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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 단편소설 '바느질' / iclickart
바느질
이광복
여러 차례 밝혔다시피 내게는 아버지 두 분, 어머니 두 분이 계셨다. 나는 세 살 때 젖을 떼자마자 큰집, 즉 (큰)아버지 내외분 슬하로 출계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나는 당초 그분들이 친부모님인 줄 알고 자랐다. (큰)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면서 아버지였고, (큰)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면서 어머니였다. 나는 그 어른들의 친아들이 아닌 조카였지만, 그러나 생후에 인위적으로 친자식 같은 양아들이 되었다.
(큰)아버지 내외분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나보다 아홉 살 더 많은 작은누님을 먼저 데려다 키웠다. 그리하여 윗집 양가에는 (큰)아버지 내외분과 작은누님과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았다. 소년 시절 나는 저 아래 친가에도 무상으로 들락거렸다.
그곳에는 당연히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비롯하여 작은누님보다 세 살 위인 큰누님이 있었고, 내 밑으로 3남 1녀의 동생들이 잇따라 태어났다. 결과적으로 4남 3녀 7남매가 친가와 양가에 흩어져서 자랐다. 양가와 친가 두 집 모두 끼니거리를 잇기 어려울 만큼 곤궁했다. 내가 석양국민학교(지금의 석양초등학교)에 들어가 4학년으로 올라갔을 때 작은누님이 출가했고, 그 이후로는 (큰)아버지 내외분 슬하에 달랑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전후 사정을 감안할 때 내가 윗집을 벗어나 아랫집에 들락거린다 한들 (큰)아버지 내외분으로서는 뭐라 하실 말씀이 없었다. 설령 해가 저문다 해도 당신들은 굳이 나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곳이 본래 나의 집인 까닭이었다. 양가가 몸에 딱 들어맞지 않는 옷처럼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반면 친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편안했다.
나는 이따금 친가에 머무르며 하루나 이틀씩 자고 나서 윗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내가 친가에서 외박 아닌 외박을 할 때마다 (큰)아버지 내외분이 배신감과 함께 매우 섭섭하게 생각했다는 불편한 심기를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랬다. 내 유년의 길목에 (큰)아버지 내외분이 계셨다. (큰)아버지는 일찍 첫 번째 부인 무안박씨와 사별한 뒤 두 번째 부인 진주강씨를 맞이했다. 무안박씨의 친정은 논산군(지금의 논산시) 노성이었고, 진주강씨는 본래 대덕군 진잠(지금의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 태생이었다. 노성과 진잠은 일찍이 왕조 시대에 읍치를 설치하고 현감을 두었던 유서 깊은 고을이었다. 그곳에는 관아와 향교와 장시가 있었다.
무안박씨는 아주 일찍 소싯적에 작고하셨다. 따라서 나는 그 어른을 뵌 적이 없었고, (큰)아버지 내외분의 회고담을 통해서 그분의 존재를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큰)아버지의 새로운 배필로 들어오신 진주강씨의 존함은 ‘일만 만(萬)’ 자, ‘순할 순(順)’ 자였다. 당신은 경술생(庚戌生), 즉 1910년 출생으로 생일은 음력 3월 초이렛날이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선지 호적상 생년월일은 1897년 2월 15일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분은 아기를 낳지 못했다. 병오생(丙午生), 즉 1906년에 태어나신 (큰)아버지와 네 살 아래이신 (큰)어머니 내외분은 금슬이 무척 좋았다. 두 어른 사이에는 불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두 분은 어떤 경우에도 언성을 높이거나 상호 낯을 붉힌 적이 없었다. 그분들은 살인적인 궁핍 속에서 한평생 서로 상대방을 위로하며 참 정답게 살았다. 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는 그런 삶이었다. 두 분이야말로 천생연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큰)어머니의 오른팔에는 어깨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어마어마한 화상 상흔이 있었다. 흉터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남의 집 부엌데기 소녀 시절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쇠죽을 물동이에 퍼 담아 외양간 구유 쪽으로 운반하고자 머리에 이던 중 왈칵 엎질러 쏟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막말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화상을 입을 때의 충격을 상상할라치면 저절로 몸서리가 쳐지면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당신은 흉터를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한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머리카락 한 올 불거지지 않은 당신의 쪽진 머리 한복판에는 앞가르마가 똑바로 일직선을 긋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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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 그날 아침 우리 식구들은 희멀건 강냉이 죽을 먹었다. 아직은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 끝이 차가웠고, 저 멀리 상락골 산기슭 응달에는 희뜩희뜩 잔설이 남아 있었다. 흐린 하늘에는 차가운 조각달이 떠 있었다. 설거지를 마친 (큰)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윤복아. 조금 이따가 십자거리로 우두 맞으러 가자.”
‘우두’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저절로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우두란 천연두 예방을 위한 종두 백신 접종 시술을 의미했다. 작년에도 우두를 맞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또 우두를 맞으라니 지레 겁부터 나는 것이었다. 오른팔 어깨에는 우두 맞은 자국이 낙인처럼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내가 되물었다.
“예? 작년에 맞었는디 또 맞어유?”
“한 번 가지구는 안 된댜. 또 우두 맞으라고 구장(지금의 이장)이 통지서를 가져왔당께.”
“그 아픈 걸 또 맞는다구유?”
“아퍼도 맞어야지 어떡하겄냐. 우두를 안 맞으면 마마 앓고 곰보 되는 겨. 너, 곰보 될래?”
“아뉴.”
“그렁께 아프더래두 꾹 참고 우두를 맞어야지.”
잠시 후 (큰)어머니가 겉옷을 갈아입으며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나는 아까부터 잔뜩 쫄아 있었다. 우두를 맞는 동안 그 아픔을 어떻게 참고 견딜 것인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곧 (큰)어머니께서 방을 나섰고, 나도 뜰팡에서 내려와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아름드리 감나무 아래 마당에서는 닭들이 뾰쪽한 부리로 흙 부스러기를 쪼며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큰)어머니와 나는 곧 집을 벗어났다. 그런 다음 신작로가 아닌, 동네 안길을 가로질러 십자거리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택했다. 우리는 윗샘을 거쳐 당산으로 올라선 뒤 광대골 뒷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당산 소나무 가지에서는 바늘처럼 뾰족뾰족한 솔잎들이 시린 바람에 떨고 있었다. 십자거리로 넘어가는 고개 길목 서낭당에는 돌무더기가 적석총같이 불룩하게 쌓여 있었고, 요 며칠 사이 누군가가 치성을 드리면서 오리나무 가지에 매단 5색 천과 새하얀 한지 오라기들이 풀럭풀럭 휘날리고 있었다.
저쪽 정면으로 태조산 태조봉이 우뚝 솟아 있었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채종말과 고추골이 시야에 들어왔다. 왼쪽 사기장골 끄트머리 신작로에는 트럭 한 대가 가로수 사이로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건너편 귀신보와 꾸억산과 마르디가 보였다. 인적 없는 들녘과 벌거벗은 산들이 허허롭고 황량했다. 길가 작은 잡목들 사이로 멧새들이 푸릉푸릉 날아다니고 있었다.
(큰)어머니와 나는 예배당 아랫길을 거쳐 십자거리로 들어섰다. 십자거리는 부여와 논산, 공주와 강경을 잇는 도로가 ‘열 십(十)’ 자 모양으로 교차하는 네거리 교통의 요충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십자거리 분기점 중심에서 부여, 논산, 공주, 강경 경계까지 사방 약 20리라고 알려져 있었다.
진작부터 전기가 들어온 그 동네에는 학교와 지서와 방앗간과 버스 정류장과 몇몇 음식점과 점방들이 멋진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간판 상단 갈고리처럼 구부정한 구조물 장치에 백열등이 달려 있었다. 야간에 간판을 비춰주는 조명 전등이었다.
나는 이미 번갯불에 콩 굽듯 한글을 깨친 뒤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던 터라 아주 어려운 한자가 아니라면 웬만한 간판쯤이야 척척 읽을 수 있었다. 십자거리는 농가 일색인 우리 동네 원증산보다 한결 번화한 마을이었다. 우리 동네는 아직 전기 공급을 못 받아 밤이면 석유 등잔 꼬투리 심지에 불을 붙여 가까스로 어둠을 밝혔다. 해가 지고 달조차 뜨지 않거나 구름이 잔뜩 낀 캄캄한 밤에는 괜히 싸질러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콕 틀어박히는 것이 상책이었다.
(큰)어머니와 나는 곧 보건 진료소에 도착했다. 그곳 헛간에는 낯모르는, 십자거리와 연화와 마르디와 숯골 등 다른 마을 어른들이 내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우두 시술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략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반반쯤 되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길게 늘어서 있는 아이들은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잔뜩 겁에 질린 나머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차례차례 진료실로 들어갈 때마다 그 안에서 앗, 아얏, 깜짝깜짝 놀라는 외마디소리와 으앙, 으앙,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가 하면 시술을 받고 나온 어떤 아이는 탈지면과 반창고로 싸맨 팔뚝을 거머쥔 채 팔딱팔딱 뛰면서 엉엉 목 놓아 울어댔다. 두 눈에서는 영롱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지난번에 접종을 받아봐서 걔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방앗간 지붕 위로 비둘기 떼가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큰)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실내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윗옷을 벗고 나무 걸상에 앉아 오른쪽 팔뚝을 내밀었다. 머리끝이 찌풋거릴 만큼 더럭 겁이 났다. (큰)어머니께서 내 오른손 손목을 잡아 주었고,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웠다. 아무리 담력이 세다 한들 감히 시술하는 장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미 수순은 정해져 있었다. 주사를 놓든 살을 째든 그건 내 일이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의 몫이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기꺼이 내 몸을 맡겼다. 의사가 내 팔뚝을 슬그머니 당신 앞으로 잡아당겨 두어 번 만지작거렸다. 공포의 연속이었다. 의사의 손길이 부드럽고 따스하다고 느끼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별안간 팔뚝이 따끔했다. 아마 주사 바늘로 콕 찌른 모양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냅다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앗! 아얏!”
엄살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팠고, 일종의 조건 반사라고나 할까 거의 무의식중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의사가 뭔가로 콕콕 쪼아대는 듯 팔뚝 언저리가 줄곧 따갑고 뻐근했다. 아파서 즉사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순간적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접종인지 시술인지 의사가 의료 행위를 진행하는 동안 까짓것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식으로 비장하게 대처했다. 그런데도 ‘아, 아!’ 하는 신음이 저절로 튕겨 나왔다. 그때 (큰)어머니가 내게 불쑥 말했다.
“그것도 못 참어?”
그 핀잔은 예리한 바늘처럼 내 가슴을 찔렀고,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면서 내면 저 깊은 곳으로부터 반항의 불길이 확 치솟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견뎠다. 그러던 중 자연 발생적으로 ‘아, 아!’를 신음처럼 토했던 것인데 (큰)어머니는 나를 위로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야멸찬 지청구로 염장을 질렀다. 당신의 귀에는 내 비명이 허풍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현장에 있던 분들이 잘 알다시피 나는 눈을 감은 데다 고개를 돌린 채 외면했던 터라 의사의 의료 행위를 직접 보지 못했다. 그분이 내 팔뚝에 주사 바늘을 꽂는지,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도구로 찔러대는지 전혀 실상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프니까 아프다는 소리를 냈을 뿐이었고, 단언컨대 아프지도 않은데 거짓으로 아픈 시늉을 한 것이 아니었다. 팔팔 뛰면서 우는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나는 의연하게 잘 버틴 셈이었다. 그런데도 (큰)어머니는 나를 겁쟁이 또는 엄살쟁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억울했다. 우두 접종의 통증 호소는 명백한 진실이자 진심이었다. 하지만 (큰)어머니는 그걸 단칼에 무 자르듯 차갑게 무시하면서 내 여린 감수성을 자극했다. 본의 아닌 누명을 썼다고나 할까 분하고 폭폭했다. 내 진실에 대한 부정을 감내하기에는 인내심에 한계가 있었다. 기분이 잡쳐 울화통이 치밀었고, 나중에는 천불이 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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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때로는 진실과 진심과 진의가 액면 그대로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진리를 처음 깨달았다. 그 후 나는 우두를 두 차례 더 맞았고, 내 오른쪽 팔뚝에는 상하 좌우로 모두 네 개의 접종 자국이 남았다. 그러나 (큰)어머니의 엄청난 화상 상흔에 비하면 어릿광대의 애교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내 내면에는 어느 사이엔가 저항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당신의 ‘그것도 못 참어?’는 내게 반감과 반항과 반발을 일깨워준 단초이자 화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박정한 말씀 한마디로 인하여 나는 성장기를 거치는 동안 둘도 없이 강고한 반골로 변모했다. 누군가가 건드리면 벌처럼 쏘고 강압적으로 누르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물론 (큰)어머니에게도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우고는 시도 때도 없이 몽니를 부리며 바락바락 대들었다.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었지만, 내 심장에는 녹슬지 않고 성능 좋은 양날의 비수가 점점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칼을 갈면 갈수록 칼날이 더욱 시퍼렇게 번득였다. 한쪽은 순종의 칼날이었고, 또 다른 한쪽은 항거의 칼날이었다. 정의에는 순명했지만, 불의 앞에서는 사정없이 저항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필승의 검투사가 되었고, 못된 놈들의 싸가지 없는 짓거리를 보면 뿌리를 뽑아 아작을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었다.
우두 맞은 날 저녁때였다. 심사가 울적했던 나는 친가로 향했다. (큰)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를 친가 어머니로부터 치유받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철렁한 물 위로 벼 그루터기가 삐쭉삐쭉 솟아 있는 수랑논에서 까마귀 떼가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추위에 시달리던 불그죽죽한 미나리들이 푸른빛을 띠며 춘삼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립문으로 들어서자 어머니가 반겨주었다. 당신이 말했다.
“어서 오너라. 우두 맞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냐? 아이고, 딱하지. 얼마나 아펐어? 우리 윤복이는 착하니께 잘 참었을 겨.”
그 따뜻한 말씀 한마디에 눈시울이 화끈하면서 콧날이 시큰했다. 뭉클해진 가슴까지 뻐근해지고 있었다. 우두 맞은 내 팔뚝을 그윽히 들여다보던 어머니의 눈에 반짝 영롱한 이슬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당신은 솥에 넣어 두었던, 아직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따스한 고구마 한 개를 꺼내와 내게 주었다. 일종의 위문품이었다. 말하자면 (큰)어머니가 채찍을 휘두르고 어머니가 당근을 주는 형국이었다. 나는 물렁물렁한 고구마를 한 입 듬뿍 베어 물었다. 하지만 목이 메어 그걸 차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사실상 (큰)어머니와 어머니가 나를 대할 때의 차이점은 구태여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극명하게 갈렸다. (큰)어머니가 ‘그것도 못 참어?’로 꾸중했던 반면, 어머니는 ‘얼마나 아펐어?’로 내가 받았던 고통을 따뜻이 감싸 주었다. 사랑의 농도가 달랐다. 나는 그날 밤 양가로 귀가하지 않고 친가에서 묵었다. 보건 진료소에서 솟구쳤던 울분이 다소 해소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 저 건너 시루봉 상공에 희끄무레한 새털구름이 높이 떠 있었다.
며칠 후 비가 내리더니 날씨가 확 풀렸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축축한 물기를 질펀하게 뱉어내며 녹고 있었다. 매화가 활짝 피었고, 뒤꼍 개나리나무도 동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나는 겨울옷을 벗고 봄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때쯤 해서는 우두 시술 부위의 검붉은 딱지가 떨어져 나가고 그 대신 콩알만 한 흉터가 생겨나 있었다. 제비 한 쌍이 개흙과 지푸라기 따위를 물어 나르며 안방 문설주 위에 열심히 집을 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누런 암탉 한 마리가 추녀 및 닭둥우리에 올라가 구구거리며 장시간 앉아 있었다. 재빨리 낌새를 알아챈 (큰)어머니께서 달걀 열두 개를 넣어 주었고, 그날부터 암탉이 매일 둥지에 들어앉아 눈을 꿈적거리며 알을 품었다. 당신은 암탉 턱밑에 모이와 물을 챙겨 주었다.
암탉은 하루에 두어 번씩 볼 일이 있을 때만 잠깐잠깐 둥우리에서 내려왔다. 종족 보존의 본능이 거룩하게 느껴졌다. 스무하루째 되던 날 병아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제히 알을 깨고 나왔다. 암탉은 신통하게도 한 개의 결손 없이 달걀 열두 개를 전부 병아리로 부화시킨 것이었다. (큰)어머니는 부드러운 천으로 갓 태어난 병아리의 물기를 조심조심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병아리들이 아무 데로나 잘못 나뒹굴어 다칠까 봐 볏짚 메꾸리에 정성스럽게 옮겨 놓았다.
당신 몸으로는 출산을 하지 못했던 (큰)어머니. 하지만 당신은 다른 동물들을 번성시키는 데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비들도 덩달아 새끼를 쳤다. 경사였다. 제비 새끼 다섯 마리는 둥지 난간 턱받이에 나란히 노란 주둥이를 내민 채 연신 짹짹거리고 있었다. 빈한하기 짝이 없는 오두막집에서도 이렇듯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는 것이었다.
어미닭은 병아리들을 애지중지 키웠고, 병아리들은 종종걸음으로 어미닭을 따라다니며 귀엽게 잘 놀았다. 이따금 시루봉이나 당산으로부터 난데없이 새매나 솔개가 나타나 병아리를 채가려고 기웃거렸다. (큰)아버지 내외분은 맹금류가 병아리들을 노리고 저공비행을 할라치면 장대를 휘휘 내둘러 멀리 내쫓았다. 그러다가 외출할 일이 생기면 어미닭과 병아리들을 닭장 안으로 깊이 가두고는 야생 사냥꾼들이 범접하지 못하게끔 잘 방비했다.
병아리들은 부쩍부쩍 자랐고, 알에서 갓 깨어났을 때에는 잘 분간하기 어려웠던 암수 구분도 확실하게 드러났다. 암평아리가 아홉, 수평아리가 세 마리였다. 색깔도 다양했다. 어떤 녀석은 벌겋고, 또 어떤 녀석은 검붉으면서 알록달록했다. 여러 종류의 잡종들이었다. 병아리들은 어느덧 토실토실한, 말하자면 약병아리로 딱 알맞은 영계가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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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오고 있었다. (큰)아버지께서 곱게 꼰 새끼줄로 올가미를 만들었고, 약병아리들을 한 마리씩 붙잡아 발목을 묶은 뒤 닭장 문짝에 붙들어 맸다. 귀여운 닭들은 난데없이 올가미에 포박되어 오글오글 몰려 있었다. 점심 새때쯤 십자거리에 사는 닭장수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자전거 짐받이에는 닭이나 오리 또는 토끼나 개 따위의 가축들을 가둘 수 있는 철망 상자가 실려 있었다.
(큰)아버지 내외분은 그 닭장수에게 약병아리 열두 마리를 모두 팔았다. 닭장수가 예쁜 닭들을 철망 상자에 주섬주섬 주워 실을 때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허리에 찬 전대로부터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 (큰)어머니에게 건넨 닭장수. 그는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내 친구나 다름없는 닭들을 싣고 앞재너머 신작로 쪽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논산 장 하루 전날이었다.
나는 거의 습관적으로 닭장을 바라보았다. 수탉과 암탉 등 묵은 닭들이 횃대를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귀여운 어린 닭 열두 마리가 사라진 닭장 안은 텅 빈 느낌이었다. 때마침 황계 장닭이 목을 길게 늘여 뽑으면서 꼬끼요… 하고 울었다. 그러고는 두 날개를 제 몸통에 탈탈 털며 날갯짓을 하는 가운데 후렴으로 꼬르륵 꼬륵…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밥 대신 밀가루 수제비로 끼니를 때웠다. 언제 남들처럼 쌀밥이나 보리밥을 먹을 수 있을는지 기약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굶지 않고 수제비라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시루봉으로부터 부엉부엉…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온 (큰)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윤복아, 냘 나하고 논산 장에 가자.”
‘냘’은 ‘내일’을 뜻하는 우리 고장 발음이었다. 귀가 번쩍 띄었다. 나는 그때까지 부여 방면으로 십자거리까지, 논산 방면으로 새다리까지 드나들었을 뿐 더 이상 멀리 가 본 적이 없었다. 말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인 셈이었다. (큰)어머니는 닭 팔아 얼마간의 현금을 손에 쥐었을 때 장에 가서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장만하려는 것이었다. 내가 되물었다.
“예? 저두 논산 장에 가유?”
예부터 5일 6장이라 했다. 장이 닷새마다 한 번씩, 즉 한 달에 여섯 번 선다는 뜻이었다. 논산 장은 매 3일과 8일, 부여 장은 매 5일과 10일에 섰다. 부여 장의 경우 큰달에는 30일이 아닌 말일, 즉 31일에 섰다. (큰)어머니가 말했다.
“그려. 너도 이제는 논산 장을 구경할 때가 되었어. 너는 아직 차비를 안 내도 됭께 나랑 같이 가자꾸나.”
‘차비를 안 내도 된다’는 말은, 내가 아직 취학 이전의 ‘유아’에 해당하는지라 버스 요금을 면제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버스 요금도 큰 부담인 우리 집 사정에 비추어 차비 안 내고 공짜로 차 탈 수 있을 때 논산 장 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뜻이었다.
(큰)어머니는 과거 논산 장을 볼 때 당연히 도보로 왕복했다. 설령 장보따리가 꽤 무거워도 버스를 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애송이인 나로 하여금 먼 거리를 걷게 할 수가 없어 당신 몫의 차비를 부담하고서라도 버스를 타기로 계획한 것이었다. 그 말씀에 (큰)아버지와 작은누님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요금 체계는 대부분 ‘대인’과 ‘소인’으로 구분돼 있었고, 버스든 영화관이든 소인에게는 대인 요금의 절반을 할인해 주었다. 나는 아직 소인 이전의 ‘유아’였고, 미구에 소인이 되면 대인 요금의 절반을 부담해야 할 것이었다. 그 후 경로 효친 사상 앙양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특정 연령 이상의 노인에게도 고궁 사찰 공원 입장료와 목욕 이발 등의 요금 할인 우대 혜택을 적용했다. 석유 등잔 꼬투리에서 불꽃이 가물가물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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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이른 아침이었다. 집을 나선 (큰)어머니와 나는 신작로 잿무덤부리에서 논산행 버스를 기다렸다. (큰)어머니는 면사무소로 배급 타러 갈 때 요긴하게 쓰는 왜포 자루를 챙겨들고 있었다. 귀빠진 뒤로 처음 버스를 처음 타 본 다는 생각에 사뭇 가슴이 설레었다. 구례들에서 뜸북뜸북 뜸부기가 울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위 사기장골 쪽에서 뿌연 흙먼지가 일어나더니 버스가 질빵너머 모퉁이를 돌아 나오고 있었다. 논산과 부여 방면을 하루 한 차례씩 왕복 운행하는 눈 익은 차량이었다. 미군 GMC 화물차를 개조한, 불쑥 불거져 나온 보닛 앞 범퍼에 ‘충남 영 319’라는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영’은 영업용이라는 표시였다. 관용차에는 ‘관’을, 자가용에는 ‘자’를 붙이던 시절이었다.
(큰)어머니가 손을 들자 버스가 멈추었다. 일단 남자 조수가 내렸다. 아직은 여차장이 등장하기 전이었다. 버스 꽁무니를 따라오던 흙먼지가 연기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유리창 정면 중앙으로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고 있는 운전수가 보였다. 그는 챙 달린, 금테를 두르고 모표까지 붙인 멋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초록색으로 도색한 차체 옆구리 노란색 테둘림에는 검정색 페인트로 쓴 ‘大韓旅客株式會社’라는 운수업체 상호 붓글씨가 선명했다.
(큰)어머니가 손바닥에 돌돌 말아 쥐고 있던 버스 요금부터 조수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나를 불끈 들어 승강구에 들이밀었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여러 마을의 인근 주민들이 십자거리에 모여 있다가 왕창 탔기 때문이었다. 나는 간신히 어른들 틈새에 끼었지만 (큰)어머니는 아직도 승강구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조수가 올라타면서 운전수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오라잇!”
버스가 출발했다. 개문 발차였다. 조수는 문간 좌우 손잡이를 꽉 틀어잡은 채 아랫배로 배치기를 하면서 (큰)어머니와 나를 안쪽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은 뒤 기를 쓰며 출입문을 닫았다. 버스 안은 콩나물시루 같았고, 나는 명태포나 오징어포처럼 납작하게 눌리다가 자칫 잘못하면 깔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좌석에도 몇 사람씩 겹쳐 앉았고, 좌석과 좌석 사이 통로의 입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무더웠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고, 승객들 사이에서 시쿰한 땀 냄새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승객들이 밀고 밀리면서 괴로움을 참느라 끙끙 힘을 쓰고 있었다. 운전수는 체로 곡물을 치듯이 이리 덜컹 저리 덜컹 버스를 ‘갈 지(之)’ 자로 흔들어대면서 승객들의 틈새와 위치를 고르게 정렬했다. 나는 좌석에 겹쳐 앉은 어른들 틈새로 빼꼼히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버스는 새다리와 섬말과 갈미를 거치면서 장꾼들을 더 태웠다. 그때마다 조수의 배치기와 운전수의 흔들기가 반복되었다. 이제 버스 안은 포화 상태였고, 한두 사람만 더 타면 버스 자체가 풍선처럼 부풀어 팍 터질 것만 같았다. 승객 중의 누군가가 말했다.
“사람도 겁나게 많네. 아이구, 밀지 말어.”
“밀긴 누가 밀었다구 그랴?”
“어허, 밀지 말랑께. 배 터져 죽겄어.”
결코 악의가 없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가벼운 말다툼이었다. 어떻게 보면 장날마다 연출되는 진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버스가 논산 시장 정류장에 이르자 승객들이 우르르 하차했다. (큰)어머니와 나도 그곳에서 내렸다. 버스 안에서 얼마나 시달렸던지 두 다리가 후들거릴 뿐만 아니라 온몸이 나른했다.
첫발을 디딘, 난생 최초로 목격한 논산은 어안이 벙벙할 만큼 경이로웠다. 한글을 깨치고 눈이 밝아졌던 것처럼 나는 그날 새로운 세계에 개안했다. 길목마다 인파가 북적거렸고, 버스와 화물차와 오토바이와 자전거도 분주히 오갔다. 붉은 벽돌 건물 높이 쌓아올린 굴뚝에 흰 페인트로 굵직하게 쓴 ‘朝花’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 건물은 저 유명한 논산의 특산품 청주 ‘朝花’를 생산하는 양조장이었다.
언제부턴가 항간의 농담 중에 ‘촌놈이 논산 장에 갔다 오면 사랑방 마실꾼들 잠을 못 자게 한다’는 말이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생동감 넘치는 논산 장의 서사에다 초 치고 된장 풀고 달착지근한 갖은 양념을 가미한다면 밤새도록 이야기를 풀어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본 논산은 이제까지 구경하지 못했던 별천지라고 말할 수 있었다.
넓은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그 도로망을 따라 큰 건물들과 점포들이 어깨동무하듯 줄지어 있었다. 기껏 십자거리에서나 보았던 몇몇 간판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화려한 간판들이 많았다. ‘형제상회’ ‘태평상회’ ‘행운상회’ 등등 이외에도 ‘논산라사’ ‘대영라사’ ‘한영라사’ 등등 웬 ‘라사’가 그렇게 많은지 궁금했다. 그 간판들 좌우 양단에 거의 예외 없이 종서로 쓴 ‘신용본위’ ‘박리다매’가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큰)어머니에게 여쭈어 보았다.
“엄니, 저기 라사가 뭐래유?”
“나사가 어디 있는디?”
(큰)어머니는 ‘라사(羅紗)’를 ‘나사(螺絲)’로 잘못 알아들은 들은 것 같았다. 문맹자인 당신은 길게 늘어선 여러 ‘라사’ 간판을 보면서도 그걸 읽지 못하는 것이었다. 점포들 유리창 안에는 모직 원단과 양복 완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우리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아마도 우리가 도저히 출입할 수 없는 딴 나라 특권층을 위한 점포인 것 같았다. 머리 위 간판을 가리키면서 내가 말했다.
“저기 ‘논산라사’라고 쓰여 있잖어유.”
“나는 글자를 잘 모르는디 진열장에다 내놓은 물건을 봉께 양복점인개벼.”
(큰)어머니는 어물어물 넘겼고, 나는 ‘라사’의 정확한 뜻을 몰라 줄곧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날씨는 점점 더 더워지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시장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점포에 들렀고, 우리 식구들의 속옷이며 치분과 칫솔은 물론 (큰)아버지 고무신 ‘만월’ 표 10문7짜리 한 켤레를 구입했다. 당신은 그 물건들을 집에서 가져 간 왜포 자루에 차곡차곡 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루가 점점 불룩해져서 일약 부자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시장에는 이것저것 모든 물자가 풍족했다. 떡집에는 각양각색의 떡이 푸짐했고, 청과물 가게에는 먹음직스러운 온갖 과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음식점 앞을 지날 때에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에 군침이 고였지만, 그러나 (큰)어머니와 나는 그걸 사먹을 처지가 못 되었다. 눈은 풍년인데 입은 흉년이었다. ‘그림의 떡’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큰)아버지와 작은누님을 생각하면서 그저 눈요기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큰)어머니는 현명했다. 초장에는 별로 짐이 안 되는, 가볍고 훼손되지 않는 공산품부터 차례차례 산 뒤 최종적으로 무거우면서도 용해될 위험이 있는 소금과 양잿물을 구매했다. 공장에서부터 근사하게 포장된 다른 공산품들이 딱딱 규격을 맞추어 시중에 나와 널리 유통되는 반면 소금과 양잿물의 소매 방식은 특이했다.
소금은 축축한 가마니에서 말이나 됫박으로 퍼서 팔았고, 양잿물은 가게 주인이 국방색 탄통에서 조금씩 집게로 덜어낸 뒤 앉은뱅이저울에 올려놓고 (큰)어머니께서 요구한 만큼 무게를 달아서 팔았다. 하얀 양잿물 덩어리들은 마치 얼음조각 같았다. 독성이 강한, 단번에 사람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위험 물질이었다. 가게 주인이 양잿물을 누런 ‘회푸대’ 종이로 간동하게 포장하는 동안 불현듯 ‘공짜라면 양잿물도 큰 것으로 먹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라 피씩 웃음이 나왔다. (큰)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자, 이제 살 것 다 샀응께 소금하구 양잿물이 녹기 전에 서둘러서 집으로 가자.”
(큰)어머니와 나는 약국 앞 정류장에서 부여행 버스를 기다렸다. 늘 그래왔듯이 점심을 거른 터라 배가 고팠다. 그때 포목전 모퉁이에서 하반신을 상실한 중증 장애인 행상이 나타났다. 그는 길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포복하면서 허리에 매단 딱딱한 미제 골판지 상자를 질질 끌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수건 양초 고무줄 수세미 기저귀끈 따위의 자질구레한 상품들이 실려 있었다.
(큰)어머니는 두 말 않고 속곳 주머니를 뒤져 비상금을 꺼내더니 얼른 ‘비사(飛獅)’ 표 덕용 성냥 한 통과 실 한 태래와 바늘 한 쌈을 팔아 주었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앞뒤를 계산하지 않는 명료한 결정이었다. 둥그런 성냥통 뚜껑에는 상표인 비사, 즉 날개 달린 사자와 함께 ‘제조원 남성성냥공업사’라는 생산 업체가 적시돼 있었다. 당신께서 돈을 치를 때 어제 닭장수에게 팔려가던 가엾은 닭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장애인 행상이 (큰)어머니에게 말했다.
“고마워유. 복 많이 받으세유.”
(큰)어머니는 장애인 행상을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차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딱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날 논산에서 또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저 현란한 간판들의 뒤안길에는 지금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극한의 병고에 신음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눈물겨운 이웃들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했다. (큰)어머니야말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실정이었지만, 당신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모른 체 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항상 약자 편이었던 당신은 그 이후에도 논산 장에 갈 때는 나를 몇 차례 더 데려 가셨다.
이광복 단편소설 '바느질' / iclickart
수십 년 전부터 해마다 가을이면 시루봉 상수리를 주워다 손수 상수리묵을 만드는 데도 일가를 이루신 (큰)어머니. 그날 당신은 논산에서 돌아오자마자 펄펄 끓인 물에 양잿물을 녹이고 고운 쌀겨를 부어 묵을 쑤듯 빨래방망이로 휘휘 저어 버무리고 벅벅 치대어 혼합했다. 그러고는 반죽이 꾸들꾸들 식어갈 때쯤 그걸 주먹밥이나 고추장 메주처럼 뭉쳐 비누를 만들었다. 작은누님이 그 일을 돕고 있었다. (큰)어머니는 시중의 상품을 구입할 형편이 못 되어 그렇게 원시적인 비누를 제조한 것이었다. 당신에게는 아예 유해물질이니 뭐니 그런 의식 자체가 없었다.
나흘 후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나뭇잎 이파리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닭장 안의 닭들은 혀를 길게 빼문 채 헐떡거리고 있었다. 닭장으로 들어간 참새 몇 마리가 닭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모이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고 있었다. 간혹 마당 감나무에서 땡감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큰)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윤복아. 머리 깎어야겠구나. 머리카락이 웃자라 마치 꺼치렁 밤송이 같구나. 여기 앉어라.”
나는 그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닭장 옆 빨랫돌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당신은 바느질 가위로 사각사각 이발하기 시작했다. 그 어른의 가위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바리캉이나 백고칼이 필요 없었다. 당신은 한 점 가위 자국도 없이 내 두발을 백고머리 뺨 칠 만큼 매끈하게 삭발했다. 그런 다음 일전에 만든 수제 비누로 까까머리 두상을 득득 문질러 씻어 주었다. 거울을 보면 모근까지 파르라니 내비치는 내 장배기가 기름칠이라도 한 듯 반들반들하였다.
십자거리와 새다리에 이발소가 있었다. 하지만 (큰)아버지와 나는 그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지 않았다. 이발 요금도 이발 요금이지만, (큰)어머니의 가위질이 워낙 특출했기 때문에 굳이 이발소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당신은 전문 이발사 이상으로 이발을 잘 했다. 그 어른께서는 아랫집 친가 동생들의 머리도 정성스럽게 다듬어 주시곤 했다.
그런 (큰)어머니는 천부적인 강골이었다. 체력이 대단했고, 임질의 저력은 실로 놀라웠다. 지게질이 남정네들의 몫이라면 임질은 아녀자들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필수 조건이었다. 당신은 우리 동네에서 무슨 짐이든 가장 잘 이는 분으로 정평을 얻고 있었다. 물동이를 이는 것은 아주 당연했고, 봇짐이든 나뭇짐이든 거의 모든 짐을 머리로 이어 날랐다.
당신은 언젠가 방앗간에서 갓 짠 참기름이 담긴, 병마개를 신문지로 꽁꽁 말아 꽂은 1.8리터짜리 대병을 머리에 이고 걸은 적도 있었다. 길쭉한 병이 백회혈 정수리 위에 수직으로 곧추 서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어머니는 병을 손으로 잡지도 않은 채 두 팔을 휘휘 내저으며 자유롭게 걸었다. 내가 볼 때에는 병이 곧 굴러 떨어질 것 같았지만,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곡마단의 곡예사처럼 여유롭게 걷는 것이었다. 경추와 대추가 똑바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어른은 땔나무도 잘 했다. 시루봉에서 솔가리든 가랑잎이든 갈퀴로 북북 긁어 한 전 두 전 착착 전 치는 것을 보면 웬만한 남자 나무꾼을 뺨치고도 남을 정도였다. 더욱이 그 땔나무를 새끼줄 망에 터지도록 담아 머리에 일 때에는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당신은 망을 불끈 들어 올려 일단 나무 둥치에다 걸친 다음 자세를 낮추어 그 밑으로 들어가 머리에 올려놓고 똑바로 일어섰다. 그 연속 동작이 번개처럼 날렵했다. 땔나무의 부피와 무게는 지게로 지기도 녹록지 않았지만, 당신은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가뿐히 귀가했다. 천하장사가 따로 없었다.
한편 우리 집에는 제사가 참 많았다. 나는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집안 어른들의 생신날과 조상님들의 기일(忌日)을 전부 암기했다. 물론 선조님들 배위(配位)의 성씨 또한 확실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설이나 한가위 명절 차례 때를 비롯하여 기제에는 늘 내가 지방과 축문을 썼다. 말하자면 장차 종가의 종통을 이어가야 할 몸으로서 기초 학습을 제대로 받은 셈이었다.
우리 직계의 경우 음력 2월부터 3월까지는 며칠 간격으로 어른들의 생신과 제사가 뒤얽혀 매우 복잡했다. 2월 스무하룻날은 할머니 전주유씨 제사, 스무엿새날은 둘째누님 생일, 스무아흐렛날은 (큰)아버지 생신, 3월 초사흗날은 어머니 생신, 초이렛날은 (큰)어머니 생신, 스무사흗날은 먼저 돌아가신 첫 번째 (큰)어머니 무안박씨 제사… 그런 식이었다. 물론 다른 달에도 생일과 제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가난한 집에 제사 돌아오듯 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집이 꼭 그런 경우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판인데 웬 제사는 그렇게도 많은지 (큰)아버지 내외분의 시름이 깊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뵌 적이 없었다. 그 어른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시대가 시대이고 가난이 가난인지라 사진이나 영정 한 장 남기지 못했다.
(큰)아버지께서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제사만큼은 빠뜨리거나 건너뛸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불변의 철칙이었다. (큰)아버지에게는 제사야말로 당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살림살이가 워낙 궁핍하다 보니 제수 장만에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하지만 비록 제주로 곡주 대신 냉수를 올릴지언정 제사 자체를 거른 적이 없었다.
(큰)어머니는 그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지면 이웃집에 가서 쌀을 꾸어다가 제사에 대비했다. 당신께서는 심신이 고달파도 쓰다 달다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시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초저녁에 조율이시(棗栗梨柿)를 괴고, (큰)어머니와 어머니가 나물을 삶거나 탕을 끓여 만반의 채비를 마치고 있다가 첫닭이 울면 메를 지어 올렸다.
모든 제사에는 연화 당숙 어른들 3형제분까지 한 분도 빠짐없이 전원 참례했다. 됫박만 한 방에 엉덩이 들이밀 틈도 없었다. 헌작을 맡은 제관, 즉 (큰)아버지와 아버지와 큰당숙 이외의 서열 낮은 참례자들은 ‘뜰팡’까지 죽 늘어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내간 일가들은 제삿날마다 우리 집에 모여 먼저 돌아가신 조상님을 받들어 숭모했다. 언젠가 한번은 할머니 제사를 모시고 나서 (큰)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조상님을 잘 모셔야 하느니라. 옛날에 땔나무를 해가지고 장에 내다 팔어서 근근이 먹고사는 어느 나무꾼이 있었더란다. 어느 해 즐기에는 눈이 하도 퍼 쌓여 나무도 못하고 장에도 못 가고 집에 갇혀 맨날 굶다시피 근근이 견디는디 부진부진 아부지 제사가 돌아오더라는 겨. 아무리 생각해도 제물을 장만할 대책이 없잖어. 궁리하던 끝에 나무할 때 쓰는, 가장 애지중지하는 도끼를 잘 닦아서 제사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겨. 아, 그러고는 그날 밤 자다가 꿈을 꾸었는디 아부지가 나타나 ‘참 고맙다. 네 성의가 가상하구나’ 하시면서 날이 밝거들랑 어느 골짜기 바위 쪽으로 가 보라고 하시더랴. 그래서 그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간밤 꿈에서 아부지가 가르쳐준 그 골짜기로 갔더니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가득 쌓여 있어서 그걸 가져다가 큰 부자가 되었다는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 나무꾼의 그 갸륵한 정성에 하늘도 감복한 거지. 우리가 그 뭣이냐… 그런 발복을 바라구 제사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서두 사람의 도리를 다할라믄 조상부터 극진히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 겨.”
‘어느 해 즐기’의 ‘즐기’는 ‘겨울께’ 즉 ‘겨울에’를 뜻하는 우리 고장 말이었다. (큰)아버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와 유사한, 전설이나 야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어른은 박학다식했고, 여필종부와 부창부수를 선험적으로 통찰한 (큰)어머니께서는 그런 바깥양반을 하늘처럼 섬겼다. 혹독한 빈곤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큰)어머니. 당신은 부엌일 이외에도 일거리가 주어지기만 하면 밭일이든 논일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만능 일꾼의 표양이었다.
그중에서도 당신의 주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바느질이었다. 안방 시렁 위 대나무 고리짝과 댕댕이 반짇고리에는 다리미 인두 전반 자[尺] 실패 가위 골무 등 바느질 도구들이 가득했다. 단추를 달거나 옷고름을 달거나 동정을 다는 수고 따위는 수시로 하는 잔일이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늘리고 줄이고 뜯어 고치거나, 닳고 달아서 나들나들해진 저고리 팔꿈치와 바지 무릎 부분에 헝겊 쪼가리를 덧대어 짜깁기를 하는 작업 역시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바느질의 귀재 (큰)어머니. 저고리 마고자 바지 치마 두루마기 도포 등 한복은 물론이려니와 형형색색의 갖가지 양복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바느질은 상상을 초월했다. ‘라사’를 눈앞에 놓고서도 그 뜻조차 알지 못했던 당신은, 그러나 바느질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신은 재단과 봉제 양면에 두루 능통했다. 원단을 자로 재고 가위로 슥슥 마름질을 한 뒤 바늘로 한 땀 한 땀 호아 가며 옷가지를 박는 공정에 만인이 탄복했다. 당신의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는 실이 촘촘하게 박히면서 일직선 또는 곡선으로 고운 선이 그어져 나왔다. 당신은 바느질에 도통한 달인이었고, 당신이 만들어낸 모든 제품은 한결같이 당대 최고의 일류 명품이었다.
누군가가 한 필이든 두 필이든 피륙을 가지고 와서 겉옷이든 속옷이든 옷가지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면, 당신은 바느질감의 치수 범위 안에서 종류를 불문하고 무엇이든 상대방의 희망대로 얼마든지 완벽하게 만들어 주었다. 옷감의 재질도 가리지 않았다. 마포든 광목이든 인조견이든 옥양목이든 비단이든 모직이든 뭐든 상관이 없었다. 나중에는 나일론까지 나와 인기를 끌었다.
당신의 손은 마법의 손이었다. 버선코를 깁든 치마 솔기를 달든 베갯모를 만들든 바느질을 마칠 때에는 실올을 돌돌 말아 감치고 옹쳐서 매듭을 지은 뒤 말끔하게 마감했다. 마무리가 얼마나 꼼꼼했던 것일까, 바느질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났는지 귀신도 그 자취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당신의 바느질 자체가 그만큼 정교했다. 거기, 명장 바느질의 진수가 있었다. 시중에서 대량으로 판매하는, 공장에서 재봉틀로 드르륵 박아낸 기성복 바느질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성복에는 항용 박음질의 시작과 끝이 엉성하게 드러나 있었고, 재차 손질을 하지 않을 경우 얼마 안 가 실밥이 스륵 스륵 스르륵 풀리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큰)어머니의 바느질에는 전연 그런 하자가 없었다.
당신은 동네 아이들의 옷도 자발적으로 수선해 주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찢어진 입성을 걸치고 다닐 경우 그 아이를 불러다 놓고 옷을 벗겨 보기 좋게 꿰매 주었다. 동네에 초상이 났다 하면 당신께서는 망자의 수의를 비롯하여 남녀 복인들의 상복과 굴건과 행전까지 모조리 도맡아서 지어냈다. 당신은 비녀로 가로지른 낭자머리에 세침 중침 대침을 골고루 꽂은 채 바느질을 하느라 밤을 지새우곤 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초상집 마당에서 볏짚에 삼 껍질을 꼬아 수질 요질을 만들고 짚세기를 삼았다.
(큰)어머니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바느질삯을 받지 않았다. 어쩌다 후한 사람을 만나면 약간의 수고비 또는 쌀이나 보리쌀 두어 됫박을 받아 오기도 했지만 그걸 공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당신께서 바느질할 때 종종 바늘귀에 실을 꿰어 드리곤 했다. 비록 싸구려라 할지라도 (큰)어머니 덕택에 우리 가족의 복장은 어느 부자들 못지않게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했다.
당신은 빨랫감을 도련하는 데에도 명인이었다. 뒷문 뜰팡에 다듬잇돌과 방망이가 있었다. 옷가지를 뜯어서 빨고 볕에 바랬다가 풀을 먹여 푸새한 뒤 다듬이질을 할 때의 감각과 기량은 고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방망이를 어느 각도로 어떻게 두들기느냐에 따라 또드락 또드락 또드락 딱딱 또드락 딱딱… 다듬잇소리의 고저장단과 가락이 달라졌다. 작은누님과 마주 앉아 다듬이질을 할 때에는 화음이 더 아름다웠다. 겨우내 안방 무쇠화로에는 벌건 알불을 재로 덮어 다독거리는 부손과 화젓가락이 꽂혀 있었다.
다리미질과 인두질은 옷감 손질의 기본이었다. (큰)어머니는 입에 물을 가득 물고 푸우푸우 물안개를 뿜어내며 옷감을 매끈하게 다리곤 했다. 자근자근 밟고 포갬포갬 개고 다독다독 정갈하게 매만진 여러 조각들을 꿰어 맞추고, 솜이불에 호청을 씌워 가뿐가뿐 거침없이 홑이불을 시치면서 일사천리로 질주하는 바느질 솜씨가 문자 그대로 천의무봉이자 묘기 대행진이었다. 티끌만한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입신의 경지에 눈이 부셨다. 누가 뭐라든지 바느질에 관한 한 당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관통하는 천하제일 불세출의 최고봉이었다.
남들도 다 아는 일이지만, 재봉틀 한 번 만져본 적 없이 모든 바느질을 특유의 손기술만으로 해결했던 당신은 분명 시대를 잘못 태어난 어른이었다. 왕조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궁중으로 초빙되어 능히 임금님 용포 등 궁중 의상을 제작하고도 남을 거장이었다. 당신은 미상불 인간문화재 이상의 탁월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차라리 조금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재단과 봉제 등 국제 대회 의상 관련 종목에 참가해 세계를 제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큰)어머니에게 그런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이 태어난 환경 또한 박복했다. 자본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그리고 학교 문턱이라도 넘었더라면 봉제 공장이나 의상실을 차려 대성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애통하기 짝이 없었다. 웬만한 도회지에 태어났더라면 삯바느질로 최소한의 생계만큼은 꾸려갈 수 있었으련만, 생업으로 삼을 만한 바느질 일감이 전무한 촌간에서 살다 보니 평생 밥벌이도 못한 채 뼈저린 생활고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당신들은 쫄쫄 굶으면서도 이 못난 양자만큼은 굶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큰)아버지 내외분. 나는 그 어른들 슬하에서 잔뼈가 굵어 오늘 여기까지 왔다. 바느질의 여왕 (큰)어머니는 그토록 처참하게 살면서 (큰)아버지와 함께 나를 지극정성으로 길러주신 양육의 은인이었다. (『창조문예』 2024. 12월호)
◆ 이광복(소설가·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충남 부여 출생. 1976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제27대), (사)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 국립한국문학관 이사,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대표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역임.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사)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소설집『화려한 밀실』『사육제』『겨울여행』『먼 길』『동행』『만물박사(전3권)』『뿌리』 외 다수. 장편소설 『풍랑의 도시』『목신의 마을』『폭설』『겨울무지개』『사랑과 운명』『계백』『황금의 후예』외 다수. 대통령표창(1987·1995),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 제14회 조연현문학상, 제28회 국제PEN문학상,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문화예술부문), 제30회 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 제35회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 제61회 한국문학상, 제21회 창조문예문학상 외 다수.
** 문화앤 피플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