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마하연론 제5권 釋摩訶衍論 卷第五
용수 지음
벌제마다 한역
이인혜 번역龍樹菩薩造 姚秦三藏筏提摩多奉 詔譯
여기서부터는 생멸상(生滅相)의 차별을 밝히는 내용이다.
【論】 다음으로 생멸상(生滅相)은 두 가지로 분별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거친 번뇌[麤]이니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미세한 번뇌[細]이니 마음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거친 가운데서도 가장 거친 것은 범부의 경계고,
거친 가운데서 미세한 것과 미세한 가운데서 거친 것은 보살의 경계이며,
미세한 가운데서도 가장 미세한 것은 부처님의 경계다.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훈습(無明熏習)에 의해 있게 되니,
인(因)에 의지하고 연(緣)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인에 의지한다는 것은불각(不覺)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연에 의지한다는 것은망령되이 경계를 지어낸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인이 멸하면 연도 멸한다.
인이 멸했으므로 불상응심(不相應心)이 멸하고,
연이 멸했으므로 상응심(相應心)이 멸한다.
【문】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상속(相續)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반면 상속한다면 어떻게 궁극적으로 멸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論】 멸한다는 말은 마음의 상[心相]이 멸한다는 말이지
마음의 체[心體]가 멸한다는 말이 아니다.
비유하면 바람이 물을 의지해서 움직이는 모습이 있는 것과 같다.
만일 파도치는 물이 멸한다면 바람은 의지할 곳이 없어서 끊겨버리지만
물이멸하지 않으므로 바람의 모습도 계속 이어진다.
바람이 그치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습도 따라서 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이 멸하는 것은 아니다.
무명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체에 의지해서 움직이므로,
만일 마음의 체가 멸한다면 중생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끊겨버린다.
그러나 마음의 체가 멸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의 모습도 따라서 멸하지만
마음의 지혜[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釋】 위 글은 다섯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 번째는 표제와 해석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생멸상을 드러내는 문
[標釋俱成示相門]이다.
두 번째는 생멸상에 따라 가설한인물에게 배당하는 문
[率相屬當假人門]이다.
세 번째는 거친 번뇌와 미세한 번뇌의 소의밝히는 문
[顯示麤細所依門]이다.
네 번째는 본각지혜로 번뇌를 대치하는 차례를 보여주는 문
[本覺對治次第門]이다.
다섯 번째는 문답을 일으켜 의심을 풀어주는 문
[發起問答決疑門]이다.
표제와 해석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생멸상을 드러내는 문이란 어떤 것인가?
거친 생멸은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미세한 생멸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을 거친 생멸이라 하며, 어떤 식과 상응한다는 것인가?
지말 중에서도 가장 지말적인 생멸이기 때문이며,
분별사식(分別事識)과 어울려 상응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미세한 생멸이라 하며, 어떤 식과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지말적인 생멸이기 때문이며,
세 가지 분위[三位]를 갖는 본식(本識)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명보살은 어떤 경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해석하였는가?
『능가경』을 근거로 하였다.
그 경에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가?
『능가경』 계통의 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대혜(大慧)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갖가지 식에는 몇 가지 생(生)과 주(住)와 멸(滅)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갖가지 식에는 두 가지 생과 주와 멸이 있다. 이것은 생각하고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식에는 유주생(流注生)과 상생(相生) 두 가지 생이 있으며,
유주주(流注住)와 상주(相住) 두 가지 주가 있으며,
유주멸(流注滅)과 상멸(相滅)두 가지 멸이 있다.’”
또 다른 『능가경』 계통의 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대혜여, 모든 식에는 두 가지 멸(滅)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상멸(相滅)이고
둘째는 상속멸(相續滅)이다.
두 가지 생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상생(相生)이고
둘째는 상속생(相續生)이다.
두 가지 주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상주(相住)이고
둘째는 상속주(相續住)이다.”
또 『대본능가계경(大本流楞伽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심식(心識)의 법에는 몇 가지 무상(無常)한 상(相)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첫 번째는 속박이 있는 미세한 식으로서, 상품번뇌를 가지며 생멸을 떠나지 않는다.
중간의 전(轉)은 속박이 있는 미세한 식으로서, 중품번뇌론 가지며 생멸을 떠나지 않는다.
멀리 전전하는 것은 속박이 있는 미세한 식으로서,하품 번뇌를 가지며 생멸을 떠나지 않는다.
거친 식을 두루 분별하면, 거울에 얼굴을 갖다 댈 때 거울과 얼굴이 분리되어 있듯 하며, 생멸을 떠나지 않는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의 세 가지 『능가계경』을 인용했는가?
거친 생멸과 미세한 생멸 두 가지의 차별된 특성을 밝히기 위함이다.
경에서는 명칭만을 밝혔을 뿐,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명보살은 마음과 상응하는지 상응하지 않는지를 분별해서
거칠고 미세한 두 가지 생멸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본론에서는 ‘다음으로 생멸상(生滅相)은 두 가지로 분별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거친 번뇌이니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미세한 번뇌이니 마음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표제와 해석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생멸상을 드러내는 문을 설하였다.
다음으로 생멸상에 따라 가설한 인물에게 배당하는 문을 설하겠다.
여기서 가설한 사람[假人]이란 세 가지를 말한다.
무엇이 세 가지 가설한 사람인가?
첫째는 물러남이 없는 범부고,
둘째는 부분적으로 청정을 얻은 자고,
셋째는 완전하게 청정을 얻은 자이다.
이상을 세 가지 가설한 사람이라 한다.
첫 번째 사람은 무엇과 상응함으로써 자신의 경계를 삼는가?
집상응염(執相應染)을 자신의 경계로 삼는다.
이것을 본론에서는‘한편 거친 가운데서도 가장 거친 것은 범부의 경계’라고 하였다.
두 번째 사람은 어떤 염심을 자신의 경계로 삼는가?
뒤의 두 가지 염심과 상응하고 앞의 두 가지 염심과는 상응하지 않으니,
업식(業識)의 일부를 자신의 경계로 삼는다. 이를 본론에서는,
‘거친 가운데서 미세한 것과 미세한 가운데서 거친 것은 보살의 경계’라고 하였다.
마지막 사람은 어떤 불상응염(不相應染)을 자신의 경계로 삼는가?
구합동상(俱合動相)의 일부와 독력업상(獨力業相) 전부를 자신의 경계로 삼는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미세한 가운데서도 가장 미세한 것은 부처님의 경계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생멸상에 따라 가설한 인물에게 배달하는 문을 설하였고,
이제부터는 거친 번뇌와 미세만 번뇌의 소의(所依)를 밝히는 문을 설하겠다.
여기서 시설하는 소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공통[通]되는 소의고,
둘째는 개별[別]적인 소의다.
공통적인 것에는 거친 생멸과 미세한 생멸 두 가지가 있으며,
모두 무명을 소의로 삼는다. 개별적인 것에도 두 가지 생멸이 있으며,
차례대로 각각 인과 연을 소의로 삼는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훈습에 의해 있게 되니,
인에 의지하고 연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인에 의지한다는 것은 불각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연에 의지한다는 것은 망령되이 경계를 지어낸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마하연론』의 문장은 어떤 경을 근거로 하였는가?
『능가경』을 근거로 하였다.
저 경에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가?
『능가경』 계통의 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불가사의한 훈습[熏]과 불가사의한 변이[異]는 현식(現識)의 인이 되며,
갖가지 번뇌[塵]와 시자 없는 때로부터의
망상에 의한 훈습은 분별사식(分別事識)의 인이 된다.”
또 『대본능가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또한, 분리되지 않은 염심[不離染心]의 인이란 정말로 불가사의한 훈습과
정말로 불가사의한 변이를 말한다.
한편 분리된 염심[分離染心]의 因이란 갖가지 물결을 일으키는 사나운 바람처럼
망상을 일으키는 현경식(現鏡識)을 말한다.” 그리하시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하셨다.
어떤 법을 불가사의한 훈습이라고 하는가?
다름 아닌 근본무명을 말한다.
무슨 의미에서 불가사의한 훈습이라고 하는가?
매우 깊은 이치를 남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매우 깊은가?
금강지(金剛地) 이하의 중생은 누구라도 이 경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사의한 훈습이라고 한다. 불가사의한 변이도 불가사의한 훈습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대본능가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말로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은 금강지 이상의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이제까지는 추번뇌와 세번뇌의 소의를 밝히는 문을 설했고, 다음으로
본각의 지혜로 번뇌를 대치하는 차례를 보여 주는 문을 설하겠다.
본각의 지혜는 근본무명을 시작으로, 멸상(滅相)을 끝으로 해서 순서에
따라 점차적으로 대치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끊어가는 데에는 무명을 버리지 않는 것으로써 끊음이 되는 것이지,
끊어버림으로써 끊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끊는다는 의미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번뇌심을 일어나지 않도록 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각의 지혜로 번뇌를 대치하는 차례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만일 인이 멸하면 연도 멸한다.
인이 멸했으므로 불상응심이 멸하고, 연이 멸했으므로 상응심이 멸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본각의 지혜로 번뇌를 대치하는 차례를 보여주는 문을 설했고,
다음으로 문답을 일으켜 의심을 풀어주는 문을 설하겠다.
두 가지 뜻에서 이 문을 시설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빠져나갈 곳을 막아버리는 문이고,
둘째는 해명을 통해 의심을 풀어주는 문이니,
본문의 문맥을 보면 알 것이다. 본각의 지혜가 근본무명을 끊을 때
세 가지 미세한 염심은 영원히 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세 가지 미세한 염심이 이미 없다면 여섯 가지 거친 염심도 일어날 수가 없다.
삼세(三細)와 육추(六麤)의 마음이 영원히 멸하여 일어나지 않으므로
본각의 성품 지혜도 그 자체로서 존립할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런가?
삼세육추의 마음에는 단지 무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각도 함께 하기
때문이며, 진(眞)과 망(妄)이 화합한 것을 두고 삼세육추의 마음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세육추의 마음이 멸한다면 말한다면 본각도 함께 없어져야 할 텐데,
어떻게 본각심이 상속하여 사정취(邪定聚)까지 이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본론에서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상속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물은 것이니,
이는 첫 번째 질문에 해당한다. 한편 본각은 끊어짐이 있는 법이 아니라
본래 구족한 공덕의 법이어서 끊임없이 항상 상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삼세육추의 마음이 영원히 멸하여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본론에서 ‘반면 상속한다면 어떻게 궁극적으로 멸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은 것이니, 이는 두 번째 질문에 해당한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문장들은 해명을 통해 의심을 풀어주는 대목인데 문맥에서 내용이
분명히 드러나므로 중복해서 해석하지 않겠다.
이제까지는 생멸상의 차별을 밝히는 부분을 설하였다. 이제부터는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서로 훈습하고 서로를 생함으로써 끊어짐이 없다는 이치를 밝히는 내용이다.
【論】 다음으로 네 가지 법으로 훈습(熏習)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염법과 정법이 일어나 끊어짐이 없다.무엇이 네 가지 법인가?
첫째는 정범이니, 진여를 말한다.
둘째는 모든 염법의 인(因)이니, 무명을 말한다.
셋째는 망심이니, 업식을 말한다.
넷째는 허망한 경계니, 육진(六塵)을 말한다.
훈습이란 무슨 뜻인가?
비유컨대 세간의 옷에는 실제로 아무 냄새도 없지만 어떤 사람이 향을 계속 쐬면[熏習] 향기가 생기는 것처럼,
훈습도 마찬가지다. 진여의 정법은 실제로 아무 더러움도 없지만 단지 무명에 의해 훈습뇌기 때문에 더러운
모습이 있게 된다. 무명의 염법은 실제로 아무런 정업(淨業)도 없지만 단지 진여에 의해 훈습되기 때문에 청정한 작용이 있게 된다.
어떻게 훈습해서 끊임없이 염법을 일으키는가?
진여의 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이 생기고,
무명이 있어서 염법의인(因)이 되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한다.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생기고,
망심이 있기 때문에 무명을 훈습해서 진여의 법을 깨닫지 못한다.
불각의 염이 망령된 경계를 일으키고 망령된 경계인 염법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망심을 훈습하여 그 염으로 하여금 집착하게 해서
갖가지 업을 지어 몸과 마음으로 모든 고통을 받게 한다.
망령된 경계의 훈습[妄境界熏習]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불어난 염에 의한 훈습[增長念熏習]이고,
둘째는 불어난 집착에 의한 훈습[增長取熏習]이다.
망심훈습(妄心熏習)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업식이 근본이 되어 일으키는 훈습[業識根本熏習]으로서,
아라한과 벽지불과 모든 보살에게 생멸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불어난 분별사식이 일으키는 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으로서,
범부로 하여금 업에 구속되어 고통을 받게 한다.
무명훈습(無明熏習)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훈습(根本熏習)으로서, 무명이 업식을 성취하는 공능을 가진다는 뜻이다.
둘째는 근본무명에 의해 일어난 견번뇌와 애번뇌의 훈습[所起見愛熏習]으로서,
무명이 분별사식을 성취하는 공능을 가진다는 뜻이다.
어떻게 훈습해서 끊임없이 정법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무명을 훈습하는 공능이 생기고,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망심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락을 싫어하여 열반을 기꺼이 구하게 한다.
이 망심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신의 성품에 대해 믿음을 가지며,
마음은 망령되이 요동하는 것이라서 앞의 경계란 없음을 알아서 멀리 떠나는 법을 닦게 한다.
앞의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갖가지 방편으로 진여에 수순(隨順)하는 법을 닦되
그것을 취(取)하지도 염(念)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해서 오랜 겁 동안 지속해 온 훈습력 때문에 무명이 즉시에 멸하고,
무명이 멸했기 때문에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도 따라서 멸한다.
인과 연이 다 멸했기 때문에 상응하는 염법도 남김없이 멸하니,
이런 것을 두고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성취했다고 한다.
망심훈습(妄心熏習)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다.
모든 범부와 이승 등은 분별사식으로 진여를 훈습함으로써 생사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서 능력에 따라 점차적으로 무상도(無上道)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다.
모든 보살은 분별사식으로 진여를 훈습함으로써 발심하여
용맹스럽게 열반을 향해 신속히 전진하기 때문이다.
진여훈습(眞如熏習)에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진여의 자체상에 의한 훈습[自體相熏習]이고,
둘째는 진여 지혜의 작용에 의한 훈습[用熏習]이다.
자체상에 의한 훈습이란 진여가 무시이래로 무루(無漏)의 성품을 갖추었다는 뜻이며,
용에 의한 훈습이란 진여가 불가사의한 업을 빠짐없이 갖추어 경계의 성품이 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며,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어
열반을 기꺼이 구하게 하며,
자신의 몸에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문】 만일 그런 이치라면 모든 중생에게 진여가 있어서 동등하게 훈습할 것인데,
어떻게 신심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등 전후로 무량하게 차별되는가?
당연히 일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아서 방편을 닦아 똑같이 열반에 들어야 하지 않는가?
【답】 진여는 본디 하나지만 한량없고 끝없는 무명이 있어서 본래부터
자성이 차별되어 두텁고 엷음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가 근본무명에 의지해서 차별을 일으킨다.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의 염(染)번뇌가 근본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킨다.
이러한 모든 번뇌는 무명에 의해 일어나 전후로 무량하게 차별된다.
이러한 뜻은 여래만이 아신다.
또한 모든 불법에는 인(因)과 연(緣)이 있어서 그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비유를 들어 보자.
나무속에 있는 불의 성품이 불의 근본적인 인[正因]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런 줄을 알지 못해서
방편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나무를 태울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중생도 마찬가지다.
비록 근본적인 인(因)이 되는 훈습력이 있다 해도 모든 불보살이나 선지식을 만나는 연(緣)이 없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어 열반에 든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반면 외연(外緣)의 힘이 있다 해도
내적인 정법(淨法)이 훈습력을 갖지 못한다면, 결국은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여 열반을 기꺼이 구할 수 없다.
인과 연이 구족하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스스로에게 훈습할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 등으로부터 자비와 원력[願]과 보호를 받아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선근(善根)을 닦고,
선근을 닦음으로써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이익을 주시고 같이
기쁘게 해 주심을만나 열반도로 땅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용훈습(用熏習)이란
중생이 만나는 외연(外緣)의 힘을 말한다.
이러한 외연에는 한량없는 뜻이 있으나 간략히 두 가지만을 말하겠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차별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연(平等緣)이다.
차별연이란 무엇인가?
이 사람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 등을 의지하여 처음으로 뜻을 일으켜 도를 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불과를 얻기까지, 수행하는 중간에 모든 불보살의 몸을 보기도 하고 공덕을 생각하기도 하며,
혹은 권속이나 부모ㆍ친척이 되기도 하고, 일 봐주는 사람이 되기도 하며, 친구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며 사섭(四攝)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아가 이제껏 지었던 무량한 모든
행연(行緣)으로 대비의 훈습력을 일으켜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을 자라게 하여 보거나 듣는 자에게
이익을 준다. 이런 의미에서 차별연이라 한다.
이 차별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가까운 연[近緣]이니, 빠르게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둘째는 먼 연[遠緣]이니, 오랜 시간에 걸쳐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이 가까운 연과 먼 연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수행을 불어나게 하는 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도를 받게 하는 연[受道緣]이다.
평등연이란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동체지(同體智)의 힘으로 일체 중생을 해탈시키고자 서원을 세워
본래적인 훈습으로 항상 그들을 놓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보고 듣는 바에 응해서 나타나
업을 보여주신다. 그런데 중생은 삼매(三昧)에 의지해야 비로소 모든 부처님을 평등하게 본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 연이라 한다.
이 자체에 의한 상훈습과 진여지혜의 작용에 의한 훈습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아직 상응하지 못한 경우[未相應]다.
범부와 이승과 처음 발심한 보살 등은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훈습하되
믿음의 힘에 의지하여 수행을 해 나가지만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이 체(體)와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재한 업으로 수행함이 용(用)과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미 상응한 경우[已相應]다.
법신보살(法身菩薩)은 무분별심을 얻었기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서 나오는 작용과 상응하며,
오직 법력에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함으로써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멸하기 때문이다.
한편 염법은 무시이래로 끊임없이 훈습하다가 불과를 얻은 즉시 끊기며,
정법훈습은 미래가 다할 때까지 끊기는 일이 없다. 무슨 뜻인가?
진여법은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멸하면 즉시 법신이 나타나 용훈습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끊어짐이 없다.
【釋】 위 글은 다섯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요점을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문[總標綱要門]이고,
둘째는 명칭을 건립하여 간략히 보여 주는 문[立名略示門]이며,
셋째는 훈습의 의미를 통틀어 해석하는 문[通釋熏習門]이고,
넷째는 훈습의 내용을 갈래지우면서 이런 저런 각도로 분석하는 문(分剖散說門)이며,
다섯째는 염정법의 멸진여부를 구별하는 문[盡不盡別門]이다.
첫 번째 문에는 여섯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상대적인 관계로 서로를 성립시켜 줌으로써 유사존재[似有]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모든 염법과 정법이 상대적으로 성립한 것이라서 독자적으로 건립되는 경우가 없음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이 문을 설하였다.
둘째는 성품이 본래적으로 없는 공한 것이라서 유(有)가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염법과 정법이 갖는 갖가지 명칭들은 본래 없는 것에다 방편으로 건립한 것이라서,
어느 것이나 예외 없이 자체로부터 유래된 명칭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설하였다.
셋째는 상대적인 관계로서로를 성립시켜 줌으로써 공을드러낸다는 뜻이다.
모든 염법과 정법은 서로를 마주보기[相觀] 때문에 본래부터
자체가 없고 자성이 공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설하였다.
넷째는 본래가 그런 것[自然]이고 허공처럼 막힘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법은 유(有)도 아니고 아니기 때문에 본래 그렇게 공이 되고,
애(礙)도 아니고 비애(非礙)도 아니기 때문에 항상
무장애(無障礙)가 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설하였다.
다섯째는 조작[作]과 비조작[非造] 양쪽 다 아닌 자연(自然)이라는 뜻이다.
모든 법은 유불(有佛)ㆍ무불(無佛≻이 서로를 훈습하고 서로를 생하여
끊일 때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하였다.
본래[法爾]적인 도리상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자성을 지키지 않아 어디든 머묾이 없다는 뜻이나,
모든 법이 연기다라니(緣起陀羅尼)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설하였다. 이러한 무량한 의미를 전체적으로 내건다는 뜻에서,
‘요점을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문’이라고 하였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다음으로 네 가지 법으로 훈습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염법과 정법이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는 요점을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문을 설하였고,
이제부터는 명칭을 건립하여 간략히 보여 주는 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두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진실하고 청정한 법의 상을 밝힌 문[眞淨法相門]이고,
둘째는 망령되고 오염된 법의 상을 밝힌 문[妄染法相門]이다.
진실하다는 말은 자성이 청정한 본각이 담고 있는 지혜를 뜻하며,
망령되다는 말은 체상에서 떨어져 나온 본상무명(本上無明)을 뜻한다.
오염된 망법을 설한 문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무명(無明),
둘째는 업식(業識),
셋째는 경계(境界)다.
하나의 진실과 세 가지 망령됨, 이 네 가지 법이 훈습이라는 일을 만들어 낸다.
본래대로의 숫자와 명칭 중에 여기서는 첫 번째와 마지막 것을 제시하여
가운데 것까지 포함시켰으니,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염법에는 예외 없이 훈습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무엇이 네 가지 법인가?
첫째는 정법이니, 진여를 말한다.
둘째는 모든 염법의 인(因)이니, 무명을 말한다.
셋째는 망심이니, 업식을 말한다.
넷째는 허망한 경계니, 육진(六塵)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는 명칭을 건립하여 간략히 보여 주는 문을 설하였고,
다음으로 훈습의 의미를 통틀어 해석한 문을 설하겠다.
이 문도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비량을 통해 비유를 들어 훌륭하게 방편을 시설하는 문[比量譬喩善巧門]이고,
둘째는 비유를 법에 맞추어 내용을 확정하는 문[法喩合說安立門]이다.
비량을 통해 비유를 들어 훌륭하게 방편을 시설하는 문이란 어떤 것인가?
비유를 들어보자. 옷은 본래 좋은 냄새도 나쁜 냄새도 전혀 없지만
어떤 사람들이 반다가야사차제오(班多伽耶娑叉提鄔) 숲에 들어가면
회말야제(會末耶提) 냄새를 쏘이기[熏習] 때문에 나쁜 냄새가 난다.
반면, 범단지다나(梵檀只多那) 숲에 들어가면 타마건다(陀摩鍵多)
냄새를 쐬기 때문에 좋은 향기가 난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비유컨대 세간의 옷에는 실제로 아무 냄새도 없지만
어떤 사람이 향을 계속 쐬면 향기가 생기는 것처럼’이라고 하였다.
비유를 법에 맞추어 내용을 확정하는 문이란 어떤 것인가?
승의(勝義)의 도리도 이 비유와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즉, 자성이 청정한 무루성품의 덕은 무시이래로 전적으로 밝고 흰색처럼 깨끗하여
때 묻은 적도 없고 흑색도 없고 오염된 바도 없지만 무명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때와 흑색이 있게 된다. 반면 무명장(無明藏)의 바다는 무시이래로 전적으로 감감한 흑색이라서
지혜에서 나오는 밝음도 없고 깨끗한 성품도 없지만 본각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청정한 작용이 있게 된다.
이렇게 염법과 정법은 임시로 성립한 것에 불과하니,
염법은 실제 염법이 아니고 정법도 실제 정법이 아니다.
모두 요술에 의해 만들어진 허깨비 같은 것이라서 실다운 자성이 없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훈습도 마찬가지다.
진여의 정법은 실제로 아무 더러움도 없지만 단지 무명에 의해 훈습되기 때문에
더러운 모습이 있게 된다.
무명의 염법은 실제로 아무런 정업(淨業)도 없지만 단지
진여에 의해 훈습되기 때문에 청정한 작용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훈습을 통틀어 해석하는 문을 설했고, 다음으로 훈습의
내용을 갈래 지우면서 이런 저런 각도로 분석하는 문을 설하겠다.
이 문은 네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흑품이 서로 훈습하므로 세력을 갖는 문[黑品相熏有力門]이고,
둘째는 백품이 서로 훈습함으로써 세력을 갖는 문[白品相熏有力門]이고,
셋째는 문답을 일으켜 의심을 풀어 주는 문[發起問答決疑門]이고,
넷째는 연(緣)을 제시해서 자세히 설하여 해명하는문[擧緣廣說開通門]이다.
첫 번째 문은 두 가지로 되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전체적인 질문과 전체적인 답을 시설하여 주장하려는 내용을 밝히는 문[摠問摠答顯宗門]이고,
둘째는 전체적인 내용으로 귀결시키면서 개별적인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는 문[歸摠作別散說門]이다.
두 번째 문도 두 가지로 되어 있으니 잘 관찰해야 한다.
네 번째 문도 두 가지로 되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훈습이 궤도처럼 일정한 법칙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문[摠標軌則決定門]이고,
둘째는 인연을 각각 밝혀서 이해를 돕는 문[因緣各示生解門]이다.
이러한 차례로 설하고 있음을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즉,‘어떻게 훈습해서 끊임없이 염법을 일으키는가?’라고 한 구절은 전체적인 내용에 관련된 질문이니,
모든 흑품이 서로 훈습하고 서로 생하게 하여 끊어짐이 없는 이치를 전체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이 아래로 이어지는 문장들은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대답이다. 답한 부분을 놓고 본다면,
청정하고 묘한 여래장[淨妙藏]으로부터 추중(麤重)한 염심에 이르기까지 근본을 등지고 지말을 향해
점차적으로 세력을 화장해 가는 차례를 설한 것이니, 설한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근본무명은 스스로 존립할 능력이 없으므로 마땅히 진여에 의지해야 바야흐로 의지처를 얻을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의 성품은
지극[至]하고
진실[實]하여
만물[部]의
의지처[主]가 되는 허공계와 같아서 ,
장애와 무장애 모두에게 귀의처가 되어 장애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본론에서는 ‘진여의 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이 생기고’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명은 자신의 처소를 얻은 뒤에는 기력(氣力)이 점점 더 세지고 공능이 자재해져
진여를 훈습함으로써 망법을 지어내 불명료한 상과 어둡고 둔한 작용을 불려나간다.
이는 애정을 끊지 못한 아비가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낳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을 본론에서는‘무명이 있어서 염법의 인(因)이 되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한다.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생기고’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미세한 업식의 망심은 무명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자체가 생한 뒤에는 거꾸로 무명을 훈습하여 자신을 불려나가는 것이, 마치 자식이 낳아준 부모를 봉양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훈습하는 힘이 더욱 불어나므로 평등한 이치 그대로인 원만한 일심을 통달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전식(轉識)의 미혹한 염을 일으키고 현상(現相)의 망령된 경계를 생하여 생사의 바다는 더욱 깊어지고 열반의 언덕은 더욱 높아진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망심이 있기 때문에 무명을 훈습해서 진여의 법을 깨닫지 못한다. 불각의 염이 망령된 경계를 일으키고’라고 하였다. 이렇게 경계의 바람은 이제 거꾸로 현식의 바다를 훈습하고 칠식의 물결을 일으킨다.
이 식은 경계의 티끌을 즐겨 집착하고 저 경계는 식안(識眼)을 향해 면전에 선다. 그럼으로써 갖가지 악업을 두루 짓고 모든 괴로운 과보를 빠짐없이 받아 삼계[三有]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며, 사독(四毒)의 도적은 물결처럼 일어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경계인 염법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망심을 훈습하여 그 염으로 하여금 집작하게 해서 갖가지 업을 지어 몸과 마음으로 모든 고통을 받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전체적인 질문과 전체적인 답을 시설하여 주장하려는 내용을 밝히는 문[摠問摠答顯宗門]을 설하였고, 이제부터는 전체적인 내용으로 귀결시키면서 개별적인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는 문[歸摠作別散說門]을
설하겠다.
이 문은 세 가지 문으로 되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경계(境界)이고,
둘째는 망심(妄心)이며,
셋째는 무명(無明)이다. 이를 세 가지라 한다.
이 세 가지에 각각 두 가지가 있어 여섯 가지가 된다. 그것은 순서대로 처음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 것이 처음 것이 되는 식으로 점차적으로 드러난다. 첫 번째는 어떤 내용인가?
이 망령된 경계에 여실하게 훈습하는 작용력이 있기 때문에 법집(法執)의 염을 불려 나간다.
이러한 훈습력이 있기 때문에 인집(人執)의 집착을 불려 나간다.
인집과 법집 두 가지가 갖추어져 일어나기 때문에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의 종류가 모두 일어난다. 이것을 일컬어 경계훈습(境界熏習)이라고 한다.
이를 본론에서는, ‘망령된 경계의 훈습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불어난 염에 의한 훈습이고,
둘째는 불어난 집착에 의한 훈습이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어떤 내용인가?
업식망심(業識妄心)에 가장 세력이 강한 훈습력이 있기 때문에 이미 벗어난
삼승(三乘)의 성인으로 하여금 미세한 변역(變易)의 괴로움을 받게 하며,
하열한 훈습력이 있기 때문에 아직 벗어나지 못한
모든 범부로 하여금 거친 분단(分段)의 괴로움을 받게 한다.
이런 이유에서 망심훈습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망심훈습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업식이 근본이 되어 일으키는 훈습[業識根本熏習]으로서,
아라한과 벽지불과 모든 보살에게 생멸의 고통을 받게 한다’라고 하였다.
마지막은 어떤 내용인가?
무명주지(無明住地) 자체의 근본이기 때문에
첫 번째 것과 마지막 것을 훈습함으로써 성취를 얻게 하며,
빠짐없이 통달함으로써 분별사식을 훈습하여 성취하게 한다.
무슨 이유로 처음과 끝만을 언급하고 중간은 말하지 않는가?
두 가지 의도에서 그렇게 하였다.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유(有)를 성취한다는 뜻이고,
둘째는 공(空)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유를 성취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주변의 유[邊有]를 제시함으로써
중간의 유[中有]를 드러내기 때문에 유를 성취한다고 한다.
공을 성취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중간의 공무(空無)를 제시함으로써 주변의 공을 드러내기 때문에 공을 성취한다고 한다.
어떻게 때서 마지막 이치[後義]가 성립하는가?
경에서 그렇게 설하기 때문이다. 어느 경에서 설하고 있는가?
『훈습경(熏習經)』에서 설한다.
그 경에서 어떻게 설하고 있는가?
『훈습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전식(轉識)과 현식(現識)과 말나(末那) 이 세 가지 식은
무명으로부터 성취된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근본무명은 주변적인 성취[邊成就]만 있을 뿐, 중심적인 성취[中成就]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이치란 저 『훈습경』을 직접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치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무명훈습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훈습으로서, 무명이 업식을 성취하는 공능을 가진다는 뜻이다.
둘째는 근본무명에 의해 일어난 견번뇌와 애번뇌의 훈습으로서,
무명이 분별사식을 성취하는 공능을 가진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는 흑품(黑品)이 서로 훈습함으로써 세력을 갖는 문을 설했고,
다음으로 백품(白品)이 서로 훈습함으로써 세력을 갖는 문에 대해 설하겠다.
‘어떻게 훈습해서 끊임없이 정법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라는 구절은 전체적인 질문에 해당한다. 즉, 모든 백품의 법이 서로를 훈습하고
서로를 생하면서 단절되지 않게 한다는 이지를 통괄해서 물은 것이다.
이 아래로 이어지는 문장들은 그에 대해 전체적으로 답하는 부분이다.
답의 내용을 살펴보면 훈습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무엇이 두 가지 훈습인가?
첫째는 무시이래로 있어 온 본래적인 훈습[無始自然熏]이고
둘째는 어느 시점부터 건립되는 훈습[始有建立熏]이다.
무시훈(無始熏)이란 백품의 법이 무시이래로 인과 과 두 가지 분위(分位)를 갖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며,
시유훈(始有熏)이란 백품의 법이 수행력을 바탕으로 해서 인과 과 두 가지 분위를 갖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다.
근본인과는 어떤 양상을 갖는가?
무시이래로 삼현과 십성의 지위를 가지며,
삼신(三身)과 사덕(四德)의 과를 갖기 때문에‘본래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시유인과는 어떤 양상을 갖는가?
이제부터라는 시점을 가지고 수행을 해야 비로소 무시(無始)의 십지(十地)를 획득하여
본유의 인과를 드러내기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라는 표현을 쓴다.
근본인과는 어떤 차례를 갖는가?
무시이래로 열 가지 본각의 진실한 지혜와 열 가지 여실한 법계를 갖기
때문에 열 가지 지말무명을 훈습하며, 한 가지 법계의 마음을 갖기 때문에 근본무명을 훈습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지(本地)’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진여 법이 있기 때문에무명을 훈습하는 공능이 생기고’라고 하였다.
시유인과는 어떤 차례를 갖는가?
아직 십신(十信)의 지위를 얻지는 못했지만 본래적인 훈습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고 죽는 괴로움을 싫어하여 연반의 즐거움을 즉시 구하게 된다.
이러한 힘이 있기 때문에 진여의성품을 훈습하여자신에게 불성이 있음을믿고서
십신의 지위에 들고, 마음이 허망함을 알아서십해(十解)의 지위에 들며,
경계가 공한 줄을 알아서십행(十行)의 지위에 든다. 벗어나 향상하는 법을 닦아서
십향(十向)의 지위에 들고, 여실한 반야로 경계가 공한 줄을 알아서
무량한 방편으로 법계의 성품을 수순하는 행을 일으키되 열반을 취하지도 않고
생사를 생각하지도 않음으로써 극희지(極喜地:十地初)에 든다.
이렇게 해서 금강지(金剛地)에 이르면, 아주 오래전부터 익혀온
훈습력 때문에 해탈도(解脫道)를 일으켜 무명이 단번에 끊어진다.
근본무명이 다했기 때문에지말무명도 존립할 수 없다.
근본과 지말의 흑품(黑品)이 자기 처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법신의 열반을 얻고 응화신의 업용(業用)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시지(始地)’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망심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락을 싫어하여 열반을 기꺼이 구하게 한다.
이 망심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신의 성품에 대해 믿음을 가지며,
마음은 망령되이 요동하는 것이라서 앞의 경계란 없음을 알아서 멀리 떠나는 법을 닦게 한다.
앞의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갖가지 방편으로 진여에 수순하는 법을 닦되
그것을 취(取)하지도 염(念)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해서 오랜 겁 동안 지속해 온 훈습력 때문에
무명이 즉시에 멸하고, 무명이 멸했기 때문에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도 따라서 멸한다.
인과 연이 다 멸했기 때문에 상응하는 염법도 남김없이 멸하니,
이런 것을 두고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성취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는 전체적인 질문과 전체적인 답을 시설하여 주장하려는 내용을 밝히는 문[摠門摠答顯宗門]을 설했고, 이제부터는 전체적인 내용으로 귀결시키면서 개별적인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는 문[歸摠作別散說門]을
설하겠다.
이 부분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망염(妄染)훈습문이고,
둘째는 정법(淨法)훈습문이다.
염법훈습문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거친 훈습이고,
둘째는 미세한 훈습이다.
거칠다는 것은 의식(意識)의 훈습을 말하고,
미세하다는 것은 열한 가지 말나(末那)의 훈습을 말한다.
의식의 훈습은 어떤 양상을 갖는가?
사십 가지 마음을 갖는 범부와 모든 이승들은 의식 가운데 있는 본각의
지분(智分)으로 의식 가운데 있는 무명의 치분(癡分)을 훈습하여,
나고 죽는 괴로움에 염증을 느끼고 열반의 즐거움을 기꺼이 구함으로써
점점 더 망상하여 불도를 향해간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망심훈습(妄心熏習)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다.
모든 범부와 이승 등은 분별사식으로 진여를 훈습함으로써 생사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서
능력에 따라 점차적으로 무상도(無上道)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열한 가지 말나의 훈습은 어떤 양상을 갖는가?
처음 성인의 지위를 획득한 때부터 금강지에 이르기까지 획득하는 지위의 차례대로
청정한 부분을 가지고 염오된 부분을 훈습하여 위없는 보리도에 깨달아 들어간다.
보살 등이 무명을 끊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다.
모든 보살은 분별시식으로 진여를 훈습함으로써
발심하여 용맹스럽게 열반을 향해 신속히 전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는 망염훈습문을 설했고, 다음으로 정법훈습문을 설명한 내용이 다.
이 문을 살펴보면, 두 가지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전체적으로 표제를 내거는 문[摠標門]이고,
둘째는 펼쳐서 해석하는 문[開釋門]이다.
총표문에서는 명칭을 전체적으로 제시한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진여훈습(眞如熏習)에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진여의 자체상에 의한 훈습[自體相熏習]이고,
둘째는 진여 지혜의 직용에 의한 훈습[用熏習]이다’라고 하였다.
개석문은 두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신이 갖는 본래적인 훈습을 밝히는 문[法身自然熏習門]이고,
둘째는 응화신이 갖는 항상적인 훈습을 밝히는 문[應化常恒熏習門]이다.
법신훈습문이란 본각의 성품 지혜가 무시이래로 공덕이 원만하고 지혜가
구속하여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여 자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서, 여기에
다른 힘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자체상훈습이란 진여가 무시이래로 무루(無漏)의 성품을 갖추었다는 뜻이며’라고 하였다.
응화훈습문이란 이러한 본각이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한 갖가지 업용을 일으켜
모든 중생의 갖가지 심상(心相)을 따라 거기에 맞게 응해서 교화하여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닦아 인이 되는
백 가지 행을 갖추고 만 가지 덕의 과를 채우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용훈습이란 진여가 불가사의한 업을 빠짐없이 갖추어 경계의 성품이 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두 가지 문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항상 훈습하여
믿음을 일으키고 이해를 내게 하며, 수행을 건립하여 퇴전하지 않도록 조작한다.
그리하여 정체지[正]와 후득지[後]에 의해 얻어진 두 가지 지위에 이르러 진속(眞俗)의 경계를
통달하여 걸림이 없게 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이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며,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어 열반을 기꺼이 구하게 하며,
자신의 몸에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치로 말미암아, 삼신(三身)이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이치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제까지는 백품(白品)이 서로 훈습함으로써 세력을 갖는 문을 설명했고,
다음으로 문답을 일으켜 의심을 풀어 주는 문을 설하겠다.
의심을 풀어 주는 이 문에서 설하는 이치는 매우 어려워서 문장만 보아서는 더욱 막힐 뿐이다.
해석을 붙여서 이런 저런 각도에서 설명하지 않는다면 삼매를 통해 통달한 이가 아닌 다음에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갖가지 해석을 내려서 빠짐없이 보여줌으로써 수행자의 마음을
깨우쳐 주려 하는 것이다. 문답한 내용을 순서에 따라서 잘 관찰해야 한다.
중생은 누구나 본각(本覺)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중생의 무리에 속하면서 본각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 두 가지가 다 맞는 이치다. 어째서 그런가?
크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무슨 뜻인가?
모든 중생은 무시이래로 본각을 갖추고 있으며,
무시이래로 본각이 없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앞의 구절에 의거한다면, 모든 중생이 본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본각은 체(體)는 하나뿐이지만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여 각각의 중생이 개별적인 각(覺)을 갖는다.
모든 중생은 하나의 각을 가질 뿐이다. 다른 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본각이 하나이기
때문에 중생도 하나만 있어야 할 것이며, 중생이 많기 때문에 본각도 하나여서는 안 되지 않은가?
이 문제는 그렇지가 않다. 어째서 그런가?말하려는 취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각심은 평등한 성품이기 때문에 종류가 달라질 수 없고,
모든 중생은 성품이 차별되기 때문에 종류가 같아질 수 없다.
종류가 달라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가 되고,
종류가 같아질 수 없기 때문에 많은 것이 된다.
그렇게 말한다면, 아래 문장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마명존자는 『대종지현문본론(大宗地玄文本論)』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마치 빈 하늘에 수레바퀴 같은 청정한 보름달이
두 몸체 없이 오직 하나로 천 개의 그릇에 빠짐없이 나타나듯
본각(本覺)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체 없이 오직 하나로
모든 중생의 갖가지 심상(心相) 가운데 빠짐없이 있다네.
그러다가 마치 한 덩이 구름이 수레바퀴 같은 저 보름달을 덮어버리면
천 개의 그릇에 있는 둥근 달도 모두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다네.
무명(無明)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체 없이 오직 하나로
모든 중생에게 빠짐없이 이르러 훈습의 일을 만들어낸다네.
두 가지 측면[義]을 갖기 때문에 모순을 빚는 오류는 없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자신이 주장하는 종지를 들어 해명하는 부분[自宗決定]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들을 섭수하기 위해 해명하는 부분[引攝決定]이다.
자종결정이란 동일하게 상속(相續)한다는 측면을 밝히기 위함이고,
인섭결정이란 차별을 갖고 상속한다는 측면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현문론(玄文論)』의 문장들은 이 중에
첫 번째 뜻을 밝히기 위한 것이고,
『기신론(起信論)』의 문장은 뒤의 뜻을 밝히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모순을 빚는 오류는 없다.
그러므로 마명존자가 『허공지지론(虛空地地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유컨대 연꽃잎으로 한 그릇에 비친 둥근 달을 가린다 해도
나머지 그릇에 비친 둥근 달은 결코 숨지 않고 나타나듯이
마찬가지로 무명이 미혹한 이의 각(覺)을 가리고 있을 때도
이미 깨달은 이의 본각은 결코 숨거나 가리어지지 않는다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차별되게 상속한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다.
또 『문수사리논의제일신력수승자비원만허공공덕계경
(文殊師利論議第一神力殊勝慈悲圓滿虛空功德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한량없고 끝없는 무명전뇌의 장애가 있어
모든 중생의 몸에 빠짐없이 이르러 막히고 걸리는 일을 만들어 낸다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위 경문을 인용하는가?
정진수행하는 이치를 밝히기 위해서다. 어떻게 밝히는가?
어떤 중생은 “무명의 체(體)가 한 종류뿐인데 그것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다면,
무명은 하나고 중생은 많아서 끊어 없애기가 쉬울 텐데 무엇 하러 수고스럽게
수행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소지가 있다.
세간의 사례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일을 이루어 내는 경우,
그것을 어렵게 여기는 마음이 부족하여 부지런히 닦지 않는다.
이렇게 게으르고 어리석은 중생들의 병을 고쳐 주기 위해서 여래께서는
“한량없고 끝없는 무명이 있어서 그것이 불성을 덮어 가린다”고 하셨다.
이렇게 보건대, 무명이 하나뿐이라는 이치가 성립한다.
그렇다면 한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 나머지 모든 중생의 번뇌도 다 없어져야 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무명이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한 사람의 무명이 끊길 때 나머지 사람이 무명을 끊을 수 없다면,
동일한 무명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 외에도 중생계가 단절되는 오류를 빚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그렇지가 않다.
무명은 비록 하나뿐이지만 상속(相續)하는 양상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그 양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컨대 하나뿐인 밤의 어둠이 열 개의 방을 다 어둡게 하지만
하나의 방에 어둠이 가실 때 나머지 방도 어둠이 가신다고는 할 수 없네.
【釋】 밤의 어둠은 하나지만 열 개의 방을 다 어둡게 한다. 그러므로
어둠도 하나고 방도 하나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고,
그렇다고 방도 열 개고 어둠도 열 개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다.
하나의 방에서 어떤 사람이 밝은 등을 가지고 방을 비추어 어둠이 남김없이 멸하고
완전한 밝음이 방 하나에 가득 비출 때,
그 방의 어둠이 남김없이 멸한다 해서 아홉 방의 어둠도 남김없이 멸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머지 아홉 방의 어둠은 멸하지 않고 남아 있다.
그러나 등을 가지고 방 하나를 비추었는데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투명번뇌도 이와 마찬가지다.
여기서 밤의 어둠이란 무명을 비유하고,
열 개의 방이란 중생의 몸을 비유하며, 밝은 등이란 지혜를 비유한다.
그러므로 무명은 하나지만 그것이 상속하는 양상이 차별되기 때문에 끊었느냐 끊지 못했느냐에
있어서 각각 다름을 알아야 한다. 만일 한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 나머지 중생이 번뇌를 끊지 못한다면,
번뇌를 다 끊지못한 중생의 몸 가운데있는 본각불성은 무명에 덮인것이고,
이미 번뇌를 다 끊은 중생의 몸 가운데 있는 본각불성은 무명에 덮인 데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를 벗어났느냐 장애에 덮였느냐가 천지차이로 벌어지는데, 어째서 여기서는
동일한 불성이라서 자신의 체(體)를 나누지 않고도 모든 중생에게 두루한다고 말하는가?
본각불성은 허공계와 동등하여 어디든 없는 데가 없고 어디든 이르지 않는 데가 없으며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해당하지 않는 곳 없이, 절대 평등한 한 맛이며 한 모습으로서
아무런 차별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무명장(無明藏) 가운데 있는 본각불성은 염법에 덮이고
가리어져 있으며 법계를 벗어난 본각불성은 덮임과 가리움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모두 반연(攀緣)에 의해 사려하고 아는 마음의 현량경계(現量境界)이지 자성 가운데
실다운 이치의 마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성의 이치는 오직 한 종류로서 차별없이 동등하다.
이런 뜻에서 마명존자는 『대종지현문본론(大宗地玄文本論)』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천 개의 그릇에 나타나는 둥근 달 더러운 물이 담긴 그릇이라면
나타나기는 하되 분명치 않고 깨끗한 물이 담긴 그릇이라면
명료하게 완전히 나타난다네. 어둡고 밝음은 같지 않으나
수레바퀴 같은 보름달은 하나뿐이듯 본각도 그러하다네.
모든 중생은 무시이래로 본각을 가지며 본각에서 떠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중생들 중에는 먼저 성불하는 이가 있고 나중에 성불하는 이가
있으며, 부지런히 수행하는 이도 있고 수행하지 않는 이도 있으며,
총명한 이도 있고 둔한 이도 있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차별을 보이는가?
똑같이 하나의 각(覺)을 가져서 다 같이 동시에 발심하고 수행하여 무상도(無上道)에 도달하나
본각불성에 강약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이 생기며, 무명번뇌에 두텁고 엷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차별이 생긴다. 그런데 처음과 같이 말한다면, 사실이 그렇지가 않다. 어째서 그런가?
본각불성은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추어
늘어날 것도 줄어들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뒤와 같이 말한다면,
사실이 그렇지가 않다. 어째서 그런가?
근본무명을 하나의 지(地:見一處住地)에서 한꺼번에 끊는다는 이치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러한 갖가지 차별이 모두 무명에 의해 지탱된다는 말은,
지극한 이치에서 본다면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수행자는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닦아
십지(十地)를 넘어서 무상지(無上地)에 이르러 삼신(三身)과 사덕(四德)을 원만히 구족하는데,
이러한 수행자는 명(明)의 분위를 갖는가, 아니면 무명(無明)의 분위를 갖는가?
이러한 행자는 무명의 분위이며, 명의 분위가 아니다.
그렇다면 청정본각은 무시이래로 수행에 매이지도 않으며 남의 힘을 빌어 얻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성품의 덕이 원만하고 본래적인 지혜가 구족해 있어 사구(四句)를 벗어났고 오변(五邊)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에서는 오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체법은 인연으로부터 생한 것이기에 작자(作者)가 없다.
그러므로 짓는 시점에 머묾이 없어서 자성이 없다.
따라서 분별지(分別智)로는 제법을 요달할 수 없다.
법성은 이와 같이 집착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와 이승은 제법이 생할 때에 있다[有]고 집착한다.
그러나 인연에 의해 생한 법은 그 성품이 유(有)를 떠난 것이다.
유를 떠난 법을 두고 유라고 우기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기 때문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덧붙이는 오류[增益謗]’라 한다.
유로 보는 견해가 이미 오류임이 증명되었으므로 무(無)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인연에 의해 생한 법은 성품이 비록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기법이 현실적으로
눈앞에 나타나므로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범부와 이승은 이 없지도 않은 법을 두고 없다라고
우기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기 때문에 ‘없지 않은 것을 없는 것으로 덜어내는 오류[損減謗]’라 한다.
유로 보는 견해와 무로 보는 견해가 이미 오류임이 증명되었으므로
유이면서 동시에 무로 보는 것[亦有亦無]이합당하지 않을까?
인연은 하나의 법으로서 그 성품이 모순을 가질 수 없다. 모순되지 않는 법이 인연법인데,
지금 유인 동시에 무라고 한다면 모순된다. 모순되는 법은 인연법이 아니다.
인연법이 아닌 것을 가지고 인연법이라고 우기는 꼴이 되므로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오류[相違謗]’라 한다.
역유역무로 보는 것이 오류임이 밝혀졌다면 비유비무(非有非無)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지금 인연법을 가지고 도리를 논하는데, 비유비무라고 한다면 인연법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그렇게 해서는 도리를 논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단순히 제법을 장난거리로 여기는 짓이 되므로
‘법을 희롱하는 오류[戱論謗]’라 한다.(通玄鈔 卷3, 卍續藏經 73, 237상)을 벗어났다.
자연(自然)이라는 말에는 자연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고
청정한 마음은 청정하게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끊기고 모든 것에서 떠났다.
이러한 본처(本處)는 명의 분위를 갖는가, 아니면 무명의 분위를 갖는가?
이러한 본처는 무명의 영역이지 명의 분위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일법계심은 백 가지 부정도 부정하고 천 가지 긍정에도 등을 돌렸으며,
중(中)도 아니고 비중(非中)도 아니며,
천(天)도 등지고 비천(非天)도 등졌다.
물 흐르는 듯한 담론도 발길을 끊어 멈추고,
살피고 사려하는 헤아림도 손을 놓고 머문다.
이러한 일심은 명의 분위를 갖는가, 아니면 무명의 분위를 갖는가?
이러한 일심은 무명의 영역이지 명의 분위가 아니나.
삼자일심(三自一心)의 마하연법에서는
하나가 하나가 될 수 없어 능(能)을 빌어 하나로 들어가고,
마음은 마음이 될 수 없어 능을 빌어 마음으로 들어간다.
실제로 나[我]라는 명칭이 아닌데다가 나라는 명목을 부여란 것이며,
스스로[自]라고 칭하지 않는데도 자신에 계합한다.
나[我]와 같은데다가 명칭을 건립하나 실다운 내가 아니고,
자(自)와 같은 것을 두고 자라고 칭하나 실다운 자가 아니다.
이는 더없이 오묘하고 더없이 심원하다.
이렇게 수승한 경계는 명의 분위를 갖는가, 아니면 무명의 분위를 갖는가?
이렇게 수승한 경계는 무명의 영역이지 명의 분위가 아니다.
둘이 아닌[不二] 마하연법은 오직 불이의 마하연법일 뿐이다.
이러한 불이의 마하연법은 명의 분위를 갖는가, 아니면 무명의 분위를 갖는가?
이제까지는 중생이 본각을 가졌다는 뜻[有覺門]을 설했고,
다음으로 중생이 본각을 갖지 못했다는 뜻[無覺門]을 설하겠다.
어째서 모든 중생은 본각을 가진 적이 없는가?
본각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본각이 없는가?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중생이 없는가?
근거[所依]가 되는 본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문을 전체적으로 자세하게 통달해야 한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문】 만일 그런 이치라면 모든 중생에게 진여가 있어서 동등하게 훈습할 것인데,
어떻게 신심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등 전후로 무량하게 차별되는가?
당연히 일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아서 방편을 닦아 똑같이 열반에 들어야 하지 않는가?
【답】 진여는 본디 하나지만 한량없고 끝없는 무명이 있어서 본래부터
자성이 차별되어 두텁고 엷음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가 근본무명에 의지해서 차별을 일으킨다.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의 염(染)번뇌가 근본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킨다. 이러한 모든 번뇌는 무명에 의해 일어나 전후로 무량하게
차별된다. 이러한 뜻은 여래만이 아신다’라고 말하였다.
이제까지는 문답을 일으켜 의심을 풀어주는 문[發起問答決疑門]을 설했고,
다음으로 연을 제시해서 자세히 해명하는 문[擧緣廣說開通門]을 설하겠다.
이 문은 두 문으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일정한 법칙을 전체적으로 제시하여 필연의 이치를 설하는 문[摠標軌則決定門]이고,
둘째는 연의 상을 여러 각도로 보여줌으로써 이해를 돕는 문[緣相散示生解門]이다.
첫 번째 문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법의 체를 설한 부분[法體說]이고,
둘째는 비유를 드는 부분[譬喩說]이고,
셋째는 법체와 비유를 배대하는 부분[契合說]이다.
모든 불법에는 인(因)과 연(緣)이 있어서 인과 연이 다 갖추어져야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 법설이다.
모든 불법은 자체적으로 건립되는 경우는 없으며 반드시 인연에 의지한다. 어째서 그런가?
법이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인(因)이란 본각성품의 종자를 말하며,
연(緣)이란 방편의 작용과 실제의 작용이 차별됨을 말한다.
이 두 가지 때문에 모든 법이 성립하니, 잘 관찰해야 한다. 이상이 법설이고,
다음은 비유설에 대한 설명이다.나무속에 있는 불의 성품이 불의 근본적인
원인[正因]인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모르고서 방편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나무를 태울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비유설이다. 위 사례에는 네 가지 비유가 나온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나무,
둘째는 불,
셋째는 사람,
넷째는 불태우는 작용이다.
여기서 나무는 염법(染法)을 비유하고,
불은 지혜,
사람은 중생,
불태우는 작용은 대치(對治)를 비유한다.
이 중에서 첫 번째인 나무의 비유는 어떤 의도에서 든 것인가?
아리라다암시(阿梨羅多掩尸) 나무를 예로 들면, 이 나무는 다섯 가지 특성을 갖는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아무것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뿌리가 깊고 견고하다는 특성이다.
둘째는 줄기와 꽃과 잎사귀와 열매가 날카로운 가시를 생한다는 특성이다.
셋째는 냄새가 지극히 나쁘다는 특성이다.
넷째는 독충이 붙기 좋아한다는 특성이다.
다섯째는 권속이 한없이 많다는 특성이다. 이상이 다섯 가지다.
무명의 염법도 마찬가지다. 근본무명은 아무것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매우 깊고 넓기 때문이며, 갖가지 모든 지말불각은 미혹의 과실이 한량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인 불의 비유는 어떤 의도에서 든 것인가?
나무속에 잠재되어 있는 불기운은 일곱 가지 특성을 갖는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첫째는 말려 죽인다는 특성이니, 나무속의 불기운이 나무를 말려서 결국에는 죽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잠재된 불기운이 나무를 나게 하고 자라게 만다는 특성이니,
차가운 기운을 막아서 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헤아릴 수 없다는 특성이니,그 불기운이 어디에 있는지 처소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는 은밀하게 간직한다는 특성이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밖으로 나타난다는 특성이니, 불꽃을 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유(有)를 따른다는 특성이니,나무가 있으면 불도 따라서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무(無)를 따른다는 특성이니,나무가 없으면 불도 따라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이 일곱 가지다.
본각반야(本覺般若)도 마찬가지다.
염법을 훈습함으로부터 완전히 소멸함에 이르기 때문이며,
훈습을 받아서 유전(流轉)하기 때문이며,
머무는 처소가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며,
무명장(無明藏) 가운데서는 은밀하게 숨고 없어지기 때문이며,
남김없이 구족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며,
염법의 유무를 따라서 본각의 유무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인 사람의 비유는 어떤 의도에서 든 것인가?
가설된 사람[街人]에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파라리다제(婆羅利多提) 가인이고,
둘째는 나시아다라(那尸阿多羅)가인이다.
첫 번째 사람은 다섯 가지 일을 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불을 내는 나무를 아는 것이고,
둘째는 찬전목(鑽轉木)을 아는 것이고,
셋째는 불이 점점 피어오르는 때[漸時]와 한 번에 화 붙는 때[頓時]를 아는 것이고,
넷째는 불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아는 것이고,
다섯째는 불을 얻는[成就] 차례를 아는 것이다. 이것을 다섯 가지라 한다.
두 번째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해서 결국 불을 얻지 못한다.
수행자도 마찬가지다. 방편을 가진 자도 있고 방편을 갖지 못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인 불태우는 작용의 비유는 어떤 의도에서 든 것인가?
불이 나무를 태우는 데는 세 가지 일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날카로움을 버리고 둔화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차이를 버리고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둔함을 짓는다면 모두 재가 된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지말을 등지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불태움으로써 상(相)을 동일하게 해서
땅[地]과 대등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세 가지라 한다.
대치(對治)하는 도의 차례도 이와 같다.
장애를 끊기 때문이며,
이치를 증득하기 때문이며,
일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비유설을 말하였고,
다음으로 비유와 법을 배대하는 부분에 대한 설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총설(摠說)이고
둘째는 별설(別說)이다.
총설이란 훈습의 행태[所爲]를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본론에서는 이를 ‘중생도 마찬가지다’라고 하였다.
별설이란 훈습의 행태를 개별적으로 구분한 것이니,
이 별설에는 세 부분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연이 빠진 채 인만 가지고는 작용을 이룰 수 없다는 뜻[緣闕單因無力門]이고,
둘째는 인이 빠진 채 연만 가지고도 작용을 이룰 수 없다는 뜻[因闕單緣無力門]이며,
셋째는 인과 연이 빠짐없이 갖춰져야 원만하게 성취된다는 뜻[因緣具足圓成門]이다.
연(緣)이 빠진 채 인(因)만 가지고는 작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나무 속 활의 성품이 본래부터 잠재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수단을 빌리지 않고서는 불을 얻을 수 없듯이,
무명장(無明藏) 속에 있는 여래의 성품도
본래부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간직하고 있지만 수행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비록 근본적인 인(因)이 되는 훈습력이 있다 해도
모든 불보살이나 선지식을 만나는 연(緣)이 없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어 열반에 든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인(因)이 빠진 채 연(緣)만 가지고도 작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설사 수단을 가졌다 하더라도 저 나무에 불의 성품이 없다면 결코 불을 얻을 수 없듯이,
모든 수행자도 수행을 해서 한없는 방편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중생심 가운데 본각의 불성이 없다면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반면 외연(外緣)의 힘이 있다 해도 내적인 정법(淨法)이 훈습력을 갖지 못한다면,
결국은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여 열반을 기꺼이 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인과 연이 빠짐없이 갖춰져야 원만하게 성취된다는 것은, 나무속에 불의 성품도 있고 수단도 가지고 있다면
불꽃이 나와 나무를 남김없이 태우듯이, 인과 연을 동시에 갖춘 자는 안으로 본각의 불성을 갖추고 밖으로
수행의 공력을 갖추어 인(因)이 되는 백 가지 행과 과(果)가 되는 만 가지 덕을 갖춤으로써
세 가지 지혜[三智]가 동시에 행해지고 네 가지 덕[四德]이 동시에 열린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인과 연이 구족하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스스로에게 훈습할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 등으로부터 자비와 원력과 보호를 받아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선근을 닦고, 선근을 닦음으로써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가르쳐 보이시어 기쁘고 이익되게 하시니 열반도로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일정한 법칙을 전체적으로 제시하여 필연의 이치를 설하는 문[摠標軌則決定門]에 대해 설명하였고,
다음으로는 연의 상을 여러 각도로 보여 줌으로써 이해를 돕는 문[緣相散示生解門]을 설한 내용이다.
이 부문에 관한 설명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총설(摠說)이고
둘째는 별설(別說)이다.
총설에 다시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 뜻인가?
첫째는 능연(能緣)이고
둘째는 소연(所緣)이다.
능연이란 응화신(應化身)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생을 위해 능히 본각의 경계를 성취하는 모습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용훈습(用熏習)이란’이라고 하였다.
소연이란 중생계(衆生界)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 교화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중생이 만나는 외연(外緣)의 힘을 말한다’고 하였다.
별설에도 두 가지 문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선택이 있는 연[簡擇緣]이고,
둘째는 선택이 없는 연[非簡擇緣]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이러한 외연에는 한량없는 뜻이 있으나
간략히 두 가지만을 말하겠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차별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연(平等緣)이다’라고 하였다.
간택연이라고 한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능연이 되는 사람[能緣人]이고,
둘째는 소연이 되는 경계[所緣境]다.
능연으로서의 사람은 어떤 위상[分齊]을 갖는가?
처음 발심했을 때부터 마지막 여래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이 연을 만들기 때문이다.
소연으로서의 경계란 어떤 위상을 갖는가?
사정취(邪定聚)와 부정취(不定聚) 두 가지 중생에게 공통되기 때문이며,
이 밖에 정정취(正定聚) 중생에게도 통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차별연이란 무엇인가? 이 사람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 능을 의지하여
저음으로 뜻을 일으켜 도를 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불과를 얻기까지, 수행하는 중간에
모든 불보살의 몸을 보기도 하고
공덕을 생각하기도 하며,
혹은 권속이나 부모ㆍ친척이 되기도 하고,
일 봐주는 사람이 되기도 하며,
친구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하며,
사섭(四攝)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아가 이제껏 지었던 무량한 모든 행연(行緣)으로
대비의 훈습력을 일으켜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을 자라게 하여 보거나 듣는 자에게 이익을 준다’라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과 선근이 미성숙한 중생의 차이를 밝히는 내용이다.
즉, 선근이 성숙한 중생의 경우는 응화신을 만나면 바로 제도되는 반면,
선근이 미성숙한 중생은 응화신을 만나도 오랜 시간을 거쳐야 제도된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이 차별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가까운 연[近緣]이니, 빠르게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둘째는 먼 연[遠緣]이니, 오랜 시간에 걸쳐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아래로는 먼 연과 가까운 연에 각각 두 가지 연을 개설하여
인과(因果)의 차별상을 밝히는 내용이다. 무엇이 두 가지 연인가?
첫째는 인을 더하는 연[增因緣]이고,
둘째는 과를 더하는 연[增果緣]이다.
인을 더하는 연이란
저 두 가지 연이 각각 십지(十地)의 만행을 불려나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과를 더하는 연이란
저 두 가지 연이 각각 여래지(如來地)의 원만한 과를 불려나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이 가까운 연과 먼 연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수행을 불어나게 하는 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도를 받게 하는 연[受道緣]이다’라고 하였다.
이제까지는 간택연(簡擇緣)에 관한 설명이었고,
다음으로는 비간택연(非簡擇緣)에 관한 내용이다.
이것을 논한 본문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전체적인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것이다.
전체적인 것 중에 ‘평등연이란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동체지(同體智)의 힘으로 일체 중생을 해탈시키고자 서원을 세워
본래적인 훈습으로 항상 그들을 놓지 않음으로써’라고 한 구절이 바로 자비원력의 연(緣)에 해당한다.
무슨 말인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한량없는 모든 중생 가운데서 훈습을 통해
경계를 지음으로써 잠재된 선근의 기운[氣]을 일으켜 항상 그것을 놓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동체지(同體智)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듣는 바에 응해서 나타나 업을 짓는다’고 한 구절은 실다운 행에 해당한다.
무슨 말인가? 응화상의 부처님께서는 유전(流轉)을 따라주는 자재하고 걸림 없는 힘을 쓰기 때문에,
때와 장소에 따라 상황과 일에 따라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 거슬림 없이 여여하게 여덟 가지 이익되는 일을
보여 줌으로써 중생을 남김없이 교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생은 삼매(三昧)에 의지해야 비로소
모든 부처님을 평등하게 본다’고 한 구절은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보는 것을 나타낸다.
즉,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계에 출현하심은, 뿔에 털이 날 만큼이나 말할 수 없이
무수한 겹겹의 세월 동안을,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
그런다 해도 사마타(奢摩陁)를 수행하지 않은 자라면 끝내 부처님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미 발심한 모든 보살 등은 삼매를 닦은 힘으로 제불의 법성신은
차별 없이 절대 평등라고 동일한 진여 동일한 법신이라고 보며,
다른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을 보는 것인데 아(我)라는 것도 원래 차별을 갖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평등하게 부처를 본다’고 한 것이다.
이제까지 총설문(摠說門)을 설했고,
다음으로 별설문(別說門)에 대해 설하겠다.
이 문에도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아직 정위(正位)에 들지 못한 자고,
둘째는 이미 정위에 든 자다.
정위에 들지 못한 자란 누구인가?
십신위(十信位)에 있는 범부와 이승(二乘)과 삼현위(三賢位)에 있는
보살 등이다. 이들은 아직 정체지(正體智)를 얻지 못하였고,
후득지(後得智)를 증득하지 못하여 이치 그대로[如理]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이것을, ‘이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과 용훈습(用熏習)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아직 상응하지 못한 경우[未相應]다. 범부와 이승과 처음 발심한 보살 등의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훈습하되 믿음의 힘에 의지하여 수행을 해나가지만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이 체(體)와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재한 업으로 수행함이 용(用)과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정위에 든 자란 누구인가?
십지(十地)보살은 안으로 정체지를 얻고 바깥으로 후득지를 얻어서 부분적으로
부처님과 동등한 지혜의 작용을 갖는다. 이들은 본각 훈습력으로
본래적인 수행을 하여 진여를 불려나가고 무명을 없애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둘째는 이리 상응한 경우[已相應]다.
법신보살(法身菩薩)은 무분별심을 얻었기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서 나오는 직용과 상응하며, 오직 법력에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함으로써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멸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훈습의 내용을 갈래지우면서 이런 저런 각도로 분석하는 문[分剖散說門]을 설했고,
다음으로 염정법의 멸진 여부를 구별하는 문[盡不盡別門]을 설하겠다.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해 이 문을 시설했는가?
망법(妄法)은 어느 것이든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시작은 없고 끝은 있다.
반면 정법(淨法)은 어느 것이나 도리에 합치하기 때문에 시작은 있고 끝은 없다.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해 시설했다.
그 밖에 진(眞)과 망(妄) 두 법은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에 함께 행할 수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기도 하다.
또한 진과 망 두 법에는 아무런 우열도 없고, 체와 상이 동등하여 넓고 좁은 차이가 없으며,
작용에 있어서도 동등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것을 본론에서는, ‘한편 염법은 무시이래로 끊임없이 훈습하다가불과를 얻은 즉시 끊기며,
정법훈습은 미래가 다할 때까지 끊기는 일이 없다. 무슨 뜻인가?
진여법은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멸하면 즉시 법신이 나타나 용훈습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끊어짐이 없다’라고 하였다.
自此已下,顯示生滅之相差別。
本曰:‘ 復次,分別生滅相者,有二種。云何爲二?
一者麤與心相應故,
二者細與心不相應故。又麤中之麤凡夫境界,麤中之細及細中之麤,菩薩境界。細中之細是佛境界,
此二種生滅,依於無明熏習而有。所謂依因依緣。依因者,不覺義故。依緣者,妄作境界義故。
若因滅則緣滅,因滅故,不相應心滅,緣滅故,相應心滅。
問曰:若心滅者,云何相續?若相續者,云何說究竟滅?
答曰:所言滅者,唯心相滅,非心體滅。如風依水而有動相,若波水滅,則風斷絕,無所依止。以水不滅,
風相相續,唯風滅故,動相隨滅,非是水滅,無明亦爾,依心體而動,若心體滅,則衆生斷絕,無所依止。
以體不滅,心得相續,唯癡滅故,心相隨滅,非心智滅。
’ 論曰:則此文中,自有五門。
云何爲五?
一者標釋俱成示相門,
二者率相屬當假人門,
三者顯示麤細所依門,
四者本覺對治次第門,
五者發起問荅決疑門。言標釋俱成示相門者,麤重生滅與心相應故,微細生滅與心不相應故。
云何名爲麤重生滅?當與何識,而相應耶?謂末末故與分別事識而共相應故。
云何名爲微細生滅?當與何識,而不相應耶?所謂末故,與三位本識,而不相應故。
馬鳴菩薩依何經本,作此解釋?謂楞伽經。彼契經中,如何說耶?謂一本分流楞伽契經中,
作如是說:爾時,大慧菩薩摩訶薩復白佛言:世尊,諸識有幾種生住滅?
佛告大慧:諸識有二種生住滅,非思量所知。諸識有二種生,謂流注生及相生,
有二種住,謂流注住及相住。
有二種滅,謂流注滅及相滅。
又一本分流楞伽契經中,作如是說:大慧,諸識有二種滅。
何等爲二?
一者相滅,
二者相續滅。有二種生,
何等爲二?
一者相生,
二者相續生。有二種住,
何等爲二?
一者相住,
二者相續住。又大本楞伽契經中,
作如是說:爾時,文殊師利卽白佛言:世尊,諸心識法有幾無常之相?
佛告文殊:若第一有縛細識,有上品非離生滅。若中轉有縛細識,有中品非離生滅。若遠轉縛細識,
有下品非離生滅。若遍分別麤識,有分離面鏡非離生滅。如是三本楞伽契經,爲明何義?
爲欲顯示麤重微細二種生滅差別相故。於契經中,唯出名字,不示其義。以此義故,
馬鳴菩薩分契不契,顯示麤細二種生滅。
如本‘復次,分別生滅相者,則有二種。云何爲二?
一者麤與心相應故,
二者細與心不相應故’故。
已說標釋俱成示相門,次說率相屬當假人門。
此中假人卽有三種。云何爲三?
一者不退凡夫,
二者分淸淨者,
三者滿淸淨者。是名爲三。
初人以何相應而爲自境界耶?謂執相應染,以爲自境界故。如本‘又麤中之麤凡夫境界故。
’中人以何等染而爲自境界耶?謂後二相應初二不相應,及業識之一分以爲自境界故。
如本‘麤中之細及細中之麤菩薩境界’故,後人以何不相應染,
爲自境界耶?謂俱合動相之一分及獨力業相之全分,以爲自境界故。如本‘細中之細是佛境界’故。
已說率相屬當假人門,次說顯示麤細所依門。此中所依卽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是通,
二者是別。通者二種生滅皆以無明,爲所依故。別者,二種生滅如其次第,各因及緣爲所依故。
如本‘此二種生滅依於無明熏習而有,所謂依因,依緣。依因者,不覺義故。依緣者,妄作境界義故。
’故今此論文依何經起?謂楞伽經。彼契經中,如何說耶?
謂分流楞伽契經中,作如是說:大慧,不思議熏及不思議變是現識因,取種種塵及無始妄想熏是分別事識因。
又大本楞伽契經中,作如是說:復次,不離染因者,可思議熏、不可思議熏及可思議變、不可思議變。
復次,分離染因者,種種猛風、妄想現鏡識,乃至廣說。
何法名爲不思議熏?所謂卽是根本無明。以何義故,
名不思議熏?謂甚深故。云何甚深?謂金剛已還一切衆生,不了此處,是故名爲不思議熏,
如熏,變亦爾故。大本經中,作如是說:可思議不可思議者,就金剛還上之人故。
已說顯示麤細所依門,次說本覺對治次第門。謂本覺智根本無明爲始,滅相爲終,如其次第,漸對治故。
然此中,斷不捨無明,以爲其斷。非以斷除而爲斷故。若爾,云何斷義成耶?謂斷煩惱心,斷除不起故,
是名本覺治道次第。如本‘若因滅則緣滅,因滅故不相應心滅,緣滅故相應心滅’故。已說本覺對治次第門,
次說發起問荅決疑門。
卽此門中,自有二意。云何爲二?
一者兩難閉關門,
二者開通決疑門。文相可見,本覺明智斷根本無明,三種細染永滅不起。已三細無六麤之心,
亦不能起三六種心永滅不起,本覺性智不能自有。
所以者何?三六種心。非但無明。亦本覺俱。眞妄和合,名三六心故。然若言三六心滅者,
本覺同滅無所有也。
豈可得言本覺之心而得相續,至於邪定?故言問曰:若心滅者,云何相續,卽是初關。若言本覺是功德法,
非斷之法常恒相續無斷絕者,豈可得言三六種心永滅不起?故言若相續者,云何說究竟滅?卽是第二關。
自此已下,作釋決疑,文相明故,不須重釋。從上已來,生滅之相決擇分已焉。自此已下,顯示染淨相熏相生,不斷絕義。本曰:‘復次,有四種法熏習義故,染法淨法起不斷絕。
云何爲四?
一者淨法名爲眞如,
二者一切染因名爲無明,
三者妄心名爲業識,
四者妄境界,
所謂六塵。熏習義者,如世閒衣服實無於香,若人以香而熏習故,則有香氣,此亦如是。
眞如淨法實無於染,但以無明而熏習故,則有染相。
無明染法實無淨業,但以眞如而熏習故,則有淨用。云何熏習起染法不斷?
所謂以依眞如法故,有於無明,以有無明染法因故,卽熏習眞如。以熏習故,卽有妄心,以有妄心故,
卽熏習無明。不了眞如法故,不覺念起,現妄境界。以有妄境界染法緣故,卽熏習妄心,
令其念著,造種種業,受於一切身心等苦。
此妄境界熏習義,卽有二種。云何爲二?
一者增長念熏習,
二者增長取熏習。
妄心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業識根本熏習,能受阿羅漢、辟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
二者增長分別事識,熏習能受凡夫業繫苦故。
無明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根本熏習,以能成就業識義故,
二者所起見愛熏習,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
云何熏習,起淨法不斷?所謂以有眞、如、法故,能熏習無明。
以熏習因緣力故,則令妄心,厭生死苦樂,求涅盤。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卽熏習眞如,自信己性,
知心妄動,無前境界,修遠離法,以如實知無前境界故,種種方便起隨順行,不取不念,乃至久遠熏習力故,
無明卽滅。以無明滅故,心無有起,以心無起故,境界隨滅。以因緣俱滅故,心相皆盡,名得涅盤,
成自然業。
妄心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分別事識熏習,依諸凡夫二乘人等,厭生死苦,隨力所能,以漸趣向無上道故;
二者意熏習,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盤故。
眞如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自體相熏習,
二者用熏習。自體相熏習者,從無始世來,具無漏法。用熏習者,備有不思議業,作境界之性依此二義,
恒常熏習,以有熏習力故,能令衆生,厭生死苦,樂求涅盤,自信己身有眞如法,發心修行。
問曰:若如是義者,一切衆生悉有眞如,等皆熏習。
云何有信無信無量前後差別?皆應一時自知有眞如法,勤修方便,等入涅盤。
荅曰:眞如本一,而有無量無邊無明,從本已來,自性差別,厚薄不同故,過恒河沙等上煩惱,
依無明起差別。我見愛染煩惱依無明,起差別,如是一切煩惱依於無明,所起,前後無量差別,
唯如來能知故。又諸佛法有因有緣,因緣具足,乃得成辦,如木中火性,是火正因。
若人無知,不假方便,能自燒木,無有是處,衆生亦爾。雖有正因熏習之力,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
以之爲緣,能自斷煩惱,入涅盤者,則無是處。若雖有外緣之力,而內淨法未有熏習力者,亦不能究竟,
厭生死苦,樂求涅盤,若因緣具足者,所謂自有熏習之力。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能起厭苦之心,
信有涅盤,修習善根。以修善根成就,則値諸佛菩薩示教利喜,乃能進趣向涅盤道。
用熏習者,卽是衆生外緣之力。如是外緣,有無量義,略說二種。云何爲二?
一者差別緣,
二者平等緣。差別緣者,此人依於諸佛菩薩等,從初發意始求道時,乃至得佛,於中,若見若念,
或爲眷屬父母諸親,或爲給使,或爲知友,或爲怨家,或起四攝,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
以起大悲熏習之力,能令衆生,增長善根,若見若聞,得利益故。
此緣有二種。云何爲二?
一者近緣,速得度故;
二者遠緣,久遠得度故。是近遠二緣分別,
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增長行緣,
二者受道緣。平等緣者,一切諸佛菩薩皆願度脫一切衆生,自然熏習,恒常不捨,以同體智力故,
隨應見聞,而現作業。所謂衆生依於三昧,乃得平等見諸佛故。此體用熏習分別,
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未相應,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以意、意識熏習,依信力故,而修行,
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
二者已相應,謂法身菩薩得無分別心,與諸佛智用相應,唯依法力,自然修行,熏習眞,如滅無明故。
復次,染法從無始已來,熏習不斷,乃至得佛後,卽有斷,淨法熏習卽無有斷,盡於未來,
此義云何?以眞如法常熏習故,妄心卽滅,法身顯現,起用熏習故,無有斷。
’ 論曰:卽此文中,自有五門。云何爲五?
一者摠標綱要門,
二者立名略示門,
三者通釋熏習門,
四者分剖散說門,
五者盡不盡別門。
第一門中,自有六意。云何爲六?
一者相待相成似有意,謂欲顯示染淨諸法,皆悉相待而得成立,無有唯自建立法故;
二者本無性空非有意,謂欲顯示染淨諸法種種名字,於本無中,權假建立,一切皆悉非自名故;
三者相待相成顯空意,謂欲顯示染淨諸法由相觀故,從本已來,無有自體,自性空故;
四者自然虛空無㝵意,謂欲顯示一切諸法非有非有故,自然作空,非㝵非㝵故,常作無障㝵義故;
五者非作非造自然意,謂欲顯示一切諸法有佛無佛,相熏相生,無斷絕義,法爾道理,性如是故,
六者不守自性無住意,謂欲顯示一切諸法作緣起陁羅尼義故。摠標如是等無量義故,名爲摠標綱要門。
如本‘復次,有四種法熏習義故,染法淨法起不斷絕’故。已說摠標綱要門,次說立名略示門。
於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淨眞法相門,
二者染妄法相門。所言眞者,自性淸淨本覺藏智。所言妄者,離脫體相,本上無明。
染妄門中,卽有三種。云何爲三?
一者無明,
二者業識,
三者境界。一眞三妄,如是四法,能作熏事本數名字。今此文中,
擧一後有幷兼中有,應審觀察。所以者何?一切染法皆悉有熏習之事故,
如本‘云何爲四
一者淨法,名爲眞如;
二者一切染因,名爲無明;
三者妄心,名爲業識;
四者妄境界,所謂六塵’故。已說立名略示門,次說通釋熏習門。
於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比量譬喩善巧門,
二者法喩合說安立門。
比量譬喩善巧門者,譬如衣服,從本已來,亦無芬香,亦無鄙香,一向無氣,
而士夫衆入於班多伽耶娑叉提鄔林時,會末耶提以熏習故,而有穢香,入於梵檀只多那林時,
陁摩鍵多以熏習故,而有香氣故。如本‘如世閒衣服實無於香,若人以香而熏習故,則有香氣故。
’法喩合說安立門者,勝義道理亦復如是。自性淸淨無漏性德,從無始來,一向明白,亦無垢黑,亦無染污,
而以無明而熏習故,則有垢黑。無明藏海從無始來,一向闇黑,亦無智明,亦無白品,而以本覺而熏習故,
則有淨用。如是染淨但是假立,染非實染,淨非實淨,皆是幻化無實自性。如本‘此亦如是眞如淨法,
實無於染,但以無明而熏習故,則有染相。
無明染法實無淨業,但以眞如而熏習故,則有淨用故。
’已說通釋熏習門,次說分剖散說門。於此門中,卽有四門。云何爲四?
一者黑品相熏有力門,
二者白品相熏有力門,
三者發起問荅決疑門,
四者擧緣廣說開通門。
第一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摠問摠荅顯宗門,
二者歸摠作別散說門。
第二門中,具此二門,應審觀察。
第四門中,自有二門。云何爲二?
一者摠標軌則決定門,
二者因緣各示生解門。如其次第,說相可見。云何熏習,起染法不斷者?卽是摠問。
謂通摠問一切黑品相熏相生,不斷義故,自此已下,卽摠荅分。就於卽此荅說分中,從淨妙藏,
乃至麤重,背本向末,漸次轉勝,說其次第,說相次第,應審觀察。根本無明不能自有,當依眞如方得止住。
所以者何?眞如之性如虛空界,至部實主,於障㝵及無障㝵中,爲作歸依,無所㝵故。如本‘所謂以依眞如法故,有於無明’故,如是無明,得自所已,氣力殊勝,功能自在,能熏眞如,令作妄法,增不了相,加闇鈍用,
譬如愛父生諸男女。如本‘以有無明染法因故,卽熏習眞如。以熏習故,則有妄心’故。如是微細業識妄心,
因無明故,自體生已,還熏無明,能令增長。譬如生子養能生父。如是熏力,更增長故,不能通達平等如理,
圓滿一心故,起轉識之惑念,生現相之妄境,生死之海更深,涅盤之岸彌高。如本‘以有妄心,卽熏習無明,
不了眞如、法故,不覺念起,現妄境界故,如是境界之風,還熏現識之海,起七識之波浪。此識樂著境界之塵,彼境面向識眼之前,遍造諸惡之業,具受一切苦報,三有之輪環循,四毒之賊浪起。如本‘以有境界染法緣故,
卽熏習妄心,令其念著造種種業,受於一切身心等苦故。’已說摠問摠荅顯宗門,次說歸摠作別散說門。
就此門中,卽有三重。云何爲三?
一者境界,
二者妄心,
三者無明。是名爲三。如是三種各有二故,卽成六數,如其次第,初以爲後,後以爲初,漸次顯示。初重云何?此妄境界有如實熏習之力故,增法執念,有如有熏習之力故,長人執著。人法二執具足起故,
過於恒沙上煩惱類,皆悉發起。是故名爲境界熏習。如本‘此妄境界熏習義,則有二種。云何爲二?
一者增長念熏習,
二者增長取熏習’故,中重云何?業識妄心有上熏之力故,已得出離三乘聖人,而能令受變易細苦,
有下熏之力故,未得出離。一切凡夫而能令受分段麤苦。是故名爲妄心熏習。如本‘妄心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業識根本熏習,能受阿羅漢、辟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
二者增長分別事識熏習,能受凡夫業繫苦故’故,後重云何?無明住地自體本故,能熏初末,令得成就,
通達遍故,能熏事識,令得成就。
何故唯擧初後,中閒不顯?有二意故。云何爲二?
一者有成就意,
二者空成就意。
云何名爲有成就意?擧邊得有,現中有故。云何名爲空成就意?擧中空,無顯邊空故。後義云何?
於契經中,如是說故,當何契經?謂熏習經。彼契經中,如何說耶?
謂熏習契經中,作如是說:轉識、現識、末那三識,非從無明,而得成就。
所以者何?根本無明唯邊成就,非中成就,此文後義,直釋彼經。是故明知此義得成。如本‘無明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根本熏習,以能成就業識義故;
二者所起見愛熏習,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故,已說黑品相熏有力門,次說白品相熏有力門。
云何熏習,起淨法,不斷者?卽是摠問,謂通摠問一切白品相熏相生不斷義故。自此已下,卽摠荅分。
就於卽此荅說分中,自有二熏。云何爲二?
一者無始自然熏,
二者始有建立熏。無始熏者,從無始已來,有因果之二位故,始有熏者,因修力故,有因果之二位故。
本因果者,其相云何?謂無始來有三賢十聖之位故,有三身四德之果故。
始因果者,其相云何?今修行時,方乃有無始之十地故,顯本有之因果故。
本因果者次第云何?從無始來,以有十種本覺眞智及十種如實法界故,
能熏十種枝末無明,以有一種法界心故,能熏習根本無明故,是名本地。
如本‘所謂以有眞如法故,能熏習無明’故。始因果者,次第云何?謂雖未得十信之位,而以本熏習之力故,
則自心中,厭生死苦,求涅盤樂,以此力故,卽熏習眞如性,自信佛性,入十信位,知心虛妄,入十解位,
知境界空,入十行位,修出向法,入十向位,以如實般若知境界空故,無量方便發起隨順法界性行,不取涅盤,不念生死,入極喜地,乃至金剛,自久遠熏習故,發解脫道,無明頓斷。根本盡故,枝末皆無。
本末黑品無所有故,得法身涅盤,成應化業用故,是名始地。如本‘以熏習因緣力故,則令妄心,厭生死苦,
樂求涅盤,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卽熏習眞如,自信己性,知心妄動,無前境界,修遠離法,
以如實知無前境界故,種種方便,起隨順行,不取不念,乃至久遠熏習力故,無明則滅,以無明滅故,
心無有起。以無起故,境界隨滅。以因緣俱滅故,心相皆盡,名得涅盤成自然業’故。已說摠問摠荅顯宗門,
次說歸摠作別散說門。就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妄染熏習門,
二者淨法熏習門。
染法門中,卽有二種。云何爲二?
一者是麤,
二者是細。所言麤者,卽是意識,所言細者十一末那。
意識熏者,其相云何?
四十心凡夫及諸二乘以意識中本覺智分,熏意識中無明癡分,厭生死苦,忻涅盤樂,漸漸轉勝,向佛道故。
如本‘妄心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分別事識熏習,依諸凡夫、二乘人等厭生死苦,隨力所能,以漸趣向無上道故故。十一末那熏習義者,
其相云何?從初聖地,乃至金剛,如其次第,以淸淨分熏染污分,證入無上菩提道故。以菩薩等斷無明故。
如本‘二者意熏習,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盤故’故。
已說妄染熏習門,次說淨法熏習門。就此門中,自有二門。云何爲二?
一者摠標門,
二者開釋門。摠標門者,摠標其名。
如本‘眞如熏習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自體相熏習,
二者用熏習。故開釋門中,有二門。云何爲二?
一者法身自然熏習門,
二者應化常恒熏習門。所言法身熏習門者,本覺性智,從無始來,圓滿功德,具足智慧,
自自作自,無他力故。如本‘自體相熏習者,從無始世來,具無漏法故#所言應化熏習門者,如是本覺,
發過恒沙無量無邊不可思議種種業用,一切衆生諸心相中,隨應教化,斷一切惡,修一切善,具百行之因,
滿萬德之果故。如本‘用熏習者,備有不思議業,作境界之性故。如是二門,不相捨離,於一切時,於一切處,
常恒熏習,起信生解,建立修行,造作不轉,到正後二地,達眞俗境,令無㝵故。如本‘依此二義,恒常熏習,
以有熏習力故,能令衆生,厭生死苦,樂求涅盤,自信己身,有眞如法,發心修行故。由此義故,
三身本有理故,顯了。已說白品相熏有力門,次說發起問荅決疑門。此決疑門義理難解,文教更閉,
作釋非散說,無定通人,不能明了。是故今更作種種釋,具足開示,曉行者心。如其次第,問荅之相,
應審觀察。一切衆生皆有本覺,有衆生數而無本覺,皆有理故。
所以者何?大覺尊者如是說故。此義云何?一切衆生從無始來,具足本覺,從無始來,無本覺故。
若依初門,一切衆生悉有本覺。如是本覺唯是一體,遍諸衆生,一一衆生各有別覺,一切衆生唯有一覺,
無別覺故。若爾,衆生唯應是一,所有本覺一故。
本覺應非一,能有衆生多故。此事不爾,所以者何?意趣別故。謂本覺心平等性故,
不能異種一切衆生差別性故。不能同種,不能異種故,一不能同種故多。
若爾,此文云何通耶?謂馬鳴尊者大宗地玄文本論中,
作如是說:譬如虛空中 淸淨滿月輪 獨一無二體遍現於千器。
本覺亦如是 獨一無二體遍於諸衆生 種種心相中。
譬如一段雲覆彼滿月輪 千器諸月輪 皆隱沒不現。
無明亦如是 唯一體無二 遍到諸衆生能作熏習事。
有二義故,無相違過。云何爲二?
一者自宗決定,
二者引攝決定。言自宗決定者,顯示同一相續義故。言引攝決定者,顯示差別相續義故。
彼玄文論爲顯初義,是起信論爲顯後義。以此義故,
無相違過。是故馬鳴尊者虛空地地論中,
作如是說:‘譬如以蓮葉 覆一器月輪 而餘器月輪終不隱現前。
無明亦如是 覆惑人覺時已覺人本覺 終不能隱覆。’此文爲明何義?爲欲顯示差別相續之義故。
復次,文殊師利論議第一神力殊勝慈悲圓滿虛空功德契經中,
作如是說:‘有無量無邊 無明煩惱障 遍到衆生身能作障㝵事。
’此文爲明何義?謂欲顯示精進修行之義故。
云何顯示?謂有衆生作如是念,若無明體唯是一種,遍於一切諸衆生者,無明唯一,衆生衆多,易可斷除。
何須敢勞,可修行也?如見世閒相,多人作一事,爲難之不足,不勤修行,爲欲對治如是懈怠癡衆生故,
如來說言有無量無邊無明,能覆佛性。以此義故,一無明義,而得成立。若爾,一衆生煩惱盡時中,
餘一切衆生皆悉亦可盡。所以者何?唯一無明故。若一人斷時,餘人不能斷者,不可得言同一無明。
復次,有衆生界斷絕過失故,此事不爾,無明雖一,相續別故。
其相云何?頌曰:譬如夜闇一 遍到十室中 滅一室闇時餘滅不可言。
論曰:夜闇雖一,而能遍到十室之中,闇一室一,亦不可言。室十闇十,亦不可說。
於一室中,人以明燈,照室之中闇盡滅無餘,明圓顯,遍照一室,中闇盡滅無餘。
九室中闇盡滅無餘,亦不可言餘九室闇具有不滅。燈照一室,闇不滅者,
亦不可說。無明煩惱亦復如是。言夜闇者喩於無明,言十室者喩衆生身,
言明燈者喩於智慧。是故當知無明雖一,相續別故,斷及不斷各各不同。
若一衆生,煩惱盡時,餘諸衆生不能斷者,煩惱未盡衆生身中,本覺佛性,
爲無明覆,煩惱已盡衆生身中本覺佛性無明所覆,已盡出離。離障佛性、
爲障佛性,天殊地別,何故今言同一佛性,不分其體,
遍諸衆生?本覺佛性等虛空界,無所不遍,無所不至,無所不通,無所不當,
平等平等,一味一相,無有差別,而無明藏中,本覺佛性爲染覆障,法界之外本覺佛性,
離染覆者,此但攀緣慮知之心,現量境界。非是自性中,實理心。是故當知佛性之理,
唯是一種等無差別。是故馬鳴尊者大宗地玄文本論中,
作如是說:‘月輪現千器 若有濁水器 現而非分明若有淸水器。
圓現而明了 晦明雖不同唯一滿月輪 本覺亦如是。’一切衆生從無始來,皆有本覺,無捨離時,
何故衆生先有成佛,後有成佛,今有成佛,亦有勤行,亦有不行,亦有聰明,亦有闇鈍,
無量差別?同有一覺,皆悉一時發心修行,到無上道,本覺佛性强劣別故,
如是差別;無明煩惱厚薄別故,如是差別?
若言如初者,此事則不爾。所以者何?本覺佛性圓過恒沙之諸功德,無增減故。若言如後者,此事亦不爾。
所以者何?一地斷義不成立故,如是種種無量差別,皆依無明,而得住持,於至理中,無關而已。
若如是者,一切行者斷一切惡,修一切善,超於十地,到無上地,圓滿三身,具足四德。
如是行者爲明無明?如是行者無明分位,非明分位。若爾,淸淨本覺從無始來,
不觀修行。非得他力,性德圓滿,本智具足,亦出四句,亦離五邊,自然之言不能自然,淸淨之心不能淸淨。
絕絕離離,如是本處,
爲明無明?如是本處,無明邊域,非明分位。若爾,一法界心非百非,背千是。非中、非、中,
背天非天,演水之談足斷而已止,審慮之量手亡而已住。如是一心,爲明無明?如是一心,
無明邊域,非明分位。三自一心摩訶衍法,一不能一,假能入一,心不能心,假能入心。
實非我名,而目於我,亦非自唱而契於自,如我立名,
而非實我,如自得唱,而非實自,玄玄又玄,遠遠又遠,如是勝處,
爲明無明?如是勝處,無明邊域,非明分位。不二摩訶衍法,唯是不二摩訶衍法,
如是不二摩訶衍法,爲明無明。已說有覺門,次說無覺門。
何故一切衆生,無有本覺耶?無本覺故。
何故無本覺耶?無衆生故。
何故無衆生耶?無所依本覺故。率此二門,應廣通達。
如本‘問曰:若如是義者,一切衆生悉有眞如,等皆熏習。
云何有信、無信,無量前後差別?皆應一時自知有眞如法,勤修方便,等入涅盤。
荅曰:眞如本一,而有無量無邊無明,從本已來,自性差別,厚薄不同,故過恒河沙等上煩惱,
依無明,起差別。我見、愛染煩惱,依無明起差別。如是一切煩惱,依於無明所起,前後無量差別
唯如來能知故’故。已說發起問荅決疑門,次說擧緣廣說開通門。就此門中,卽有二門。
云何爲二?
一者摠標軌則決定門,
二者緣相散示生解門。
於第一門,卽有三種。云何爲三?
一者法體說,
二者譬喩說,
三者契合說。又諸佛法有因有緣,因緣具足,乃得成辦者,卽是法說。謂諸佛法當待因緣,無自立法。
所以者何?以法爾故,所言因者,本覺性種。所言緣者,權實別用。以此二事故,諸法得成立,應審觀察。
已說法說,次說喩說。如木中火性是火正因,若人無知,不假方便,能自燒木,無有是處者,卽是喩說。
此中譬喩,卽有四種。云何爲四?
一者木喩,
二者火喩,
三者人喩,
四者燒喩。
所言木者,喩於染法。
所言火者,喩於智慧。
所言人者,喩於衆生。
所言燒者,喩於對治。
第一譬喩其意云何?所謂阿梨羅多掩尸木,卽具五事。云何爲五?
一者根源深固,無能超過;
二者幹枝花葉乃至果實,生利銛刺;
三者香氣極穢;
四者毒虫樂著;
五者眷屬無盡。是名爲五。
無明染法亦復如是。根本無明甚深廣大,無能超過故。一切種種枝末不覺,
迷惑過失,無有量故。第二譬喩其意云何?所謂伏火,卽有七事。云何爲七?
一者乾亡義,能令枯木乃至死故;
二者生長義,能㝵寒氣令得生故;
三者莫測義。
不知所故四;者隱藏義,不能見故;
五者出現義,出火炎故;
六者隨有義,隨木有故;
七者隨無義,隨木無故。是名爲七。本覺般若亦復如是。
熏習染法至盡滅故,受熏流轉故,所住之處不思議故,無明藏中,密隱沒故,具足出現無所餘故,
隨染有無本覺有無故。第三譬喩其意云何?謂假人者,有二種故。
云何爲二?
一者婆羅利多提假人,
二者那尸阿多羅假人。彼第一人卽知五事。
云何爲五?
一者知出火木,
二者知鑽轉木,
三者知漸頓時,
四者知止住所,
五者知成就次。是名爲五。若第二人不知此事,終不得火。修行諸人亦復如是。亦有方便,無方便故。
第四譬喩其意云何?謂火燒木卽有三事。
云何爲三?
一者捨利作鈍事,謂火燒卽諸刺木等,不能害故;
二者捨異作同事,謂作鈍卽都合灰故;
三者背末還本事,謂同相卽與地等故。是名爲三。
治道次第亦復如是。謂斷障故,證得理故,歸一心故,已說喩說,次說合說。
此合說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摠說,
二者別說。
言摠說者,摠所爲故,如本‘衆生亦爾’故,言別說者,別所爲故,此別說中,卽有三門。
云何爲三?
一者緣闕,單因無力門;
二者因闕#單緣無力門,
三者因緣具足圓成門。緣闕單因無力門者,譬如雖木中火性,從本已來,有伏藏火,而不假方便,無以得火。
如是雖無明藏中,如來之性,從本已來有自性淸淨心,而不待修行之功,無以得佛故。如本‘雖有正因熏習之力,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以之爲緣,能自斷煩惱,入涅盤者,則無是處。故因闕單緣無力門者,
譬如有人,雖具足方便,而彼木中,若無火性,終不得火。如是一切行者,雖具修行無量方便,而衆生心中,
若無本覺佛性,終不得佛故。如本‘若雖有外緣之力,而內淨法未有熏習力者,亦不能究竟,厭生死苦,
樂求涅盤故。因緣具足圓成門者,譬如木中有火性,亦具方便,火炎出現,燒木無餘。因緣具者,亦復如是。
內中有本覺之佛性,外中具修行之功,能圓百行之因,滿萬德之果。三智俱行,四德雙開。如本‘若因緣具足者,所謂自有熏習之力。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能起厭苦之心,信有涅盤,修習善根,以修善根成就,
則値諸佛菩薩示教利喜,乃能進趣,向涅盤道故。已說摠標軌則決定門,次說緣相散示生解門。
就此門中,卽有二說。云何爲二?
一者摠說,
二者別說。
就摠說中,卽有二意。云何爲二?
一者能緣,
二者所緣。言能緣者,卽應化身能爲衆生,造作成本覺之境界故。
如本‘用熏習者故。’言所緣者,卽衆生界一切諸佛所化徒故。如本‘卽是衆生外緣之力’故。
就別說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有簡擇緣,
二者無簡擇緣。
如本‘如是外緣有無量義,略說二種。云何爲二?
一者差別緣,
二者平等緣’故。
所言有簡擇緣者,卽有二意,云何爲二?
一者能緣之人,
二者所緣之境。能緣人者,
其分齊云何?所謂發心以爲其初,如來之地以爲其後,能作此緣。所緣境者,
其分齊云何?所謂通於邪定、不定二種衆生故。復次,通於正定聚故。如本‘差別緣者,
此人依於諸佛菩薩等,從初發意,始求道時,乃至得佛,於中若見,若念,或爲眷屬、父母、諸親,
或爲給使,或爲知友,或爲怨家,或起四攝,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以起大悲熏習之力,能令衆生增長善根,若見若聞,得利益故’故。自此已下,明善根已成熟,未成熟之差別。謂有衆生善根已熟,
應化之身卽便應時速令得度,亦有衆生,善根未熟,應化之身時節久遠,令使得度。如本‘此緣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近緣,速得度故;
二者遠緣,久遠得度故’故。自此已下,於近遠緣,各開二緣,
顯示因果之差別相。云何爲二?
一者增因緣,
二者增果緣,增因緣者,彼二種緣各各增長十地萬行故。增果緣者,
彼二種緣各各增長如來之地圓滿果故。
如本‘是近遠二緣分別,復有二種。云何爲二?
一者增長行緣,
二者受道緣故。
’已說有揀擇緣,次說無揀擇緣。就此文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是摠,
二者是別。摠說中,言平等緣者,一切諸佛菩薩皆願度脫一切衆生,自然熏習。恒常不捨者,
卽是慈悲願力緣焉。所謂一切諸佛菩薩,於一切時,於一切處,常恒熏習,一切無量諸衆生中,而能作境,
發起伏藏,善根之氣,常不捨故,以同體智力故,隨應見聞。而現作業者,卽是實行。所謂應化上佛,
以隨轉自在無㝵之力故。隨時,隨處,隨宜,隨事,隨樂,順順如如,顯示八種利益之業。教化衆生無有餘故。所謂衆生依於三昧,乃得平等見諸佛故者,卽是顯示觀佛正法。謂一切諸佛出現衆生界中,譬如角中毛,
重重無數,不可說劫,如是雖有無量無邊,而若不修奢摩他者,終不見佛。是故發心已去一切諸菩薩等,
以三昧力,觀見諸佛法性之身,平等平等無有差別,同一眞如,同一法身,異唯見自,我自無別,
是故說言平等見佛#已說摠說門,次說別說門。就此門中,卽有二門。云何爲二?
一者未入正位,
二者已入正位。
云何名爲未入正位?謂十信凡夫、一切二乘、三賢菩薩等,未得正體智,未證後得智,未證如理故。
如本‘此體用熏習分別,復有二種。云何爲二?一者未相應,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
以意、意識熏習,依信力故,而修行,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
’云何名爲已入正位?謂十地菩薩內得正智,外得後智,一分智用與如來等,唯本熏力,自然修行,
增長眞如,能滅無明故。’如本‘二者已相應,謂法身菩薩,得無分別心,與諸佛自體相應故,得自在業,
修行與智用相應,唯依法力,自然修行,熏習眞如,滅無明故。’已說分剖散說門,次說盡不盡別門,
此門爲明何義?爲欲顯示一切妄法非道理故,無始有終,一切淨法契道理故,有始無終故。
復次,爲欲顯示眞妄二法極相違故,不俱行故。復次,爲欲顯示眞妄二法無有勝劣,其體相等,無有廣狹,
其作業同故。如本‘復次,染法從無始已來,熏習不斷,乃至得佛後,卽有斷,淨法熏習卽無有斷,盡於未來。
此義云何?以眞如法常熏習故,妄心則滅,法身顯現,起用熏習故,無有斷’故。
釋摩訶衍論 卷第五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석마하연론』 5권(ABC, K1397 v37, p.1035b01-1043c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