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78 호(1995. 6. 30)
【소재지】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47-5(중원향토민속자료전시관)
【시 대】조선시대
【소유자】경주이씨국당공파
【수 량】4점
【규 모】영정-전신상 99×184cm, 좌안7분면상 32×47cm, 정면상 34.5×42cm
[내 용]
충무공 이수일 영정(忠武公 李守一 影幀)은 전신상(全身像, 99×184cm)과 좌안7분면상(左顔七分面像, 32×47cm), 정면상(正面像, 34.5×42cm) 등 3점으로 전신상은 운문(雲紋)이 그려진 흑녹색의 관복(官服)에 의습처리(衣襲處理)가 희미하여 마치 1장의 천으로 마름하여 붙여 놓은 듯 보이며 훙배(胸背) 무늬는 해태상으로 주위에 모란이 장식되어 있고, 공수자세(拱手姿勢)에 흰 소매 끝이 관찰되며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 세모꼴 단령(團領)의 표현, 내공(內供)과 첩리(貼裏)의 가지런한 나열(羅列), 족좌대(足座臺)에 한껏 벌린 목화(木靴) 놓임 등 17세기 초엽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좌안7분면상은 지본채색(紙本彩色), 붉은색으로 엷게 그려진 얼굴 주름 필선(筆線)은 전신상(全身像)의 선(線)들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종이를 대고 베낀 것으로 보이지만 수염이나, 귀, 관모(官帽)의 세부표현은 미흡하고 의본(衣本)은 간략히 윤곽을 그린 후 채색을 하였다.
정면상은 좌안7분면상과 규모와 필치(筆致)가 거의 일치하며 전면상의 미숙한 표현이 전신상 및 좌안7분면상과 다른 인물처럼 느끼게 하고 있다.
충무공 이수일(명종 9년~인조10년,1554~1632)은 서촌 시곡(西村 柿谷, 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출생으로 조선중기의 무장(武將),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본관은 경주(慶州)로 이완 대장(李浣 大將)의 아버지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의 벼슬을 거쳐 1590년 선전관(宣傳官), 1592년 임진왜란 때 장기현감으로 의병을 일으켜 예천 용궁(醴泉 龍宮)에서 패전(敗戰), 1593년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고 이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 水軍節度使)로 승진하여 왜군을 대파(大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회령부사(會寧府使),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1596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으면서 명령을 어겨 결장종군(決杖從軍)하였으며, 그 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세 번이나 역임하면서 변방(邊方)을 침범하는 야인(野人)들을 소탕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亂)으로 평안도 병마절도사겸부원수(兵馬節度使兼副元帥)로서 난을 평정(平定)하여 진무공신2등(振武功臣二等),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진 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인조 10년(1632)에 79세로 별세하여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를 충무(忠武)라 하였으며 현재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에 묘소(충북도 기념물 제 21호)와 사당(忠勳祠)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어 경주이씨 국당공파 종중(慶州李氏 菊堂公派 宗中)에서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