에서 밀주를 담가서 파는 술장사를 하였는데 술단속을 나온 술조사원이 들어 닥쳤으나 마침 방학이라 집에 내려와 있던 고려대학생 아들을 보고 그냥 돌아 갔다고 하는 逸話는 대학생인 형님의 간곡한 설득인지도 모른다. 든든한 아들 하나를 둔 고모님께서는 얼마나 자랑 스러워 했을까 ! 홀로 아들 하나만을 믿으며 온갖 어려움 다 겪고 살아온 고모를 나는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시로서는 서울대학교 보다 더 인기 있었던 고려대 학생을 둔 어머니는 어려움도 어려운 모르고 아들 잘둔 즐거움으로 살았으리라 여겨진다. 시골 촌놈이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학위와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아들을 둔 엄마로서 외 아들 홀로 키우며 많은 모진 고생 그 얼마나 컸을까 ? 그래서 나의 고모이기전에 한 여인으로서 삶이 존경스럽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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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울 某 대학의 敎授에서 대학원장으로 퇴직 할때까지 고모는 평생을 한번
도 아들집에서 신세를 지지않고 고향 예천에서 구십세를 넘기면서도 정정하게 사시다가 타계 하였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아들에게 신세지지 않으려고 홀로지낸 어머니의 표상을 나의 고모에게서 본다. 타계 하기 십수년전 80고령에도 친정조카를 찾아와 이틀밤을 보내고 가던 뒷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모 두를 다 주고 간 것이다.
아버지는 누이동생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형제지간의 情 또한 남달라서 가난했던 둘째 형님과의 사랑은 “管鮑之交”이상 그것이였다. 큰 아버지는 젊은 시절 附子(부자)를 잘못 복용 해 하체가 痲痺(마비)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형님(나의 큰아버지)의 온갖 수발을 들게 되었는데, 원거리 갈려면 말꼬삐잡고 말에다 형님을 태워서 마부일 하였으니 힘든일을 할때마다 직접 와서 도와야 했기에 다른 형제들보다 함께한 날이 많았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손재주가 뛰어났던 큰아버지는 목수 일뿐 아니라 金銀 細工일 대장간 풀무에서 연장 만드는 일등 뛰어난 재주꾼였다. 그래서 큰 아버지 댁은 많은 사람들로 언제나 붐볐다 하지만 가난은 면치 못하여 아버지는 가끔씩 보리쌀이나 밀가루 등를 가져다 주었다. 때로는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함께 가기도 하였는데 아버지에게 나는 특별히 귀한 아들이였으리라.
* 李 相三 선생님을 追憶하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삼학년 교실, 라이락 향기 풍기는 따스한 봄날, 쉬는 시간이라 창 밖을 보고 있노라니, 멀리 운동장안으로 멋진 청년 한분이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 와 교무실로 들어 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분이 나와의 오랜 因緣을 맺게된 이상삼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좀 늦은 나이에 대구 師範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학교로 첫 부임 하시게 되었는대, 나와는 4학년이 되어서야 담임으로 뵙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20대의 멋진 청년 선생님이 셨다. 학교에는 여자 선생님도 한분 계셨는데 예쁘긴 하지만 정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교장선생님과는 잘 만나는 듯 했지만 멋쟁이 이선생님과는 거리를 둔듯보였는데 어느날 이선생님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 선생님을 좋아하지도 않을뿐 아니라 다소 경계의 대상인 것처럼 네게 얘기한적이 있다. 해가 바뀌어 4학년이 되었을 무렵 선생님은 우리 동네,나의 옆집에 방을 얻어 自炊를 하게 되었다. 자취 생활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선생님이 손수 자취생활 하는걸 안타까이 본 나의 부모님은 우리집에와서 기거하라고 청하여 흔쾌히 허락하였으며, 어머니는 빈방을 내어 주었다. 식사는 거의 나와 겸상을 했는데 처음에는 불편 했으나 선생님은 언제나 편안하게 대하여 주었기에 잘 지낼수가 있었다. 학교에 갈때는 으레 도시락 두 개를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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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교무실에 갔다드리고는 했으며, 학교를 마칠때에도 선생님의 이런 저런
심부름을 하며 기다렸다가 함께 귀가 하곤 하였다. 선생님은 언제나 내 이름을 끝자 한자만 “祥아 !”라고 불러주어서 더욱 情感을 느끼게 하였다. 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동화 이야기라 든가 만화에서 본 애정 스토리도 들려주었는데, “난 옥 씨 백년을 같이 살아요! 아니요, 천년만년을 ! ” 이렇게 애정 섞인 만화 이야기를 자주 해 줄 때는 홀로 외롭게 지내는 청춘이 쓸쓸해 보이기보다는 나와 놀아주는 시간이 즐거웠다. 내가 어렸으니까! 앞집에 사는 “옥화”와 나는 같은 반이라 자주 만나서 선생님의 자취방을 방문 하였는데, 그때 아이오딘화는 제법 살림할 줄을 아는 소녀였다. 그래서 선생님의 방 청소도 하고 반찬도 챙겨다 주고는 하였다. 어느 날 선생님이 심한 몸살로 누워 앓고 있었는데, 나와 옥화는 뜻밖의 병시중을 맡게 되었다. 선생님 홀로 自炊 방에서 앓고 있는데 대야에 물 떠와 수건으로 적시어 이마에 대고 열을 식히고, 간병을 극진히 하였다. 선생님은 며칠간이나 앓고 나서 쾌차하였는데 언제나처럼 옥화를 이쁘해 주셨다. 옥화는 나의 앞집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서 어머니에게도 이쁜 소녀였다. 뜨개질 솜씨가 있어 겨울철에는 양말을 떠 주기도 하고, 방학이 되어 집에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와서 많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寸數로 따지면 姪女 벌이지만 우리는 소꿉친구였다. 세월이 흘러서 그때의 옥화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봐도 알 길이 없으니, 맘속에만 남아있는 추억 속의 소녀일 뿐이다. 옥화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酒癖이 심하여 아침 밥상을 마당에 팽개치기 일쑤였으니 어린 옥화는 어머니 마져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숱한 설움 견디며 살아온 착하디착한 어린 소녀다. 옥화의 마음 ! 그 상처 얼마나 컸을꼬! . 하지만 밖에 나와서는 그런 티 하나 없이 밝은 모습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내가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할 따름이다. 풍문에 의하면 시집가서 서울에 살고 있으며 남편 잘 만나서 열심히 살아온 덕에 아주 부자로 잘 산다고 한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릴 때의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니 ? “ 언제나 성실했던 옥화는 잘 살 거야”라고 믿어본다.
내가 육 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인사 발령을 받고 “낙동 서부 초등학교”로 轉勤을 갔다. 선생님과의 이별은 나뿐 아니라 반원 전체가 설움과 아쉬움으로 惜別의 情을 나뉘었다. 그 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선생님의 고향인 낙동면 용포리 골짜기를 찾아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는데 차도 다닐 수 없을 만큼 오지 마을이었다. 사모님은 나를 따스하게 맞아 주었으며, 손님으로 맛있는 음식과 친절로 대해 주었다. 그토록 대구 시내로 轉勤 오고 싶으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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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지만 끝내 尙州 시내에서 교직을 끝으로 停年을 마쳤다. 오랫동안 소식을 끊
고 지내든 어느 날, 내 나이 오십팔 세일 때다. 초등 동기생인 여자 친구가 선생님의 근황을 알려 왔는데, “대구의 가까운 병원”에 무릎 수술받고 입원 중이란 것이었다. 너무 반가워 단숨에 달려가서 오십여 년 만에 재회의 기쁨을 가졌다. 金一封 외에 과일 등으로 예를 표하니 선생님 또한 깊은 感懷에 할 말을 잊은 듯 한동안 손만 잡고 침묵이 흘렀다. 이게 선생님과의 마지막이었다 몇 번의 전화를 했으나 목소리 들을 수 없었으며 다만 사모님과 통화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요양병원에 계신다는 것이었다. 나의 腦裏에는 언제나 멋진 모습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잘도 보듬어 주신 恩師님이었으며 때 묻지 않는 교육자로서의 表象을 보여 준 분 이였다. 作故 하였으리라 생각되지만 내 마음에는 언제나 나의 스승으로 남아있다. 마음으로라도 삼가 선생님의 靈前에 꽃 한 송이라도 올려 드리고 저세상에서 회복하시라 冥福을 빌어본다.
* 나의 형님 - 나의 부모님은 膝下에 3남3녀를 두었다. 위로는 나보다 열세살이나 많은 형님이, 아래로 여동생 셋에다 남동생 하나로 1950년대 출산율로 는 적당한 자녀를 둔 가정이다. 산아제한 없던 시기라 십남매를 둔 가정도 허다했던 때였다. 그야말로 여자는 결혼하고 나면 십수년동안을 출산의 연속이라 할수 있었으니 그 고통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부모님은 여느 가정처럼 자녀들을 성장기에서부터 출가할때끼지 온 정성다해 자녀들 뒷바라지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 하면 농사일이나 하든 시절에 상급학교 진학시켜 뒷바라지 하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아버지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尊敬하고 싶은 表象이 였으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模範을 보임으로서 자녀교육을 실천하신분이다. 형님은 아버지의 첫 장가를 가서 얻은 아들이며 나를 비롯한 아우들은 아버지가 상처를 하고 새 장가를 가 얻은 자녀들이다. 어머니는 시집와 첫 번째 자식이 나이고 두세살 터울로 여동생,남동생 또 여동생 둘을 두어 우리는 오남에다 배 다른 형님을 포함해 삼남 삼녀가 되어 대가족이 되었다. 형님은 내가 여섯 살 무렵 결혼하였는데 형수 되는 새색시는 쪽두리를 쓴채 연지 붉게 바르고 큰방에서 고개 숙여 있었는데 잔치손님 틈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수님은 결혼후 일년만에 첫 친정을 가게되었는데 십여리나 되는 시골길을 내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무슨일이였는지는 알수없으나 새댁이였던 형수님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고개를 넘고 또고개를 넘어 친정집이 가까워 왔을 무렵 갑자기 형수님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철없던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왜 울까 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 그리운 부모님 생각에 감격의 눈물일거라 세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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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른 뒤에야 알 것 같았다. 초등학교 2학년 되었을 때 아버지는 형님 대신 새로
집을 사서 분가를 했다. 그 집은 동네에서 한 채뿐인 기와집이었으며 대문도 대갓집처럼 큰 대문이 달려 있어 사람들은 대문집, 혹은 기와집이라고 불렀다. 또 형님은 체구가 다구 지고 성격도 원만하여 어린 동생들을 잘 챙겨 주었는데 특히 나에 대한 애착이 크셨던 것 같다. 물론 장가를 간 후로는 슬하에 자녀들이 생기고 나니 나에게서 점점 멀어 지기는 했지만, 형제지간의 우의는 남들 못지않게 두터웠다. 하지만 성년이 된 후로는 賭博에 빠져 부모님의 속 썪이는 날이 많았다. 농한기가 시작될 즈음이면 또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다니면서 화투 도박을 하였는데 농가의 토지 문서를 놓고 벌일 정도로 그 규모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라 만치 대단한 것이었다. 동네에서만이 아니고 이웃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하는 遠程賭博으로 하루가 멀다고 꼬박 날이 새는 경우도 많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도박 빚을 갚아주느라 나락 두지(벼 창고)를 열어 절도(?) 행각을 벌여야 했다. 당시 도박은 어느 농촌 할 것 없이 성행하였으나 나라에서도 도박 단속은 있었으나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였다.
아버지 還甲 잔치를 하루 앞두고 형님과 사촌 형, 그리고 나, 셋이 시골 장터에 가서 돼지 한 마리를 사 리어카에 싣고 오는 도중에 “미주 굴”이란 동네 주막에 들른 형님은 또 도박꾼들과 어울려 한판을 벌인 것이다. 해가 저도 오지 않자 찾아갔더니 돈뭉치를 앞에 두고 열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만두고 가자 했지만, 형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한동안 잠잠했지만, 완전히 도박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병역 문제로 신체검사에서 乙種 불합격을 두 번 받고 그다음 合格통지를 받았으나 忌避하는 바람에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날마다 형사가 찾아와 아버지를 못살게 굴기도 하고, (이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이리저리 탐문하기도 하였지만 형님은 낮에는 뒷산에서 밤이면 몰래 집으로 들어와 불안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逃避 生活은 1961년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國土建設 隊에 입대하여(철도 공사) 나라 부역 일을 하고 나서야 병역의무를 마칠 수 있었으니 병역 문제로 십여 년간을 맘고생, 몸고생하며 사신 것 같다.
이후 가정생활뿐이 아니고 동네에서도 열심히 한 젊은 시절을 보내셨다. 기계에 손재주가 있었던 지라 여름철이면 양수기 고장으로 형님을 부르는 곳이 많아 바쁘게 다녔고, 그로 인해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위 탈꼬 맞아 생겨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통통 방앗간을 운영하였는데, 동네는 물론 이웃 마을에서도 찾아와 방앗간은 成市를 이루었다. 하지만 통통 방아는 잦은 고장을 일으켜 수리하느라 고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촌과 나는 사랑채에서 함께 기거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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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이면 드럼통에 수수료로 모아둔 쌀을 몰래 퍼다가 이웃집 구멍가게에다 주고 군것질을 하기도 하였지만 한 번도 아버지나 형님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형님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 농촌에서 유복한 노후를 보내었다.
* 나의 학창 시절 * 초등학교 입학은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전쟁 후라 폐허가 된 교실은 초가지붕으로 가을이면 동네마다 공동으로 지붕이어서 교체일을 했으며 교실이 부족해서 칠판을 들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나무 그늘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담임이셨던 姜 선생님은 “ 이렇게 고생해서 공부하여도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나올 수 있다.”라고 하신 얘기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생생하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우리 반에서 언제나 일등을 한 安ㅇㅇ은 서울 명문대학교 교수로 또 다른 金ㅇㅇ은 지방대학 학장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옛것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만,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지식은 어둡다고 한 말이, 나이 들고 보니 딱 맞는 말이다. 내가 복지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강의하는 나 역시도, 수강생들 또한 한두 번의 강의로는 한쪽 귀로 들으면 다른 한쪽 귀로 빠져나가는 잠재 기억 능력이 떨어져 있음을 절감한다. 그래서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들 하는가 보다. 그러나 꾸준한 학습으로 두뇌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퇴보는 안 되게 현상 유지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중학교는 고향에서 40여 리나 떨어진 읍내로 가게 되었다. 상주중학교. 나의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 중학생 시절이라 남다른 애착과 함께 많은 추억을 있게 한 곳이었으며 수업 시간마다 다른 선생님들과의 만남도 즐거운 시간이었으며 새로운 친구들과의 사귐도 고향 시골과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校歌는 歌詞부터 마음에 다가와 입학식, 졸업식 때 외에도 자주 불렀다. “ 천봉산 빼낸 정기 온전히 타고 尙州 伐 첫 마루에 터전을 잡아 單成으로 이룩된 學園尙中에 높은 이상 품에 안고 모여든 우리 씩씩하게 바르게 배워 나가자. 한배 님의 거룩한 피 물리어 받고 새로 산 이 나라의 선구자 되고…? ” 교가는 교장으로 계셨던 김철기 교장선생님이 작사하였고, 작곡은 음악 선생님이셨던 “김삼수” 선생님이 곡을 붙였다. 교장선생님은 내가 입학할 무렵 전근 가셨고, 음악을 가르시던 김삼수 선생님은 졸업 때까지 週 한 시간의 音樂을 지도 하였는데 나는
선생님의 음악 시간이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헤어스타일은 예술가 머리로 長髮을 하였으며, 키는 팔척장신에 꾸부정한 모습으로 지휘봉을 잡고 학생들을 자기도 하여 주셨다. 주로 외국민요를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음악에 소질이 없어 선천적인 音癡에 가까운 나에게는 그래도 그때 배운 가곡이나 외국 민요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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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도 즐겨 부르곤 한다. “산타루치아, 돌아오라 쏘렌토로, 이목동아, 메기의 추
억, 스와니강, 켄터키 옛집, 가고파” 등 많은 곡을 지도해 주셔서 음악 하면 잊을 수 없는 恩師 중의 한 분이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선생님은 젊은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교직을 그만두시고 대구로 떠났다는 것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40대의 젊은 교사와 어린 여학생과의 로맨스는 사람들의 指彈을 받기도 했지만 두 사람만의 뜨거운 사랑을 제삼자들이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나는 국민학교 성적이 뛰어나서 중학교 입학금도 면제받아 입학하였는데 학급의 석차는 5등을 넘어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항상 5~6등의 순위를 지키며 부모님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갔다. 가난한 농촌의 출신인지라 처음 두 달은 먼 친척 집에서 下宿을 하다가 고향 친구를 만나 함께 自炊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학교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네였는데 어린 나이에 밥하는 것부터 불 때는 것 모두가 서투른 생활이 계속되었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 뭘 먹고 학교 다니느냐?”라며 거의 날마다 반찬을 조금씩 갔다가 주시곤 했다. 반찬은 거의 없이 밥과 김치 혹은 고추장이었으나 때로는 콩 반찬을 해와서 많이 먹었는데 영양실조가 되니 얼굴에는 버짐이 피어나고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어느 날은 기운이 없고 머리에 열이 심하게 나는 바람에 결석하였는데 담임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뇌염이 유행하던 시기라 걱정이 되셨나 보다. 나는 班에서 키가 좀 큰 편이라 운동은 못 하지만 운동하는 친구들이랑 잘 어울려 다녔다. 그중에는 교내 기계체조 선수·육상선수가 있었는데 삼 학년이 되어서는 이 친구들의 하숙집이나, 학교 서무실 등에서 밤늦기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자취 생활은 중2 때까지 이어져서, 주인댁 식구들과도 친분이 쌓여 갔을 무렵 저렴하게 하숙하라는 제안에 감사히 받아들여서 졸업 때까지 한식구처럼 지낼 수 있었다. 주인 아들은 나와 동갑이었으나 한해 선배였으며 생일이 정월이라 나보다 먼저 학교에 입학 하게 되었다. 나와는 친한 친구로서 언제나 친형제처럼 중학교 생활을 보냈다. 주인아주머니도 나의 어머니와 동갑이셨는데, 친절하고 사려 깊은 분이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두어 번 하숙집에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귀한 손님 대접을 받으셨다. 주인아주머니는 서둘러 술상을 준비해 아버지께 손님 대접에 정성을 다해 주셨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주인 아주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친절함에 칭찬을 아끼 않으셨다. 누구나 하숙생활의 에피소드와 추억은 있겠지만 거의 삼년이란 긴 시간을 한집에서 보낸 다는 것은 한 가족이 되었으며, 때로는 가까운 산으로 가서 버섯을 따기도 하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 주곤 하여 남의 집 같지 않는 하숙집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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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는 “規律”이란 제도가 있어 “ 학생 선도”를 하였는데 나도 “규율”에
뽑혀 3학년 내내 규율부 학생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학생 지도과장 선생님은 규율의 선발기준을 성적과 품행이 우수한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서, 아마도 선생님 보시기에 나를 착한 학생으로 보았던 같다. 규율의 활동은 주로 아침 등교 시간대에, 교문에 서서 학생들의 복장 단속이나 질서 등을 지적해 주어 시정토록 일러 주기도 하고, 지각생에 대한 단속이었는데 후배들은 규율 앞에서는 쩔쩔매기 일쑤였다. 졸업 후 대부분 진학하는 학생들은 서울 쪽을 가고 지방으로 가는 경우는 성적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 도깨비에 대한 斷想 - 어린 시절이라, 저녁을 먹고 나면 으레 동네 나들이 하는 게 일상이었다. 특히 동지섣달 겨울철 긴 밤이면 만만한 친구네 집 호롱 불가에 삼삼오오 모여 놀았다. 특별한 잡기(오락)도 없이 온갖 얘기로 밤 깊은 줄 모르며 노는 날이면 친구 어머니의 성화로 끝이 난다.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무서운 도깨비 이야기로 우리들의 흥미를 끌어내었다. 누구네 삼촌이 늦은 시각 시장을 다녀오다가 도깨비를 만나 “여기는 물이니 옷을 걷어라.” 하면 가시밭길로 끌고 다녀서 온통 상처를 입고, 밤새 끌려다니다가 닭 우는 소리에 놀란 도깨비에 풀려나와 새벽이 되어서 기진맥진하여 돌아왔다느니, 또한 도깨비한테 홀려 다니다가 참재 꼬리로 꽁꽁 묶어 잡고 보니 빗자루 귀신이었단다. 빗자루 도깨비 귀신은 피묻은 빗자루가 도깨비로 변한다고 한다.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네가 불을 지필 때에는 빗자루를 깔고 앉는다. 이때 그날이 되는 여성에서 피를 묻혀서 빗자루 도깨비 귀신이 나온다고 한다. 나는 어린 시절 한참동안이나 이 도깨비 귀신에 시달려 왔다. 특히나 비바람 부는 날 밤에는 화장실 가기가 너무도 무서워 어머니를 대동하고서야 볼일을 보기도 하였다. 도깨비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중학생이었던 그날도 도깨비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自炊를 하던 때라 매주 토요일에는 집으로 와 일 주간의 양식과 반찬을 가져가는 생활을 하던 터라 버스에서 내려 10리를 걸어가야 집까지 갈 수 있었다. 같이 오든 친구들은 다들 가버리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는 혼자가 되어 밤길 산골짜기 외길을 걷는다. 겨울철은 일찍 어두움이 찾아와 칠흑 같은 밤이면 도깨비 나올까 봐 두려움이 앞을 가린다. 큰 용기를 내어 길가의 창 돌을 주워 들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 본다. 건너편 언덕에 어두움 속에서도 힘 이양 허수아비 물체가 나를 위협해 온다.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전신에 땀으로 긴장되는 순간 나뭇가지 위의 흰 보자기를 보았다. 순간 긴장이 풀리고 속옷은 땀으로 젖었다. 도깨비는 일생 동안이나 내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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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처음 원서를 내었던 경신고등학교(소신학교)를 포기하고 지방에 있는 전통 있는 농잠 학교에 원서를 내었다. 농잠 고등학교는 일제 강점기부터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역사 깊은 학교다. 농업 학교였지만 대학 진학률도 높아 서울 명문대 입학생도 있었고, 특히 육군 사관학교와 공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많았다. 육사 재학생이던 선배는 휴가 중
모교에 들려 육사 생활에 대한 얘기를 하였는데 식사는 “직각 식사” 말에 웃음이 나왔다. 공군 파일럿으로 공군에 근무하는 선배는 학교 상공을 비행할 때면 간단한 선물을 학교 운동장에 낙하시키고 가기도 하여 담임 선생님은 졸업생들을 자랑스럽게 여겨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던 나에게는 멋진 육사 생도의 유니폼과 깔끔한 몸매에다 자신 있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 엄청이나 부러워 보였다.
고등학생이 되어 정들었던 중학 시절의 하숙집에서 복용동 최 모색으로 옮겼다. 이유는 학교가 멀기 때문이었으며 고등학교의 새로운 친구가 생겨서 같이 하숙 하기로 하였다. 이 집은 某신문 지국을 하고, 나의 고등학교 동창회장댁이었다. 가족으로는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 두 분, 노처녀로 인물이 미인인 따님, 유치원생인 손자, 손녀가 사는 대가족이다. 아들은 두 분이었는데, 두 분 다 군인이었다. 당시 큰아들은 육군 대령, 작은아들은 육군 중위였는데 가끔 집에 들리곤 하였는데 인물이 잘생기고 품격을 갖춘 덕망이 있어 보였다. 주인아저씨는 첩을 두어 한집에 살고 있는데 가정의 주도권은 업되는 분이 쥐고서 가정을 통치하는 것이다. 본처의 손자 손녀도 본인이 끼고 큰방을 차지하고 호령을 한다. 그러나 가족 중 누구도 불평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 내 눈에는 너무나 이상할 정도였다. 본처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한다. 가족뿐 아니라 하숙생들의 식사 준비까지 하는 것이 완전 하인이었다. 성품은 착하고 마음 여린 여인이다. 외동딸 또한 엄마처럼 순하며 착한 데다 완전 미인이라 어쩌다 방 청소를 하러 오면 한참 누나뻘인데도 여성의 매력을 풍겨
주었다. 때로는 남자 친구 얘기라던 지, 애인과 여행한 추억담을 들려주곤 하여 그저 흥미 있게 들은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하숙집 아저씨를 만났는데 “아들 보러 간다” 하시며 아들이 “대구의 00부대장”이라며 자랑삼아 내게 도움을 주겠다는 언질까지 주었지만, 그 뒤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다. * “도시락 절도사건과 우정”- 점심시간이 되었다. 하숙집에서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펴보니 몰래 누군가가 다 먹어버렸다. 장난이었으나 너무나 화가 났다. 짐작이 가는 반 친구를 추궁하는 바람에 한바탕 교실 안은 소란했다. 상대는 나보다 두 살 위였고 복싱선수로, 품행이 별로 좋지 않은 L 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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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나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왜소한 상태라 일방적으로 한방을 얻어맞았다. 이에 격분한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그를 상대해 주었고, 창 너머 도망가는 것까지 추격했으나 잡지 못하고 수업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할 수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의 중재로 도시락 촌극의 한판은 마무리가 되었다. 이 일로 인해 L 군은 점점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왔으며 심지어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집까지 놀러 오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당시 나는 중학생·초등학생 두 명을 가르치는 알바를 하고 있었다. 평소 운동을 하며 불량 학생으로 인식되었던 터라 거리를 두었었는데 가까이 지내다 보니 성실하기도 할 뿐 아니라 순수한 인간미가 있었다. 수업 중에 몰랐던 문제를 물어보기도 하고 함께 공부하는 성실성도 있었다. 때로는 자기 집에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내어놓기도 할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 파티할라치면 으레 나를 불러 주었고, 단둘이서 선생님 댁을 방문 하여 많은 조언과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학교생활뿐 아니라 교외에서도 함께 생활하는 단짝이 되어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특별한 우정을 쌓아 갔다. 졸업 후 그의 성품대로 경찰이 되었고, 정년 이후에는 고향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도 참으로 많지만, 출생의 인연을 빼고 나면 학연의 만남이 커다란 업보가 아닐까 ! “소매 끝만 스쳐도 五百生의 因緣”이란 부처님의 말처럼 우리는 날마다 많은 인연을 맺으며 살고 있다. 일생을 살면서 초중고 대학을 합치면 16년을 학교에서 많은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직장에서 30년을 보내고 나면 인생 후반 30년을 살면서 또 다른 만나게 되지만 인생은 홀로 왔다가 외롭게 홀로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흙에서 나와 다시 한 줌의 부토로 돌아가 자연과 합치한다는 평범한 자연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 해군사관학교에 응시한다. - 입학시험이 다른 일반 대학보다 빠른 시기에 치러진 해군사관학교에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원서 입시요강도 까다로워 지역
유지 3명의 추천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유지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동창회장, 경찰서장, 그리고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시험을 치르게 된
데 학과 시험 전에 미리 체력 단련 실기시험을 치러야 했다. 사전에 충분한 입시 정보를 파악하지도 못하여 준비도 안 된 상태라 힘든 실기시험을 치렀는데, 50m 달리기 왕복 6회 300m를 달리는 것으로 기록적 수안에 들어야 했다. 부진한 점수를 알면서도 필기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렸지만,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모든 일에는 충분한 사전 정보와 지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경험이었다. “知彼知己면 百戰不殆”란 손자병법의 교훈을 - 16 -
되뇌어 본다. * 4H 농촌 계몽운동에 힘쓰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농촌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체력으로나 성향에 맞지 않아 힘든 일이 많은 농사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대안이 없이 그대로 시간은 흘러갔다. 부모님께서 고등학교까지라도 시켜 주신 것에 감사드리지만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암울한 시기를 보낸 것이다. 때는 5.16 직후라 새마을 사업이 전국 곳곳에서 성행되고 4H 운동이 확산하여 농촌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농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젊은 피가 일기 시작했다. 우선 새줄은 정보와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농촌 계몽운동과 그 과제 등에 관한 공부에 전념했다. 농촌진흥원에서 일 주간의 교육을 받고 돌아와 동네의 젊은 청년 20여 명을 규합해 4H 클럽을 조직하고 작은 일부터 하나씩 해 가기로 하였다. 주인 없는 야산을 개간하여 소득을 창출하기도 하고, 동네의 새마을 사업에도 일조하는 등 활성화를 가져왔으며 매월 마을회관에서 정기 모임을 하고 변화하는 농촌 건설에 우리만을 가꾸기를 위한 세미나도 열었다. 그러나 가을 추수가 끝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중 고등학교 동기생인 H 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 준비를 하고 있으니 한번 내려오라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 대구시 동구 신암동 언덕배기 판잣집에서 자취하며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모처럼의 만남에 반가움의 회포를 소주잔 기울이며 밤새는 줄 모르고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상의하고 진학하라는 허락을 겨우 받아내고 며칠 후 4H 클럽 회장직을 부회장에게 넘기고 미련 없이 친구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신암동 언덕배기 판자촌에는 집집마다 수도가 없어 동네 어귀에 있는 공동수도를 사용하였는데, 물 바에서 들고 물 받아오기가 여간 어려움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이면 물동이가 2~30개씩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되면 받아오는데 동네 처녀들이 많아 부끄러워 물 받으러 가기가 싫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
짱이 늘어 눈인사도 나누게도 되어 물동이 나르는 일도 예사로워졌다. 학원에 등록하고 강의를 듣는데도 전쟁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은 시간에는 뒤에서 서서
들을 정도로 입시 학원은 성시를 이루었으며, 이름있는 강사는 수강생으로 넘쳐 흘렀다. 나는 필수과목인 영수 두 과목을 신청하여 수강하였는데 일 년 동안 책을 덮어둔 상태라 입시를 위한 정리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 친구와 나는 Y 대학, K 대학에 입학하여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 대학생이 되다.- 1964년 봄 입학식을 마치고, 전공과목인 경제학과 선배들로부터 신입생 환영회를 시작으로 낯선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교양학부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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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의 시간도 낯선 풍경이었으며 교양 영어 Freshman English 시간이 비로소 대학 신입생임을 알려 주는 신호였다. 전공과목에서 내가 감당하기 힘든 과목은 경제 수학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수학 시간은 참으로 힘든 과목이었는데 또 어려운 수학 공부를 해야 한다니 나는 수학 머리가 되지 않음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수학 머리(두뇌)와 어학 머리로 구분되며 또 수학 어학 다 잘하는 머리가 있다고 한다. 두 가지를 다 잘하는 두뇌를 가진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 나는 어학 분야에는 좀 소질이 있나 보다. 고등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는 언제나 수업받기 시작과 동시에 나에게 먼저 리딩(Reading)을 시켰으니까!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여 보니 공부 잘하는 반 친구들에 비하니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영어 실력이 말이 아니다. 어려운 영어신문을 들고 다니며 해독할 정도였으니 나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는…. 경제 원장 시간에는 ( 원어 교재 수업) 모르는 단어가 페이지당 수두룩하였으니 콘사이스 찾기가 바쁠 정도로 시골학교 출신은 우물안 개구리 였음을 실감하게 하였다. 분발 하여 겨우 따라 가기는 하였지만 성적은 B학점 이상 맞아본 적은 없다. 대학생활은 써클 활동으로서 각종 동아리 모임을 가졌는데, 12인 클럽(12인당이라고 함)에 반 친구 소개로 들어가 선배들과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12인 클럽은 각 학년마다 12인으로 구성 되어 4학년 까지 48명이었다. 따뜻한 봄날 전당대회를 한다고 모였는대 법학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사회의 여야 정치인들의 전당대회를 모방한듯한 모습이였다. 선배중에는 재건학교(불우학생교육) 교장을 비롯 글쓰는 시인( ?), 총학생회 간부들이 있었다. 그들중에는 뒷날 신문사 사장, 중견 기업체 사장, 시의회 의원등 지방에서 알려진 인물들이 나오기도 했다. 대학생활은 강의시간외에 도서관(주로 시험기때)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끼리 술파티로 나름대로 개똥철학을 운운 하면서 논제를 정하면 열띤 토론으로 술자리는 길어져 갔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의 야망과 꿈을 향한 넑두리 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省察 하자면 미래를 위한 좀더 치밀한 설
계와 좋아하는 전공을 찾아 邁進하지 못한 후회스러움 또한 크다. 누구나 인생을 다시 살라하면 지나온 과거처럼 어리석게는 살지 않으리라고 말하지만
막상 그때가 오면 어떻게 잘 할수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철학자 키엘케골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란 책에서 “ 그대 결혼 하여 보라 그러면 후회 할 것이다.그러나 결혼하지 않아도 후회 할것이다” 라고 한 구절은 인생을 어떻게 살면 지혜롭게 후회 없이 살수 있을까 하는 명제는 소인들에게는 그 答을 칮기가 쉽지만은 않다. 대학생 들의 단골 술집이 있었는데 동인동의 “둥굴관” 횟집,그리고 옛 l 군인극장 옆에있었던 “돌채”가 젊은이 들의 아지터 였다.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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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젊음이 있고,철학이있고,사랑이 있고,낭만이 있었다. 돌채의 여사장은 “魚頭鳳尾의 철학을 설파 한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이 무었인가? 그것을 놓지면 후회할것이라고 ” 맛 중에서 물고기는 머리가, 새중에는 꼬리가 맛의 으뜸이란 것이다. 무엇이 인생에서 으뜸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얘기인 것 같다. 인생을 살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엄청이나 괘도를 달리 할것이기 때문이다. 좀더 높이 날수 있는 나래를 펴지도 못하고, 뜬 구름 잡으려는 부푼 꿈의 망상으로 많은 소중한것들을 잃어버고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문득 1960년대 思想界 잡지에 실린 詩句가 생각난다. “저 멀리 하늘의 파돗 소리 들리는 근처에 무었인가 所重한 물건을 나는 잃어 버리고 온 모양이다. 透明한 過去의 停車場에서 遺失物界 앞에 섰더니 나는 도리어 슬퍼지고 말았다”
* 수성못에서 만난사랑 ! 중간고사를 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친구와 수성못 가는 버스에 올랐다. 날이 가물어 수성못의 물은 매말라 물한방울도 없이 바닥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못안 바닥을 걷고 있는 여학생으로 보이는 여인을 보았다. 원피스 차림의 여인은 알맞은 키에 늘씬한 몸매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나는 주제 넘게 말을 걸었다. “왜 못안에 들어가 괜찮느냐” 며, 하니 미소를 지어며 “자기도 시험 끝나고 울쩍하여 나왔노라”며 솔직한 대화가 쉽게 이루어져 집으로 오는 버스를 같이 타게 되었으며 나는 하숙집인 사촌 형님 댁이 있는 동인 로터리 내리고 그녀는 지저동이 집이라 헤어지게 되었다. 며칠 후 초인종이 울려서 형수님이 나가 보았는데 뜻 밖에도 그녀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 어떻게 된 일이냐 물을 것 없이 그녀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동촌의 방천을 걸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집은 내가 버스를 내려갈 때 몰래 함께 내려 알아 두었던 것이라 했다. 나에 대한 관심이 컸는가 보다. 그때 나의 사촌 형은 가축병원을 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많은
사회활동을 한지라 인맥이 넓혀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도 나의 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며, 그녀의 할머니와 언니들도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 집과
상호 통하는 부분이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글 쓰는 솜씨가 뛰어나 신문에 그녀의 詩가 실리기도 하였으며, 가끔 멋진 글솜씨를 보여 시적 감각이 있는 편지 보내오기도 하였다. 여고 시
절에는 규율부장을 할 만큼 활달한 성격으로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아 친구들의 모임에 나를 초청 하기도 하였는데 친구들과 내가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본 후로는 한 번도 나를 불러 주지는 않았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 후 그녀의 편지를 모두 불살라 버리는 통에 지금은 追憶 속의 여인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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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만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입대하게 되었다. 외로운 군 생활 속에서도 나에게 오아시스가 되어준 것은 오로지 잊지 않고 정성으로 보내준 그녀의 편지였다. 사랑의 스토리를 엮어가며 세상의 뉴스에서부터 학교생활까지 많은 것을 알려 주었는데 “누구누구는 결혼했다”는 대목에서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졸업하면 결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부모님이 혼사 문제를 거론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월남에서 귀국하여 잔여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면회를 왔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입대 전보다 성숙해진 그녀의 모습에서 멋진 여인상을 보았다. 그녀는 결혼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부모님이 결혼하라는 것이었는데 나의 의중을 물어왔다. 결혼이란 나에게 있어서는 저만치 멀리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법한 얘기인데 나는 어쩌란 말이냐?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남은 군 생활을 마쳐야 했고, 학교도 마쳐야 했으며, 또 취업도 안 된 미숙아가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앞날이 너무나 멀기만 하였다. 그 뒤 장문의 편지에 솔직한 내 심중을 담아 보냈다. 찻집에서 마지막 이별의 커피를 마시면서 3년이란 절대 짧지만은 않은 惜別의 情을 나누게 되는 아픔을 안고서, 사랑보다 더 큰 우정이라 변명이라도 하며 아픈 가슴을 달래야 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옛사랑이 더 애틋한 그리움은 追憶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닐진대…. * 625의 피난길 斷想 ! - 초여름 어느 무덥든 날이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부역 일을 나갔다가 일도 하지 않고 돌아오시어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야 한다고 하셨다. 다음날 큰아버지 댁에서 돼지를 잡아 몇 집이 나누어 먹고 피난을 각기 알아서 피난길에 올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물어보았더니 우선 尙州를 벗어나 義城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돗자리 하나를 들고 나섰으며, 어머니는 출생한 지 두어 달 밖에 안된 어린 동생을 보자기에 싸서 안고 삼십여 리 떨어져 있는 외갓집으로 산을 넘고 넘어 찾아가 방 한 칸을 빌렸다.
외가에는 우리 말고도 두 집이 더 와서 시끌벅적하였다. 아버지는 밤이면 몰래 산을 넘어 마을 앞산 꼭대기에서 마을을 점령하고 있는 인민군의 동태를 살펴
는 게 일과였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피난 가시지 않고 집에 머물러 계셨기에 더 궁금해하셨으리라 생각된다. 외갓집의 피난 생활은 장기간 폐를 끼칠 수 없다는 판단에 선지 한 달이 채 되지도 않아 철수하여 집이 보이는 냇가 밤 숲으로 옮겼다. 채소밭 둑에 세 그루의 밤나무가 있었는데 여름이라 숲이 우거져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가족 여덟 식구는 이곳에서 취사는 물론 잠자리까지 해결하였다. 밤숲 옆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냇가가 있어 물놀이 겸 목욕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한번은 냇가에서 놀고 있는데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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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굉음을 내며 내 머리 위로 나는 게 아닌가! 놀라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는데 “엎드려 !”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어머니였다. 아마도 적군이 아닌가 해서 확인하려고 저공 비행한 듯 보인다.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던 때라 비행기 폭격하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불꽃과 함께 轟音을 내고 있었다. 625 전투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전투지역이 낙동강을 사수해야 하는 절명의 낙동강 전투와 다부동 전투를 꼽을 수 있다. 지금도 다부동 전투의 결전장이었던 유학산에는 전사자의 유골과 유품이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 가족들은 치열한 낙동강 전투 상황을 보면서도 보름여 만에 밤술 피난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인민군 소대 병력으로 보이는 패잔병(?)들이 총 개머리판을 질질 끌면서 지나기도 하고, 집으로 들어와 밥을 해 달라고 하였는데 그들의 이동 병역 숫자가 십 명을 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았다. 그를 때마다 이웃집 몇몇 집이 합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루는 느티나무 정자에 동민들이 쉬고 있을 때 인민군 몇 명이 쳐들어와 “저기 메어 놓은 소를 잡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 그소는 바로 우리 소였다. 소 주인을 묻지도 않고 총으로 살해하여 잡는다는 것이다. 이에 놀란 아버지는 사정을 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어쩔 수 없이 堂叔 父 댁에 있는 송아지로, 대체 하기로 합의를 보아 송아지를 대령하게 되었다. 무덥던 어느 날 아버지는 들에 물꼬를 보러 갔는데 지나가는 인 민군 일개 분대에 잡혀가 “기관총”을 메고 십여 리를 가다가 어느 동네를 지나가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돌아오셨다. 때는 戰勢가 인민군이 불리하여 퇴각하는 거로 짐작이 된다. 인민군 병사 중에는 총을 메면 총이 땅에 닿을 만큼이나 어린 소년들이 군의 동원 되어 앳된 얼굴도 많았다. 북한의 남조선 통일이라는 야욕 때문에 애꿎은 백성들만 희생되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피난 갔다가 한두 달 만에 다들 돌아왔지만 젊은 분 들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먼리 남으로 남으로 청도 밀양으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은 소식이 없다가 거
의 일 년이 지날 무렵에 돌아온 이도 있었으니 웃지 못할 풍경들도 많았다. 남편과 아내 따로 피난 간 떨이네 삼촌은 아내를 기다리다 재혼을 하는가 하면, 형제가 함께 피난을 갔다가 경찰서에 잡혀 현역 입대를 하여 가족들이 생사를 확인하느라 고심하던 중 군사우편 한 통이 날아 오는 바람에 한숨짓는 일도 있었다. 중학교 동기생 중 한 명은 아버지가 인민군의 앞잡이로 같은 동네 주민을 못살게 고발하고 재산을 수탈하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화가 난 동민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마치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을 보는 느낌이었다.
* 군인 아저씨가 되다. - 대학 2학년을 마쳤을 무렵 군 소집 영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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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군 기피 생활을 뼈아프게 보아온 나에게는 당당하게 병역의무를 해야겠다는 각오로 대구 00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하게 되었다. 까까머리 훈련병으로 입소 하던 날 낯설기만 한 연병장과 병영 막사. 호랑이처럼 날 세워 굳은 표정의 기간 사병은 신병들의 氣를 완전히 꺾어 주눅 들게 했다. 입소 하던 날 3소대에 배정되어 향도 및 분대장을 선임해 주었는데 나에게는 “향도”라는 직책이 부여 되었다. 소대의 반장인 셈이다. 첫날 밤이 되었다. 10시에 소등과 취침이다. 계급이 “하사”인 내무반장(반을 통솔하는 책임자)이 향도와 분대장을 기상시켜, 침상에 엎드려 “빳다”를 치는데 향도는 다섯 대, 분대장은 세 대를 맞았다. 어이없이 당하고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닿아와 있었지만 “이것이 군대로구나” 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 없는 폭력이다. 그런데, 잠시 후 자리에 앉히고 침상 아래서 막걸리 반 양동이를 올려 술 파티를 벌리는 게 아닌가! 당황한 나머지 무슨 일 이냐, 뭐 물었더니 “신고식, 매.이니 넘 맘에 담아 두지 말고 6주 교육 기간 간부로서 잘하라는 뜻이라며 우리를 달래어 주었다. 얼큰히 취한 상태로 첫날밤을 무사히 잘 지냈다.
향도가 하는 일 중에는 인원 점검부터 사역병, 취사병을 동원하는 것 외에 저녁 일석점호 보고였는데 네 개 소대장에서 내가 제일 잘한다고 기간 사병은 칭찬해 주었다. 입대를 호적이 나와 비슷해 같이 입대한 사촌 동생이 있어 걱정되었다. 동생은 1소대에 소속이었기에 소대 향도에게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하였다. 1소대 향도는 김 某某였는데 대구의 H 호텔과 H 극장 사장의 아들이었으며, 가톨릭 신학교를 다녔다는 후문을 들었는데 사실인지는 나도 모른다. 군대에 들어오면 다들 자기 집에 금송아지 있다는 자랑하는 자 많으니까! 그런데 6주간의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훈련병 생활은 익숙해져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식사에도 적응되어 군대의 누룽지에다, 도루묵국이나, 콩나물국도 맛 들여져 갔고, 어려운 사격 훈련이
나 각개 전투 훈련도 잘 소화해 내며, 6주간의 훈병으로의 생활이 끝났다. 情 들자, 이별이라더니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대로 머물고 싶을 만큼 동료들과도, 훈련장과도 깊은 정이 들었다. 드디어 퇴소식을 마치고 각자의 다음 교육장으로 命을 받아 떠나 들 갔다. 만남은 헤어짐의 약속이라 했던가!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듯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만남의 緣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다. 좋은 만남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이가 있는 반면에, 나쁜 악연의
만남으로 인해 인생을 그렇지는 예는 너무나 많다. 나는 육군 군의 학교로 命을 받았다. 일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낯선 부대로 들어 왔다. 안내병의 지시대로 숙소를 배정받아 마치 이방인이나 된것처럼 하루밤을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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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신고식을 마치고 군의학교 교육생이 되었다. 식사 시간에는 줄을 서서 식당으로 가면서 軍歌를 불렀는데 인솔자가 “군가는 < 진짜 사나이> ! 군가 시작”하면 노래를 부르며 식당으로 향한다. 이것 또한 일상이니 잘 적응되어 갔다. 교육은 학과와 실습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으며 학과는 교실에서 실습은 야외에서 하였는데 이곳의 교육은 훈련소에 비하면 紳士 생활이다. 간호학 시간에는 이뿐 간호 장교가 강의할 때면 다들 기분 좋은 표정이다. 얼굴도 예쁘지만, 탐스러운 耳目口鼻는 한창 물오른 여인으로 보였으니까! 적어도 청춘 교육생들의 눈에는 그리 했으리라. 야외 실습 시간은 응급처치나, 들것 훈련 등이었는데, 이 시간은 더 기대된다. 왜냐하면 휴식 시간이면 移動 주보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계란에서부터 찹쌀떡 같은 간식을 파는 민간인들이 교육장 가까이 접근해 와 장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교육생들에게는 반가운 존재가 되었다. 군의학교의 분위기는 마치 사회생활과 별로 차이 없는 듯하였는데, 토요일 오전 일과가 끝나고 나면 부대 내에는 면회를 온 민간인들로 붐볐다. 의무 사령부 내에는 관련 부대가 있었는데, 육군 군의학교를 비롯해 간호학교, 시험대, 간호장교 숙소 등이었다.. 특히 식당은 민간인이 부대에 들어와 운영하고 있어서 사회의 일반 식당과 다름없었다. 토요일 오후부터는 고기 굽는 냄새가 넓은 식당에 풍기고, 술과 함께 면회객들로 성시를 이루고 보니 이곳이 군부대인가를 錯覺할 정도이다. 하지만 월요일이 되면 분위기는 軍으로 돌아간다. 군의 학교의 피교육자 생활도 익숙해 갈 무렵이면 훈련소에서도 그랬듯이 6주간의 교육은 마무리가 된다. 충원이 하달된 곳 중에서 내가 원하는 곳을 선택하여 갈 수 있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졸업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사계 사병이 나를 불러내어 수도 육군병원으로 발령을 내려 하는데 어떠냐고 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알짜배기 희망지였으나 次順으로 00 통신부대 의무 중대를 희망 근무지로 선택받아 발령해 줄 것을 원했다. 원하던 대로 발령이 났다. 졸업식을 마치고 함께 교육받든 동기생들은 발령이 된 대로 각자가 자기 부대를 찾아 떠났다. 한강 이남은 단 3명뿐이었다. 대구에 있는 00 통신부대 전입 신고를 마치고 다음 날 또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대전과 광주 두 곳이었는데, 인사장교인 文某 중위는 같이 온 동기생을 대전으로 발령을 내는 바람에 나는 광주로 가게 되었다. 동기생의 姓이 文氏였기 때문이다. 대구 지역 사람들은 멀리 광주 가기를 엄청이나 싫어 꺼리는 곳 중의 하나가 광
주였다. 광주 “尙武臺” 하면 軍紀가 세기로 병사들 사이에는 이름나 있다. 陸軍 二等兵 초년병에게는 光州란 곳은 異邦人의 낯선 世上이었다. 이튿날 光州 行 버스를 타고 비포장 된 도로를 달려 춘향이의 고향이란 남원을 거쳐 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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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광주땅을 밟은 것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였다. 일과가 끝난시간이라 몇몇 병사들이 내게 다가와 新兵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꼬치꼬치 케어 물었다. “고향이 어디냐 ?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냐? 애인이 있냐? ? ” 그리고 신고식이라며 코끼리 쳇바퀴 도는 훈련까지 시키는데 군 생활의 自愧感마저 들었다. 선배 병사들이 후배들을 다스리는 방법은 모든 것이 선배들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군부대의 나쁜 殘在 物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日帝의 무력 통치로 시작된 사무라이 정신이 깃든 비인도적 弊習으로 보인다. 세월이 흘러 國軍의 나이도 七旬을 넘어 兵營 文化도 선진국 버금갈 정도로 刷新되었다니 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尙武臺 안에는 많은 군소부대들이 있다. 포병학교, 기갑학교, 보병학교. 그리고 군소 위성부대가 많아 전국에서 별(star)이 가장 많은 곳으로, 사령관이쓰리스타, 학교장이 준장! 이래서 합하면 십여 개가 넘는다고 하니 상무대 내의 軍紀는 으뜸이라고 소문이 나 있다. 한번은 외출을 나갔다가 복장 위반으로 헌병대에 잡혀간 일이 있었는데, 헌병대 취재 실의 높은 단상에서 몽둥이 들고 어를 능 거리며 위반하여 잡혀 온 병사들을 위협하는 그 헌병의 꼴이 마치 “일본 순사”가 죄인 다루는 모습을 聯想하게 했다.
* 한밤중에 일어난 下剋上 단막 - 光州에 온 지 4개월쯤 되는 어느 날 子正이 넘은 시간 증대 본부 내무반에는 십여 명의 병사들이 취침 중이었는데, 선임병 4~5명이 營外 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하여 전원을 起床시켰다. 팬티 바람으로 통로에 군번 순으로 집합을 시키고는 차례로 “배트”를 쳐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유 없는 트집으로 선임병으로서 위세를 후임 병사에게 보이려고, 또한 선임병의 위치를 굳힘과 동시에 잘 모셔(?)달라는 일종의 쿠데타였다.. 빳다는 내 차례까지와 나의 엉덩이를 힘껏 후려쳤다. 瞬間 하늘이 핑 돌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사물함의 야전삽을 잡아 “용서할 수 없다.” 대항하여 선임병
적지 역인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하기 전에 약품빽을 찾으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하여 이리저리 찾았지만 찾을수 없어서, 업무수행을 제대로 하지못한 책임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왔다. 군용 열차에는 이동헌병과 군의 중요한 문서를 전달하는 傳令이 항상 탑승하고 있었는데, 급히 전령에게 분실사실을 알렸더니, 전령은 이동헌병과 무었인가를 속삭이고는 내 약품자루를 내어 주는 것이 아닌가 ! 내가 속한 부대가 통신부대라 전령 또한 통신부대 소속이였으므로 정기적으로 한번씩 부대에 와서 봉급을 수령하기도 하고 출장업무 보고를 해야하는 임무를 가졌기 때문에 열차내의 문서 연락병은 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즉각 이동헌병과 상의 하여 처리 하여 주었던 것 같다.
移動憲兵의 임무는 병사들을 보호하고, 열차내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무가 있는데, 오히려 범죄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나 할까 ! 이러한 일들은 60년대 우리 軍隊의 自畵像이 였다고나 해야 할까 ?
* 戰爭터로 가다. - 1967년 화창한 봄날이였다. 광주에서의 軍생활 일년이 되어 갈 무렵이였다. 군장비(통신부대의장비) 검열이 있은후 수고 했다며 중대장은 며칠간의 휴가를 내어 주었다. 시골에 들려 부모님도 뵈옵고,친척들도 찾아 인사도 할겸 며칠을 머물다 대구에 오니 군부대에서 형님댁으로 연락이왔는대 빨리 본대로 복귀 하라는 것이였다.
휴가중에 대구 본부로 인사발령을 난 것이 아닌가 ! 내심 반가웠지만 이곳 광주에서의 병영생활도 보람을 가지며 동료 선후배들과도 情이 쌓여서 떠나기는 아쉬움이 많았다. 처음 광주행은 불안한 시작이였지만 일년이 지난 이제는 그런대로 할만한 소소한 일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역마다 다 그렇지만 이곳에 들어온 병사들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전라도 사투리와 전라도 동료 병사들과의 괴리감도 없지 않았지만 가까이 지내보니 또다른 매력을 주는 친구들도 많았다. 휴가를 다녀오면 맛있는 음식을 가져와 내무반에서 파티를 열기도 하고, 전라도의 풍물이라 든가, 학교(전남대) 다닐때의 써클 활동이며, 심지어는 여자친구 자랑등 깊은 우정을 나눈 기억속에 남아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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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전우들도 있었으니, 사람은 지역의 차별이 아니라 교감의 문제이며 소통의 문제일뿐이다. 情이 들어 갈 무렵 인사명령에 따라 이곳 광주를 떠나 다시 通信團 본부가 있는 대구로 왔다. 낯선 醫務小隊에 신고를 하고 새로운 병영생활이 시작되었다. 때는 越南戰이 절정에 있을 무렵이 여서 많은 병사들이 播越되어 월남전선으로 갔다. 특히 醫務병사들이 많은 差出로 越南戰에 가게 되었는대 보병 다음으로 많은 犧牲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병들과 생사를 같이 하면서 그들에 대한 응급처치를 담당 해야 했었기 때문에 보병들과 다를바가 없었다.
** 월남전에 자원하다**
醫務小隊에 오자마자 월남 차출에 소대에서 한 명을 보내야 한다는 군의관의 말을 듣고서 며칠을 고민하며 눈치를 살펴보았다. 다들 가기 싫어하는 것은 當然之事였다. 당시로서는 전쟁이 치열하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라 가족들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전쟁터에 보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눈치를 보니 금방 온 나를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제대가 몇 개월 남지 않은 古參 병을 보낼 수도 없었으며, 이등병 졸병을 보내기도 민망스러운 지경이 되었다. 다음날 나는 결심을 굳히고 “派越”하겠다는 선언을 의무 소대장에게 보고했다. 軍醫官인 의무장교 金大尉는 “큰 결심을 했다.”라며 위로해 주었다. 며칠 후 파월 장병이 거처야 하는 특별훈련을 위해 강원도 춘천을 지나 “오음리”라는 부대로 배속되어 갔다.
이곳에는 각 부대에서 差出되어 온 많은 병사가 새로운 출발을 위해 4주간의 특수훈련을 받는 곳이었다. 훈련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後輩期가 입소하여 循環的으로 훈련이 이어지는 것이다. 훈련은 09부터 18시까지로 마치고 영내로 올 때쯤이면 배고픔을 못 이겨 식사도 하기 전에 민간인 야전 식당에 가서 “라면” 한 그릇을 뚝딱해 치우고 식당으로 가서 배식이 된 식사를 한다. 라면이 처음 나온 때라 그것이 라면인지도 모른 채 口味를 당기는 신비로운 맛이었다. 훈련을 마칠 때쯤 월급은 일 년 치를 한꺼번에 수령하였는데, 이후 월남에서의 봉급은 미국에서 지급되기 때문이란 것이다. 공동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고 월남에서 입을 정글 복으로 갈아입었다. 훈련소의 위생 상태는 한마디로 빵점이라고나 할까
세탁하지 않는 모포와 침구는 이(lice) 득실거렸다. 또 다른 진풍이 있었는데, 부대를 끼고 장사하는 모든 식당은 거의 外商장사 여섯 훈련을 마치고 壯途에 오르는 날 (월남으로 출발 하는 날) 앞을 가리고 외상값 달라는 아낙들이 아우성을 치기도 했다. 가난했던 1960년대의 우리 군의 한 단면이었다. 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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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음리를 떠나 재(陵)를 넘어 수송 트럭을 타고 춘천역에 도착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춘천에서 출발하여 청량리역에서 20분가량을 머물러 있었는데, 사전에 연락을 병사들은 가족들이 창밖에서 준비한 먹거리를 창으로 넣어 주기도 하며,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르는 안타까운 장면이 이어졌다. 나의 부모님은 아들이 월남 간다는 소식도 모른 채 잘 계시리라 생각하며, 미리 부모님께 연락을 한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 아니라 달라질 것 또한 아무것도 없으니 굳이 알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舜天百姓으로 오직 농사만을 천직으로 살아온 농사꾼인 아버지께 미리 걱정을 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다.
날이 새자, 열차는 부산역에 도착, 이어서 부산 제3부두에 정박해 있는 25만 톤급 수송선에 올랐다. 오전 10시 환송식이 열렸다. 부산 시내 몇몇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 가족들이 나와서 석별의 환송식은, 여학생들의 “맹호부대 노래”를 열창하는 가운데 끝이 나고 배는 출항하였다.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맘 먹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 불효한 자식 부모님께 일자상서도 없이 먼 월남 땅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많은 병사가 다 함께 가고 있습니다. 다들 한 집안의 귀한 아들들입니다. 일 년간의 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몸 건강히 지내서 십이오”라는 짤막한 편지를 써서 수송선 내의 우편함에 붙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배는 한국 땅을 멀리 한 채 남지나 해협을 거쳐 필립핀 근해를 지난다. 갑판 위에 올라 보니 수평선이 원형을 이룬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바다밖에는 없다. 이따금 화물선이 밴 구동 소리 없이 지나고, 부둣가의 갈매기도 보이질 않는 그야말로 망망대해(茫茫大海)이다. 바다 구경 한번 못하고 자란 시골 촌놈이 처음 바다를 구경한 것이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거쳐 영덕으로 동해를 본 것이 고작이었는데, 이렇게 넓고 넓은 대양을 여행할 줄이야 생각만 해도 꿈같은 시간이었다.
선실(船室)은 4층 규모로 맨 아래층은 기계실이고, 나머지는 휴게실, 헬스장. 영화관이 있으며, 2, 3층은 침실과 식당으로 이루어져, 모든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식사는 밥과 양식 두 종류로 나왔는데, 아침은 빵과 계란 우유 과일 등으로 비교적 간단한 메뉴였으나 점심, 저녁은 고기와 밥이 함께 맛있는 음식이 제공되었다. 한국에서 먹던 것에 비하면 고급스러워서 만족한 편 이였다. 선실 내 PX(군영 내 편의점)에는 한국군 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일반 물건들이 있었는데, 일본의 소니, 내셔널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당시 인기 품목으로 우리 한국군의 눈길을 만족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PX는 직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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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만이 근무하는 슈퍼마켓으로 운영되는데 한국군 병사 한 사람이 실수하는 바람에 선실마다 경고 메시지가 날아왔다. 근무병이 모르는 줄 알고 물건을 슬쩍 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한국군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불상사를 가져왔다. 일주일이나 걸려야 도착 할수 있는곳을 이제 이틀 간의 항해로 인해 멀미를 심하게 하는 병사들이 늘어나자 “다 본”이라는 멀미약을 선실마다 나눠 주었는데 이 약을 먹고 나면 잠이 많이 와 침실에는 낮잠 자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멀미하지 않는 병사들은 영화관이나 헬스장에서 지루한 항해 시간을 보낸다. 나도 약간의 멀미는 했지만 견딜 만하여 갑판 위를 오르내리기도 하며 영화를 보러 한 시간씩을 보낸다. 밤이 되면 취침 시간을 지켜야 하지만 낮잠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 편지를 쓰거나 침실 동료와 앞으로 닥쳐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선배들로부터 주워들은 경험담을 통해 위로를 삼기도 한다. 지루한 항해는 일주일이나 걸려서 베트남의 남녘 항구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병사들은 다소 피로를 느꼈으나 새로운 환경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착잡한 심경들이었다. 월남이라는 나라는 그 당시 우리나라처럼 남쪽은 월남이 북쪽은 월맹이 차지하고 월남은 티우 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공산 월맹은 胡志明이 통치하고 있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월남전에다 많은 인적, 물적 지원을 쏟아붓고 빠른 시일 안에 전쟁을 끝내려 했다. 우리나라는 비전투요원부대인 비둘기부대를 필두로, 전투부대인 청룡부대, 다음으로 육군 맹호부대, 이어서 백마부대까지 많은 한국군이 증파되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성이 못지않은 전쟁터에서 죽고 사는 것은 兵家常事라 지만 멀리 이국땅에서 왜 싸워야 하며 또 싸우다가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意味는 무엇인가? 가난한 나라 백성이기에 남의 전쟁 대신하려 이곳에 팔려 온 것이 아닌가? ! 그래서 봉급은 나라에서 가져가고 일부만 지급했던 가난한 나라 백성의 설움이 아니었던가? !
** 전선에 투입되다**
월남의 어느 놈 쪽 항구에 도착하자, 대기 하고 있던 GMC 군용 트럭을 나눠 타고 이름 모를 시가지를 지나간다. 길거리에는 어린 꼬마들이 손을 흔들며 “시 가헤트 주세요” 혹은“조코렏 기브미”하며 손을 내밀면 우리 병사들은 한국에서 가져온 “신탄진” 담배를 던져 주기도 하였는데 이는 나의 어릴 적 自畵像이었다. 625가 끝나고 집 앞의 신작로에는 연일 미군용 트럭이 짐이나 장비들을 싣고 수십 대가 줄지어 지나간다. 차가 너무나 많이 지날 때면 신기하기도 하여 하나둘셋 하며 몇 대나 될지 세어보기도 했던 기억은 가마득한 옛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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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들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비행기 사격장에 근무하는 미군 병사들이었는데, 우리들은 미군 병사들이 천천히 지나갈 때면 “죠코랟기브미” 하며 손을 내밀었고 그들이 던져준 과자나 껌을 받아먹으며 즐거워했던 그 모습이 여기 월남 땅에서 나의 어린 시절과 다름없는 가난하고 헐벗은 고난의 시간이 재현되고 있음을 보고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월남적 등을 위한 훈련부대에서 적응훈련이 있던 날 훈련소장인 육군 K 중령은 이렇게 당부의 말을 병사들에게 전한다 “ 우리는 이국땅에서 남의 나라 전쟁하러 왔다. 따라서 죽지 말고 전원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기를 바란다”라는 격려의 말을 하였다. 다들 숙연한 분위기 속에 침묵이 흘렀다. 비로소 전쟁터가 바로 여기로 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이국땅 월남에서의 첫날밤이다. 나는 야간 전화 당직을 섰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포 쏘는 소리와 함께 야간 照明彈이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놀라고 두려운 맘이 들었지만, 여기는 전쟁터이니 늘상 이런가보다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날이 새고 이곳에 들어온 정보는 심각한 상태였다. 맹호부대 00중대가 베트콩의 야간 기습을 받아 상당수의 아군 피해가 발생하여 밤이 새도록 포사격과 함께 수색 작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전 10시 한 대의 쓰리고 타(4/3톤 승용차)가 막사 앞에 머물렀다. 잠시 후 의무병 3명을 호명하였는데 나도 이 3명 중에 포함되었다. 의무 병사 3명을 태운 인솔자인 듯한 부사관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인적도 없는 신작로를 한 시간여 달려 路上에서 야자열매를 파는 아낙네 앞에다 차를 세우고 야자열매 두 개를 사서 야자 수액을 맛보여 주었다. 열대지방의 뜨거운 날씨에 야자 수액은 그 맛이 시원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맛이었다. 월남 땅에 온 신병에게 베푸는 인솔 부사관의 작은 버려졌다. 점심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도착한 곳은 “송꺼우” 해변에 위치한 7,276부대(혜산진부대) 00대대 의무 중대였다. 인솔자의 안내로 간단한 점심을 먹고 나니 또 다른 곳으로 가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우리 3명은 각자 다른 보병 중대의 “義務兵”로 파견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7,276부대 제3중대의 1소대 의무병으로서 명을 받고 중대로 향하는 헬리콥터를 탔다. 월남은 야산이 많은 지형에다 베트콩의 기습을 피하기 容易한 곳에 한국군 步兵부대가 대부분이 높은 산 高地에 자리하고 있었다. 3중대는 송꺼우 해변에서도 멀지 않은 그 높이가 276m의 野山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걸어서 오르내리기에는 상당히 험준한 곳이다. 월남은 열대지방이라 열대성 침엽수종이 많아, 가시넝쿨을 헤치고 또 더위를 이기고 다녀야 하므로 埋伏(매복)을 위한 산길은 병사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오후 3시경이 되어서야 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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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부터는 3중대가 있는 276고지에 나를 내려 주었다. 부대 안은 寂寂(전적)한 분위가 감돌았다. 벙커마다 한두 명의 병사들만 보이고, 지금 “중대는 작전을 마치고 오늘 귀대한다”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으스스한 낯설고 다들 이사 간 집처럼 공허한 분위 그 자체였다. “과연 이 부대에서 잘 근무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作戰(작전) 갔던 병사를 실은 헬리콥터가 헬기장에 내리고, 대기하고 있던 각소래 요원들은 마중 나가 격려와 위로의 인사를 나눈다. 전투 상황은 내가 命 받은 소속된 1소대 소대장에게 전입 보고를 했다. 보병 소대장은 (의무 중대에서 보병부대로 지원파견 나온 병사) 수고해 달라는 격려의 말로써 보고를 마쳤다. 소대 본부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소대장 전령이 내 식사까지 챙겨 주는 바람에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위생병의 권위(?)가 보병부대에서는 귀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도 그를 것이 전선에서는 필요한 것이 약물이다. 한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비타민, 링거 주사, 위장약. 그리고 아프면 의무 중대에 일주일은 입원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귀한 대접인가 싶다. 저녁을 먹고 나니 여름밤의 시원한 벙커(토굴을 파 선생님 빽으로 덮음) 위에서 며칠간의 작전 이야기를 들려준다. 교전이 심해 아군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작전의 발단은 7,276부대 2중에서 일어났다.
** 그날의 전투 이야기 ** 내가 월남 도착 다음 날, 신병 교육장 상황실에서 야간 당직을 서면서 보았던 밤새 울렸던 포성과 불꽃은 바로 2중대 베트콩 기습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월남 전사에서도 기록될 만큼이나 대형 참사였으니 한국군에게는 치명타였다. 대부분의 한국군의 보병 중대는 야산에 본부를 두고 소대
병력을 분산하여 벙커를 자하에다 지어 막사로 사용하며 쳐두었으며, 철조망 밖으로 나가는 출입문을 만들어 밖에 있는 헬기장으로 나갈 수 있게 했다. 헬기는 병사들의 보급품이라든가 우편물 외에 병력을 수송하는 임무를 주로 하였는데, 헬기장으로 나가는 문은 필요시에만 열도록 했으나 거의 항상 열려 있었다. 하지만 해가 질 무렵이면 당연히 잠가 두어야 한다. 그날 2중대가 기습을 받던 날, 보초는 월남 신병(월남에는 25일마다 신병이 오고, 만기 근무자가 귀국함)이 서고 있었는데, 자정이 넘은 시각 베트콩은 팬티 바람으로 열린 문으로 유유히 들어왔다. 그러고는 수류탄을 잠들고 있는 벙커 안으로 던졌으니 그 인명의 피해가 얼마였을꼬? 글피 구국을 앞둔 부관은 베트콩이 침실로 들어와 벽에 걸어둔 카메라, 트랜지스터라디오에 탐내는 틈을 이용해 야전 화장실 상황 보고를 받은 똥통 속에서 목숨을 겨우 건졌다는 당시의 진술이었다. 상황 보고를 받은 포대와 관련 부대에서는 밤새 지원 사격으로 2중대 주변은 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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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化 되고 말았다. 베트콩을 확인한 步哨(보초)가 겁을 먹고 황급히 내무반에서 곤히 자는 분대장에게 달려가 “분대장님! 분대장님!”하고 소리쳤지만, 잠결의 분대장은 상황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가 아닐까? 특히나 그날은 내일 작전 출동이 예정돼 있어 술을 한 잔씩 하고 잠든 터라 잠에서 깨어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보초는 베트콩이 쳐들어오면 무조건 총을 발사했더라면, 자동으로 非常이 걸리고 狀況은 달라졌을 텐데 보초는 겁부터 먹고 내무반으로 도망쳐 왔으니, 慘劇(참극)이 더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현장을 지휘한 것은 중대장도 아니고 소대장도 아닌 부사관이었다는 후문이다. 월남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눈앞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보니 慘憺(참담)함과 緊張感(긴장감)으로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걷는 듯 지나갔다.
* 이발사 宋 일병의 죽음 - 큰 작전이 없는 날에는 중대 주위를 埋伏(매복)하는 그것이 일상이었다. 1소대에(義務兵) 배속된 나는 소대가 움직일 때마다 소대장과 함께 출동해야 했다. 소대장은 통신병, 의무병과 함께했으나 통신병은 소대장의 분신과도 다름없이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게 되어 있었으며. 무전으로 들어오는 상황 보고 및 소대장을 보필하는 일급 필수 요원이다. 그리고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병사가 있었는데, 바로 이발을 하는 병사이다. 우리 소대에는 宋 일병이 이발을 담당하여 그 인기가 꾀나 있었다. 누구나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송 일병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부탁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이발 경험이 있었던 宋 일병은 이발 솜씨가 남달라 중대장도 만족해 꼭 宋 일병을 찾아 이발하였다. 船室 안에서도 내게 남달리 친절하게 다가와 이발을 해 주겠다던 宋 일병이었다. 아마도 같은 宋가여서 이국땅에서 일가를 만난 듯 情感이 남달랐든가 보다. 월남에 도착한 지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우리 소대(1소대)는 埋伏(매복) 명령을 하달받고 座標(좌표) 00지점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두움이 막 내려앉을 무렵, 우리는 중대(276고지)에서 하산하여 밤이 점점 깊어 질 무렵 정해준 지점인 사탕 수수밭에 분대별로 埋伏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클레이모어”를 설치 하는 것으로, 클레이모어는 콩알만 한 탄알이 수백 개가 박혀 있어 터지면 엄청난 살상의 효과를 가진 탄약이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소대장은 장치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다시 한번 더 해 주었다. 네모난 클레이모어 탄알은 배에다 대고 딱 맞도록 하여 그대로 목표 지점에 설치하고 자리로 돌아와 스위치를 누르면 폭발하여 전방의 목포 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송 일병이 속한 분대에서는 클레이모어 설치가 정반대로 설치되어 있어서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자정이 넘을 무렵 사탕수수밭으로 들어 - 31 -
오는 기척 소리에 순간 클레이모어 스위치를 누르자, 커다란 轟音과 함께 작은 불길이 일어났다. 앞쪽으로 폭발해야 할 폭탄이 자기 쪽을 향해 터진 것이다. 월남의 초년병들에게는 충분한 월남 전선의 상황에 미숙하여 미쳐 대처하지 못한 사고가 되었다. 사탕 수수밭으로 침투한 멧돼지 소리에 놀라 스위치를 눌러서 일어난 사고이다. 宋 일병은 사망, 그 외 중상자가 두 명 더 있었다. 급히 무전을 쳐서 헬리콥터를 불러 후송시키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철수했다. 이때 宋 일병은 우리 파월 동기생 중 첫 犧牲者가 되었다. 그토록 다정했던 宋 일병을 잃은 소대장과 소대원 모두는 沈痛(침통)한 표정으로 귀대하였지만, 중대원들을 볼 면목이 없어 다들 풀이 죽어 있었다. 이날 저녁 중대장은 헬기로 떠난 宋 일병을 위한 追悼式(추도식)으로 전 중대원을 중대 연병장에 집합하여 간략하지만 異國 땅에서 戰死한 宋 일병을 보내는 이별 儀式을 치렀다. 장례 대표로 1소대장이 나와 盞을 올리고 큰절했다. “이발은 누구에게. 하라고, 먼저 갔어? 宋 일병! ” 그토록 다정했던 宋 일병의 冥福을 빌어본다.
** 대민진료와 민간외교. - 월남에 파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맹호 사단장이었던 채명신은 파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승진되었다. 그는 월남의 전투를 전장에서보다 민간외교에 중점을 두어 주월 한국군이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민간인들을 위한 대민 지원 사업을 통한 민간외교를 强調 하였다. 우리 의무 소대는 상부의 지침에 따라 대민진료소를 마련하였는데, 보병대대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지탄삼거리”에 민간인을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이곳은 우리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북쪽의 “다낭”에서 내려오는 길목이었으며, 주위에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농촌 마을이 산재해 있었다. 내가 7,276부대 3중대 1소대에 파견된 지 6개월이 지난 후 의무소대로 복귀한 後였다. 의료진은 선임 하사와 나, 그리고 운전병이었던 “장00” 병장 외에 월남인 간호조무사 2명이었다. 診療室은 입 所聞을 듣고 찾아오는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진료는 일반 의약품을 처방하거나, 외과적인 治療를 주로 하였으며, 가끔은 응급환자가 오기도 하였는데, 이때에는 의무 중대로 이송하여 진료받도록 조치하였다. 이러한 진료 덕분에 민간인들과의 교류도 많아지자, 촌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이때에는 으레 “씨 레이션” 몇 박스 들고 방문하여 “차(茶) 한잔을 마시고는,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둘러 보고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민간외교는 이렇게 작은 것 에서부터 한국군에 대해 신뢰를 하는데 큰 貢獻을 거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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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火傷 환자의 진료 ** - 낮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태양이 灼熱(작열)하는 남국의 날씨는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兵士들은 작전이 없을 때는 거의 “벙커”인 숙소에서 시간을 보낸다. 온도가 높지만 섭도가 낮기 때문에 그늘에만 있으면 시원한 편이다. 하지만 炊事(취사)를 하거나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밖으로 나와야 했다. 화장실(재래식)은 구덕이기 때문에 “오일 디디티”를 뿌려 놓는다. 화장실을 갈 때면 담배를 물고 한 대피하면서 볼일을 보는 습관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있는데, 피고 남은 꽁초를 화장실 아래에 던지면 뿌려놓은 오일 디디티에 불이 붙어 엉덩이에 큰 화상을 입고서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의무소대 막사를 몇 바퀴나 뛰어다닌다. 군의관은 모르핀 주사로 진통을 가라앉혀 주지만 화상 치료는 보통 한 달가량이나 걸린다. 화상 환자는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파월 주기가 25일이기 때문에 월남 신병들은(야전 보병부대) 취사에 대한 교육을 미처 받기 전에 취사 일을 하다 보니 밥솥(밥솥은 탄통으로 함)의 패킹(고무)을 제거하지도 않은 채 불을 지핀다. 시간이 지나도 국솥이나 밥솥은 김이 나지 않자 억지로 열어본다. 순간 팽창할 대로 팽창되어 있든 국솥은 폭발음과 함께 위로 솟구쳐 오른다. 더위 때문에 팬티 바람으로 있든 병사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또 우리 의무소대로 헬기를 타고 내려보내어진다. 古參들의 신병교육부대에서 오는 웃지 못할 사건이다.
** 김 상병 실종사건 - 보병부대에 파견된 지 6개월이 지났다. 보병 중대는 대부분이 산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보급품과 우편물은 부대 아래에 있는 보급소에서 헬리콥터로 보내어 온다. 각 소대에서는 한 명의 요원을 補給所(보급소)에 보내어 그 임무를 하도록 하고 있었다. 내가 파견근무를 하든 혜산진부대(7276부대) 3중대 1소대의 보급소 담당 사병은 金 00 상병이었다. 보급소 철조망 너머에는 민간인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김 상병은 시간이 있을 때 가끔 이 구멍가게에 들려 가게 주인인 “링이”과도 얘기를 나무고는 하였다. 그날도 점심을 먹고 난 오후 세 시경 김 상병은 예나 다름없이 그곳을 들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간 김 상병은 대기 하고 있던 viet-cong 두 명으로부터 포박당하고 말았다. viet-cong은 민간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인인지 군인인지를 알 수가 없다. 월남인 들은 세금을 이중으로 낸다는 말이 있다. 월남 정부에 내야 하고, 또 베트콩에게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야간에는 베트콩의 활약으로 민간에 들어와 물자와 금품을 약탈 하거나 강제로 징수한다는 것이니 월남인들은 그들에게 협조를 안 할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가게 주인이 보는 앞에서 잡혀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부대 내에서는 실종된 김 상병을 찾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 맹호부대 사령부 및 각 첩보부대에 수사하도록 요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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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었다. 金 상병이 실종된 지 보름여 만에 중대 본부로 연락이 왔다. 김 상병을 포박하여 간 두 명의 베트콩이 잡혔다는 것 이였다. 이틀이 지난 뒤 깡마른 두 명의 베트콩은 중대로 이송되어 왔다. 상급 부대에서는 “너희 전우를 죽인 범인은 너희가 알아서 처단하라”는 지침이 있었다고 누군가가 나에게 일러 주었다. 取調(취조) 결과에 따르면, “베트콩이 김 상병을 포박하여 마대에 꽁꽁 묶어 오토바이에 싣고 송꺼우 어느 바닷가로 가, 여러 가지 정보를 확인하고서는 손목을 자르고, 가시 많은 선인장 몽둥이로 맨몸의 김 상병을 쳐서 죽였다는 陳述을 얻어 내었다. 당시 월남인 들은 한국군이 태권도를 잘한다는 인식 때문에 손목을 자른다는 일화가 있었다. 이러한 취조 결과를 들은 김 상병의 소대원들은 치를 떨었다. 소대원 몇 명은 중대 뒤 언덕바지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는 그 두 명의 베트콩을 포박하여 묶어두었다. 그러고는 구덩이를 파고 그들의 무덤을 만들 준비를 하였다. 소대 선임 하사인 김 중사는 나에게 “ 총검술 구경 가자”명 나의 의중을 물었다. 심약한 나로서는 볼 수도 할 수도 없어 거절하였다. 선임하사인 김 중사는 소대원 중 몇 명에게 포박된 베트콩을 향해 훈련소에서 배운 대로 “찔러 총”을 시켰다.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옆에 있는 베트콩에게 빨아 먹으라고 강제로 끌어다 대니 공포 속의 그는 그 피를 핥아 먹었다. 이런 행위는 반대로 이어졌으며 그들은 중대 뒤편 언덕에 묻혔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일기를 썼다. “인간이 이토록 殘忍할 수가 있는가? ? ” 625의 참상을 체험하지 못했어도 전쟁은 인간에게 극도의 殘忍함을 要求 하여 勝者와 敗者도 없는 悲劇만이 아픈 상처로 남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니 육군 졸병의 마음에 남은 그 傷處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 “말아리아”에 걸리다. - 월남에 체류한지 칠개월쯤 되는 어느날, 열이 38도를 넘어서는 열병이 생겼다. 더운 열대지방이라 병명이 알려지지 않으면서 열이 오르는 경우가 일상화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의무대 에서는 이 病을 “불명열”이라 命名하여 부르곤 하였다. 나도 不明熱인가 하여 링거만 맞고 하루 이틀을 기다렸지만 好轉 되지않아 후송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혈액검사 결과 “말아리아”로 판정이 났다. 처방이란 링거와 경구 투약으로 며칠간을 버티었지만 결국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담당 군의관이 급히 수혈을 하였는대,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 오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야전병원의 침상은 임시로 마련한 야전침대 였으며 병실은 텐트를 친 막사였다. 막사 안은 여러부데에서 실려온 환자들로 붐볐는데, 맹호부대를 비롯하여 백마부대, 청룡부대 에서온 병사들 이였다. 일주일 가량 머물다가 美6,靜養病院이 있는 “캄란”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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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되었다. 이곳은 미국이 50년간 賃借하여 사용할수 있는 육지 밖의 섬이였다. 육지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는 임시로 고무풍선처럼 바람을 넣은 튜브로 건널수 있게 만들어 져 있었다. 美6靜養 병원은 퇴원 환자들이 일시동안 머물러 정양하기 위한 요양시설이였다.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많이 덥지도 않고, 전쟁의 포화소리도 없는 남쪽의 평화 로운 異邦의 세계같은 곳이였다. 해변가 모래 사장위에 막사를 지어서, 모든 병사들이 휴식할수 있도록 근린생활의 요건을 만족시키기에 충분 하였다. 식사는 뷔폐식으로 호텔식 못지않을 만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최고였으며, 식사후에는 휴게실에서 오락이나 영화감상,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시설도 잘 갖추어 져 있었다.모든 시설은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침실 막사 만이 별도였다. 일이란 일체 없었으며, 자고 일어나면 해변가를 산책 하거나 오후에는 해수욕을 즐기는 호화로운 군대 생활이다. 가끔씩 미군쪽에서 한국군에 대한 원망이 있었는데, 해수욕복 없이 해수욕을 하는병사들 때문에 미여군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것이나, PX에서 몰래 슬적 하는바람에 한국군의 체면을 깎이게 하는 사례도 있기도 했다. 담배가 없어 미군에게 “시가랫 기브미” 하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60년대의 가난했던 우리 군생활의 斷面이기도 하였다.
** 맹호 10호작전에 참가 하다.(1968년 舊正攻勢)
월남에 온지도 10개월이 지난 월남의 古參兵으로 귀국일도 두달이 남지 않은 2월 初旬頃(초순경)이 였다. 작전 명령이 떨어 졌다.맹호10호작전, 일명 구정공세가 시작된 것이였다. 월남은 우리와 같이 음력설을 년중 가장 큰 명절로 지낸다. 월맹군은 2월 음력 설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대남 攻勢를 펼쳐와 년중 행사처럼 평소보다 더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중대는 1번국도변에 있는 00지점을 탈환 하라는 작전 명령을 하달받고 2월8일 16시경 다수의 헬기에 나눠타고 00지점에 렌딩하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화장실 만드는 것이였으며. 다음으로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초소를 만들고, 경계근무를 서는것이였다. 나는 중대장 L대위와 전령인 J상병과 함께 상황을 파악 하고 적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이미 포병부대에서 적의 要塞를 포격하여 상당한 被害를 입힌 후라 잔여병을 掃蕩(소탕)하는 것이 주요 임무가 되었다. 적과의 대치하고 있는 거리는 불과 100여M여서 적의 움직임 까지도 파악되는 상황이였다. 콩 뽁듯한 총탄소리는 간헐적이긴 하지만 그쳤다 이어지기를 수차례나 반복 되었다. 통신병 J 상병은 이러한 광경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M16소총은 적을향해 정조준으로 불을 뿜었다. 쓰러지는 적군을 본 J상병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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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에는 한걸은 더 나아가 아름들이 나무를 隱蔽(격폐)로 삼아 사격하기 시작했다. 그 瞬間 敵의 탄알이 J상병의 오른쪽 대동맥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목에서는 鮮血이 솟구쳐 흘러 나왔다. 동료 병사들은 “위생병”을 소리쳐 부르며 인공 호흡을 하라고 하며, 중대장은 혀를차며 안타까워 했다. 즉시 헬기를 불러 후송 시켰지만 곧 사망하고 말았다. 작전은 밤새 이어 졌으며 이른 새벽에야 끝이났다. 敵의 陣地를 탈환 하고보니 참혹한 현장은 말로는 표현 할수 없는 전쟁터 아니면 있을수 없는 비극의 현장이였다. M16에 머리를 맞은 적군은 수박을 둘로 쪼갠듯 갈라져 있었고, 포 사격에 맞은 듯 분간 할수 없을 만큼이나 훼손된 시신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러한 전쟁의 참상은 오늘을 사는 월남인들 에게 “나는 죄인이다”라고 贖罪(속죄)를 해야 할 것 같다. 1번 국도변의 월맹군의 舊正 攻勢는 우리군의 승리로 끝을 맺으며, 중대는 작전임무를 수행하고 歸隊 하였다. 이후 보름간의 휴식을 가지며 귀국 할날을 손꼽아 기다린 끝에 꿈에도 그리던 내나라, 내 고향을 찾아 드디어 3월 31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 가을 回想 ** 1992. 10. 일기장에서.. 宋 베네딕도(세례명)
코스모스 핀 가을길이
그립기도 하도하여
나
그리움의 파돗소리 들리는 近處로
하염없이 달려만 가네.
아 ...
그러나 가슴은 터질 듯 痛哭하노라.
遺失物系 앞에서 ....
초가지붕 박 꽃이
그립기도 하도 하여
나
잃어버린 그 가을 찾아 헤메이네.
빠알간 감홍시, 토실 알밤 찾던
그날이
그립기도 하도하여
나 오늘도
그 따스하던 가을 햇살 찾아 헤메이네.
** 아버지를 그리며 * (아버지 忌日에) -1993.12.17.일 기장에서 - 아버님! 당신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아버님 생전의 그 모습은 이 불효한 자식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 더해가고 있음은 어인 일이 옵니까? 生前에 제게 주시었던 사랑이 너무 크시옵고, 깊었던 까닭이 옵니까! 일평생 성낸 얼굴 한 번도 않으셨던 당신께선 우리 여섯 남매를 위해 온 정성 다 쏟으시고 그 큰사랑 주시고 가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남매 모두 무던히도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지요. 특히나 姑婦 간의 갈등 속에서 아픈 맘 다스리시며 가정만을 위해 祈禱하셨지요. 이른 새벽 일어나시어 소(牛)죽솥에 불을 지피시고는 아침기도와 珠신공까지 다 하셨지요. 지금도 아버님의 그 祈禱 소리 귀에 쟁쟁하여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 더해갑니다.
어느 날 아버님은 “건어물”논을 갈고 계셨지요. 신작로 길을 따라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소 몰아 논 가는 아버님의 찌렁찌렁한 목소리는 얼마나 우렁찼는지 산울림이 되어 골짜기를 메우셨지요. 이후 저는 더 멀리에서도 아버님의 목소리는 들으며, 우리 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러웠답니다.
아버님! 제 나이 불혹을 넘어 지천명이 되어 갑니다. 세상에 태어나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아 실천하라는 나이가 된 셈이지요. 하지만 아직도 아버님께 미치기는 너무나 未熟합니다. 평소 아내는 “아버님을 좀 닮으세요”라며 생전에 아버님께서 진지 드시든 “수저”를 챙겨와 제게 사용하게 했지요. 성인은 못되어도 君子답게 사시다가 하느님 품에 가신 아버님 모습 닮으며 훗날 아버님 뵈올 그날까지 당신이 주신 무언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님의 幽 宅은 형님의 반대에도 생전에 원하셨던 큰아버지 옆에 모셨습니다. 하느님의 품속에서 永眠하시기를 기원하며 연도(煉禱)를 바칩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여서 자랑스럽습니다. - 찬바람 불어오는 새벽에 -
** 황혼의 계절에 --
바람은 나뭇가지 위에서부터
옷 소매자락으로 불어온다.
머언 광야에서 山과 江과 들을 지나
나에게로 왔나보다.
싱그럽던 樹木의 盛夏를 아는가 그대는 ?
싱싱한 젊음을 송두리째 鋪道위로 날려 보냄은
또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
그 심술쟁이 세월의 선물인가 !
어느날 파아랗던 하늘은 잿빛으로 변하고
낙옆마져 앗아버린뒤,
그 바람소리 그쳤어라.
11월의 司祭는 잿빛祭衣 입의시고.
煉獄영혼 위해 祈禱 하시네.
司祭여 !
그 기도중에
잃어버린 어린양 하나
기억해 주옵소서.
못다한 빚 補贖할수있게...
달성공원 탐방 ! - 공원에서 멀지도 않은 지역에 살면서 언제나 맘만 먹으면 들릴 수 있는 곳이 이곳 달성공원이다. 그러나 오늘(2024.06.12.) 내가 찾은 달성공원은 평소와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깊은 감회와 함께 이곳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오늘 함께한 解說 士로부터 달성공원의 역사와 유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겪어온 온갖 풍상과 애환을 들을 수 있어 그 意味가 새롭다.
1970년대 어린아이들 손잡고 입구에 들어서면 守門將으로 공원의 상징과도 같았던 키다리 아저씨가 門을 지키고 있었으며, 賞春客 인파에 공원은 언제나 붐비곤 하였다. 지금은 입장료도 없는 무료 개방으로 언제나 들릴 수 있으니 아침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기 위해 들러는 주민들 대부분이 이용객으로 되었으니 동네 공원이나 다를 바 없다.
오늘 해설사의 자세한 해설과 함께, 아울러 歷史觀을 들러보고 나서야 이곳이 達成 徐氏의 遺虛地였다는 사실과, 초기에는 밭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토성으로, 보잘 것 없는 곳이였으나 백년이란 긴 세월동안 온갖풍상과 애환을 격으며 오늘날 이렇게 잘 가꾸어진 멋진 작품을 유산으로 우리곁에 있다는 것은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桑田碧海라고 해야 할까 !
慶尙監營이 尙州에서 大口(大邱)로 옮기게 되니 바로 지금의 “관풍루”라 한다. 이곳을 그토록 많이 오르고 했건만 역사의 자취도 無知한 것, 부끄러울 뿐이다. 역사관을 둘러보고는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痕迹이 있었으니, 순종의 달성공원 행차는 왕의 “지방 순례”란 의미에서 대단한 사건임은 틀림없겠으나 일제의 청치야 욕을 위한 수단의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看過한다면 결코 영광스러운 행차라고는 볼 수 없는 아픔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달성공원이 일제 神社參拜의 장으로 사용된 사적 기록을 사진으로 확인하는 순간 “이 나라 백성들의 가슴속에 맺힌 한 또 얼마나 했을까 ?” “나라 잃은 설움의 상처가 이곳에도 있었구나” 놀라울 뿐이다. 이제 시련의 역사를 고이 간직한 채 묵묵히 잘도 버티어온 달성공원! 이제는 역사의 아픔을 씻고, 명품 공원으로 손색없는 대구의 자랑이 되었다. 잘 정돈된 공원의 잔디와 백 년도 더 될법한 향나무 수십 그루는 누가 이렇게 잘도 가꾸어 놓았으며 “오롯이 너만은 공원의 역사를 아는 듯”威風堂堂이다.
공원 오른편 언덕배기를 오르니 사슴“우리” 앞에 이른다. 귀 쫑껒 반기는 모습에 나그네 발길 한참이나 머물게 한다. 먹이를 주어도 별 반응이 없으니 이젠 방문객들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조금 더 오르니 “관풍루”의 “樓閣”을 만난다. 이곳이 “경상감영”이었다는 사실 외에 더 이상 역사의 모습은 알 수가
없었다. 대구의 초여름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겉옷 벗어들고 관풍루를 지나 綠陰 짙은 土城 길로 접어들라면 숲은 左右로 드리워져,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다. 이따금 불어오는 솔바람 함께 벤치에 앉아 이마에 흐른 땀 씻고 있노라면, 지나버린 그날의 追憶이 아른거린다. “그 어느 무덥던 어느 여름날 이곳 이 자리 벤치에서 냉커피 한잔 마시며 요란스러운 매미의 교향곡을 들으며 한낮의 피서를 함께 했던 옛 친구가 그리워진다.”
토성을 지나 다시 내려오면 바다사자 놀이터, 이어서 호랑이, 코끼리 외에 원숭이 재주부리는 동물원이 달성공원의 명물들이다. 이곳에 갇혀 있는 동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애잔한 마음 그지없다. 넓디넓은 바다에서, 아프리카 대 초원에서 활보하지도 못한 채, “우리”에서 갇혀 사는 운명이라니 어쩌면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순리를 逆行하는 죄악은 아닐까 ?” 하는 넋두리를 해 본다.
동물원을 지나 일제의 蠻行에 저항한 애국지사 旺山 許 蔿 선생의 殉國 記念碑 앞에 서니 그분의 忠節! 그 용기에 고개 숙여진다. 그 옆에 李相龍 구국 기념비, 그리고 詩人 李相和 詩碑가 있다. 나라를 위해 義와 忠을 다 하신 기념비 앞에서 肅然함만 더할 뿐이다. 亂世의 英雄이라 했던가! 暗鬱했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오롯이 나를 犧牲했던 사람 중에서도 대구가 낳은 英雄들을 여기 碑石에서나마 만날 수 있음에, 그 感懷가 새롭다. 시인은 일제의 아픔을 詩로써 恨을 노래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 나라 모든 이가 역사의 아픈 기억을 더 많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달성공원의 탐방을 마치고 “고은” 시인의 “화살”이란 詩가 가슴에 박혀와 여기에 옮겨 본다.
-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 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 오지 말자 -
(성공한 혁명은 화려해 보이지만 그 뿌리는 언제 어디서나 참혹한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먼저 일어나 싸운 사람들의 희생에 닿아 있다. 자기 자신은 승리의 과일을 맛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인생을 걸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이만큼 인권과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위의 시를 읽으면서 많은 영웅을 생각하게 한다. 이순신, 유관순, 안중근,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등을….)
** 외갓집 가는길 ** (1992.12.22. 일기중)
산새 울음소리 들어며
산골길 따라
외갓집 가든길
어머니 손잡고
서낭당을 돌아서 가든길.
지금은 人跡마져 끊인채
오가는이 없구나.
경북 상주 중동면 길마(금당) 꿈에도 그리운 내 고향! 저 푸른 산맥 사이 고요히 숨 쉬는 고향, 길마 마을, 금당 골짜기, 내 꿈속에 그리운 곳. 맑은 시냇물 흐르며 들꽃 향기 머무는 그 곳, 아이들 웃음소리 넘치는 내 어린 시절의 낙원. 한 여름의 푸른 논, 가을이면 황금 들녘, 겨울이면 하얀 눈밭, 사계절 변치 않는 아름다움. 어머니의 손길이 닿은 따뜻한 아침밥 냄새, 아버지의 힘찬 발걸음, 내 마음속 깊이 새겨진 기억들. 멀리서도 잊지 못할 경북 상주 중동면 길마, 금당의 작은 마을, 내 영혼의 안식처. 경북 상주 중동면 길마(금당) 꿈에도 그리운 내 고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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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은 10리 길,
돌아가면 삼십리 길 !
반세기를 지난 오늘
추억속의 그길 걸어보네.
잘 포장되어진 신작로 길 생기고
외갓집 가는길도 십여분에 지척일세.
知天命을 살았어도
고개 고개 넘어며 들려주던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길 잃은 나그네
마음 둘곳 없어
오늘도 헤메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