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과 미학의 조화원칙을 융합
- 엔드류 와이어스의 작품에서 받은 감흥이 수채화의 길로 인도 -
박명인(미술평론가·한국미학연구소 대표)
미술이란 언제나 한계에 부닥치면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화하는 학문이다. 원초적인 원시미술에서부터 근자에는 반미적인 예술을 외치며 추상개념이 대두되었지만, 역시 미적이지 않은 예술, 또는 미적이지만 한계현상이라는 액추얼(actual)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구성원리에 충실하면 이 원리로부터 획득하여 도출되는 대상 이외의 어떠한 대상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식의 절대적 한계에 맞부딪치거나 내적 모순에 다다르거나 하는 위험은 전혀 있을 수 없게 된다. 대상의 특정 영역을 설정하여 규정되는 대로 인식에 의해 이론적으로 만드는 것은 관계의 기본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백용준은 건축학을 전공한 석학으로서 논리가 정연(精硏)하다. 예술로부터 미나 미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고, 예술과 정당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에 고심했다. 그러던 중 하나의 계기가 도래되었다. 미국의 수채화가 엔드류 와이스(Andrew Wyeth)의 작품에서 감명을 받으면서 충격적인 감성변화가 생겼다. 엔드류 와이스는 수채화이면서 사진과 같은 정교한 묘사력이 있고 추상성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빛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엔드류 와이스의 이러한 작품세계가 백용준을 흥분시켰다.
수채화에 심취하기 전에는 유화를 하면서 미술대전, 목우회공모전, 단원미술제 등에서 특선, 우수상 등 많은 이력을 쌓았지만 엔드류 와이스에 의한 감동 이후에는 수채화만 시도하고 있다. 그 영향력으로 백용준의 수채화도 정교함에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 뛰어난 묘사력을 보이고 있다. 건축학 개념에 의한 오차가 없는 정교함이 서로 같지 않은 것, 상관성이 없는 사물이 고르지 못한 상태로서 배치되어 있을 때 그와 같은 일치성적인 것과 통일적인 것에 의하여 조화되고 결합되어 있는 형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채화는 반복하거나 덧칠할 수 없는 공간성과 시간성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해서 조화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성이 건축과 동질성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백용준은 중학시절부터 남달리 미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미술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건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한민국의 경제나 사회가 어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덕단지의 설계 시공에 참여했고, 김포공항의 국제공항화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건축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백용준은 건축학 개념을 형상사유가 직관적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건축학에서 주요한 공간성과 수채와의 시간성이 합치된 사유형식으로써 조화, 대비, 대칭, 명암, 균형, 밸런스가 통일되어야 하는 심미의식을 원칙으로 표출한다.
흔히 미술을 예술이라고 하지만 미학적 개념은 달리 해석된다. 미술은 예술에 일부분 속해 있는 것이며, 예술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작하는 활동, 즉 음악, 미술, 문학, 무용, 연극, 건축, 영화에 이르는 포괄적인 창작활동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건축적인 사유형식은 사실성에 준하게 되며 작품의 순수한 자립상태가 명백하여 사물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수채화는 농담건습(濃淡乾濕)이 분명해야 물리적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같은 원칙이 엔드류 와이스의 작품에서 감동을 받은 계기적 동기이다.
백용준의 작품은 인물군상이나 자연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개별적인 것,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능력을 보여 준다. 이것을 칸트는 “감성을 시간성과 공간성에 관계 지우고 이를 직관(intuition)과 감응(affections)으로 분류하여 그 작용을 설명했다. 이는 선험적이고 순수하며 지성적인 것으로부터 추출된 개념판단 기준이었다. 그런 만큼 건축학은 예술에 있어서 중차대한 종합성을 갖고 있어서 객체의의(客體意義)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건축은 오차가 발생하면 붕괴와 직면하게 되기 때문에 조화의 법칙을 준수하게 된다. 수채화를 하는 백용준을 거론하면서 건축학이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그 만큼 건축은 백용준 인생에 커다란 궤적이기 때문이며 또한 건축공학과 수채화와 공통되는 조화의 원칙이 합치되기 때문이다.
필로라우스(philolaus BC5세기)는 “조화는 복잡 다단한 원소들에 의하여 형성된 통일체이며 조화되지 않은 원소들 사이에 존재한 일치(一致)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야말로 조화의 원칙이 배제된다면 건축은 존재할 수 없다. 비유적으로 수채화도 조화의 법칙을 떠나서는 거론할 수 없다. 따라서 건축학을 전공한 백용준은 미술에 있어서도 건축학 개론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적 사유와 미술적 사유의 총체적인 특성을 종합하여 의태(意態), 의상(意象), 정상(情狀)을 표출함으로써 예술성을 완성한다. 이를테면, 회화에 있어서의 필연성만이 예술적 개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건축에 있어서 예술미라고 할 수 있는 입체적 요소를 병합하여, 색원근법, 거리원근법, 명암원근법을 추구하면서 미술의 통일체로서의 판단기능(laculty judgment)을 선험적인 양식으로 결정해 냈다. 이것은 창작활동이 현상에 있어서 나타나는 직관적 특징의 범주에서 고유의 것, 혹은 유형적으로 나타나는 개별양식이 총체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건축미학의 표출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건축미학은 절대적인 것이며 이를 백용준은 회화에 정진하면서 건축과 미술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에 의해 창견(創見)하고 이를 바탕으로 창작예술미로 완성하고자 고심해 왔다.
특히 엔드류 와이스의 작품세계에 매료되어 수채화에 정진해 오면서 물과 물감과 종이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수채화만의 기법을 계속 실험하면서 새로운 기법 도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가 하면 추상적인 독창적 마티에르 효과를 얻기 위해 마스킹 리퀴드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적 과정은 경험에 일부일 뿐이며 무엇보다도 엔드류 와이스의 사진처럼 정교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인물군상을 보면 수채화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백용준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그렇게 정교하게 그리려면 사진을 붙여 놓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상 사람들은 타인이 잘하는데 자신이 못하면 긍정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엉뚱하게 비아냥대는 경우가 많다. 극사실을 사진으로 비유하는 사람은 실제로 극사실도, 사진도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예술적 인식이 부족한 사람이다. 극사실을 묘사하는 것은 사진처럼 정교한 묘사를 손으로 직접 해내고자 하는 노력과 원망(願望)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많은 노력은 물과 물감과 종이의 조화효과를 착안점으로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며, 색과 색이 혼합되어 불투명해지면 본연의 색감이 상실되고 당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시행착오가 생기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성에 의한 인식을 적용하여 본연의 색이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빠르게 붓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본연의 색이 상실되지 않으면 조화가 형성된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었다. 여기에는 수채화만의 결여의 미도 있고, 빠른 시간성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색의 신비한 감성이 도출되기도 한다.
사물을 관조하면서 판단하는 심리반응에 의한 감응(以心感應)의 결과는 자동적인 형상이 도출되었다고 해도 그 모식(模式), 즉 지식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백용준의 지식과 기법과 노력에 의해 생성된 결과이다. 대부분 작품들은 인물군상, 풍경, 정물 등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건축미학은 정경(情景)을 만들어 내는 양기(陽氣), 음기(陰氣), 풍기(風氣), 명기(明氣)가 부합되어야 인간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 조건이 되는 것이며 이를 회화에 융합시켰을 때는 미술에 있어서도 태양의 기운, 달의 기운, 바람의 기운, 음양의 기운이 협화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구극원리(究極原理)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기반으로 백용준은 건축학과 미학을 연계해서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이같은 백용준의 심미의식은 명석한 두뇌로 세계의 소리와 자아의 소리를 결합하고 물과 종이와 시간이라는 물질미학의 조화 진리를 파악해 나가는 데서 울림을 느끼게 한다. 칸딘스키는 ‘울림은 형태의 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바로 백용준의 작품에서 시각적으로 가슴을 울리는 감흥을 느낀다면 이것이야말로 백용준 예술성에서 생명력을 느끼게 되는 울림일 것이다.
미술평론 글 목록글 제목작성일
[출처] 박명인의 미술평론|작성자 박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