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황희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난해에 과거에 합격한 후 적성(積城) 고을의 훈도(訓導)를 지내는 중이었다.
고려 때의 훈도는 서당의 훈장노릇도 하면서 사또의 일을 도와 주는 일을 겸하였다. 사또가 없을 때에는 일을 대리하기도 하는데, 황희는 유능하고 성실하다고 누구에게나 널리 일정받았다. 사또인 김명원(金命元)은 송사문제로 항상 골치를 앓았는데 황희가 대신 나서서 잘 처리하였다. 김명원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황희를 극구 칭찬하면서 모처럼 휴가를 보냈다.
황희는 오랜만에 나귀를 타고 개경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어서 부모님을 뵙고픈 마음에 뙤약볕이 내리쬐는 길을 급하게 가느라 햇볕에 얼굴이 타고 자꾸만 땀이 흘러내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지름길로 가고자 외딴 산길을 접어들어 나무 그늘에서 나귀를 매어놓고 땀을 닦아내며 잠시 쉬고 있었다. 바로 그때에 검정 소와 누렁 소 두 마리를 몰면서 밭을 갈고 있던 농부가 일손을 멈추고 황희가 쉬고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북 지방에서는 두 마리 소로 쟁기질을 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농부는 예사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황희 ; 자, 여기에 앉으시지요, 더운 날씨에 참으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농부 ; 젊은이, 참으로 고맙소. 농부는 황희 곁에 앉더니 그를 찬찬히 바라보고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참으로 귀상(貴相)이로다. 얼마후 농부가 황희에게 물었다. “선비가 바로 황희라는 사람이요?”
황희 : 네, 어르신께서 어떻게......?
농부 : 허허, 역시 그렇구먼......참으로 크게 될 인물이로다. 그래 과거는 보았소?
황희 ; 네, 작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농부 : 장수가 나면 용마(龍馬)가 나고 봉(鳳)이 나면 황(凰)이 나는 법인데 아직은 선비의 때가 아니지.......!
황희 : 무슨 말씀이신지요....? 농부 : 아니오, 그냥 나 혼자 한 말이었소. 그때 바로 두 사람 앞에서 되새김질을 하던 검정 소가 ‘움메에’하고 울음을 길게 목청껏 뽑자, 누렁 소도 따라서 울었다.
황희 ; 어른신, 저기 검정 소와 누렁 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일을 잘하는지요?
농부 : 허허....., 나는 젊은이가 그런 질문을 하기를 기다렸다오. 잠깐 귀 좀 빌립시다. 저 소 중에서 누렁 소가 일하는 것이 한결 낫소. 황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다시 물었다.
황희 : 어른신께서는 왜 제가 소에 대하여 질문하기를 바라셨는지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제 귀에다 대고 은밀하게 대답하시는 것입니까?
농부 : 아무리 짐승이라도 자기 흉을 보는 것 싫어하니까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뜻이오.
황희 : 아하, 그러셨군요.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농부 : 짐승조차도 자기를 흉보면 싫어하는데 사람이야 오죽 더하겠소.
황희 : 네, 잘 알겠습니다.
농부 : 선비는 들으시오. 장차 거구생신(去舊生新)의 때가 오면 새 터전을 개척하여 옥토로 가꾸는 중임을 맡게 될 것이오. 그때 내말을 참작하기 바라오. 선비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급제까지 했으나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깊은 심지를 지녔소. 그러한 장점을 더욱 살리시오. 국가의 중임을 맡아 수행할 때 항시 조화와 인화에 힘써 인재를 고루 포용해야 하오. 선비는 장차 새시대가 도래할 때 역사를 경작할 큰 임무를 맡을 것이오. 역사를 경작하는 데 있어 황폐한 땅의 가시덤불을 베어 내고, 불을 지르고, 개간을 하고 옥토를 만들어야 하오. 나라를 다스리는 과정에 있어 농사의 한철은 백년대계(百年大計)에 비유하지. 민족적인 대동단결에 저력이 발동하는 태동기간은 천년대계(千年大計), 장차 천지개벽이 이루어지는 그 시기는 만년대계(萬年大計)에 비유할 수 있지. 그런데 선비는 이 민족의 만년대계 추수기에 앞에 역사의 밭을 경작하는 가장 큰몫의 일을 해낼 소의 역할을 타고났소.
황희 : 하오면 그 소의 등에 쟁기를 메워 일할 소몰이꾼은 누구인지요?
농부 : 허허 성인요세출(聖人要世出)이라, 그는 아직 다섯 살도 안 된 잠용(잠용(潛龍)이오. 수면으로 서서히 자태를 드러낼 때까지 그대는 기다려야지. 후일에 그대와 그 잠용은 (훗날 세종을 뜻함)역사의 경작꾼으로서 길이 남아서 칭송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작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후일에 대비하오. 천하를 주유하며 견문을 넓히고 더욱 학문에 수양을 쌓으시오.
황희 : 가르치심을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하온대 어르신은 뉘신지 존함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농부 : 허허, 곧 알게 될 테니 어서 집으로 가오.
황희는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더 이상 묻기도 어려워 범상치 않은 농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귀에 올랐다. 한참을 오다가 뒤돌아보니 농부와 소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황희 : 혼자 중얼거렸다. 이상하구나! 저분은 뉘신지 필시 예삿분이 아닌가 보구나....... 나는 아직 남을 다스리거나 지도할 만큼 학문과 덕을 갖추기 못하였다. 저분이 일러주신 말씀은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집에 가서 부모님과 의논한 후 벼슬을 그만두고 인격을 수양하고 천하를 주유(周遊: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놂)하며 많은 것을 배워야겠구나!
범상치 않은 농부의 말은 너무나 강렬하게 황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황희는 아버님, 어머님을 찾아 뵙고 사또께서 특별히 휴가를 보내 주어서 오게 되었음을 아뢰고, 그동안의 문안 인사를 드렸다. 더블어 집으로 오던 중 어떤 이인(異人:농부)을 만난 이야기를 하며 벼슬을 그만두었음을 한다고 아뢰었다. 그날 늦게 귀가한 황군서는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허락을 하였다.
황군서 : 희야, 지금은 시절이 매우 어지럽다. 그러니 네 말대로 천하를 주유하고 많은 것을 체험하고 배운 후 적당한 시기에 돌아오너라. 시절이 안정되면 그때 다시 벼슬길에 나가서 네 뜻을 펴도록 하여라. 우선의 안일함에 빠져 큰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은 우물안 개구리 식의 짫은 생각이니라. 그러니 대장부로서 바람직 스럽지 못하니 내일이라도 당장 집을 떠나도록 하거라.
황희 : 아버님의 뜻을 헤아려 결코 부끄러움이 없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부자간에 모처럼 만나서 밤이 깊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며칠 후 황희는 집을 떠나서 나그네 길에 나섰다. 어느 주막에서 국밥에 곁들여 탁주를 두어 사발을 마시는 중 우연히 옆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풍해도(豊海島: 황해도로 개칭되기 이전의 명칭) 구월산에 가까운 벽촌 마을이었다. 장돌뱅이로 보이는 몇몇 초로의 늙은이들과 중년 남성이 주고 받는 이야기는 황희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이러하였다.
최씨 : 내참 세상 살다가 이상한 일도 다 겪었네, 순박하게 생긴 최씨라는 사내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내의 아내는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 후 뒤끝이 안 좋아 앓고 있었다. 그런데 엊그제 어떤 이인이 찾아와서 주문을 외우자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최씨는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사람을 살려 주셨으니 조금이라도 사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것을 사정하였으나,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이인 : 꼭 그러시다면 저 외양간에 매인 검정 소와 누렁 소를 좀 반나절만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최씨 : 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이라도 가져가시지요. 죽은 아내의 목숨을 살여 주셨는데 소가 문제이겠습니까?
이인 : 아닙니다. 내가 밭갈이를 하고 싶어서 그러니 잠시 빌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댁의 산전(山田)을 갈아 엎어 옥토로 만들어 드리겠소.
최씨 : 아이구, 그렇지 않아도 은혜를 입었는데 이렇게 고마울 수가....!
이인 : 내일 아침 일찍 소를 부릴 터이니 새벽에 소에게 배불리 먹여 길마를 지은 후 마당에 내놓으시오.
최씨 : 네, 그렇게 하구말구요. 이튿날 최씨는 이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이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소를 부리겠다고 했는데....... 최씨는 계속 기다렸으나 저녁 때가 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 후 이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다음과 같았다.
이인 : 주인장, 오늘 참 소를 잘 부렸소. 이제 소에게 배불리 먹이시오.
최씨 : 소를 부리시다니요? 소는 마당가 그늘에 매어놓아 하루 종일 잠만 잤는데.....!
이인 : 아, 나는 편법으로 소의 혼과 기운만 잠시 뽑아다 썼던 것이오.
최씨 : 그게 사실입니까?
이인 : 믿기지 않거든 저 아래 산전으로 가보시오. 개간이 되어 옥토로 변했을 것이오. 어쨌든 오늘 소를 잘 먹이고 사흘간 쉬도록 하시오. 이인이 뭐라고 주문을 외우자, 하루 종일 잠만 자던 소가 깨어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힘들게 일을 했을 때처럼 몸체가 땀에 젖어 있었다.
최씨는 소에게 먹이를 주고 이인을 방으로 모신 후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산전으로 급히 달려가 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산전은 모조리 잘 갈아져 있고 돌맹이까지 말끔히 추려져 있었다. 최씨는 급히 달려와 이인에게 넙죽 절을 하면서 물었다.
최씨 : 죽어가는 소인의 아내도 살려주셨고, 산전까지 좋은 밭으로 만들어주셨으니 이 은혜 어떻게 갚아야 할지 소인에게 가르쳐주십시오.
그때 이인은 마당으로 나서서 천천히 최씨에게 말하였다. ”은혜랄 것이 아무것도 없소. 내일 저 아래 주막에 가서 그저 술이나 하시면 되오.”라는 말을 건넨 후 이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더라는 것이다.
그 무렵 회군한 이성계 일파가 권세를 잡고 우왕을 관동지방(강릉)으로 귀양을 보낸 후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공양왕을 내세웠다. 회군하여 세력을 잡고 나니 자기들끼리 세력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고려의 사직은 허울상 명목만 겨우 유질될 뿐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그말을 듣자 황희는 번개처림 뇌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 혹시 그 분이 아닐까? 엊그제 내가 그늘에서 쉴 때 간접적으로 교훈을 주셨던 그분......꼭 찾아서 만나뵈야지.” 그러나 막상 그분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분명 그분은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암시하신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반드시 만나게 되리라.”황희는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다시 무작정 천천히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먹기도 하고 굶기도 하면서 초라한 행색으로 구월산 산중으로 접어들었다. 마침 해는 뉘엿뉘엿 저무는데 가까운 곳에는 인가가 없었다. ‘이거 참 큰 낭패로구나’ 싶어 두리번거리다가 언덕 아래를 바라보고는 갑자기 깜짝 놀랐다.
다음에 (9-2)에서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