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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7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상담 및 교리 진행 ★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지성의 길2 297~302p
<'부드(budh)'의 세 번째 의미는 -'아는 것' '이해하는 것이다.>
▷ 일 시 : 불기2569(2025)년7월21일 (월) 오후1:00~4:00
▷ 장 소 : 서울구치소 소법당
지도법사: 보광-조철주
동참: 이병기 포교사
2025년7월21일(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정기 자매 상담 및 교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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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상담 후 생활법문 및 선지식 라즈니쉬 오쇼의
가르침을 점검하고,
사홍서원을 끝으로 회향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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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 교리를 마치고 *
서울구치소 활동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져, 17:30분 왕십리 거창식당에서 송호경,이병기 포교사와 모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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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07월21일(월) 선지식- 라즈니쉬 오쇼의 가르침 점검 < 반야심경 The Heart Sutra>지성의 길3 302~307p
<'부드(budh)'의 넷, 다섯번째 의미는 -'불을 밝히는 것' '깊이 관통하는 것이다.>
◆지성의길 <budh' -네 번째 의미>.
네 번째 의미는 '불을 밝히는 것' 빛이 되는 것이다.
붓다는 빛이다.
그는 빛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까지 빛을 밝혀 준다.
그는 광채다. 그에게서 어둠은 사라졌다. 그의 내면에는 불꽃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연기도 없는 순수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이 네 번째 의미는 어둠과 정반대된다.
맹목(盲目, blindness)과 무지에 대응하는 의미다. 빛이 되는 것,
불을 밝히는 것이 부드(budh)의 네 번째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그대는 어둠의 대륙이다.
아직 한 번도 탐험되지 않은 어둠의 땅이다. 303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들은 히말라야와 대양을 탐험하고 달과 화성까지 탐사하면서
단 한 가지는 시도하지 않는다. 바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험이다.
인간은 달에 착륙했지만 아직 자신의 내면에는 착륙하지 못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달에 가거나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은 단순히 도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 것 같다. 심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위안을 받으려고 다른 탐험을 시도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한 죄책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산에 오르면서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가장 높은 산은 그대 안에 있다. 그대는 아직 그 산을 오르지 않았다.
그대는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해 들어간다.
하지만
가장 거대한 바다는 그대 안에 있다.
그 바다는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대는 달을 향해 날아간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이것은 그대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꼴이다.
진짜 달은 그대 안에 있다.
왜냐하면 진짜 빛이 그대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지성적인 사람은 가장 먼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자신의 존재 안으로 먼저 들어간다.
이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먼저 그대 자신을 알아야만 비로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그 후에는 어디를 가든 그대 주변에 지복과 평화, 침묵, 기쁨이 넘실 댈 것이다.
이렇듯 네 번째 의미는 '불을 밝히는 것 이다.
지성은 불티와 같다.
잘 이용하면 이 불티는 불길이 되어 타오를 수 있다.
이 불티는 빛과 따스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이 섬광 같은 불꽃은 빛이 되고 삶이 되고 사랑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깨달음' 이라는 단어 안에 포함된다.
깨달음의 불을 밝힌 자는 내면의 어느 구석에도 어둠이 남아 있지 않다. 304
모든 것이 아침과 같다. 지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밤의 어둠과 음침함은 사라졌다.
밤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지구가 다시 깨어난다.
붓다가 된다는 것은 그대 안에 아침이 열리는 것과 같다.
이것이 지성의 역할이다. 이것이 지성의 궁극적인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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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budh)의 다섯 번째 의미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대 안에는 끝도 없는 심해(深海)가 있다.
다섯 번째 의미는 또한 뚫고 들어가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그대 존재의 핵심, 그 심장부로 관통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반야심경을“Heart Sutra Prajnaparamita Hridayam Sutra” 라고 부르는 이유다.
사람들은 삶에서 많은 것을 뚫고 들어가려고 한다.
섹스에 대한 욕망도 일종의 관통(貫通)에 대한 욕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섹스는 다른 사람 안으로 관통해 들어간다.
똑같은 관통이 그대 자신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대 자신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통은 순간적인 일별(一別)을 준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관통해 들어가면 우주적인 오르가슴을 얻을 수 있다.
이 우주적인 오르가슴은 영원히 유지된다.
한 남자가 외부의 여자와 만나고, 한 여자가 외부의 남자와 만난다.
이것은 매우 표피적인 만남이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즐거운 순간을 가져다 주긴 하지만
표피적인 만남에 지나지 않는다.
내면의 여성이 내면의 남성과 만나면...
그대 안에는 양성(兩性)이 다 들어있다.
그대의 한 부분은 여성이고, 다른 부분은 남성이다.
그대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양성적인 존재이다.
'부드(budh)' 라는 어원의 다섯 번째 의미는 '관통(penetration)'이다.
그대 내면의 남성이 내면의 여성을 관통할 때 만남이 일어난다. 그대는 전체가 된다.
하나로 합일한다. 이때 외적인 것에 대한 모든 욕망이 사라진다.
이 무욕(無慾)안에 자유가 있고 니르바나(涅槃)가 있다.
붓다의 길은 부드(budh)의 길이다. 305
이 '붓다(Buddha)' 라는 말이
고타마 붓다(Gautama the Buddha)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붓다'는 그가 도달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의 이름은 고탐 싯다르타(Gautam Siddhartha)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붓다가 되었다. 어느날 그의 보디(bodhi), 그의 지성이 활짝 피어났다.
'붓다(Buddha)'는 정확히 '그리스도(Christ)' 와 같은 뜻이다.
예수의 이름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란 예수에게 일어난 궁극적인 개화(開花)를 의미한다.
'붓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고탐 싯다르타 외에도 많은 붓다가 있었다.
모든 인간이 부드(budh)의 능력을 갖는다.
그러나 부드, 즉 볼 수 있는 능력은 그대 안에 씨앗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 씨앗이 움터서 거대한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고, 하늘 아래에서 춤추기 시작하면,
그 나무가 별들과 속삭이기 시작하면, 이때 그는 붓다가 된다.
붓다의 길은 지성(intelligence)의 길이다.
그의 길은 감성의 길(emotional path)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감성적인 사람들이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길이 있다. 헌신(獻身)의 길, 박티 요가(Bhakti Yoga)가 그들의 길이다.
그러나
붓다의 길은 순수한 기얀 요가(Gyan Yoga)의 길, 앎의 길이다.
붓다의 길은 사랑이 아니라 명상의 길이다.
부드(budh)와 마찬가지로 '기야(gya)'라는 또 하나의 어원이 있다.
'기야'를 어근으로 하는 단어들이 있다. 먼저, '기야남(gyanam)' 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기야남'은 인식(cognition), 앎을 의미한다.
지혜를 뜻하는 '프라즈나(prajna)' 라는 단어가 있고,
초월의 지혜를 뜻하는 '프라즈나파라미타(prajnaparamita)' 라는 단어가 있다.
또는
지각(知覺) Perception), 감수성(sensitivity)을 뜻하는 '상기야(sangya)' 라는 단어가 있고,
의식을 뜻하는 '비그야남(vigyanam)'이라는 단어도 있다.306
이 단어들은 '기야(gya)'라는 어근(語根)에서 파생했다.
'기야'는 앎을 의미한다.
그대는 이 반야심경뿐만 아니라
붓다의 모든 경전에서 이 단어들이 수없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몇 개의 다른 단어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 단어들 중에 '베드(ved)' 라는 말이 있다.
베드'는 앎을 의미한다. 힌두교의 '베다(veda)' 라는 말도 이 '베드'라는 어원에서 나왔다.
그 밖에 마음을 뜻하는 '만(man)', 마음에 새기는 것을 뜻하는 마난(manan)',
의식을 뜻하는 '치트(chit)'와 '차이탄야(chaitanya)' 등의 단어들이 있다.
붓다의 길에는 이런 단어들이 포장석(鋪裝石)처럼 널려 있다.
그의 길은 지성의 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명심하고 넘어갈 사실이 있다.
이 경전은 지적 능력(intellect)을 훨씬 넘어선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은 지적 능력을 따라서 가는 길이다.
지적 능력이 그대를 데리고 갈 수 있는 한도까지 가야 한다.
지적 능력은 사용되어야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 능력은 초월되어야 하는 것이지 제거의 대상은 아니다.
그리고 이 초월은 그대가 사다리의 가장 높은 칸에 도달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대는 지성 안에서 계속 성장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지성이 제 할 일을 다 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지성에 작별을 고하라.
지성은 오랫동안 그대를 도와주었으며 그대를 멀리까지 데려다 주었다.
지성은 훌륭한 교통수단이었다. 지성은 그대를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준 배였다.
이제 그대는 반대편 기슭에 도달했다. 이젠 배를 버려야 할 때이다.
배를 머리 위에 이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붓다의 길은 지성을 통해 가면서도 지성을 초월한다.
지성이 그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어버린 순간이 온다.
그때에
지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307
이젠 지성 또한 버려야 할 때이다. 지성은 제 역할을 다했다.
병이 완쾌되면 약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된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병이 완쾌된 다음에도 약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발에 가시가 박혀 고통스러울 때
그대는 다른 또 하나의 가시를 이용해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낸다.
일단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낸 다음에는 두 개의 가시 모두를 버린다.
가시를 빼내는 데 도움을 준 또 하나의 가시를 보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지성의 역할은
그대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일단 지성의 역할이 완수되고 그대의 존재가 드러나면
지성이라는 도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대는 지성에 고마움을 전하고 작별을 고한다.
붓다의 길은 지성을 초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길은 지성의 길, 순수한 지성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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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오쇼라즈니쉬 강의(손민규 옮김)『반야심경』초판2쇄;서울:태일출판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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