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사막 - 신현정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러고는 난생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자전거 도둑 - 신현정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폐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차르르 하르르.
염소와 풀밭 - 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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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정 시인
1948년 서울 출생
2009년 별세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4년 월간문학 등단
2004년 제4회 한국시문학상 수상
시집
『대립』
『염소와 풀밭』
『자전거 도둑 』
『난쟁이와 저녁식사를』외
고미혜 기자
故 신현정 시인 시선집 출간
지난달 16일 세상을 떠난 고(故) 신현정 시인의 49재에 맞춰 시선집이 출간됐다.
30일 출간된 '난쟁이와 저녁식사를'(북인 펴냄)에는 시인이 생전 펴낸 '대립', '염소와 풀밭', '자전거도둑', '바보사막' 등 4권의 시집에서 시인이 직접 고른 80편 가량의 시가 수록됐다.
이 시선집은 시인이 세상을 뜨기 전에 출간이 계획됐던 것으로, 시인의 병세 악화 등을 이유로 출간이 늦춰져 결국 49재에 즈음해 빛을 보게 됐다.
시인은 시선집을 위해
"아아, 시는 빛의 몸 /
우리가 언제 어디서고 무엇이고 간에 /
그 어떤 파장으로도 만나게 되리 /
이 기쁨, 환희를 /
노래하자 춤추자"
라는 자서(自序)를 남기기도 했다.
정진규 시인은
"왜 무의미일수록
내 심장은 붉고 크고 게걸스러워지는 것일까요.
무위(無爲)와 실컷 놀다갔으면 합니다"
라는 시집 '바보사막' 속 고인의 말을 회상하며
"'실컷', 그것도 '무위'와 놀다가겠다더니 서둘러 떠나버린 그가 야속타"
고 말하기도 했다.
'자전거 도둑' 신현정 시인 타계
2009-10-16
시집 '염소와 풀밭', '자전거 도둑' 등을 발표한 신현정 시인이 16일 새벽 1시 22분께 간암으로 서울대학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61세.
신 시인은 1948년 10월 28일 서울 왕십리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해 1964년 경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윤석산, 조정권 시인 등과 교우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66년에는 서울대학교 주최 전국고교생문예콩쿨대회에서 시 ‘아기새와 능금나무’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1967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이시영, 송기원, 감태준, 이경록, 황충상, 김종철, 신용삼, 이진행, 김현숙, 김상렬 시인 등과 교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