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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DHAMMACAKKAPPVATT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F DHAMMA
우꼬레 영어 번역 / 김한상 우리말 번역
행복한 숲
제7장
미얀마력 1324년(서력 1962년) 따바웅(Tabaung)1의 보름날 설법
우리가 그동안 다른 명상센터들을 방문한 관계로「초전법륜경」법회가
따자웅몬(Tazaungmon)의 보름날 설해진 법문을 끝으로 중단되었습니다.
따바웅(Tabaung)의 보름날을 맞아 우리는「초전법륜경」의 법문을 다시 시작하고자 합니다.
제 6장에서 우리는 도제(道諦)를 다루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를 아는 지혜인 삿쨔 냐나(saccā-ñāṇa),
진리에 대해 어떠한 기능을 행해야 함을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
진리에 대한 기능을 행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kata-ñāṇa)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2
1. 고제(苦諦)에 적용되는 진리를 아는 지혜 - 삿쨔 냐나(SACCĀ-ÑĀṆA)
Idam dukkham ariyasaccā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ñāṇam udapadi, paññāudapadi, vijJudapadi, aloko udapadi.
“이것이 고성제(苦聖諦)이다. 비구들이여!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이 게송은 고제(苦諦)에 관해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아는 지혜인 사쨔 냐나(saccā-ñāṇa)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앞전의 법문에서 태어남은 괴로움이다라는 식으로 고제(苦諦)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조금 더 반복해보도록 하겠습니다.‘이것이 고성제(苦聖諦)이다’라는 말씀에서 ‘이것이’란 태어남(jāti)에서 시작해서 오취온(五取蘊)으로 끝나는 괴로움의 다양한 범주를 가르킵니다. 여기서 필수적인 항목은 오취온으로 대부분은 책으로 배워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오취온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이것은 물론 주요한 과제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오취온을 어떻게 개인적인 체험으로 이해할수 있는지를 지적하기 위해 이를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앉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현저해지는 현상이 모두 오취온(五取蘊)입니다.
성자(ariya)들은 이러한 대상들에서 오직 무서운 고통과 괴로움만을 보지만 범부(puthujJna)들은 정반대로 봅니다.
범부들은 이러한 대상들을 고통과 괴로움의 구현으로 보지 않고 즐겁고 건전한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형상(色)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이 들리고, 감미롭고 낭랑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미로운 향기를 맡고 맛난 음식을 맛보고 즐거운 감촉(觸)을 누리는 것은 더할나위없이 즐겁습니다. 욕계(欲界)3의 중생들은 감촉(觸)을 가장 즐거운 것으로 여깁니다. 상상과 몽상에 젖는 것도 또한 즐겁습니다. 하지만 몽상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면 끔찍한 일이자
커다란 손실일것입니다.
사실상,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은 고제(苦諦)인 오취온(五取蘊)입니다. 끊임없는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인해
무상· 고· 무아인 참되고 무서운 본성을 철견하여 고제(苦諦)를 절실히 깨닫고자 위빠사나 명상을 닦습니다.
세존께서는 위빠사나 도를 충분히 닦으셨기 때문에 아라한도의 지혜를 얻어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가장 성스러운
지복인 열반을 보셨습니다. 열반이라는 가장 뛰어나고 가장 성스러운 지복을 보심으로써
부처님께서는 오취온(五取蘊)에서 오직 무서운 고통과 괴로움만을 보셨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다른 사람에게 듣거나 알라라(Alara)와 웃다까(Udaka)사문들에게 배운 수행을 닦아서가 아니라 팔정도를 닦아서 얻은 스스로의 직관적인 지혜를 통하여 부처님에게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고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이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으로 어떠한 외부의 지도나 가르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체험과 직관적인 지혜로 진리를 찾고 발견하신 바르게 깨달으신 분, 정등각자(正等覺者 sammā-sambuddha)가 진정으로 되셨음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한 공개적인 선포는 참으로는 필요합니다. 그 당시에는 나형외도(裸形外道)인 니간타가 행하는 절식과 같은 고행이 성스럽고 거룩한 수행으로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다섯 비구들도 초기에 그러한 생각속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남에게 들어서가 아니고 사유와 추론을
통해서도 아니고 스스로의 깨달음과 체험, 직관적인 지혜를 통해서 수행과 지혜를 이루었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을때
비로소 다섯 비구들은 세존께서 진정으로 위없는 깨달음(無上正等覺)을 얻으시고 부처님이 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외부의 도움없이 직관적인 지혜를 얻는 것은 정등각자(正等覺者)와 벽지불만의 고유 영역입니다.
세존의 제자들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을 닦아서 깨달음과 지혜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에도 원한다면
그러한 지혜를「대념처경」등과 같은 경전에 간직된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을 하여 얻을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전들의 가르침대로 그렇게 수행을하면 오취온(五取蘊)를 있는 그대로, 즉 단지 괴로움과 고통에 불과한 것으로 볼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의 선포에는 다섯 비구들로 하여금 정진을 하도록 하여 오취온(五取蘊)의 진정한 본성을 보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앞전의 부처님의 선포에서“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라는 말씀으로 최상의 지혜(abhiññā)가 나타났음을 말씀하셨고 하나의 지혜를 각각 눈(眼 cakkhu),
지혜(智 ñāṇa), 통찰지(慧 paññā), 영지(靈知 vijJ), 광명(光 aloka)의 다섯가지로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상응부(相應部)의 주석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눈(眼 cakkhu), 지혜(智 ñāṇa),통찰지(慧 paññā), 영지(靈知 vijJ), 광명(光 aloka)은 동일한 지혜를 뜻하는 유의어이다. 보는 기능 때문에 지혜를 눈(眼 cakkhu)이라 한다. 아는 기능 때문에 지혜(智 ñāṇa)라 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석적으로 아는 기능 때문에 통찰지(慧 paññā)라고 한다.
꿰뚫어 알기 때문에 영지(靈知 vijJ)라고 한다.
빛을 내는 기능 때문에 광명(光 aloka)이라고 한다.”
빠알리 논장인「무애해도」도 이들 용어를 비슷하게 설명합니다. 빠알리어 짝꾸(cakkhu)는 본다는 개념을 전달하기 때문에 눈[慧眼]입니다. 원하는 의미나 개념을 각기 다른 청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여러 가지 빠알리어가 쓰인다고 주석서는 설명합니다. 그래서 육안으로 선명하게 보는 것처럼 지혜를 묘사하기 위해 눈[慧眼]4이라 합니다. 비유하면, 몇 년동안 장님으로 지내온 사람이 올바른 약의 처방이나 안과전문의의 수술로 시력을 되찾게 된다고 합시다. 치료전에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만 이제는 모든 것을 선명하게 봅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위빠사나의 지혜나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개발하기 전에는 괴로움의 오취온(五取蘊)은 유익하고 즐거운것이라는 무명(avijiā)속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보고 듣고하는 순간 끊임없이 알아차림으로써 위빠사나의 지혜가 강력해지면 수행자는 보고, 듣고 하는 현상인 오취온(五取蘊)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참된 본성 때문에 참으로 두렵기 그지 없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이는 장님으로 있다가 시력을 회복한것과도 같습니다. 성스러운 도의 개발로 괴로움의 참된 본성을 아는 깨달음은 더욱더 예리해질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하기 때문에 눈[慧眼]이라고 합니다.
‘ñāṇam udapadi, 지혜가 일어나고’라는 말씀에서 냐나(ñāṇa)는 앎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혜(智)입니다.‘paññā udapadi, 통찰지(慧 paññā)가 일어나고’에 대해「무애해도」는 빠알리어 빤냐(paññā)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하여 일어남과 사라짐등을 알아차리는 동안 정신(nāma)과 물질(rūpa)은 뻣뻣한 움직임과 그것을 아는 마음으로 따로 따로 분리되어 알게됩니다. 초보자들은 이러한 구별을 직접 체험할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또한 결과에서 원인을 구별해낼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사라짐과 뚜렷히 다른 모든 새로운 일어남을 알게 됩니다. 또한 끊임없는 일어남과 사라짐 때문에 오온(五蘊)은 무상하며, 무시무시한 괴로움이며 저절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누구의 제어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오온은 자아가 아니고 실체가 없음을 여실히 알게 됩니다. 그러한 것은 희미한 빛처럼 모호하고 불분명하고 흐릿한 지혜가 아니라 마치 손바닥에서 관찰되는 것처럼 명료하고 선명하고 확실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적으로 아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통찰지(慧 paññā)라고 하는 것입니다.
‘vijJ udapadi, 영지(靈知 vijJ)가 일어나고’라는 말씀에서 빠알리어 위지자(vijJ)는 꿰뚫어 앎, 관통을 뜻합니다. 이를 하늘을 나는 초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경서에 등장하는 만트라(眞言 mantra)를 외는 사람, 마법사(魔法師)를 뜻하는 ‘위지자다라(vijJdhara)’라는 말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여기서 위지자(vijJ)는 사람이 아니라 관통하는 기능을 나타내기 때문에 꿰뚫어 앎인 영지(靈知)5라고 합니다.
꿰뚫어 앎인 영지(靈知)는 오묘(奧妙)한 것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미얀마력 1300년(서력 1938년)경 일어났던 한 사건을 집고 넘어가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향 마을의 한 주지 사야도와 토론을 하면서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리면 통찰지(慧 paññā)가 생겨난다고 그에게 일러주었습니다. 하지만 사야도는 이러한 종류의 인식을 통찰지로 수긍할수 없었습니다. 사야도는 통찰지는 관통하는 것으로 오직 꿰뚫어 아는 것만이 통찰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꿰뚫어 앎’을 생기게 할수 있는지를 묻자 사야도는 잠시 머뭇거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요. 꿰뚫어 앎은 그냥 꿰뚫어 앎이지요.”
‘꿰뚫어 앎’은 꿰뚫음이란 뜻의 빠알리어‘paṭiveda’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법문 2장에서 설명된 것처럼 ‘꿰뚫어 앎,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의‘sambodha’와 유사합니다. 장막이나 벽에 가려져 있으면 사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장막에 구멍이 뚫히고 벽에 창문이 생기면 이들 틈새를 통해 사물이 보이게 됩니다. 이처럼 이 지혜는 어리석음(moha)의 장막을 관통합니다.
처음에는 어리석음에 가리워져 보고 듣고 하는 것은 무상· 고· 무아로 보이거나 알려지지 않습니다. 무명(avijiā)과 어리석음(moha)에 가리워진채 그것들이 항상(nicca)하고, 행복(sukha)하고 자아(atta)가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위빠사나 지혜가 강해지면 마치 무명의 장막이 관통되는 것과 같이 선명한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한 인식을 꿰뚤어 앎이라고 합니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꿰뚫어 앎인 영지(靈知 vijJ)가 내면에 일어났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무애해도」에 따르면‘aloko udapadi, 광명(光 aloka)이 일어났다.’라는 구절에서 aloko(광명)란 불을 킴, 밝게 함, 비춤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는 용어일 따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광명은 단순히 사람의 육안으로 보이는 그런 일반적인 불빛이나 광명을 뜻하는게 아니라 모든 현상을 선명하고 분명하게 구별하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이전에는 암흑에 둘러싸인 것처럼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의 진정한 본성이 보이거나 알려지지 않습니다. 위빠사나의 지혜와 성스러운 도가 개발될때 무상·고·무아의 진정한 본성이 분명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을 비유적으로 ‘광명(光 aloka)이 일어났다.’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다양한 근기의 청중들이 명확히 이해할수 있도록 이 한가지 형태의 최상의 지혜(abhiññā)가 각각 눈(眼 cakkhu), 지혜(智 ñāṇa), 통찰지(慧 paññā), 영지(靈知 vijJ), 광명(光 aloka)의 다섯가지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는 법문을 듣는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이렇게 설해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한가지 단어를 쓰는 대신에 두 세가지 유사어를 써서 청중들이 그둘중 어느 하나로 우리가 설하는 의미를 파악할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설명한 빠알리어 단어와 그 의미들은 모두 진리를 아는 지혜(saccā-ñāṇa)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싸쨔 냐나(saccā ñāṇa)는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제(苦諦)에 적용되는 해야 할 어떠한 기능이나 행위를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고제(苦諦)에 적용되는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
- 낏짜 냐나(KICCA-ÑĀṆA)
Tam kho panidan dukkam ariya saccām parineyanti me, Bhikkhave, pubbe annu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ñāṇam udapadi, paññāudapadi, vijJudapadi, aloko udapadi.
“고성제(苦聖諦)는 바르게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이것은 고성제(苦聖諦)와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6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고성제와 관련해서 행해야할 기능은 고성제를 바르게 잘 통달하고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성스러운 도과와 열반의 증득을 열망하는 수행자는 열심히 정진해서 고제(苦諦)를 바르게 잘 통달해야 할 의무, 그러니까 태어남(jāti)에서 오취온(五取蘊)까지 고제(苦諦)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을 철저하게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태어남(jāti)과 같은 이 고제(苦諦)의 구성요소중 필수요소가 바로 오취온(五取蘊)입니다. 이 오취온을 있는 그대로 앎으로써 고제(苦諦)를 바르고 철저하게 잘 이해하는 과업이 완수됩니다. 그래서 『상응부(相應部)』의 대품(大品) 제상응(諦相應)편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비구들이여 무엇이 고제(苦諦)인가? 오취온(五取蘊)을 고제(苦諦)라고 해야 할것이다.’
우리는 법문 제 4장에서 오취온(五取蘊)에 관해 상세한 해설을 한바 있습니다. 보고 듣고 하는 순간에 감각의 육문(六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오취온(五取蘊)입니다. 이들은 육문(六門)에서 일어나는 대로 모든 현상을 알아차림으로써 자신의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노력으로 거침, 조악함, 반드러움, 부드러움 같은 땅의 요소(地大 pathavi-dhātu)를 몸소 체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점착성, 유동성, 습한 성질의 물의 요소(水大 āpo-dhātu)와 뜨거움, 차가움, 따스함의 불의 요소(火大 tejo-dhātu), 압력과 운동의 특성을 가진 바람의 요소(風大 vāyo-dhātu)도 또한 몸소 체험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의 체험으로 하나 하나씩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 지는 이전에 상세하게 잘 설명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몸의 어느 지점에서 뚜렷해지는 감촉(觸)에 주의력을 집중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때 네가지 근본요소(四大)들중 하나는 그 고유 성질(自性)7로 자기 존재를 부각시킬것입니다.
네가지 근본요소(四大)들을 이해하고 나서 보고 듣는 것을 알아차릴때 보고 듣는것이 의지하는 육체적 토대, 형상(色)과 소리(聲)라는 물질적 대상, 식이라는 정신적 무더기(識蘊)와 그 마음부수(心所)들이 뚜렷히 드러납니다. ‘일어남, 꺼짐, 앉음, 감촉함, 앎, 뻣뻣한 느낌, 뜨거운 느낌, 통증, 들음, 봄’의 현상을 매번 알아차릴때 마다 수행자는 알아차리는 대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모두 새로 일어나자 마자 곧바로 사라짐을 몸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매번 일어날때마다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이다(hutva abhavato anicca)라고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인해 압박당하는 괴로움(udayabbhaya-patipilanatthena-dukkha)이라고 알게 됩니다.
또 수행자는 이는 자기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자신에 대한 통제력이 없는 무아(avasa vaṭṭanatthena anattā)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을 면밀히 주시하고 무상· 고· 무아의 성질을
철견하여 몸소 얻어진 자신의 지혜가 바로 고제(苦諦)를 포괄적으로, 바르게, 잘 아는(pariññeyya)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실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포괄적으로, 바르게, 잘 이해해야 하는 오취온(五取蘊)인 고제(苦諦)를 남에게 듣지 않고서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pubbe ananu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내면에 일어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꼰단냐존자와 같은 제자들은 세존이나 세존의 다른 제자들에게 법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고제(苦諦)를 포괄적으로 바르게 잘 알아야(parinneyya)한다는「초전법륜경」의 명확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려서 오취온(五取蘊)인 고제(苦諦)를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정신과 물질· 무상· 고· 무아에 관해 듣고 배우는 것만으로 목표를 이룰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오직 슬픔과 동정만을 표할뿐입니다.
낏짜 냐나(kicca-ñāṇa)8란 철저하고 바르게 잘 알아야 하는 오취온(五取蘊 인 고제(苦諦)를 깨닫는 것입니다.
각주 이 낏짜 냐나(kicca-ñāṇa)는 고제(苦諦)에 관해 어떠한 기능이 행해져야 하는 지를 아는 지혜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성스러운 도를 얻기전에 이루어집니다. 수행자는 명상을 닦기전에도 반드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을 할 때마다 알아차림으로써 무상· 고· 무아의 성질을 포괄적으로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는 위빠사나를 닦는 동안에도 물론 이러한 과업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수행자가 오취온(五取蘊)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철저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위빠사나의 지혜를 완전하게 개발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제자들인 사념처수행자들은 명상을 닦는 동안 우리에게서 지침을 받을 때부터 보고 듣는 순간 일어나는 어떠한 것도 주위깊게 알아차려야 한다고 배웠으므로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kicca-ñāṇa)가 요구하는 역할을 완수하였습니다. 또한 알아차리는 동안 설령 수행자가 맨 처음엔 무엇을 알아차려야 하는지를 모른다하더라도 그는 곧바로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판별력이 바로 낏짜 냐나(kicca-ñāṇa)로 어떠한 기능이 행해져야 하는 지를 아는 지혜입니다. 이 해야할일을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충분할만큼 설명하였으므로 우리는 이제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kata-ñāṇa)로 넘어가겠습니다.
3. 고제(苦諦)에 적용되는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 까따 냐나(KATA-ÑĀṆA)
Taṃ kho panidaṃ dukkhaṃ ariya saccāṃ pariñña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 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m udapādi, pana udapādi, vijjā udapādi, aloko udapādi.
“이 고성제(苦聖諦)를 철저하고 바르게 잘 깨달았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보고 듣는 행위를 알아차림으로써 오취온(五取蘊)인 고제(苦諦)를 깨닫고
무상· 고· 무아를 끊임없이 철견하는 것이 위빠사나 지혜입니다.
하지만 위빠사나의 지혜만으로는 철저하고 바르게 통달하는 기능인 통달지(pariñña)의 역할이 아직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을 놓쳐버린 대상들에 관련해서 항상(nicca)하고 행복(sukha)하고 자아(atta)가 있다는 인식이 드는게 여전히
가능합니다. 위빠사나의 지혜를 완벽하게 이루고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개발해야만 열반의 평화를 체험할수 있습니다.
성스러운 도의 지혜가 개발되고 열반의 평화가 체험될때만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완전해지고 지속된다고 할수 있을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제(苦諦)를 철저하고 바르게 통달하는 과업의 완수입니다.
예류의 지혜마저도 이러한 과업을 완벽히 완수하는데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라한도의 지혜를 깨달아야만 고제(苦諦)를 백퍼센트 철저하고 바르게 통달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세존의 경우는 아라한의 도과와 정각을 얻으신 시점부터 그 과업이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고제(苦諦)를 철저하게 아는 과업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눈(眼 cakkhu)등이 생겼으며 그 과업은 완성되어 더 이상 행할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 명상수행에 매진하고 있는 수행자들도 고제(苦諦)를 철저하고 바르게 알고 마침내 아라한의 도과를 얻어 철저히 아는 과업을 완수하고자 하는 희망속에서 이러한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라한의 도과를 얻고 나면 반조함으로써 그 역할이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방금 고제(苦諦)에 적용되는 진리를 아는 지혜인 삿짜 냐나(saccā-ñāṇa),
해야 할일을 하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kata-ñāṇa)의 세가지 지혜들을 간략하게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1. 보고 듣는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은 진정한 괴로움으로 고제(苦諦)라고 아는 지혜가
바로 삿짜 냐나(saccā-ñāṇa)입니다.
2. 이 고제(苦諦)를 주의깊게 알아차려 철저하고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아는 지혜가
바로 낏짜 냐나(kicca-ñāṇa)입니다.
3. 반조함으로써 고제(苦諦)를 철저하고 바르게 이해했음을 아는 지혜가
바로 까따 냐나(kata-ñāṇa)입니다.
이 세가지 지혜들 가운데 진리를 아는 지혜인 삿짜 냐나(saccā-ñāṇa)는 수행자가 위빠사나 명상에 매진하는 동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은 단지 괴로움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때 나타납니다. 이 삿짜 냐나(saccā-ñāṇa)는 성스러운 도가 출현하기 전에 생겨납니다. 성스러운 도를 이루는 순간, 즉 열반의 평화를 보는 순간에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에 내재한 고제(苦諦)를 깨달음으로써 이 지혜가 일어납니다. 성스러운 도가 출현한뒤에도 이 지혜는 반조함으로써 커나갑니다.
그래서 이 삿짜 냐나(saccā-ñāṇa)는 성스러운 도가 일어나기 전과 일어나고 난 후, 그리고 일어나는 순간에 사성제(四聖諦)를
아는 지혜입니다. 사실 성스러운 도를 얻는 순간 실현되는 것은 오직 멸제(滅諦)뿐입니다. 나머지 세가지 진리인
고제(苦諦),
집제(集諦),
도제(道諦)는 각각 통달지(pariñña),
버림(pahāna),
수행(bhāvanā)으로 구성된
꿰뚫음(paṭiveda)의 역할을 완수함으로써 실현된다고 합니다.
멸제(滅諦)에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는 일시적인 깨달음,
즉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은 괴로움이라고 아는 기능이 고제(苦諦)와 관련하여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성스러운 도과를 증득한 성자(ariya)들, 특히 아라한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은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을 숙고(paṭisaṅkha)를 통해 압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본성을 철저하고 바르게 아는 꿰뚫음(paṭiveda)의
역할이 도를 얻는 순간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를 닦는 동안 이 괴로움에 대한 지혜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실제로 알아차림으로써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고제(苦諦)를 바르게 잘 아는 것으로 통달지의 꿰뚫음(pariñña-paṭiveda)이라고 합니다.
고제(苦諦)를 바르고 잘 통달해야한다는 깨달음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의 경우,
성스러운 도를 얻기에 앞서 성취해야 합니다. 어떠한 기능들을 행해야 하는지를 아는 선행하는 지혜를 가져야
비로소 성스러운 도의 증득을 위한 이러한 기능들을 행할수 있습니다.
고제(苦諦)의 경우를 보면, 오온(五蘊)에서 분명해지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매번 일어날때마다 알아차림으로써
무상(anicca)의 성질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초기 단계에서 제대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선행하는 이해로써만이 현상을 관찰하는 필수과업을 행할수 있고, 완전히 성숙된 위빠사나를 얻고 나서 성스러운 도를
개발할수 있습니다.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각각에 대해 행해야 하는 기능을 아는 선행하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성스러운 도를 닦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道)를 얻기 훨씬 이전에
고제(苦諦)를 철저하고 바르게 잘 통달해야 하고,
집제(集諦)를 버려야 하고,
멸제(滅諦)를 실현해야 하고,
도제(道諦)를 닦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앎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진리들에 대해 어떠한 기능을 행해야 하는지를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가 도(道)가 출현하기 휠씬 이전부터 미리 앞서와야 합니다.
이러한 기능들을 행했음을 아는 지혜는 아라한의 도과를 얻고나서 청정범행을 살아왔음(vusitaṃ brahmācariyaṃ)을, 해야할 일을 다했음(kataṃ karaniyaṃ)을 반조하고 난뒤에 비로소 일어납니다. 까따 냐나(kata ñāṇa)란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입니다.
아라한도는 소멸(nirodha)의 증득으로써 고제(苦諦)를 철저하고 바르게 이해하고 집제(集諦)를 버리고 도제(道諦)를 닦는 다른 세가지 과업들도 다함께 행했습니다. 이러한 네가지 기능들을 모두 행했음을 아는 것이 바로 이루었음을 아는 지혜(kata-ñāṇa)입니다.
진리를 아는 지혜인 사쨔 냐나(saccā-ñāṇa),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 해야 할 일을 다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kata-ñāṇa)에 대한 상기의 간략한 설명은 「논사(論事 Kathāvatthu)」의 복주석서인「물라띠까(Mūla-tika)」에 따랐습니다. 우리는 고제(苦諦)에 적용되는 세가지 지혜를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집제(集諦)에 적용되는 세가지 지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집제(集諦)에 적용되는 진리를 아는 지혜 - 삿쨔 냐나(SACCĀ-ÑĀṆA)
Idaṃ dukkhasamudayo ariya saccaṃ ti me, Bhikkhave, pubbe ananu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aloko udapādi.
“이것이 집성제(集聖諦)이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상기의 구절에서 ‘이것이’란 이미 설명한바 있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ā-taṇhā),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괴로움이 이들 갈애로부터 일어나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는 얻고자 애써야 하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즐거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욕망의 대상을 추구하는 동안에 자신들의 목숨을 잃는 정도의 극심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일어난 갈애를 억제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또한 괴로움과 불행을 낳습니다.
이미 얻은 부와 재산을 잘 간수하는 것이란 참으로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담배를 피는 사람들과 비틀(betel)잎을 씹는 사람들은 그 욕망의 대상들이 고갈되었을때 고통을 격습니다.
음주와 아편 흡입에 빠진 사람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때 더욱 더 심한 고통을 느낄것입니다.
사람은 홀로 태어납니다. 어렸을때는 부양가족들에서 자유로운 홀몸으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성장하게 되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의 부추김을 받아서 짝을 구할 필요를 느끼고 상대를 찾아나섭니다, 그가 얻을수 없는 상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비참한 종말을 맺을것입니다. 자신이 필요하는 짝을 얻게 되어서 마침내 자신의 바램이 성취되었다 하더라도 서로간에 성격이 맞지 않음을 발견하는 시점부터 곧바로 문제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설령 금실좋고 화목한 결혼생활이라 하더라도 어느 한 배우자가 중병에 걸렸을때 문제가 벌어집니다. 병에 걸린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윽고 죽음은 어느 한 배우자에게 닥쳐와서 다른 배우자에게 극심한 비탄과 고통을 안겨 줍니다. 이러한 모든 괴로움은 다 갈애(taṇh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생들은 이 갈애가 행복의 원천이라는 무명(avijiā)에 전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갖가지 감각대상들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지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즐거운 대상이나 감각이 없어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게 될때 삶은 지루하고 따분해집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승원이나 절을 방문하는 것은 넌덜머리나는 일입니다. 위빠사나 명상에 대한 설법을 듣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반면 영화와 같은 오락쇼는 즐거움, 환락, 유희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욕망의 대상들을 사냥해다가 지극정성으로 이 갈애를 먹여 살립니다. 쾌락을 쫒는 이러한 광적인 추구는 이렇게 하는게 즐거움과 행복을 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된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믿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무명에 전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즐겁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 때문에 실제로는 무섭고 소름끼치는 것입니다. 갈애는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절대로 감각적 쾌락에 물리는 법이 없습니다. 몇날, 몇달, 몇년간을 쾌락을 누리고서도 갈애는 여전히 만족을 못합니다. 그래서 쾌락에 대한 그침없고 열정적인 추구 때문에 중생들의 즐기는 행위는 중단되지 않을것입니다. 마침내 즐거운 대상과 감각의 재고가 다 떨어지는 때가 오면 크나큰 불만족이 지속됩니다.
이는 갈애가 어떻게 현재의 삶에 문제와 괴로움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짧막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갈애가 반복되는 윤회의 주범이라는데 괴로움의 진정한 원인이 있습니다.
즐거운 형상(色)과 소리(聲)는 즐거움과 갈애(taṇhā)를 자극하고 이렇게 자극받은 갈애는 취착(upādāna)을 일으킵니다.
취착 때문에 만족을 얻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행해집니다. 이는 상카라와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āmā-bhava)9를 이룹니다.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그러한 행위들과 죽는 순간 속행의 식(速行識 Jvana-vinñāṇa), 즉 그때 나타난 대상을 거머쥐는 갈애(taṇhā)에서 자극의 힘을 받는 업지음의 식( abhisaṅkhāra-vinñāṇa)로 인하여, 재생연결식이 죽음의 마음(cuti-citta)뒤에 곧바로 나타납니다.새로운 삶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삶과 결부된 모든 고난과 시련이 시작된다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 일어난 순간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모든 고난과 시련은 모두 갈애(taṇh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갈애가 모두 제거된 아라한은 더 이상 새로운 삶의 괴로움을 격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는 태어남과 같은 갖가지 괴로움의 진정한 원인으로 집제(集諦)입니다.
색계존재(色界有 rūpa-bhava)와
무색계존재(無色界有 arūpa-bhava)를 열렬히 갈망하는 이들은
각각 색계선(色界禪 rūpavacara-jhāna)과
무색계선(無色界禪 arūpavacara-jhāna)을 성취하기위해 매진합니다. 그렇게 선정을 성취하면
색계범천(rūpa-brahmā)이나
무색계범천(arūpa-brahmā)계에 재생합니다.
범천(Brahmā)으로 그들은 육체적이고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그들의 수명은 또한 겁(劫)의 단위로 헤아려집니다. 세간적인 관점에서 볼때 그들의 삶은 여러 행복한 삶들가운데 하나로 여겨질수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명이 다하고 나면 그들은 죽음과 마주쳐야 하고 죽는 괴로움(maraṇa-dukkha)을 격습니다. 또한 불사(不死)의 바램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도 함께 격습니다. 또 죽은뒤에 향하게 될 욕계존재(慾有 kāmā-bhava)의 고난과 시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래서 범천계의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도 진정한 고제(苦諦)입니다.10
죽은 다음에 존재하지 않고자 하는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또한 지금 이생에서 거리낌없이 악행을 저질르도록 하기 때문에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허무주의자들은 악행을 삼가는 대신 가능한 어디에서든지 어떠한 악행도 서슴치 않고 저지르고 거기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러한 불선업(akusala-kamma)때문에 그들은 수없이 많은 생을 악처(apāya)에 떨어져 재난과 고통을 격습니다. 그러므로 허무주의적 인생관에서 기인하는 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는 확실히 집제(集諦)임이 너무나 명백합니다.
이러한 세가지 갈애(taṇhā)가 괴로움의 근본원인임을 아신 부처님은 어떻게 그들을 철견하였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이것이 집성제(集聖諦)임을 본 눈(眼 cakkhu)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갈애가 집성제(集聖諦)라고 아는 지혜가 삿짜 냐나(saccā-ñāṇa)입니다. 집성제(集聖諦)를 아는 지혜인 삿짜 냐나(saccā-ñāṇa)는 성스러운 도의 출현 전과 후에 일어납니다. 도의 순간에 삿짜 냐나(saccā-ñāṇa)또한 버림의 꿰뚫음(pahāna-paṭiveda)으로 이루어집니다. 요컨데, 도가 일어나기 전과 일어나고 나서, 그리고 일어나는 순간에 사성제(四聖諦)를 아는 지혜가 바로 삿짜 냐나(saccā-ñāṇa)입니다.
5. 집제(集諦)에 적용되는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
- 낏짜 냐나(KICCA-ÑĀṆA)
Tam kho panidam dukkhasamudayo ariyasaccām paha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ñāṇam udapadi, paññāudapadi, vijJ udapadi, aloko udapadi.
“이 집성제(集聖諦)는 버려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만약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를 원한다면 괴로움의 원인을 먼저 제거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약을 복용하여 그 병의 근본원인부터 제거해야만 합니다.
미얀마 내과의사들은 질병의 원인을 피, 바람, 담즙, 기후, 음식등의 부조화로 진단합니다. 서양 내과의사들은 다양한 병원균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러한 질병의 원인들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적절한 의학적 치료로 제거하면 질병이 말끔하게 치유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의 바퀴로 반복되는 윤회고는 그 근본원인이자 집제(集諦)인 갈애를 제거해서 피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집제(集諦)는 버려야 할 법(pahātabba-dhamma)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버림은 어떻게 작용되는 것일까요?
이를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갈애야. 일어나지도 생기지도 말거라. 나는 갈애에서 벗어난 그대로의 마음(自性淸淨心)을 유지할것이다. 나는 갈애가 없는 마음만을 가질것이다. ”과연 그러한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러한 마음상태를 얻기위해 노력해보고 그러한 마음상태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수 있는지를 한번 지켜봐야 합니다.
결혼한 사람이 아내에 대한 사랑, 애정의 생각, 충족해야 하는 성애(性愛)의 감정에 어찌 시달리지 않겠습니까?
담배를 피우고 비틀잎을 씹고 좋은 음식을 먹고자 하는 갈애가 어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부와 재산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은 또 어떻습니까?
이러한 갈애들은 중요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일상사로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면서 그러한 질문들을 얼버무려서는 쉽게 해결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갈애를 억누를수 없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갈애가 일어날때마다 고통을 겪여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엄존하며 버려야 할 법(pahātabba-dhamma)인 갈애는 가능할 때 제거해야 함을 깊이 명심해야만 합니다.
사실상 제거해야 할 갈애(taṇhā)는 세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몸으로 하는 행동(身業)과 입으로 하는 행동(口業)을 유발하는 갈애.
2. 상상해낸 즐거움과 환상을 마음껏 향락하도록 마음을 부쿠키는 갈애.
3. 나타날 적당한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면서 잠재하는 갈애.
이 세가지 갈애중 몸으로 하는 행동(身業)과 입으로 하는 행동(口業)을 유발하는 갈애는 계로 제거되는 거친 단계의 번뇌(vītikkhama-kilesa)로 분류됩니다. 계율을 철저히 잘 지키는 사람은 설령 가지고 싶은 욕구가 생기더라도 다른 사람이 소유한 물건은 절대 훔치지 않습니다. 또 그릇된 음행을 하지 않습니다.(청정범행의 계를 지키는 사람은 어떠한 성관계도 하지 않습니다.) 또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취하게 하는 술이나 약물을 삼가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계로 제거하는 번뇌(vītikkhama-kilesa)를 물리칩니다. 이것이 어떻게 계로 갈애를 제거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상상해낸 즐거움과 쾌락에서 생기는 갈애는 집중된 마음인 삼매로 제거되는 중간 단계의 번뇌(pariyutthāna-kilesa)로 분류됩니다. 들숨날숨(出入息 ānāpāna)과 같은 명상대상의 하나를 끊임없이 닦아나간다면 감각적 대상에 대한 욕망과 감각적 대상을 상상하는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와집니다. 명상수련의 어느 하나에 그렇게 몰입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제멋대로 자유롭게 떠나서 매력적인 감각대상을 생각을 하고 대부분의 경우, 감각적 쾌락을 갈망을 하는데 빠져들게 될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로부터 벗어난 그대로 유지할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 끊임없이 명상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에도 집중의 힘이 강해지기 전까지는 감각적 욕망의 생각(kāmā-vitakka)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사마타 명상을 통해서 선의 집중을 얻을때 비로소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의 생각이 일아나지 않지만 그것도 선정몰입이 지속되는 동안만 가능합니다. 이는 삼매(samādhi)가 어떻게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으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를 저 멀리 떨쳐 버리는 지를 보여줍니다.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는 선정을 얻은 사람에게도 남아있습니다. 그러한 갈애들은 또한 일부 범천에게도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는 사마타 집중으로는 제거하지 못합니다. 사마타와 명상에 미숙한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과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에서 자유로울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자기의 삶과 존재를 즐거워하는 것이 갈애나 번뇌때문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마음은 번뇌에서 벗어난 그대로 유지될수 있고 그러한 마음이 바로 열반이다.’라는 극단적인 사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적절한 조건이 무르익으면 나타나는 갈애를
잠재하는 번뇌(ārammaṇanusaya-kilesa)라고 합니다. 이 번뇌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1. 아람마나누사야(ārammaṇanusaya) - 감각대상에 잠재하는 번뇌
2. 산타나누사야(santananusaya) - 중생을 이루고 있는 오온(五蘊)의 흐름에 잠재하는 번뇌
보거나 듣는 순간에 나타나지만 무상· 고· 무아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대상들이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반조 하는 순간 그 보고 듣는 것과 관련하여 번뇌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번뇌는 감각대상에 잠재하는 번뇌인 아람마나누사야(ārammaṇanusaya)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번뇌는 위빠사나의 지혜로 제거될수 있습니다만 위빠사나는 오직 관찰되는 대상에 일어나는 번뇌만을
제거할수 있습니다. 잠재성향의 번뇌는 영향을 받지 않고 관찰을 벗어나는 대상들에 그냥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성스러운 도로 아직 제거되지 않고 중생을 이루고 있는 오온(五蘊)의 흐름에서 일어날 적당한 때를 엿보고 있는 번뇌는
산타나누사야(santananusaya)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번뇌는 오로지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만 제거할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bhāvanā)을 닦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성스러운 도로써 산타나누사야(santananusaya)를 쉽게 제거할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6. 잠재성향의 번뇌(ANUSAYA-KILESA)는 실제로 존재한다
경전과 아비담마에 잠재성향의 번뇌(anusaya-kilesa)에 관해 분명히 언급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잠재해 있는 번뇌같은 것은 없고 다만 마음의 기억력으로만 번뇌가 생긴다는 주장을 하고 다닙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불경한 말을 해대는 것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사춘기이전의 어린이에게는 이성(異性)을 즐거워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慾愛)는 아직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번뇌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번뇌가 일어날 만한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조건이 무르익으면 올라올때를 엿보면서 번뇌가 내면에 잠재해 있습니다. 사춘기에 이르면 이성의 모습과 소리만으로도 즉시 성적인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성적인 욕망은 그냥 순간적으로 일어날 뿐이지 이전에 그 일어남을 보았거나 들어서 그것을 마음에 간직해 놓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상 유년기때 잠재하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성적인 욕망이 일어나며 그때서야 그 성적인 욕망이 일어날 기회를 만난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과 법과 승가의 삼보(三寶)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어떤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봅시오. 그런 그들도 다른 종교의 스승들에게 감화를 받게 되면 부처님과 법과 승가의 삼보에 대해 회의적 의심(vicikicchā)이 들기 시작합니다. 일부는 아예 신앙을 바꿔서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를 받아들이기까지 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회의적 의심과 삿된 견해는 마음의 기억력때문이 아니라 항상 그들 내면에 회의적 의심과 삿된 견해가 잠재해왔고 성스러운 도로 아직 완전히 일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시절의 성자(ariya)들은 예류자의 도로 회의적 의심과 삿된 견해를 제거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스승도,
제석천(帝釋天)이나 마라조차도 그들에게 삿된 견해를 받아들이고 삼보(三寶)에 대해 회의적 의심을 가지게 할수 없었습니다.
이는 성스러운 도로 잠재하는 번뇌인 산타나누사야(santananusaya)를 제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전법륜경」법문을 듣는 이 기회를 가진 선한 사람들은 일어날 적당한 때를 엿보고 있는 번뇌들이 중생들의 내면에 잠복해 있으며 괴로움의 진정한 원인인 이 갈애는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bhāvanā)을 닦아서 성스러운 도로 제거해야 한다고 꼭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거되야 하는 법이라고 아는 것이 집제(集諦)에 적용되는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입니다.
집제(集諦)에 적용되는 이 낏짜 냐나(kicca-ñāṇa)는 성스러운 도가 나타나기 이전에 개발되야 합니다.그래서
이 낏짜 냐나(kicca-ñāṇa)는
알아야 할 고제(苦諦),
버려야 할 집제(集諦),
실현해야 할 멸제(滅諦),
닦아야 할 도제(道諦)를 아는 한발 앞서 나간 지혜입니다.
이 낏짜 냐나(kicca-ñāṇa)는 남에게 전해듣지 않고 세존에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인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버려야 할 집성제(集聖諦)이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그리고 나서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버리는 역할을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7. 집제(集諦)에 적용되는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 까따 냐나(KATA-ÑĀṆA)
Tam kho panidam dukkhasamudayo ariya saccām pahin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ñāṇam udapadi, vijJudapadi, aloko udapadi.
“이것이 버려진 집성제(集聖諦)이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이는 버려야 하는 집제(集諦)인 갈애를 버리고 나서 버리는 역할이 완수되었음에 대한 반조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해야할 역할을 완수하였음을 아는 지혜는 까따 냐나(kata-ñāṇa)로 알려져 있습니다.
집제(集諦)에 관해서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집제(集諦)를 앎으로써
네가지 성스러운 도로 열반이 증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도에서 악처(apāya)에 이르게 하는 갈애가 제거됩니다.
두 번째 단계인 일래도에서는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가 없어집니다.
세 번째 단계인 불환도에서는 미세한 형태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가 사라집니다.
남아있는 모든 갈애는 네 번째 단계인 아라한 도에서 열반을 증득할때 완전히 소멸합니다.
그러한 갈애의 소멸은 네가지 성스러운 도나
버림의 꿰뚫음(pahāna-paṭiveda)으로 집제(集諦)를 아는 것이라고 일컬어 집니다.
버림이나 제거의 행위는 성스러운 도로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을 이룹니다.
그래서 집제(集諦)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버림이 바로 버림의 꿰뚫음(pahāna-paṭiveda)입니다. 이 이루었음을 아는 까따 냐나(kata-ñāṇa)도 매우 중요합니다.
명상을 하는 목적은 이 갈애와 함께 번뇌를 실제로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이러한 갈애와 번뇌들이 제거되었을때에만 높은
지혜의 증득과 해야 할 바의 완수가 이루어지고 보장됩니다. 자신이 정말로 이러한 갈애와 번뇌들로부터 벗어났는지를 면밀히
검토해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설사 깨달음의 가장 낮은 단계인 예류자가 되었다 주장하더라도 악처(apāya)로 떨어지게 하는 불선업(akusala-kamma)을 촉발시키는 갈애가 제거되었어야 합니다. 오계를 어기도록 부추킬수 있는 갈애로부터도 벗어나야만 합니다.
살아있는 실체인 자아가 있다는 사견에 대한 갈애와 결부된 즐거움과 쾌락이 버려졌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갈애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날때만 이 예류자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주장이 인정될수 있을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어떠한 주장도 인정될수 없음을 유념해야 합니다.11
우리는 집제(集諦)에 적용되는 진리를 아는 지혜인 삿쨔 냐나(saccā-ñāṇa),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kata-ñāṇa)라는
세가지 진리를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멸제(滅諦)에 적용되는 이들 세가지 진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8. 멸제(滅諦)에 적용되는 진리를 아는 지혜 - 삿짜 냐나(SACCĀ-ÑĀṆA)
Idam dukkhanirodho ariyasaccāmti me, Bhikkhave, pubbe ananu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hi,
ñāṇam udapadi, paññāudapadi, vijJudapadi, aloko udapadi.
“이것이 버려진 멸성제(滅聖諦)이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상기 경문에서 ‘이것’은 이미 설명했던 집제(集諦)인 갈애의 완전한 소멸을 가리킵니다.
갈애가 제거되면 정신(nāma), 물질(rūpa), 상카라(saṅkhāra)의 모든 괴로움은 끝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소멸(nirodha)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임을 아는 사짜 냐나(saccā-ñāṇa)가 내면에 일어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짜 냐나(saccā-ñāṇa)는 성스러운 도의 전후에 걸쳐 일어나고 도를 얻는 순간에 얻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이 지혜가 도를 얻기 이전에 일어나는지에 대해 보면, 제자들은 남에게 전해 들어서 이 지혜를 얻습니다. 하지만
세존께서는 자신의 직관으로 예류도를 얻기 전 이 지혜를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성스러운 도를 얻는 순간에 이 사쨔 냐나(saccā-ñāṇa)는 실현으로
열반을 깨닫는 성스러운 도의 지혜와 같아지게 됩니다.
9. 멸제(滅諦)에 적용되는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
- 낏짜 냐나(KICCA-ÑĀṆA)
Tam kho panidam dukkhanirodho ariya saccām saccika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ñāṇam udapadi, paññāudapadi, vijJ udapadi, aloko udapadi.
“이것이 실현되어야 할 멸성제(滅聖諦)이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멸제(滅諦), 즉 갈애의 소멸인 열반을 아는 이 지혜는 증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멸제(滅諦)에 관해서 해야 할 기능을 아는 지혜이기 때문에 낏짜 냐나(kicca-ñāṇa)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깨달음이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즉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중의 하나를 관찰하는 동안에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a-upekkhā-ñāṇa)가 완전하고 확고하게 확립되는 순간 관찰의 대상인 상카라와 그것을 아는 식이 모든 상카라의 괴로움이 끝이 나는 그런 소멸의 상태로 돌진해 들어갈때까지 깨달음의 걸음걸이는 더욱 더 빨라집니다. 조건지워진 모든 것(有爲法)들의 소멸을 깨닫는 순간 갈애도 또한 소멸됩니다. 그래서 성스로운 도를 통해 갈애의 소멸을 이루어 실현하는
멸제(滅諦)라고 합니다. 그러한 실현은 실현의 꿰뚫음(sacchikiriya-paṭiveda)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멸제(滅諦)는 실현해야 할 진리입니다. 그러한 실현은 실현의 꿰뚫음(sacchikiriya-paṭiveda)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고 듣고 감촉하고 아는 것을 알아차리는 목적은 멸제(滅諦)를 실현함으로써 실현의 꿰뚫음(sacchikiriya-paṭiveda)이라는 역할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의 금강보좌(金剛寶座)에서 아라한의 도과를 통해 열반을 실현하심으로써 실현의 꿰뚫음(sacchikiriya-paṭiveda)이라는 역할을 완수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해야할 일을 완수하고 반조한 낏짜 냐나(kicca-ñāṇa)를 어떻게 개발하였는지를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0. 멸제(滅諦)에 적용되는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 까따 냐나(KATA-ÑĀṆA)
Tam kho panidam dukkhanirodho ariya saccām sacchika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ñāṇam udapadi, paññāudapadi, vijJ udapadi, aloko udapadi.
“이것이 실현된 멸성제(滅聖諦)이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이는 아라한 도과의 지혜로 멸제(滅諦)를 실현하시고 나서 해야 할 일의 완수에 대한 반조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곧이어 도제(道諦)에 적용되는 세가지 지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1. 도제(道諦)에 적용되는 진리를 아는 지혜 - 삿짜 냐나(SACCĀ-ÑĀṆA)
Idam dukkhanirodhagamini patipeda ariyasaccā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ñāṇam udapadi, paññā udapadi, vijJ udapadi, aloko udapadi.
“이것이 도성제(道聖諦)이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이 진리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성스러운 도의 진리라고 하는 긴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주석서들은 이를 그냥 도제(道諦)라고 축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법문에서 이 축약된 명칭인 도제(道諦)를 그냥 쓰도록 하겠습니다.
팔정도는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평화에 이르는 도닦음(patipada)의
성스러운 진리임을 아는 지혜를 삿짜 냐나(saccā-ñāṇa)라고 합니다.
이 삿짜 냐나는 성스러운 도를 얻는 순간과 그 전후에 걸쳐 일어납니다.
성스러운 도를 아직 얻지 못했던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도제(道諦)를 듣기만 해서 배웠습니다. 범부들은 개인적인 체험으로 도성제(道聖諦)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석서들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도제(道諦)는 원하는, 열망하는 바르게 알아야 하는 법이다. ’이렇게 전해 들어서 알면 마음은 그 도제(道諦)로 향해야만 합니다. 도제(道諦)에 관한 예비적인 역할은 그냥 도제(道諦)에 마음이 향함으로써 완수됩니다. 이와같이 범부들은 알수 없는 열반인 멸제(滅諦)에 관하여 주석서들은 원하고 열망하고 바르게 인식해야 할 법으로 마음을 단지 그 멸제(滅諦)에 향하게 하는 것만이 요구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멸제(滅諦)에 대한 예비적인 역할이 완수된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성제(道聖諦)는 생각하고 숙고할 필요가 없다고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반도 미리 숙고하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직관적인 통찰로써 멸제(滅諦)를 아는 지혜에 이전에 이미 도달하심으로써 직관으로 이 도제(道諦)를 아는
지혜도 함께 얻으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부처님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고 고백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스러운 도를 얻는 순간 실현을 통해 오로지 열반인 소멸의 진리(滅諦)를 알게됩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이러한 식으로 도의 법들이 실현되며 이러한 것으로써
개인에게 도의 법들을 닦아야 하는 역할이 완수됩니다.
이것이 수행의 꿰뚫음(bhāvanā-paṭiveda)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도제(道諦)는 내면에서 닦아야 하며
이러한 도닦음(paṭipada)을 수행의 꿰뚫음(bhāvanā-paṭiveda)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개인의 내면에서 성스러운 도가 일어날 때 성스러운 도를 보는 것이 됩니다. 동시에 그것이 이루어졌음을 아는 역할도 의미합니다. 성스러운 도를 닦아 반조를 함으로써 그 도가 개인에게 아주 선명하게 드러날것입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도를 곧바로 닦을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를
첫 단계로 닦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위빠사나는 또한 소멸(nirodha)에 이르는 올바른 수행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의 제 6장에서 주석서「삼모하위노다니」도 그렇게 닦아야 한다고 권하고 있음을 이미 언급한바 있습니다.
12. 도제(道諦)와 관련되어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
- 낏짜 냐나(KICCA-ÑĀṆA)
Tam kho panidam dukkhanirodhagamini patipadaariya saccām bhave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ñāṇam udapadi, paññā udapadi, vijJudapadi, aloko udapadi.
“이것이 실현된 도성제(道聖諦)로 이를 닦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도제(道諦)는 내면에서 닦아야 하는 법이라고 아는 지혜를 낏짜 냐나(kica-ñāṇa)라고 합니다. 이 낏짜 냐나는 도제(道諦)와 관련되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럼 도제(道諦)와 관련되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도제(道諦)는 자신의 내면에서 닦아야 합니다. 이를 확실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닦아야 하는 법인 도제(道諦)는 본「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처음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도를 닦는 것은
세존의 바램에 따라 열반을 얻기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도제(道諦)를 닦아서 수행을 시작할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선구자 되는 도(pubbabhaga-magga)인 위빠사나 도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도성제(道聖諦)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빠사나 도를 닦는것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이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나 위빠사나 도를 닦기 위해서는 먼저 고제(苦諦)를 잘 관찰해야만 합니다.
제 4장에서 폭넓게 설명한 고제(苦諦)란 바로 오취온(五取蘊)을 뜻합니다. 매번 일어날때마다 그 오취온을 관찰하게 되면
알아차림의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의 구별을 아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를
첫 번째로 개발하게 됩니다. 이 지혜에 뒤이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이해하게 됩니다.
계속 수행해 나아감에 따라 정신(nāma)과 물질(rūpa)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흐름의 성질을 알게 됩니다.
이 흐름은 일어났다가는 다음순간 곧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불안정적하고 무상하고 단지 괴로움일 뿐입니다.
또한 자기 저절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자아가 아닙니다. 이러한 실체들을 몸소 체득하는 것이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바른 견해(正見)가 개발될때 바른 사유(正思惟)와 다른 도들도 개발된다는 것은 이전에 설명한바 있습니다.
이러한 도들을 어떻게 닦는지도 이전에 설명한바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어떻게 이러한 도들을 닦는 지는 먼저 자신이 느끼는 감촉을 알아차리는 데에 있습니다.
수행을 단순화 하기위해서 우리는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고 권해왔습니다.
배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과정중에 수행자는 다른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수도 있습니다.
수행자는 그러한 생각도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뻣뻣함, 뜨거운 느낌, 통증, 가려움등과 같은
고통스러운 감각을 또한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 동작의 변화도 일어나는 대로 또한 알아차려야 합니다.
보이거나 들리는 특이한 현상도 또한 주시해야 합니다.그렇게 해서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동안 알아차리는 모든 순간에
있는 그대로를 아는 지혜(如實智), 바른 견해(正見), 위빠사나 도가 개발될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진리(苦諦)인 오취온(五取蘊)의 실제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팔정도를 닦는 것이 됩니다.
요약을 하면
1.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인 위빠사나 도를 닦아서만이 성스러운 도를 얻을수 있습니다.
2. 위빠사나 도를 닦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진리(苦諦)인 보고 듣는 현상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3. 괴로움의 진리(苦諦)인 보고 듣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순간마다 팔정도가 닦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억을 돕는 주(註)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근본 도(mūla-magga),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 성스러운 도(ariya-magga)를 닦아서 열반에 이른다.
어떤 사람들은 책에서 오취온(五取蘊)의 현상과 무상·고·무아등에 대해 배운 지식으로 그러한 목적을 이룰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은 사념처명상법에 따라 명상을 닦아서 경이로운 경험을 얻을때야 비로소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들은 만약 보고 듣는 등의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주시하는 실참 수행을 닦지 않았더라면 고제(苦諦)를 철저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통달지의 역할(pariñña-kicca)을 이루지 못하고 팔정도를 닦는 역할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깨우침을 터놓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경전에 정통한 학식있는 사람들이 하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체험으로 높은 성취를 위한 바른 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팔정도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을 관찰해서 닦아야 하는 법(dhamma)이다.’라고
「초전법륜경」에 구체화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아울러 도제(道諦)와 관련된 기능을 아는 것이
낏짜 냐나(kicca-ñāṇa)라는 것과 이 낏짜 냐나는 성스러운 도가 출현하기 이전에 경청을 통해서 배움으로써 얻어야 한다는 것,
고제(苦諦)인 오취온(五取蘊)의 실제적인 현상을 일어나는 순간 관찰해서만 비로소 위빠사나 도를 닦을수 있다는 것,
위빠사나 도를 닦아야만이 실참수행 도의 진리(bhavetabba-magga-saccā)라고도 하는 성스러운 도가 닦아지고 열반이
실현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13. 도제(道諦)에 적용되는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 까따 냐나(KATA-ÑĀṆA)
Tam kho panidam dukkhanirodhagamini patipadaariya saccām bhavi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utesu dhammesu, cakkhum udapadi, ñāṇam udapadi, paññā udapadi, vijJudapadi, aloko udapadi.
“이것이 멸성제(滅聖諦)이고 이것은 닦아졌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법들에 관해서 눈(眼 cakkhu)이, 지혜(智 ñāṇa)가, 통찰지(慧 paññā)가, 영지(靈知 vijJ)가, 광명(光 aloka)이 나의 내면에 일어났다.”
이는 아라한의 도를 얻기까지 도제(道諦)를 닦았음을 반조함으로써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kata-ñāṇa)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말씀하시는 세존의 고백입니다. 사성제(四聖諦)에 각각 적용되는 진리를 아는 지혜인 사쨔 냐나(saccā-ñāṇa),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kata-ñāṇa)라는 세가지 지혜는 이제 열두가지 방법, 즉 세가지 지혜를 넷으로 곱한 것으로 완전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이 열두가지 방법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 도를 얻는 순간과 그 전후에 걸쳐 사성제(四聖諦)를 아는 지혜가 삿짜 냐나(saccā-ñāṇa)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인 집제(集諦)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인 멸제(滅諦)이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임을 아는 지혜가 바로 삿짜 냐나(saccā-ñāṇa)입니다.
이 지혜는 또한 도를 얻기 전에 미리 일어납니다.
제자들의 경우 멸제(滅諦)와 도제(道諦)에 적용되는 삿짜 냐나(saccā-ñāṇa)는 오직 들어서 생기는 지혜(聞慧)를 통해
도의 직전에 얻습니다. 멸제(滅諦)는 도를 이루는 순간 실현을 통해서도 인식됩니다. 주석서들에 따르면 남은 세가지 도
(일래, 불환, 아라한도)는
통달(pariñña),
버림(phāna),
도닦음(paṭipadā)의 세가지 기능(tisu kiccato)을 완수함으로써 도를 얻는 순간에 알게된다고 합니다.
도를 얻고 나서 어떻게 이들 도를 알게되는 지는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상세한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2 무엇을 알아야 하며(苦諦),
무엇을 버려야 하며(集諦),
무엇을 실현해야 하며(滅諦),
무엇을 닦아야 하는지(滅諦)에 대한
선행하는 지혜를 해야 할일을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a-ñāṇa)라고 합니다.
‘괴로움(dukkha)을 철저하고 바르게 통달해야 하며
일어남(samudaya)을 버려야 하며,
도(magga)를 내면에서 닦아야 한다’
라고 아는 것이 바로 사성제(四聖諦)에 적용되는 낏짜 냐나(kicca-ñāṇa)입니다.
이 지혜는 위빠사나 명상을 시작하기전은
물론 성스러운 도가 출현하기 이전 위빠사나를 닦는 동안에도 일어납니다.
3. 필요한 기능을 이루었음을 아는 것이 바로 해야할일을 하는 지혜인 냐나(kata-ñāṇa)입니다.
세간사에서도 해야 될 역할을 다했을때 다했음을 아는 앎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달(pariñña),
버림(phāna),
실현(sacchikiriyā),
도닦음(paṭipadā)을 이루었을때
이러한 사실들은 반조함으로써 알게 됩니다.
이러한 알게됨을 행해져야 할 일을 이루었음을 아는 지혜(kata-ñāṇa)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설명한것은 네가지 종류의 진리를 아는 지혜인 삿짜 냐나(saccā-ñāṇa),
네가지 종류의 해야할 일을 아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
네가지 종류의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kata-ñāṇa)로 구성된 총 열두가지 지혜들입니다.
이 열두가지 지혜들중 어떻게 삿짜 냐나(saccā-ñāṇa)가 일어나고 네가지 기능들이 이루어지는 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간략하게 이들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1.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는 철저하고 바르게 통달해야 합니다.
그러한 통달은 통달지의 꿰뚫음(pariñña-paṭiveda)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일어남의 진리인 집제(集諦)는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버림은 버림의 꿰뚫음(pahāna-paṭiveda)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 소멸의 진리인 멸제(滅諦)는 실현해야 합니다.
그러한 실현은 실현의 꿰뚫음(sacchikiriya-paṭiveda)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는 내면에서 닦아야 합니다.
그러한 도닦음을 수행의 꿰뚫음(bhāvanā-paṭiveda)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도를 얻는 순간 오직 멸제(滅諦)만을 실현을 통해 깨닫게됩니다.
나머지 세가지 진리인 고제(苦諦), 집제(集諦), 도제(道諦)는 각각
통달지의 꿰뚫음(pariñña-paṭiveda),
버림의 꿰뚫음(pahāna-paṭiveda),
수행의 꿰뚫음(bhāvanā-paṭiveda)으로
요구되는 역할을 완수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제(苦諦),
집제(集諦),
도제(道諦)는 역할의 완수함으로써 멸제는 실현으로써 깨닫는다.’
5. 도를 통해 사성제(四聖諦)중 하나를 보게 될때.
6. 네가지 모든 꿰뚫음(paṭiveda)이 완수된다.
성스러운 도와 마찬가지로 위빠사나를 닦는 순간에도 대상으로서 고제(苦諦)만을 관찰해서 나머지 세가지 진리인 고제(苦諦),
집제(集諦), 도제(道諦)를 아는 역할도 아울러 행해집니다. 이것은 이렇게 행해집니다. 명상을 통해서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의 구현체로 알아차려지는 감각대상은 항상함(nicca), 행복(sukha), 자아(atta)의 무명속에서 감각대상을 즐거워 하는 갈애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갈애의 일시적인 버림의 꿰뚫음(tadanga-pahāna-paṭiveda)입니다.
관찰되는 대상과 상카라(saṅkhāra),식(識 vinñāṇa)따위를 항상(nicca)하고 행복(sukha)하고 자아(atta)가 있다고 그릇되게
인식케 하는 무명(avijiā)은 일어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어 사라집니다. 이것이 일시적 소멸(tadanga-nirodha)을 통한 실현입니다. 모든 것을 무상· 고· 무아로 철견하는 위빠사나 도는 알아차릴때마다 닦아집니다. 이것이 수행의 꿰뚫음(bhāvanā-paṭiveda)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명상을 닦는동안 관찰로 고제(苦諦)를 알게 되면 나머지 세가지 진리인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는
버림의 꿰뚫음(pahāna-paṭiveda),
실현의 꿰뚫음(sacchikiriya-paṭiveda),
수행의 꿰뚫음(bhāvanā-paṭiveda)이란 역할을 완수함으로써 파악됩니다.
그래서 사성제(四聖諦)모두를 동시에 파악하게 된다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우리는 세가지 지혜로써 각각의 사성제(四聖諦)를 파악하는 열두가지 방식을 고찰하는 끝맺음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초전법륜경」의 큰 법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한 공덕으로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선한 여러분들 모두가 듣고 보고 하는
등의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고제(苦諦)등을 완전하고 올바르게 이해할수 있게 되고 여러분들이 선택한 도와 과를 통해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속히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1. 따바웅(Tabaung)은 양력 12월에 해당
2. 사성제(四聖諦)에 적용되어 설명될 이 세가지 지혜를 여기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도록 한다.
(1) 삿짜 냐나(saccā-ñāṇa) - 진리를 아는 지혜, 즉 사성제(四聖諦)를 아는 지혜를 말한다.
(2) 낏짜 냐나(kicca-ñāṇa) - 진리에 대해 어떠한 기능이나 역할, 할일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지혜
(3) 까따 냐나(kata-ñāṇa) - 진리에 대한 그러한 기능이나 역할,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이 세가지 지혜를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四聖諦)에 각각 적용을 시키면 다음과 같은 총 12가지의 지혜가 나온다.
고제(苦諦) - ① 고제를 아는 지혜 ② 고제에 대해 어떠한 기능이나 역할, 할 일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지혜,
③ 고제에 대한 그러한 기능이나 역할,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집제(集諦) - ④ 집제를 아는 지혜 ⑤ 집제에 대한 어떠한 기능이나 역할, 할 일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지혜,
⑥ 집제에 대한 그러한 기능이나 역할,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멸제(滅諦) - ⑦ 멸제를 아는 지혜 ⑧ 멸제에 대한 어떠한 기능이나 역할, 할 일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지혜,
⑨ 멸제에 대한 그러한 기능이나 역할,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도제(道諦) - ⑩ 도제를 아는 지혜 ⑪ 도제에 대한 어떠한 기능이나 역할, 할 일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지혜,
⑫ 고제에 대한 그러한 기능이나 역할, 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3. 욕계(欲界)는 삼계(三界)중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는 오욕(五慾)이 주가 되는 세계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사악도(四惡道)와 인간, 육욕천(六欲天)이 모두 포함된다.
4. 눈[慧眼]이라고 옮긴 빠알리어 짝꾸(cakkhu)를 본서의 영역자는 눈의 보는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vision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vision(見, 봄)으로 번역되는 빠알리어는 다사나(dassana)이기 때문에 본서는 이 짝꾸(cakkhu)를 빠알리어 원어에 충실하게 그냥 눈[慧眼]으로 옮겼다.
5. 영지(靈知)라 번역한 위자(vija)는 무명(無明)으로 옮기는 아위자(avija와 대가 되는 말이다. 그래서 명(明)으로 한역되었다.
그러나 명(明)은‘안다, 체험한다’는 동사√vid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고 지혜는 일반적으로 냐나(ñāṇa)나 빤냐(paññā)의 역어이므로 신령스럽게 안다는 의미를 살려 영지(靈知)라고 옮겼다. 그리고 위지자(vijJ)와 빤냐(paññā)를 본서에서는 각각‘영지(靈知)’와‘통찰지(慧)’로 옮겼지만 사실은 모두 최상의 지혜인 아빈냐(abhiññā)를 달리 표현하는 술어로 봐야 한다. 그래서 본서의 영역도 이 둘을 별 구분없이‘penetrative insight’와 ‘knowing penetratingly’로 옮기고 있다.
6. 낏짜 냐나(kicca-ñāṇa)에서 낏짜(kicca)는 √kṛ(to do)의 분사형태인데 나중에 중성명사로 정착된 술어로‘
역할, 기능, 작용, 의무, 해야 할 일’이란 뜻이다.
그래서 지혜란 뜻의 냐나(ñāṇa)와 합성어로 쓰여‘어떠한 역할이나 해야 할 일을 해야 함을 아는 지혜’라고 풀이된다.
7. 고유 성질(自性)로 번역한 사브와(sabhāva)는 특정 법이 가지는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것은
고유성질을 가진 법은 찰라생· 찰라멸하기 때문에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8. 해야 할 일을 하는 지혜인 낏짜 냐나(kicca-ñāṇa)에 대해서「청정도론」(Vis.VⅡ.26)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완전히 알아야 할 법들(즉, 사성제)를 완전히 알아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철저히 알아야 할 법들(즉, 고제)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버려야 할 법들(즉, 집제)를 버려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실현해야 할 법들(즉, 멸제=열반)을 실현해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닦아야 할 법들(즉, 도제)을 닦아야 한다고 깨달으셨다.”
9. 존재(有 bhava)는 두 가지인데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āmā-bhava)와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apatti-bhava)이다.
업으로써의 존재의 특징은 업(業)이고
재생으로써의 존재의 특징은 업으로부터 생긴 무더기(蘊)이다.
이것은 각각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역할과 다시 태어나는 역할을 하며,
업으로서의 존재는 유익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나타나고
재생으로서의 존재는 유익하다 혹은 해롭다라고 할수없는 무기(無記)로써 나타난다.
10. 「대념처경」의 주석서에 따르면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란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이
함께 하는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존재에 대한 탐욕과 선(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라고 한다.
11. 마하시 사야도의 말씀에서 보듯 상좌부 불교에는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해주는 큰스님이나 제삼자의 인가란 것이 없거나 중요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비담마가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수행자들은 철저히 자기점검을 하고 또 도반이나 깨달았다는 사람들을 점검하기 때문이다. 마하시 사야도도 다른 법문에서 성자란 외적으로 그 사람의 행위나 사상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를 비추어 보면 들어난다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출가자는 깨닫지 못했는데 자신이 깨달았다고 주위에 말하고 다니면 그것은 네 가지 바라이죄(波羅夷罪 pārājika)에 해당하는 가장 큰 범계(犯戒)이다. 그래서 상좌부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결코 자신이 깨달았노라는 말씀을 하지 않는다. 주위에서 저 스님은 저런 사상 저런 행위를 구족하셨기 때문에 예류자다 아라한이다 등등으로 판단하는 말들이 있을 뿐이다. 레디 사야도, 모곡사야도같은 분들도 자신이 아라한이라 한적이 없었고 마하시 사야도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의 행위나 견해가 부처님 말씀과 일치한다면 그는 성자일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삿된 견해에 놀아나고 절이나 돈이나 명예 등에 잔뜩 눈독을 들인다면 그 사람의 인가나 주장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으로 범부중생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