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우는 날은
뻐꾸기 우는 날은
뻐꾸기 울음터에
여남은 개 스무 개씩 돌팔매를 날려본다
돌팔매 날아간 족족
앉는 족족
너 있다
아니면 또 한나절을
꽃밭 가에 나앉아서
봉숭아 채숭아를 송이송이 헤어본다
다홍빛 분홍빛 속에
그 꽃 속에
너 있다
뻐꾸기 우는 날은
뻐꾸기 울음 따라
십 리쯤 시오 리쯤 자드락길 걸어본다
하현달 사위는 서녘
그 서녘에
너 있다
오동꽃을 보며
이승의 더딘 봄을 초록에 멱감으며
오마지 않은 이를 기다려 본 이는 알지
나 예서 오동꽃까지는 나절가웃 길임을
윗녘 윗절 파일등은 하마 다 내렸는데
햇전구 갈아 끼워 불 켜든 저 오동꽃
빗장도 아니 지른 채 재넘이길 열어놨네
하현의 낮달로나 나 여기 떠 있거니
오동꽃 이운 날은 먼데 산 뻐꾸기도
헤식은 숭늉 그릇에 피를 쏟듯 울던 것을
책
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
그 밖의 많은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
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
목차마저 희미해진 어머니, 라는 책
거덜난 책등을 따라 소금쩍이 일었다
밑줄 친 곳일수록 목숨의 때는 남아
보풀이 일 만큼은 일다가 잦아지고
허기진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
달의 門下
나는 달의 門下다
달은 높이 떠 있으므로
차면 기우나니,
따라잡지 못할 강론
한번도 강림한 적 없으되
늘 내 곁에 가득한 달
진흙 수레를 끌고
홀로 가는 구만 리 장천
오직 달빛만이
가르침의 전부인 것
물 속에 잠겼다고 보는가,
그마저도 중천인 것
시장한 초이레 달이
초여드레 달을 위해
조금씩 베어 먹던
그늘을 남겨 두느니,
건너간 하늘 길섶에
먹물 장삼 한 벌
분황*에 들다
그적 그 신랏적 발치쯤에 나부껴도
풀물 든 네 옷고름 한눈에 알아보았네
돌벽돌 포개 들고선 탑이 슬몃 돌아선 날
보고도 아니 본 척 그러는 줄 내 모를까
하늘 짓광목을 드는 칼로 베어낸들
돌갗에 돌옷이 앉은 세월만은 못 덮는 것
나는야 애당초에 저 문밖의 돌거북이
어깨가 허물망정 질 만큼은 짐을 지고
한 발짝 떼지도 못했네, 즈믄 해가 저물도록
하 그리 굴풋했던 길이 길을 당기느니
쇠난 멍 자국을 멍든 손에 움켜쥔 채
나 이제 분황에 드네, 지천의 너 있으매
*분황사(芬皇寺) :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절. 앞마당에 모전석탑이 있다.
봄눈
나의 어린 신부는 흰 나귀를 타고 갔다
탱자나무 울을 지나 흙먼지 에움길을
툭 터진 괴춤 사이로 마른 뼈가 드러났다
젖은 손수건이 첨탑 위에 떨어졌다
눈물이 마르면서 다시 낯선 밤이 오고
혼자서 서녘의 불빛을 느루 셀 듯싶었다
나의 무지 끝에서 너는 늘 반짝였거늘
어찌 몰랐을까 쉬흔 해가 저물도록
다 못간 세상의 저녁에 너는 왔다, 봄눈처럼
뻐꾸기가 쓰는 편지
- 먼저 간 아우를 어느 봄꿈에 보고
뻐꾸기 봄 한 철을 갈아낸 그 먹물을 내가 받네 내가 받아 한 장 편지를 쓰네 어디라 머리칼 한 올 잡아볼 길 없는 네게
너 있는 그곳에도 봄 오면 봄이 오고 봄 오면 멍든 봄이 멍이 들고 그런가 몰라 서럽고 막 그런가 몰라 꽃 피고 또 꽃 진 날에
너 나랑 눈 맞춰 둔 그 하루 그 허기진 날 말로는 다 못하고 끝내는 못다 하고 꽃이면 꽃이랄 것가 꼭 꽃만도 아닌 것아
너 다녀간 꿈길 끝에 찬비만 오락가락 오락가락 찬비 속에 목이 젖은 먼 뻐꾸기 젖은 목 말리지 못한 채 먹점 찍는 먼 뻐꾸기
나의 직립보행
가장 먼 길을 돌아 가장 가까이 왔다
하도나 가까워서 때로 너 안 보이고
뭇 밤의 애젓한 이마에 흰 이슬이 박혔다
너 없는, 그 가공할 허기가 들레던 날
나의 직립보행은 마침내 시작되었다
너 하나 만나기 위해 육백만 년을 걸어왔다*
모서리가 닳은 채로 서걱이던 나의 별은
너의 잔기침에 가볍게 부서진다
홀연히 세상에 없는 춤사위가 빛날 때
그 뻘밭 그 진구렁 얼음강에 덮였다가
마안한 하 세월의 모랫벌이 되기까지
오, 너는 어느 만년설을 홀로 건너온 무지개더뇨
*인간의 직립보행은 육백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구절초 詩篇
찻물을 올려 놓고 가을 소식 듣습니다
살다 보면 웬만큼은 떫은 물이 든다지만
먼 그대 생각에 온통 짓물러 터진 앞섶
못다 여민 앞섶에도 한 사나흘 비는 오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
내 몸은 그 강가 돌밭 잔돌로나 앉습니다
두어 평 꽃밭마저 차마 가꾸지 못해
눈먼 하 세월에 절간 하나 지어 놓고
구절초 구절초 같은 차 한 잔을 올립니다
角北
- 가을 지에밥
가을은 해년마다 돗바늘을 들고 와서
촘촘히 한 땀 한 땀 온 들녘을 누벼 간다
봇물이 위뜸 아래뜸 고요를 먹이고 있다
절인 고등어 같은 하오의 시간 끝에
하늘은 또 하늘대로 지에밥을 지어 놓고
수척한 콩밭 둔덕에 두레상을 놓는다
角北
- 눈
1
角北에 눈이 왔다, 뿔이 다 젖었다
행여나 귀 밝은 눈이 눈치라도 챌까 보아
햇볕을 조리차하여 언 콧등을 녹인다
그렇듯 한동안은 음각의 풍경 속에
마을도 과수밭도 앞섶을 징거맨 채
안으로 번지는 먹물을 닦아 내는 시늉이다
2
풍경이 다 지워졌다, 백색의 암흑이다
겉장을 뜯지 않은 천연의 공책 한 권
먼데서 경운기 소리가 한 모서릴 찢고 간다
밤새 흐르지 않고 두런대던 골짝물들이
얼결에 생각난 듯 빈 공책을 당기더니
썼다간 찢어 버리고 찢었다간 다시 쓴다
달
무얼 보느냐는
네 물음에
으응, 달
암 것도
모르면서
저 혼자 환한, 달
키 낮은 뽕나무 가지
볼기를 턱
까붙인, 달
달은 왜 보느냐는
네 물음에
으응, 그냥
그냥
못 들은 척
가지를 떠나는, 달
그래, 달
너는 좋겠다
그냥 떠나면 되고
빈집의 家系
살던 이 떠나자
집도 따라 떠났다
녹슨 문고리에 家系마저 바스러지고
마음은 저무는 참대밭
나부끼는 눈발이다
함석문 바깥쪽을 자꾸 기웃거리더니
감나무 잔가지 몇 툭, 하고 부러진다
우물은 뚜껑이 삭은 채
군기침을 해 쌓고
헛간 시래기 줄에
굴뚝새라도 날아들었나
누가 뭐라는 듯 연신 부스럭거리다
뒤란의 마른 흙담을
몰래 뜯어 먹는 고요
헌신짝을 물고 뜯던 동네 개는 간데없고
괭이도 조선낫도 모지라지면 모지라질 뿐,
그 집에 살던 이 죽자
집도 따라 죽었다
즈믄 사랑의 노래
그래, 우리 사랑은 즈믄 해나 그 즈믄 해 전의 어느 안 마르는 우물 안에서 하냥 푸르고 맑은 적막이 토해내는 물이끼나 받아 먹고 살던 비단잉어의 그것이었을까 몰라 비단잉어의 그것이었을까 몰라
아니면 또 어느 후미진 절간의 태 먹은 돌종이 받아내는 먹뻐꾸기 울음소리나 듣고 수백 리 솔밭길을 한달음에 휘달려 오던 연꽃향기의 그것이었을까 몰라 연꽃향기의 그것이었을까 몰라
아, 그래, 그도 아니면 그냥 눈먼 세월 밖에서 즈믄 해나 그 즈믄 해 전의 일은 아주 영 잊어 버린 듯 먼눈 뜨고 선 돌장승의 그것이었을까 몰라 돌장승의 그것이었을까 몰라
歌人
입동에 강을 건너는 한 歌人이 있었네
설핏한 눈발 속에 시든 술잔을 버리고
맨발로 언 강을 건너는 한 가인이 있었네
하냥 먹물빛으로 저무는 세상 밖에
어차피 꽃밭 아닌 적막마저 갈아엎고
서둘러 언 강을 건너는 한 가인이 있었네
가슴에 못다 지핀 모닥불도 불일밖에
한 철 푸르던 목청 그나마 숯이 되고
입동에 강을 건너는 한 가인이 있었네
그리운, 강
강은 세속도시의 종말 처리장을 휘감아 돌고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로 가는 먼 길이
길게 휜, 수로를 따라
다급하게 풀린다
용케 추슬러 낸 몇 소절 노래도 삭아
더는 흐르지 못할 끈적한 욕망의 진창
또 어떤 격렬함으로 강은 저리 부푸는가
잡풀들의 아랫도리가 툭, 툭 부러지면서
익명의 새떼들만 취수탑 근처를 날고
마침내 뻘물 아래 아득히
혓바닥을 묻는, 강
시월
바람은 넘실넘실 벼논을 먹어간다
이랑이랑 일렁이며 윗배미서 아랫배미로
한 입씩 베어 물었다 되뱉느니, 저 금빛!
햇볕은 또 햇볕대로 태금이라도 하려는 듯
종일을 들명나명 체질하는 시늉이다
감흙을 받아낸 봇물도 한결 누긋해지고
하늘에 깔아놓은 새털구름도 그렇지만
이제 더는 애운할 일 잰걸음 칠 일도 없이
짯짯한 인연의 여울터, 물살이나 볼 일이다
꽃과 질그릇
1
그대 꽃집에 와 꽃을 고르실 때면
나는 그저 벙그는 열망에 불붙는, 그러면서 활짝 피지는 않고 힘 주어 막 피어나려는 순간에 멎은,
그대 눈 침침할 때면 그제사 폭싹 재가 되는,
2
그대 내 생각의 저 안켠 대숲그늘 서늘한 한 채 절간이라면
내 그리움은 글쎄 그 절간 들목 어디 억새꽃 자지러진 산자락쯤 되랴
그것도 단청이 낡은 채 기웃대던 하늘가에
3
내가 끝내 한 개 그릇으로, 그릇이래도 이 빠진 질그릇으로나 와 앉기까지
가을은 또 몇 번씩의 천식을 앓으며 저 샐비어 꽃밭에 불이나 지피다 가고,
더러는 투정조로 울며 투정조로 달라붙고,
인간
1
긴 팔로 땅을 짚고 기다가 가끔 허리를 들고 엉거주춤 선 채 먼 산을 보고 주저 없이 벼랑을 뛰어내리는 폭포 앞에서 직립의 뼈를 씻었다
돌을 깨고 돌을 갈며 나무를 깎고 나무를 다듬으며 빙하와 만년설을 넘고 화염의 골짜기를 지나 거친 평화의 풀밭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천천히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인간
2
인간은 기린의 목을 갖지 않았다
긴 목을 빼고 보기보다는 때로 엎드려 숨을 줄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긴 목을 숨길 데라곤 허공밖에 더 있느냐
인간은 사자의 이빨을 갖지 않았다
굶주린 이빨로 생육을 찢는 대신 잡식의 식욕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빨은 언젠가 빠진다 더 무엇을 찢으랴
인간은 순록의 뿔을 갖지 않았다
뿔과 뿔을 겯고트는 각축 대신 간교한 사통의 체위를 익혔기 때문이다
체위가 풀리는 곳에 뿔의 위엄은 없다
3
지느러미와 물갈퀴와 부레를 버리면서 야만의 털을 뽑고 날갯죽지와 꼬리뼈를 감추면서 곧추세운 등뼈가 떠받친 뇌 속에 연신 차고 넘치는 늪을 키웠다
동쪽의 검은 폭풍 속에서 대삼림의 아득한 비명을 듣고 깎아지른 협곡의 북쪽에 검푸른 당나귀 떼의 뼈를 묻고 남쪽의 황폐한 사냥터에서 피 묻은 돌칼의 온기를 닦았다
끝내는 불멸의 서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간
그곳, 불콰한
*
그곳에 아이를 못 낳는 만삭의 3월이 있고, 봄이 와도 돌아갈 줄 모르는 철새들의 썩은 날갯죽지가 있고,
그곳에 쑥잎 머위잎이 징거맨 숱한 상처의 실밥 자국이 있고, 늦눈 그친 골짜구니 고라니 삵 승냥이 떼 붐비는 바위 벼랑 끝 낯선 평화의 울부짖음이 있고,
그곳에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른 젖가슴의 멍울이 있고,
*
그곳에 5월이 있고, 5월의 청춘이 있고, 5월의 청춘이 들이켜다 만 비릿한 유혹의 끈적거림이 있고,
그곳에 한사코 서으로 서으로만 고개를 묻는 진흙 수렁 속 연꽃의 시간이 있고, 착 가라앉은 무중력의 고요 속에 속절없이 괴어 오른 초록 그늘의 술지게미 냄새가 있고,
그곳에 칭얼거리며 보채며 먼길을 에도는 실개천이 있고,
*
그곳에 큰키나무 우듬지의 8월이 있고, 낡은 수레를 몰아 캄캄한 밤 수풀을 우르르 쾅쾅 휘달려가는 불콰한 천둥 번개의 길이 있고,
그곳에 물레를 던져버린 외눈박이 도공의 흙 묻은 턱수염을 스치는 불완전연소의 숯검정이 있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든 채 종작없이 빗길을 헤매고 다닌 말더듬이 집배원의 늦은 귀가가 있고,
그곳에 젖동냥 가는 홀아비의, 더듬거리는 지팡이가 있고,
*
그곳에 줄 끊어진 첼로의 11월이 있고, 팔목 붕대를 풀며 텅 빈 무대를 휘돌다 일순 고꾸라지는 주정뱅이 첼리스트의 이 빠진 술잔이 있고,
그곳에 기름 등불 사위는 저녁의 돌담 길을 적시며 오는 먼 쇠북 소리가 있고, 술이 눈썹 밑까지 차올라 돌아가는 후미진 숲정이에서 붉은 수염의 토째비를 만나 씨름도 한 판 하고 더러 담뱃불도 얻어 붙이곤 하는 시오리 저문 장길이 있고,
그곳에 외딴집 벙어리 부처가 밤 마실 가는 산모롱이가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