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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요15:12-17) 주제: 내 계명은 이것이다. 2025.5.11.(주일 강해 설교)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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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시는 계명이 무엇일까? 계명하면 우리는 엄청난 것으로 큰 부담을 가지곤 합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보면 얼마나 많은 계명과 율법과 율례가 많은지 생각하면 머리가 다 복잡하고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요한복음15장 말씀을 통하여 “계명은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계명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랑 이길래,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고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잘 깨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2절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말씀하시고 있는데,
이 말씀을 보면, 누구나 이와 같이 생각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하고 살아야하는구나’.라고
막연히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정확히 모르면 우리 식으로 믿고, 알고, 우리식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2절 말씀에서 왜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한 15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먼저 기억해야합니다. 지난번 주제부터 떠올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라.” 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
그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은 농부이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에 붙은 가지라고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 12절에서 말씀하시는 계명인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오늘 12절에서 말씀하시는 원문을 보면, ‘사랑한다면’ 이라는 문법상 가정법으로 동사형태를 띠우고 있는데,
즉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라는 이 단어는 동사형태를 띠우고 있는 액션 즉 행동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는 어떠했나요?
예수님을 사랑했나요? 우리는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한 것과 같이,” 라는 이 단어는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라는 말씀 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뒤에 “너희도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이라는 가정법으로서 우리에게 조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은 우리를 진정한 사랑으로 사랑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아직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데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건과 방법을 알기 위하여서 어떻게 해야,주님을 사랑할 수 있나요?
라고 의문문으로 질문하고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13절을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다시 말해서
사랑의 전제 조건이 무엇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인데, 여러분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것도 모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사랑하셨는데 너희도 이와 같이 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다시 보면, 너희도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라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문법으로 보면 친구를 위해서 너희가 목숨을 버리게 된다면, 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친구라는 계념은 막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친구라는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친구라는 계념과는 전혀 다른 뜻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친구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필로스’라는 단어입니다.
‘필로스’ 친구라는 이 단어는 내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이 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자가 없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것을 13절에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이 큰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것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여기서 친구라는 단어가 또 나옵니다.
이 친구라는 단어를 14절에서 다시 말씀하심은, 너희는 나와의 관계가 친구의 관계이냐? 아니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으십니까?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지금 여러분의 신앙은 주님과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없다면, 여러분은 주님과 친구가 될 수 없는 신앙 인 것입니다.
14절에서 말씀하는 또 하나의 친구의 의미는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에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친구의 관계가 되려면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바로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말씀으로 보면,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포도나무인 주님과 가지인 내가 붙어 있으려면,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이 말은 내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과수원 농사를 지을 때, 때로는 가지를 쳐 내기도 합니다.
이유는 가지가 많으면 많은 영양분을 흡수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나무에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수확의 열매를 온전히 맺기 위해서는 나무에서 무성한 가지를 반드시 쳐 내어야 하는 것 입니다.
포도나무의 비유를 보면, 포도나무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도나무가 온전한 많은 열매를 맺기위해 가지가 잘려나가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과 내가 온전한 친구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죽을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한데,
그런 믿음이 나에게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라고 14절에서 정의를 내려놓고,
15절에 가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 입니다.
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이 말씀의 의미는 이제 주님과 내가 친구의 관계가 아니면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13,14,15절 계속 친구라는 단어를 기록 하여 말하고 있는데,
헬라어로 ‘필로스’라는 이 단어를 세상적인 언어로 번역하면 ‘우정’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로 친구라는 ‘필로스’ 단어를 보면 3가지의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 둘째는 좋아하는 사람, 셋째는 친밀한 사람이라는 세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필로스’라는 단어에는 우정과, 깊은 관계의 사랑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친구라 말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세상에서의 친구 관계를 말할 때는 어떤 감정을 두고 말을 하나요?,
때로는 좋아할 때 ,사랑할 때, 그리고 친한 관계의 감정들이 있는 사람에게 친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도 이렇듯 친구라는 계념은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예수님과 나와의 친구 관계는 어떠한 관계일까요? 예수님과 나와의 친구 관계는 인간의 계념의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필로스’친구 관계는 영적으로 사랑하는 관계, 좋아하는 관계,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데,
특히 친밀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속마음도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관계를 말하는 것 입니다.
때로는 억울한 마음 속상한 마음도 다 사랑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야기 할 수 있는 관계인 것 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나와 사랑하는 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할 수 있는 것 들이고
내가 좋아하는 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할 수 있는 것 들이고, 내가 친밀한 관계에 있을때 가능한 것들 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영적으로 이야기 해봅시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밀하다고 생각 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항상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 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을 죽기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 좋아하기 때문에 ,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기도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게 노력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과 진정한 친구 관계 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에게는 1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친구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들은 것을 다 알게 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모르게 아니하고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진정한 친구라면 삶속에서 힘들고 낙심하고 절망할 때
그 힘든 모든 것을 예수님과 기도로 소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분이 어떤 분인지 막연하게 아는 관계가 아니라면,
더 알고, 더 친밀한 관계가 되도록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도록 노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내 마음에 있으면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다”(신30:1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육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많은 대화를 하려하고 더 만나려고 하면서
어찌 주님과는 그러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영적인 관계로 더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밀해야 마귀 사단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친밀한 관계이고 이 대화가 바로 기도인 것 입니다.
하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인 사도이시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과 형제요 친구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도가 되시는 대 제사장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밀한 친구가 되시는 분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믿는다면 주님과 진정한 친구라면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와 진정 친구라면 나를 위해 땅 끝까지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전해 줄 수 있겠느냐?”
하신다면 “아멘”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친구도 아니고 거짓말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은 어떠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찔리는 사람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으며
“게으르고 악한자여 너희가 마음에서 나를 떠났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요한복음15장 본문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이 주님과의 친구 관계인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인 관계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시는 이유는 주님과의 친구 관계로 열매를 맺는 것,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계명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너와 나와의 친구 관계가 이루어질 때 주님이 주신 계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하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을 지킬 것인데 그것이 무엇 입니까?
나는 어디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에게 연합되고 하나가 되어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육적으로는 열심히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열심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영적인 것은 따르지 못하고 육적인 삶만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인본주의’‘세속주의’라고 말 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知)정,(情)의,(意)를 주셨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하여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이 강건해지고 영이 강건해지면 육은 영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삶인 것입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택하여 세웠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포도나무에서 가지를 낸 것이지
가지가 포도나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워보면 알 수 있듯이 어떤 자녀들은 본인들이 잘해서 성공하고 잘되고 자라고 성장하는 줄 압니다.
자기가 스스로 된 줄 알고 그래서 부모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집가고 장가가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길러 보면
비로써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나이가 60을 넘고 보니 “그랬구나, 그랬구나” 하고 깨닫는 것도 많아지고
느껴지는 것도 많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보면 돈이 많다고 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 많다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가진 것이 적어도, 근심 걱정은 떠날 날이 없고 완전한 평안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잠 잘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고, 돈이 있을 때가 있고,
이 세상에는 모든 때가 있는 것처럼 때를 따라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믿음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세월을 아끼라’하는 말씀이 있듯이 주어진 삶속에서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궁핍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믿음 가운데 항상 열매가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그때마다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
즉 기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과 친구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5가지의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짚어 보겠습니다.
주님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관계, 좋아하는 관계,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이렇게 세가지의 관계가 이루어 진 사람이 친구다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과 친구가 되기 위하여 또 다섯까지 조건이 16절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문장의 형식이, 가서/ 맺게/ 있게 /구하든지/받게 될 것이다./라는 가정법으로 조건을 말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가정법은 “너희가 간다면, 열매를 맺게 된다면, 있게 된다면 (머물게 된다면), 구하게 된다면, 받게 된다라는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원문으로 다시 해석하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너희가 간다면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가 있게 된다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게 된다면 받게 된다라는 ” 형식의 문장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법의 조건은 내가 해야 열매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다섯 가지 조건으로 이루어진 문장을 한글 번역으로 기록된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에
한글 성경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한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의 말씀 속에 있는 이 다섯 가지 조건은 주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 자신이 해야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다섯가지 조건을 우리가 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과 친구 관계가 되기 위함입니다.
주님과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밀한 친구가 되기 위해 가야하고 맺어야하고 머물러 있어야하고
구해야하고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원받는 것처럼 행함이 없이 믿음으로만 되는 것처럼 이해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알아야하는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과 친구 관계가 되기 위해
내가 예수께로 가야한다는(간다면)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위해 말씀이 내 안에 머무르게(있게 된다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게 된다면 (기도하면)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받는 것은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조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16절 말씀은 가정법으로 조건을 제시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조건은 깨닫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않고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는다는 것으로만 알고 달라고 떼쓰고 기도만하니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속에서도 자녀들이 부모에게 떼쓴다고 다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떼를 써도 안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안주는 것처럼
주님도 우리가 막무가내로 떼쓰고 기도하고 구한다고 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섯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마지막 17절에 가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단어가 하나 빠져 있는데, 이것을 정확히 원어로 번역하면
“내가 너희에게 위임하여 말을 하는데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니라“라는 것이 올바른 번역입니다.
”내가 명함은“ 이라는 단어는 명령의 단어가 아니고, ‘위임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위임이라는 말은 사전을 보면 어떤 일을 다른 사람에게 지워 맡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위임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을 하였다(너희에게 할수 있도록 맡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에 대해 내가 참석 못한 것에 대해 너희에게 맡겼는데
그것에 대해 너희가 한 것을 내가 ‘동의’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 여러분이 ‘동의’를 해야 하는데,
이 동의를 할 때 ‘제창’이라는 말과 ‘동의’라는 말이 있는데
‘동의’는 참석한다는 것이고 ‘제창’은 참석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17절의 “내가 (주님) 위임을 하여 너희에게 말을 했다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명함은“ 이라고 한글 성경 번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맡겼다는 위임과 직접 명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해석 인 것입니다.
17절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미는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도록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와 나와의 관계가 친구가 될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구가 되는 관계는, 사랑하는 관계(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관계 (끊어 질수 없는 것)친밀한 관계(매일 기도 하는 것)를 이루기 위해 다섯가지 조건을 설명해 놓고
내가 너희에게 위임하여 말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은 너희가 서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종합해 보면
먼저 예수님과의 친구 관계를 말씀하시고 마지막의 결론은 서로라는 단어로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사랑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자, 이것이 바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사랑 이웃 사랑의 관계를 가져야 너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열매를 맺지만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더 세밀하게 12절부터 17절까지 기록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붙어 있으면 친구의 관계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육신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 ,서로 좋아하는 관계, 서로 친밀한 관계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인 영적인 하늘과의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헬라어 ‘필로스’친구라는 단어는 바로 사랑과 우정이 함께 담아져 있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 말씀처럼 나를 친구로 이렇게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밀하게 사랑하는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도 이와 같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말씀하신 계명처럼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 사랑이 되어야하고 이웃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명이며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처럼 이것이 “내 계명은 이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간의 관계가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이제 깨달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말씀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는 악한자를 억지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계념이 아닙니다.
원수인 악한 자가 예수 믿고 회심하여 돌이켰을 때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녀 관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는 믿음의 사람에 대해 사랑하라는 말씀 입니다. 세상에는 악한자도 있고 의로운자도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믿음의 사람에 대해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악한 자는 멸망시키고 죄의 심판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단어는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원수가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 관계가 되었을 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믿는 자들,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무조건 다 사랑하라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과 친구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인데
비결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어 다섯가지 조건으로,
우리가 예수께로 간다면, 맺는다면, 머물게 된다면, 구한다면,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농부이신 하나님과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자는 반드시 서로 사랑하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가 바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것을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포도나무를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에서는 여러 농사 중 포도 농사가 많았기 때문에
포도나무를 비유해 영적인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 하셨다면,
예를 들어 농사짓는 분들은 노력도 없이 무조건 심었다고 '올해는 열배 백배로 많이 추수하게 해주세요' 라는
기도는 잘못된 기도임을 아시고 막연히 구하는 기도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한 것은 기도 안해도 노력한 만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해 놓고 많이 달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노력한 만큼 구하면 열배 백배 거두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심은 것은 심은대로 거두기 때문 입니다. 기도 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 창조할 때 순리대로 하셨기 때문에,
예를 들어 예수 안 믿는 자도 땅에 포도나무를 심고 기다리면 그가 농사지은 만큼 포도 열매가 맺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순리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도 선한 자에게도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한 순리는 악한 자가 농사지어 과실을 심어도 열매를 먹고 선한 자가 괴실을 심어도 열매를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이해하시고 무조건 구하면 주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헛된 기도를 하지 마시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잘되고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고 노력한 만큼 믿고 구할 때 받을 수 있도록 바른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요한복음15장 12절부터 17절까지의 영적인 말씀을 잘 깨닫고 이해하셔서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있어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과의 친구 관계가 잘 이루어지고 깨달은 조건과 방법을 통하여
내 삶속에서 열매 맺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첫댓글 은혜 말씀 감사합니다.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