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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의보살경 제2권--1
송나라 양주 사문 지엄 보운 공역
정관유 번역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 보살마하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보살에게 다함없는 법이 또 있습니까?”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있습니다.
보살이 보시[檀]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다함없으니,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보시를 수행함에 한량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먹을 것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
수명과 변재와 몸을 충만하게 하는 힘과 즐거움을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마실 것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마실 것을 주어 목마름을 여의게 하기 때문이며,
옷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옷을 주어 청정한 몸을 갖추어 부끄러움을 없애게 하기 때문이며,
타고 다닐 수레가 필요한 자에게는 수레를 주어 온갖 안락을 얻고 신통을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등불이 필요한 자에게는 등불을 주어 부처님의 눈처럼 청정함을 원만히 갖추게 하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음악을 베풀어 주어 천이통(天耳通)의 맑게 트임을 원만히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향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향을 주어 몸에서 원만하고 미묘한 향이 나게 하기 때문이며,
다리[鬘]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다리를 주어 칠각[七覺]의 다라니꽃을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바르는 향이나 가루 향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그에 맞게 모두 베풀어 주어
계율∙지혜∙선정을 갖추어 그 몸에 배어들어 바르게 하기 때문이며,
갖가지 맛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그들의 생각대로 베풀어 주어 맛의 모양을 성취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의지할 데 없는 자에게는 의지할 곳을 베풀어 주어서 중생을 위해 충분히 구호하여 귀의하게 하기 때문이며,
깔자리[敷具]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깔자리를 모두 베풀어 주어서
마침내 번뇌[陰蓋]를 끊어 버리고 범천과 현성과 여러 부처님의 묘한 상좌[床座]를 성취하게 하기 때문이며,
앉을 자리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자리를 주어서 삼천대천세계를 도량으로 삼아
금강좌(金剛座)의 자리를 다 성취하게 하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바라는 것에 따라 모든 것을 베풀어 주어서 보리에 필요한 온갖 것을 성취하게 하기 때문이며, 병
에 따라 약을 베풀어 주어서 늙고 죽음이 없게 하여 감로의 법약(法藥)을 다 성취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심부름꾼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모두 심부름꾼을 주어서 자재한 지혜를 원만히 갖출 수 있게 하기 때문이며,
또 금∙은∙유리∙파리(頗梨)∙진주 가패(珂貝)∙벽옥(碧玉)∙산호(珊瑚) 따위의 갖가지 보배로써 베풀어 주는 것은
대인의 32상(相)을 원만히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갖가지 영락(瓔珞)으로써 베푸는 것은 80종호(種好)를 원만히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코끼리∙말∙수레를 베푸는 것은 대승을 원만히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또 가지고 있는 동산을 보시하는 것은 선지(禪支)를 갖추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 거느리고 있는 처자(妻子)를 보시함은 위없는 도법(道法)에 대한 사랑을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창고에 있는 곡식과 재물로 보시하는 것은 모든 선법(善法)의 보배 창고를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염
부제(閻浮提)나 사천하(四天下)를 그 뜻에 따라 보시하는 것은 법왕(法王)의 국토를 원만히 갖추어 자재함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오락 도구들을 보시하는 것은 한량없는 법의 즐거움을 갖추어 즐겁게 하기 때문이며,
다리와 발로써 보시하는 것은 법의 발을 갖추어 도량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며,
손으로써 보시하는 것은 법의 손을 원만히 갖추어서 중생을 어루만져 즐거움을 얻게 하기 때문이며,
귀와 코를 가지고 보시하는 것은 모든 감관을 원만히 갖추어 다 예리하게 통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또 눈을 가지고 보시하는 것은 걸림 없는 법안(法眼)을 원만히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머리를 가지고 보시하는 것은 삼계(三界)에서 가장 훌륭한 모든 지혜를 갖추게 하기 때문이며,
피와 살을 가지고 보시하는 것은 모든 견고하지 못한 것을 견고하게 하기 때문이며,
수뇌(髓腦)를 가지고 보시하는 것은 금강 같은 몸을 갖추어 무너지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삿된 생활로 재물을 구해서 보시하지 않고,
중생을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의 재물을 억지로 구하여 도로 남에게 보시하지 않으니,
겁내는 보시와 부끄러운 보시와 인색한 보시가 없으며, 그 허락해 주는 바대로 하여 덜거나 더함이 없이 보시하고,
사랑하지 않음이 없이 보시하며, 끝까지 언제나 보시하므로 끝내 보시하지 않음이 없으며, 아첨하는 보시와 간사한 보시가 없고,
업보를 의심하여 보시하지 않으며, 삿된 생활에 의한 보시가 없고, 어리석은 보시가 없으며,
믿지 않는 보시가 없고, 알지 못하는 보시가 없습니다.
지치거나 어려워하는 보시가 없고, 의지하거나 집착하는 보시가 없으며, 선택하는 보시가 없고, 다른 모양의 보시가 없으며,
받을 자를 구하여 보시하지 않고, 받지 못할 중생이 없으므로 계율을 가졌거나 계율을 범하였거나 간에
더하고 덜 하는 보시가 없으며, 받는 자에게 갚기를 바라고서 보시하지 않고, 이름을 구하려고 보시하지 않습니다.
또 보시를 헐뜯거나 칭찬하지 않고, 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은 보시도 없으며,
불타는 번뇌의 보시도 없고, 후회하는 마음으로 보시하지 않으며, 보시를 자찬하지 않고,
잡되거나 더러운 보시가 없으며, 업보를 바라고서 보시하지 않고, 일정한 곳에 보시함이 없으며,
미워하거나 성내거나 더럽게 여기거나 사랑하는 따위의 보시가 없습니다.
와서 구걸하는 자가 있을 때 괴롭게 하거나 해치면서 보시하지 않고, 업신여기거나 쉽게 여겨 보시함이 없으며,
얼굴을 찡그려 가면서 보시하지 않고, 던져주면서 보시하지 않으며, 까닭 없는 보시가 없고, 손수 주지 않는 보시가 없으며,
떳떳하지 않은 보시가 없고, 끊어버리는 보시가 없으며, 질투하거나 교만한 보시가 없습니다.
한계를 둔 보시가 없고, 그가 허락하여 주는 것 그대로 사고팔지 않고서 보시하며, 감내하거나 감내하지 않는 보시가 없고,
복 밭 아닌 보시가 없으며, 적은 보시라 해서 깔보지 않고, 많은 보시를 찬탄하지도 않으며, 쇠퇴하여 줄어드는 보시가 없고,
후생(後生)을 구하기 위하여 보시하지 않고, 자재 로이 재보(財寶) 얻기를 구하여 보시하지 않습니다.
제석천왕과 범천왕과 호세(護世)천왕과 전륜성왕(轉輪聖王)과 같은 모든 과보를 바라고서 보시하지 않으며,
성문과 연각의 승(乘)을 원하여 보시하지 않고, 왕자로서 자재롭게 되기를 바라면서 보시하지 않으며,
한 세상만을 위한 까닭에 보시하지 않고, 만족을 느끼는 보시가 없으며, 일체지(一切智)에 회향하지 않는 보시가 없고,
청정하지 않은 보시가 없으며, 때[時]에 맞지 않는 보시가 없고, 해독을 끼치는 보시가 없으며, 중생을 괴롭게 하는 보시가 없습니다.
보살이 행하는 보시는 지혜로운 이의 업신여김이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적(空寂)함을 관찰하여 보시를 행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공훈(功勳)을 지음이 없이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세 가지 존재[三有]의 모양을 벗어나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장소를 취하지 않고서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해탈과(解脫果)를 위하여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습니다.
뭇 마군을 조복하기 위하여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번뇌와 애욕을 끊기 위하여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하여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잘 분별하여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보리를 돕기 위하여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바르게 회향하기 위하여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도량과 해탈의 과(果)를 장엄하기 위하여 보시하므로 다함이 없으며,
이 보시는 끝이 없으므로 다함이 없으며, 이 보시는 파괴됨이 없으므로 다함이 없습니다
.
또 이 보시는 끊어지지 않으므로 다함이 없으며, 이 보시는 넓고 크므로 다함이 없으며,
이 보시는 머묾이 없으므로 다함이 없으며, 이 보시는 항복시킬 수 없으므로 다함이 없으며,
견줄 것이 없는 보시이므로 다함이 없으며, 이 보시는 일체종지(一切種智)에 나아가므로 다함이 없으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보시를 수행하되 다함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 보살에게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선남자여.
그대가 이미 보살마하살이 보시[檀]바라밀을 수행하여 다함이 없음을 기꺼이 말해 주었으니,
바라건대 그대는 이제 보살의 지계[尸]바라밀을 말해 주십시오.
보살이 얻는 다함없는 지계바라밀의 다함없는 뜻은 무엇입니까?”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보살의 계율이 예순일곱 가지가 있는데 그 계율을 청정하게 닦는 것이 또한 다함이 없습니다.
그 예순일곱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모든 중생을 괴롭히거나 해치지 않는 것이요, 다른 사람의 재물을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요,
다른 사람의 부녀(婦女)를 삿된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이요, 모든 중생을 속이는 일이 없는 것이요,
처음부터 두 가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니 자기의 권속에 만족할 줄 알기 때문이요,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니 거칠고 더러운 것을 참기 때문입니다.
꾸미는 말이 없으니 항상 착하게 말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의 즐거운 일을 탐내거나 질투하지 않기 때문이요,
처음부터 성내거나 미워함이 없으니 나쁜 말을 참기 때문이요,
바른 소견을 가져서 삿되지 않으니 다른 도(道)를 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깊이 믿으니 마음이 흐리지 않기 때문이요, 법을 믿고 따르니 법을 잘 관찰하기 때문이요,
스님들을 믿고 공경하니 성인의 무리를 존경하기 때문이요, 엎드려 절함이니 부처님을 생각하기 때문이요,
엎드려 절함이니 참는 성품을 본받기 때문이요, 엎드려 절함이니 스님들을 높이 공경하기 때문이요,
금하는 계율을 굳게 지키는 것이니 모든 것을 범하지 않고 나아가 조그마한 금계까지도 놓아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자람이 없는 완전한 계율을 가지는 것이니 다른 승(乘)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요,
뚫어지지 않는 계율을 가지는 것이니 나쁜 곳에 태어남을 여의기 때문이요,
거칠지 않은 계율을 가지는 것이니 모든 번뇌와 섞이지 않기 때문이요,
더럽지 않은 계율을 가지는 것이니 오로지 깨끗한 법을 자라게 하기 때문이요,
매우 깊은 계율을 가지는 것이니 뜻에 따라 회향하여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요,
찬탄할만한 계율을 가지는 것이니 슬기로운 이도 꾸짖지 않기 때문이요,
순수하고 선한 계율을 가지는 것이니 바르게 생각하여 알기 때문이요,
가책(呵責)하지 않는 계율을 가지는 것이니 모든 계율에 산란하지 않기 때문이요,
착하고 견고한 계율을 가짐이니 모든 감관을 잘 지키기 때문이요,
이름난 계율을 가짐이니 모든 부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이기 때문이요,
만족할 줄 아는 계율을 가짐이니 만족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요,
욕심이 적은 계율을 가짐이니 탐내고 아낌을 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청정한 계율을 가짐이니 몸과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이요,
아란야(阿蘭若)의 계율을 가짐이니 시끄러움을 여의기 때문이요,
거룩한 씨앗[聖種]의 계율을 가짐이니 다른 뜻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위의(威儀)의 계율을 가짐이니 일체의 선근으로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요,
말한대로 계율을 갖는 것이니 사람과 하늘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의 계율을 가짐이니 중생을 옹호하기 때문이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계율을 가짐이니 모든 괴로움을 참고 견디기 때문이요,
기뻐하는 마음의 계율을 가짐이니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요,
똑같이 여기는 마음의 계율을 가짐이니 사랑하고 미워함을 여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살피는 계율을 가짐이니 잘 분별하기 때문이요,
단점이나 결함을 구하지 않는 계를 가짐이니 다른 이의 마음을 감싸주기 때문이요,
잘 거두는 계를 가짐이니 잘 지키고 보호하기 때문이요,
지혜를 베푸는 계율을 가짐이니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요,
인욕의 계율을 가짐이니 마음에 성냄이나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요,
정진의 계율을 가짐이니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요,
선정의 계율을 가짐이니 모든 선지(禪支)를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요,
지혜의 계율을 가짐이니 선근(善根)을 많이 들었어도 싫증냄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문(多聞)의 계율을 가짐이니 널리 배워서 견고하기 때문이요,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계율을 가짐이니 보리를 도와 이루게 하기 때문이요,
악지식을 멀리 여의는 계율을 가짐이니 나쁜 도를 버리고 멀리 여의기 때문이요,
몸을 아끼지 않는 계율을 가짐이니 변하지 않음이 없다는 생각으로 관찰하기 때문이요,
목숨을 아끼지 않는 계율을 가짐이니 선근을 부지런히 수행하기 때문이요,
후회하지 않는 계율을 가짐이니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요,
삿된 생활을 하지 않는 계율을 가짐이니 마음과 행동이 청정하기 때문이요,
초조해 하지 않는 계율을 가짐이니 끝내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불타지 않은 계율을 가짐이니 착한 행업(行業)을 닦기 때문이요,
교만이 없는 계율을 가짐이니 마음을 낮추어 교만하지 않기 때문이요,
동요되지 않는 계율을 가짐이니 모든 욕심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요,
높이지 않는 계율을 가짐이니 마음이 평등하고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부드럽고 조화로운 계율을 가짐이니 마음에 부대낌이 없기 때문이요,
조복된 계율을 가짐이니 괴롭히거나 해침이 없기 때문이요,
적멸(寂滅)한 계율을 가짐이니 마음에 번뇌[垢穢]가 없기 때문이요,
말을 따르는 계율을 가짐이니 말과 같이 행동에 옮기기 때문이요,
중생을 교화하는 계율을 가짐이니 거두어주는 법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요,
바른 법을 옹호하는 계율을 가짐이니 진실 됨을 어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대로 성취하는 계율을 가짐이니 모든 중생에게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이요,
부처님을 친근히 하는 계율을 가짐이니 여래의 위없는 계율을 구하기 때문이요,
부처님의 삼매에 들어가는 계율을 가짐이니 모든 불법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예순일곱 가지 청정하게 수지하는 계율의 다함없음’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또 다함없이 청정한 계율 가운데 기대거나 집착함이 없으니,
이른바 나∙너∙중생∙수명(壽命)∙양육(養育)∙장부[士夫]∙물질∙느낌∙생각∙지어감∙의식∙땅∙물∙불∙바람에 대해 그러합니다.
이 청정한 계율 속에는 눈에 대한 물질의 모양과 귀에 대한 소리와 코에 대한 냄새와 혀에 대한 맛과
몸에 대한 감촉과 뜻에 대한 법 등의 모양이 없고 또 몸과 마음도 없습니다.
이 계율은 정해진 모양이니 한결같이 공통되지 않기 때문이며,
또 이 계율은 나뉘어 다른 모양이니 방편으로 모든 법을 반연하기 때문이며,
이 계율은 공(空)한 모양이니 모양 없는 제(際)를 얻어 삼계(三界)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이 계율은 지음이 없으니 생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無生忍]이기 때문이며,
이 청정한 계율 속에는 이미 지은 것과 현재 짓는 것과 앞으로 지을 것이 없고
이 청정한 계율은 과거도 없어지지 않았으며 미래도 오지 않을 것이며 현재도 머물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이 청정한 계율 속에는 마음이 깨끗하여 더러운 것이 없고 알음알이가 머무르지 않고 생각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이 청정한 계율은 욕계(欲界)에 의지하지 않고 색계(色界)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무색계(無色界)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청정한 계율은 욕심의 티끌을 내버리고 성냄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무명의 막힘을 없애며,
이 청정한 계율은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 하지도 않고 인연을 거스르지도 않으며,
이 청정한 계율은 ‘나’라는 생각이 있지 않고 ‘내 것’이라는 생각도 버렸고 몸이라는 소견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이 청정한 계율은 붙여진 이름[假名]을 취하지 않고 물질의 모양에 머물지 않고 이름과 물질에 섞이지도 않습니다.
또 이 청정한 계율은 인(因)에 매이지 않고 모든 소견을 일으키지 않고 의심이나 후회에 머물지 않으며,
이 청정한 계율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머물지 않고 선근에 집착하지 않으며,
이 청정한 계율은 불타는 번뇌가 없고 고요하여 모양을 여의며,
이 청정한 계율은 부처될 종자를 끊지 않으니 바른 법을 구하기 때문이며,
법 종자를 끊지 않음은 법의 성품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며, 스님의 종자를 끊지 않음은 함이 없음[無爲]을 닦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청정한 계율을 지닌 자는 계속 이어가서 끊이지 않기 때문에 다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부의 계율은 생(生)을 받는 곳에 있기 때문에 다함이 있고, 사람 가운데서 10선(善)을 다하기 때문에 다함이 있으며,
욕계 모든 하늘의 복 갚음의 공덕이 다하기 때문에 다함이 있고,
색계 모든 하늘의 선정의 한량없는 마음이 다하기 때문에 다함이 있고,
무색계 하늘에서 들어가는 모든 선정이 다하기 때문에 다함이 있고,
외도와 선인(仙人)의 모든 계율이 신통을 잃어버려 다하기 때문에 다함이 있고,
모든 성문과 유학 무학의 계율은 열반에 들어가 다하기 때문에 다함이 있고,
벽지불의 계율은 대비심이 없어 다하기 때문에 다함이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그러나 보살의 청정한 계율은 다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계율 속에서 모든 계율이 나오기 때문이니, 마치 종자가 다함이 없으면 열매도 다함이 없는 것처럼
이 보리의 종자가 다할 수 없는 까닭에 여래의 금계[戒禁]도 다함이 없는 것이며,
그래서 여러 보살들이 가진 모든 계율도 모두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그러므로 이것을 보살이 청정한 계율을 닦아 지녀서 다함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 보살에게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선남자여. 그대가 이미 보살의 지계바라밀의 다할 수 없음을 흔쾌히 말씀하셨으니,
바라건대 그대는 이제 보살의 인욕[羼提]바라밀을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것을 보살이 짓는 다함없는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또 서른두 가지 일을 갖추어 인욕을 수행하여 또한 다함이 없습니다.
그 서른두 가지란, 모든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해칠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덮어 가림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성냄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분노하거나 다툼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싸움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모든 미진과 같은 세계에 대하여 마음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자기와 다른 사람을 옹호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알며, 보리심을 따르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입니다.
잘 생각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두 가지의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업보를 알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몸을 장엄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입으로 깨끗한 말을 베풀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마음이 견고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말이 자재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입니다.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마음을 잘 분별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싸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깨끗한 세간의 행을 닦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사람과 하늘의 과보를 받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입니다.
몸의 모양이 훌륭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미묘한 범음(梵音)을 갖추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모든 허물과 근심을 제거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거칠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끊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모든 불선근(不善根)을 끊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모든 번뇌의 적을 죽이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괴롭히고 해치는 중생을 초월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요,
모든 불법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에 마땅히 이 인욕을 아는 것이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서른두 가지 인욕을 수행하여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어떤 것을 인욕이라고 하는가?
욕하는 자를 보더라도 잠자코 받아들여 보복하지 않는 것이니 그 음성이 메아리의 모양[響相]과 같음을 잘 알기 때문이며,
꾸짖음을 보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몸뚱이의 모양이 그림자의 모양과 같은 줄 잘 알기 때문이며,
성내는 자를 보더라도 마음에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이니 심법(心法)이 허깨비 모양[幻相]과 같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분한 일이 있더라도 그 분한 것에 대하여 보복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니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명예로운 말을 듣더라도 마음에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스스로 훌륭한 체하지 않기 때문이며,
명예롭지 못한 말을 들어도 마음에 거리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공덕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요,
영화로움이나 이익을 만나더라도 기뻐하지 않는 것이니 자신을 잘 조복하기 때문입니다.
쇠하거나 닳아 없어지는 일을 당하여도 거리끼지 않는 것이니 마음이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며,
칭찬하는 자를 보아도 마음이 놀라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분별을 잘 하기 때문이며,
헐뜯는 자를 보아도 마음이 위축되지 않는 것이니 그 마음이 넓고 크기 때문이며,
비웃는 자를 보더라도 그 마음이 낮아지지 않는 것이니 편안히 머물기 때문이며,
자랑하는 자를 보아도 그 마음이 높아지지 않는 것이니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일을 당하여도 마음으로 기뻐하지 않는 것이니
함이 있는 법[有爲法]은 변하지 않는 모양[常相]이 없음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괴로운 일을 당하여도 마음으로 괴로워한다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이니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며,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니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고통을 참고 받는 것이니 위급한 자를 보고는 자신이 그 고통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마디마디 사지가 분해되더라도 이 고통을 참는 것이니 각지(覺支:깨달음의 갈래. 覺分∙苦提分)를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며,
뭇 괴로움이 몸에 가해지더라도 다 참고 받는 것이니 부처님 몸의 모양을 갖추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도 참는 것이니 업력(業力)을 잘 짓기 때문이며,
뜨겁게 타오름을 나타내 보여도 모든 고행을 다 닦는 것이니 외도를 조복하기 때문이며,
그 자리에서 모든 도에 들어가는 것이니 제석과 범천과 세간을 수호하는 여러 천왕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인욕이라고 합니다.
또 끝내 참는다는 것은 서로 다툼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다른 사람이 나를 꾸짖는 것을 보고서 참는다면 이렇게 참는 것은
두 가지 모양을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니며,
‘누가 나를 꾸짖는가’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참는 것은 바로 법 공덕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니며,
‘눈을 꾸짖는가’라고 한다면 이렇게 참는 것은 바로 감관[入]의 모양을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니며,
귀∙코∙혀∙몸이거나 의식을 꾸짖는 것이라 하여도 이렇게 참는 것은 모든 감관[諸入]을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니며,
만약에 꾸짖는 이가 없다고 하여도 이렇게 참는 것은 무아(無我)를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닙니다.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인 줄 알고서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러한 인욕은 메아리 같은 모양이라고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니며,
저 사람이나 나나 둘 다 덧없다고 여긴다면 이렇게 참는 것은 덧없음을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니며,
저 사람은 전도(顚倒)되었고 나는 전도되지 않았다고 여긴다면 이렇게 참는 것은 높고 낮음을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니며,
저 사람은 부지런히 수행하지 않고 나는 부지런히 수행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참는 것은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만약 저 사람은 나쁜 갈래에서 살고 나는 좋은 갈래에서 산다고 여기면서 이렇게 참는다면
이것은 좋고 나쁨을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이 아니며,
나는 무상(無常)한 것은 참아도 유상(有常)한 것은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고(苦)에 대해서는 능히 참지만 모든 쾌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무아(無我)인 것은 참아도 유아(有我)인 것은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부정한 것은 참지만 청정한 것은 참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와 같이 참는 것은 상대가 있음을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공(空)에 대해서는 참아도 모든 견(見)에 대해서는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모양 없음[無相]은 참아도 모든 느낌[覺]은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
는 바람이 없는 것은 참아도 바람에 대해서는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조작함이 없는 것은 참아도 조작하는 것은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번뇌가 다한 것은 참아도 번뇌가 있는 것은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착한 것에 대해서는 참아도 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세속을 벗어나는 것은 참아도 세속에 그대로 있는 것은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다툼이 없는 것은 참아도 다툼에 대해서는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번뇌가 없음[無漏]은 참아도 번뇌에 대해서는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백법(白法:청정한 법. 선법)은 참아도 흑법(黑法:삿된 법)은 참지 않는다고 하거나,
나는 적멸(寂滅)은 참아도 생사는 참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와 같이 참는 것은 상대를 관하는 것이지 끝내 참는 것은 아닙니다.
끝내 참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만약 공적(空寂)에 들어가 모든 견(見)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공(空)에 기대거나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이 모든 견해들도 다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이며,
만약 모양 없음[無相]에 들어가 모든 알아차림[覺]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모양 없는 것에 기대거나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이 알아차림도 다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입니다.
또 바람이 없음[無願]에 들어가 바람[願]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바람이 없는 것에 기대지도 않는다면
이 바람도 모두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이며,
만약 조작하는 것이 없음[無作]에 들어가 조작함[作]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조작하는 것이 없음에도 기대지 않는다면
이 조작함도 다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이며,
만약 번뇌가 다함에 들어가 번뇌와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번뇌가 다한 것에 기대지도 않는다면 모든 번뇌가 다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입니다.
만약 착함에 들어가 착하지 않음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착함에도 기대지 않는다면 착하지 않은 것도 모두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이며,
만약 세속을 벗어남[出世]에 들어가 세속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세속을 벗어남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면
세속에 있는 것도 모두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이며,
만약 다툼이 없는 것에 들어가 다툼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다툼 없는 것에 기대지도 않는다면 이 다툼도 모두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입니다.
만약 번뇌가 없음[無漏]에 들어가 번뇌와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번뇌가 없는 것에 기대지도 않는다면 모든 번뇌가 다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이며,
만약 백법(白法)에 들어가 흑법(黑法)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백법에 기대지도 않는다면 흑법도 다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이며,
만약 적멸에 들어가 생사와 더불어 화합하지 않고 적멸에 기대지 않는다면 생사도 다 공할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다면 이는 두 가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끝내 참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품이 스스로 생긴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을 따라 생긴 것도 아니고 자타가 화합하여 생긴 것도 아니며
또한 있음과 없음을 벗어나 있어서 파괴할 수 없다면, 파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 것이 끝내 참는 것이며,
지음도 짓지 않음도 없고 의지하여 집착하는 것도 없으며 분별함도 없고 장엄함도 없으며 법을 닦아 다스림도 없고
일어나 나아감도 없어서 끝까지 만들어 내지 않으니 만약 만들어 내는 것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참는 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참음[無生忍]이요,
생겨남이 없는 참음이 바로 벗어나지 않는 참음[不出忍]이요, 벗어나지 않는 참음이 바로 끝내 참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이 인욕을 수행하여 인욕의 수기(受記)를 얻으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인욕을 수행하여 다함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인욕을 말할 때 모든 대중들이 무진의 보살을 찬탄하여 말하였다.
“선남자여,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이 인욕에 대해 흔쾌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곧 갖가지 희유한 꽃을 비처럼 뿌리고 가루 향∙바르는 향,
셀 수 없는 여러 가지 옷과 깃발[幢幡]∙보배∙일산[盖]을 무진의 보살에게 공양하니,
백천 가지 기악이 공중에서 저절로 소리를 내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만약 어떤 중생이 여래의 깊고 깊은 인욕을 얻고자 한다면, 이 말씀을 듣고서 놀라거나 겁내지 말라.”
이때 여러 가지 꽃과 향과 옷과 깃발과 일산이 두루 넘쳐서 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였다.
그때 부처님께서 무진의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대가 공양한 꽃이나 향 등의 물건을 네 몸으로 그릇을 만들어 그것들을 네 몸에 집어넣어서 가지런히 정돈할 수 있겠느냐?”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신통의 힘으로 곧 몸을 그릇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때 무진의 보살이 곧 보살의 색신(色神)삼매에 들었는데, 삼매에 들어서는 온갖 공양 꺼리들을 다 배꼽 속에 넣었다.
다 넣었는데도 그 몸의 크기는 예전과 같아서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그때 대중 가운데 있던 대장엄(大莊嚴)이란 보살이 무진의 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지금 드신 삼매의 이름이 무엇이 길래 그대가 삼매에 든 뒤에
모든 공양꺼리를 그 몸속에 다 집어넣어도 몸의 크기는 예전과 같아서 늘거나 줄지 않습니까?”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 삼매의 이름은 일체색신삼매(一切色身三昧)입니다.”
대장엄 보살이 말하였다.
“이 삼매에 이것 말고 또 다른 힘이 있습니까?”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이 삼매의 힘은 몸의 경계 안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물질을 다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이 몸의 경계는 예전과 같아서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때 대중 가운데 있던 사람과 하늘들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선정의 힘을 볼 수 있을까?’
이때 부처님께서 모든 사람∙하늘 대중들의 생각을 아시고 무진의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대가 이 선정의 신통력을 나타내 보여 주어라.”
[출처] 무진의보살경(無盡意菩薩經) 제2권--1|작성자 목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