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에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56] 이충우(李忠雨)와 채태원 사이의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이씨(慶州李氏) 국당공파(菊堂公派)이다.[57] 이충우는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가 고향인 목부(牧夫)로, 반야월 출신의 채태원을 만난 뒤 일거리를 찾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58] 이충우 부부가 살던 조선인 부락은 목축장이 유명했던 곳으로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극심한 곳이었다.[59] 아버지 이충우(李忠雨)의 본명은 이덕쇠였으나 1939년에 이충우로 개명하였다. 이명박도 이상정(李相定)이었는데 이명박(李明博)으로 바꿨다.[60] 다른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상(相)자 돌림이지만 혼자만 ‘명박’인 이유는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는 ‘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지었기 때문이다. 족보에는 돌림자를 딴 ‘상정’(相定)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61] 제17대 대선 때 돌림자가 다른 이름 때문에 ‘형제들과 배가 다르다’는 공격을 받아 DNA 검사까지 받기도 했다.[62] 창씨 개명의 이름은 쓰키야마 아키히로[63](月山明博)로서 조부 이종한(李鐘漢)이 1940년에 쓰키야마 씨(月山氏)로 창씨하였다고 한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읍 덕성리 덕실마을에 정착했고[64] 약 2년 정도 거주 후 포항읍내로 이사했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국땅을 밟은 아버지는 귀국 후에도 목장 일에 종사했고 어머니 역시 과일행상에 나섰지만 그의 가족의 생활고는 해결되지 않았다.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한국 전쟁이 터졌고 미군의 폭격으로 바로 위의 누나와 귀국후 태어난 막내 남동생을 잃었다.[65][66] 전쟁통에 집안 살림은 더 어려웠고 단칸방에서 모든 식구가 자며 하루 두 끼는 술지게미로 때웠다.[65] 그 때문에 친구들에게 술 냄새를 풍긴다며 구박받기도 했다. 어렸지만 성냥, 김밥, 밀가루떡을 팔아 살림을 도왔다.[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