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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만나도 보석 같은 제자, 이명훈 박사
명예교수 김용식 (조경학과)
나의 대학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다. 2학년 때부터 연구실에서 숙식하며 교수님의 일을 도와드렸고, 밤에는 시내에 나가 당시에는 아주 흔한 가정교사를 하였다. 1학년 때부터 즐기던 산악부 활동은 2학년 9월에 대둔산에서 가진 1주일간의 암벽훈련을 끝으로 단념해야 했다.
2학년 봄부터 시작한 교수님의 연구를 3학년 복학생 선배와 둘이 시료 채취부터 논문작성에 이르기까지 도와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본다면 학부생 실험 리포트 수준이겠지만, 당시의 연구는 수지구(resin canal)의 수와 위치를 광학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리기다소나무(Pinus rigida), 테다소나무(Pinus taeda), 이 두종의 교잡종인 리기테다소나무(xPinus rigitaeda) 및 이 수종과 리기다의 여교잡(backcross hybrid)인 xPinus rigirigitaeda)를 식별하는 내용이다. 소나무 잎을 수수깡을 반으로 쪼개 그 사이에 넣고 도루코 면도날로 현미경으로 잘 보일 수 있도록 잘라서 관찰하는 일이다. 이 일을 한지 4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현미경에 잘 보이도록 잘라낼 수 있다. 나는 방학도 없이 항상 시간이 부족하였다. 다행히(?) 가을 중간고사 시작을 앞두고 내려진 계엄령 때문에 오직 교수님 연구를 돕는데 대부분 시간을 다 보냈다. 지금도 기억에 당시 친구들과 중간고사 준비를 하면서 내일부터 시작하는 중간고사가 없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말이 씨가 되었는지 다음날에 10월 유신 선포와 함께 계엄령과 휴교령이 선포되어 학교 출입을 완전히 금지하였다. 당연히 중간고사는 무기 연기되어 어린 마음에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며칠 후에 연구실 출입 허락을 받아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지금은 교수님 사무실과 연구실이 별도로 있지만, 당시에는 강의실과 같은 크기의 공간을 간단한 칸막이로 막아 놓은 게 전부여서 교수님께 찾아오는 손님이나 대화를 원하지 않아도 다 들을 수 있는 구조였다. 학부생 때에 경험한 이 연구실 생활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영남대학교 조경학과에 부임하여 처음 몇년은 대학원 학생이 없었기에 아주 조그만 사무실에 학부생 1명과 둘이 생활하였다. 나는 20여년 전에 완전히 끊었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알아주던 지독한 골초였다. 특히 창문을 닫고 지내는 시간이 많은 겨울철에도 마찬가지였으니, 지금 되돌아 보면 연구실 학생에게는 오직 내 자신만 생각한 참으로 위험하고 미안한 짓이었다. 며칠 전에 동대구역에서 초기의 연구실 김OO 학생을 만나 담소 중에 그 담배 이야기를 했다. 그 학생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했지만, 매우 미안했다.
되돌아보니 1983년 8월에 부임한 이래 정년까지 연구실을 거쳐간 인원이 거의 100여명이었다. 연구실에 들어오는 학생의 선발은 자의적 판단을 매우 중시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공부나 일은 시켜서 될 일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부생의 시야는 당연히 제한되어 있기에 대신 연구실 생활이 어떤 점에서 도움이 되는지 등만을 이야기해 줄 뿐이다. 이후 연구실 학생이 몇 대를 이어갈 즈음에는 연구실 선배가 스스로 선발하도록 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criteria를 넘어서면 사전 주의나 경고 없이 아주 냉정하게 정리하였다. 이렇게 표현하니 정리가 다반사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 경우는 꼭 두 차례에 2명이었다. 연구실을 거쳐간 학생은 대학원이든 학부든 지금까지 당연히 끈끈한 정으로 이어져 내려옴을 기쁘게 생각한다.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연구실 학생은 아주 다양한 환경에서 자랐고 꽤 다른 인성과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이에 따른 에피소드도 매우 많다. 내가 주로 하는 연구는 실험실보다는 야외조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특히 학부 학생은 저학년부터 시작하여 졸업하기 전에 전국의 주요 산들을 두루 다니며 조사하는 귀중한 경험을 쌓게 된다. 조사를 나가면 나는 학생들에게 항상 그 지역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한다.
연구실의 야외조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하여 항상 아침 6시에서 6시 30분에 출발하여 아침식사는 도중에 휴게소에서 하는데, 왜관휴게소, 금강휴게소, 남강휴게소, 지리산휴게소 또는 현풍의 박소선할매곰탕을 자주 이용하였다. 훗날 모임에서 이야기해 보면 이러한 추억이 학생들에게 오래 남아 있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도 즐거운 추억인가 보다.
이번에 소개하는 이명훈 박사는 여러 연구실 가족 중에서도 꽤 기억에 남는 신실한 학생이다. 이명훈 박사가 2000년 3월에 입학 후 군 복무를 마치고 2004년 4월에 연구실에 들어와서 처음 갖는 야외조사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 연구실은 며칠 전에 국가유산청으로 이름이 바뀐 문화재청에서 발주한 강원도 고성의 민통선 이북지역에 위치하여 바로 눈앞에 북한의 산하가 펼쳐져 있는 “향로봉·건봉산천연보호구역”의 식물상과 식생조사의 용역을 수행할 때이다.
이 조사 지역은 DMZ를 기준으로 대부분 휴전선의 남방한계선(SLL: Southern Limit Line) 내에 있어서 민간인의 접근이나 출입은 매우 까다롭다. 조사계획서를 수립할 때에도 숙소 선정 등 가장 간단한 정보조차도 구하기가 어려워 부대 내 시설의 이용요청을 하였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연구실에서 수행한 가장 먼 거리의 조사 장소로, 거리도 멀뿐더러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비효율적인 군대 행정 때문에 조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에 대부분의 조사 지역이 지뢰 표시한 곳이 많아서 철저하게 동행하는 군인의 안내에 따라야 했다. 항상 긴장감 속에 조사를 하였지만,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숲속에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가 없으니 조사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향로봉·건봉산천연보호구역”의 첫 현장조사를 위하여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출발할 때 일어난 일이다. 늘 하던 대로 약속 시간에 출발하여 “북대구 IC”를 막 벗어 났을 때에 전화를 받았다. 아침에 늦잠을 자느라 약속 시간에 늦었다 한다. 그래서 나는 이미 출발하였으니, 오늘밤 숙식을 예약한 진부령의 “꿀벌식당”으로 오라 했다. 강원도 고성의 진부령은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고갯길의 하나이다. 진부령 고개를 넘기 직전에 있는 “꿀벌식당”은 집은 허름하였으나, 식당의 주인아주머니는 경산 와촌이 고향으로 청국장 맛이 기가 막힌 집으로 우리 팀이 일년 간 조사하면서 신세를 꽤 많이 진 집이다.
우리 팀은 조사 첫날 오리엔테이션 겸 “향로봉·건봉산천연보호구역” 중 건봉산에 올라 간단한 조사를 마쳤다. 건봉산 GP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사병으로 복무 시 머물던 내무반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장엄한 산세를 보면서 한국전쟁 때나 그 이후 이곳에서 복무한 수 많은 병사들의 고생이 어떠했을지를 쉬이 짐작하였다.
조사를 마치고 어두컴컴할 때에 “꿀벌식당”에 도착하니 거기에 이명훈 군이 우리 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의 기분은 매우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였다. 첫 휴가나온 죽마고우와 밤세워 술 마시다 보니 늦잠을 자서 약속 시간에 올 수 없었다 한다. 하지만 그것도 1학년 학생이 약속 시간을 놓쳤으면 쉽게 포기할 법도 했을 터인데, 그 먼 곳까지 온 것을 잊을 수 없다. 난 그 당시에 이 정도면 앞으로 꽤 괜찮은 학생으로 키울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졌다.
子曰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 改是
나는 사람을 처음 판단할 때에 그 사람의 말만 듣고 행실을 믿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행실까지 살피게 되었다.
-논어의 공야장(公冶長)」편-
“향로봉·건봉산천연보호구역”의 조사를 계기로 나는 여러 학생 중에서 흙 속에 묻힌 보석을 찾아낸 느낌이다. 이명훈 박사는 학부 과정 중 매우 성실하게 학업과 연구실 생활을 이어 나갔다. 당시에 조사를 마치고 경산 시내에서 부친이 운영하시던 중국집에도 아주 가끔 갈 때면 가족처럼 대해 주시던 부모님을 잊을 수 없다. 영남대학교 조경학과는 졸업하기 위하여 4학년 때에 논문이나 작품을 선택하여 의무적으로 제출하여 통과해야만 졸업을 할 수 있다. 이명훈 박사는 당시 경산시의 마을 숲을 논문으로 작성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당시의 논문을 정리하여 “한국환경생태학회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명훈 박사가 석사과정을 시작할 때에 나는 오사카에서 있은 한·중·일 조경학회의 공동 학술발표회에서 구두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참석한 한 인사가 발표를 잘 들었다 하며 매토종자(seed bank) 관련 논문을 한편 주었다. 나는 귀국하여 이 논문과 관련하여 이명훈 군에게 소나무숲과 상수리나무숲에서 채취한 토양을 외부환경과 밀폐된 자연자원대학 유리온실에 옮겨 발아 상황을 관찰하여 석사논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유형의 연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한 것이었지만, 예측한 대로의 현상은 미치지 못하였으나,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다. 이 주제로 석사과정을 마칠 즈음에 이명훈 박사는 한국연구재단에 3년 과제로 연구비를 신청하여 선정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조경학 분야에서 석사과정 학생이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를 받는 일은 아마 처음으로 생각한다.
한번은 한국수자원공사에서 발주한 청송댐 수몰지역 이식수목의 조사 용역을 수행할 때이다. 용역 조건에 3그루로 알려진 망개나무의 생육 위치를 꼭 파악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추나무와 같이 갈매나무과(Rhamnaceae)에 속하는 망개나무 Berchemia berchemiaefolia (Mak.) Koidzumi는 한반도에서 충북 속리산, 월악산 또는 주흘산과 경북의 내연산과 일본의 남부 지역에 자라며, 개체군 크기가 작아 우리나라에서는 꽤 희귀한 수종이다. 언젠가 속리산국립공원 조사 때도 이 수종을 찾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던 터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앞섰다. 현장 조사 중에 도로 중앙에 50대 중반의 남자가 간질이 발작하여 쓰러져 있는 것을 경찰에 신고하여 처리하는 것을 본 후 우리는 현장 조사를 계속 진행하였다. 댐 수몰지역 현장에서 1/25,000 지도상에서 한곳씩 체크해 가던 중 산마루 턱에서 잠시 쉴 때이다. 가만히 보니 나무 높이는 2~3m 정도로 아주 작았지만,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하던 망개나무였다. 그래서 이명훈 군을 포함하여 조사원들에게 계곡부를 먼저 체크한 후 주변 산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망개나무는 계속의 물 흐름에 따라 계곡 하부에서 상부까지 계속 이어져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고 앞뒤의 능선 전체가 망개나무 우점종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망개나무 개체군으로 확인한 적도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듯 수많은 사람이 지나 다녔고, 바로 1년 전에 종합적인 식생 및 식물상 조사를 하였음에도 바로 큰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을 보지 못한 채 지나쳤던 것이다. 망개나무를 찾은 기쁨으로 시원한 수박을 먹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명훈 박사는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취직을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당연히 중앙무대에서 활동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초지일관 대구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중에 실토한 바로는, 직장도 중요하지만,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고 싶다 한다. 이명훈 박사는 쌍둥이 아들을 두어 요즈음 같은 시대 상황에서 보아 국가에도 크게 헌신한 매우 보기 드물게 보는 갸륵한 청년이다.
이명훈 박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이곳저곳에서 현장 조사도 많이 하였지만, 연구실에서 수행한 수목원과 정원관리의 정책개발을 위한 프로젝트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순천만국가정원”을 비롯하여 국민의 큰 인기를 끄는 산림청의 정원정책의 하나로, 국가정원, 지방정원 및 민간정원을 지원하는 법과 제도적으로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연구에 참여한 선·후배와의 관계도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잘 처리하여 상하 간에 신망이 매우 깊은 젊은이다.
이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직장과 직원이 있다. 이들 세계에서 당연히 실력이 매우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인성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곳저곳의 여러 직장에서 살핀 바로는, 인성이 부족한 직원은 어느 조직이든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경우를 아주 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명훈 박사는 실력과 인성을 겸비하였기에 후배 학생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는 젊은이라 생각한다. 이런 제자를 만난 나는 매우 행복한 사람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선·후배 또는 동료 교수님께서 혹시 대구수목원을 돌아볼 기회가 있으시면 이명훈 박사의 안내를 받아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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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옥고 고맙습니다. 제가 학생 시절에 타과 학생들이 답사다니는 국사학과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는데, 조경학과가 우리 학교에 있었더라면 저는 전혀 부러움을 사지 못했겠다 싶습니다. 과연 '전국이 내 조사터'이시구나 싶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올해초 교수님의 facebook에서 오래 전에 혼자 찾아왔던 그 대학초년생과 만남을 가졌다는 짧은 글이 있었는데, 이 글을 기억하고 원고 청탁을 드렸는데, 역시 여쭈어 볼 만한 일이었구나 싶습니다. 사진도 많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