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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던 미국 생활에서의 문화 충격
최순돈 / 신소재공학
1. 1970년대 중반
서울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76년 3월 영남대학교 금속공학과에 “전임대우”로 발령을 받아 강의하게 되었다. 가지고 있던 옛날 자료를 살펴보니, 이인기 총장님의 임명장이 보였다. 그 당시 전국에서 최고 봉급이 월 30만원 정도인 것을 보면 영남대학교 전임대우의 봉급이 전국에서 최고 수준인 것 같다.
그땐 나이가 어렸고 고등학교 동기 중 33명이나 영남대에 재학생으로 다니고 있었으며, 금속공학과의 재학생 중 군에 갔다 온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난번 내리사랑 치사랑에서 “고맙고 친구 같은 제자들”에 실려있다. ]
2~3년을 근무하다 보니 이렇게 편하게 지내다간 박사학위 취득이 힘들겠다 싶어 유학을 결심하였다. 그 당시는 미국에 유학 가는 것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이었으나 미국대학들의 등록금과 생활비가 만만하지 않은 상황. 그래서 수소문 끝에 1977년부터 “국비 유학생 지원제도”가 있음을 알고 1978년에 지원하였다. 그 당시 전국에서 49명이 합격했으며, 대부분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국비유학한림원의 자료에 의하면 초기에는 국비로 대부분 미국으로 유학하였지만, 그 뒤로는 유럽, 중국, 러시아에 유학을 가신 분도 꽤 있었다. 미국대학에 apply 하니 여러 대학에서 지원을 받아주었다. 그 당시 미국의 도시 중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곳으로 미국 자동차 판매량의 90%를 차지하는 '빅3' (포드, GM, 크라이슬러)의 본거지로서 자동차 산업의 중심인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이었다. ( 지금은 모두 몰락. 대부분 자동차 산업은 미국 남부 지역으로 감. ) 그래서 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로 유학을 결심하였다. 국비 유학생 지원제도에는 유효기간이 있어 그 기간을 지나면 유학을 갈 수 없었다. 급하게 이인기 총장님의 주례로 결혼하고 난 일주일 후 1980년 1월 말에 나만 홀로 미국에 갔다. 그 당시는 미국의 입국 절차가 유별나게 까다로웠기 때문에 아내는 8개월 후에 미국에 입국했다.
2. 미국 유학 시절
미시간대학에 도착하여 방을 구하려니 국비 지원은 아직 못 받았고 방값이 아주 비싸서 누구와 같이 거주할 수 있는 방 2개인 아파트를 찾아보았다. 마침, 방이 2개이고 방 한 개를 누군가가 이미 사용하고 있는 아파트를 찾아 계약하였다.
입주하여 미국인 roommate를 만났고 그의 이름은 J. Solovy (존이라고 부름). 학부는 역사전공. 그 당시 미국과 한국의 생활 방식이 워낙 달랐지만, 같이 지낸 덕분에 영어를 많이 배우게 되었고 재미난 시절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매월 초에 지난달의 전기료와 전화비 등을 내는데 존은 미국식으로 자기에게 온 전화, 나에게 온 전화 등을 하나하나 따져서 전화비를 나누고, 마찬가지로 전기료도 아파트 안에서 지낸 일수로 1센트(cent) 단위까지 나누어 계산하고 있었다. 존은 외식을 같이 나갈 때도 밥값을 각자 계산하자는 식이었다. 그 당시 한국은 그런 문화가 아니었길래 같이 지낸 두 달 후 나는 “야! 이번 달 전화비는 내가 다 낼게. 너는 내지 마!” “이번 외식값은 내가 전부 낼게.” 등등 몇 번을 내가 전부 계산했더니 그도 버릇이 들어 “오늘 식사는 내가 대접할 테니 나가자”라고 하며 응대해 주었다. 존 덕분에 저녁에는 같이 학교 주변을 많이 구경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성문화가 워낙 보수적인 반면 미국은 성에 개방적이라서 그런지 그는 간혹 내가 방에 있는데도 애인을 데리고 와서 같이 자곤 했고, 때로는 둘만 있는 거실에서 간혹 옷을 거의 벗다시피 다니곤 했다. 그렇지만 대학이 있는 도시라 그런지 Ann Arbor는 밤에도 아주 안전했고 영화관에서 포르노 영화는 밤 12시 이후에만 상영되는 등 약간은 보수적인 도시였다.
미시간대학에서 처음 자동차를 구입하여 캠퍼스를 운전 중 깜짝 놀라는 일이 발생하였다. 학생들이 많이 지나는 길에 차를 잠시 정지하였더니 웬 젊은 여학생이 나의 차 위에 덜컹 올라타더니 “go to hot???”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중에 존에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같이 지내자는 뜻’. ‘내 참! 아무리 개방적이라지만....’ 그 여학생을 억지로 말린 후에야 그녀는 웃더니 차 위에서 내려와 사라졌다.
8개월 후 아내가 미국에 오자 나는 그 아파트에서 나와 학교 인근에 있는 아파트의 방을 구했고 간혹 존과 만났다. 존은 내가 그 아파트에서 나온 후 한 방에 침대가 2개 있는 기숙사로 옮겨 그의 룸메이트와 지내고 있었다. 간혹 놀러 가면 반가이 맞아 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존의 기숙사로 놀러 가니 그 옆의 침대에 존의 룸메이트와 그의 애인이 홀랑 벗고 서로 안고 누워 있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해 존에게 나가자 하니 “괜찮다”라고 하며 여유 있게 계속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참!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둘이 발가벗고..’ 그렇게 존과 친밀한 친구로 지내는 동안 형제처럼 정이 들었고 그가 다른 지역에 간 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 존의 소개로 인근 마을의 중년 남자와 만나 같이 대화를 나누는데 또 충격을 받았다. 그 남자는 아들이 1명 있는데 공부도 못하고 자기 말을 잘 안 들어 만 20세가 되면 자기 집에서 쫓아낼 거라고 말하였다. 그래도 자식인데.. “아들은 생활비 없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니, 본인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만 대답했다.
어느 날 대학원 수업 시간보다 일찍 강의실에 들어갔더니 우리 수업 이전에 학부 수업이 있었고 그 과목이 수학이었던 모양. 칠판에 sin 30o = 0.5라고 쓰여있었고 기타 수학 문제들도 우리나라 중학교 수준.... 현재도 그렇지만 미국대학 학부생들의 수학과 과학 실력은 한국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 그렇게 대학원 수업을 듣던 중 한국의 국비 유학생들과 주기적으로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유학생 두 사람이 서부 지역을 cross-country 할 계획이 있는데 경비 관계로 같이 갈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즉각 합류했다. 미시간에서 서쪽으로 가는데 보통 길이 휑 하니 아무 건물도 없고 최소 7시간 정도 가야만 우리가 원하는 목표 지점에 도착하곤 하였다. 그렇게 하여 록키마운틴 → 그랜드캐년 등 5개 국립공원 → 샌디에이고 → LA → 샌프란시스코까지 28일간 구경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랜드캐년을 구경하고 한참 운전 중 차가 산 위로 올라가는데 (고도가 상당이 높았음) 주위에 야생 곰을 자주 보게 되었다. 벌써 저녁이 되어 거기서 캠핑하였는데.. 텐트 치고 잘 때 실수로 먹을 것 일부를 밖에 놓아둔 게 실수.. 밤 늦게 야생 곰이 주위에 부스럭거리더니 그 음식을 먹는 소리가 들려 밤새도록 떨면서 지낸 적도 있다. 협곡이 많이 있는 어떤 지역을 통과할 때 큰 간판이 있길래 자세히 보니 “Indian Reservation”이라고 쓰여있다. 입구를 막아놓아 들어갈 수 없었는데, 그곳의 인디언들은 외부와 교류가 절단되어 감금된 채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우리 부부는 거기서 유학 중인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이후 28일간 여행으로 너무 지친 우리 부부는 먼저 비행기를 타고 미시간으로 돌아왔다.
박사 학위과정에서 전공 수업은 나에게 대체로 순조로웠다. 재료공학 중 가장 어려운 과목이 재료 열역학인데 수강생의 절반 정도가 일반 한국 학생들의 실력에 비하면 많이 미달이었다. 나는 영남대에서 재료 열역학을 3년간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그 과목이 아주 쉬웠다. 기말시험에서 수강한 대학원 학생들의 평균 점수가 25점 정도일 때 나는 96점을 받았다. 담당 과목 교수인 E.E. Hucke는 “어떻게 이렇게 잘할 수 있느냐?”라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드디어 박사과정 필수과정인 Qualifying examination을 치기 위해 미리 죽어라고 공부하였다. 그 당시 재료공학과에서 한국 유학생이 14명 정도가 Qualifying 시험을 치렀는데 그 결과 반만 통과하였고 시험에 통과 못 한 대학원생들은 다른 대학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Qualifying examination을 통과 후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 A를 지도교수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박사논문 실험 도중 교수 A의 상임 수석 조수인 일본인 Haru Wada와 의견 차이로 다툼이 자주 일어났고, 나는 더 이상 못 견뎌서 6개월 후 지도교수를 바꾸기로 하였다. Wada는 나에게 “지도교수 A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이 학과에서 제일 영향력이 크며 학부장도 맡고 있으니, 아무도 너를 지도교수로 받아주지 않을 거야. 만일 지도교수를 바꾸려면 다른 대학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라며 나를 조롱하였다. 고민 끝에 E. Hucke를 찾아가 지도교수로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즉각 “너 같으면 무조건 ok”. 그렇게 지도교수를 무사히 정하고 Hucke와 재미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수감사절에 Hucke가 나와 아내를 자기 집에 점심같이 먹자고 초청하였다. 주소를 보고 찾아가니 지도교수는 집 안에 있었고 대문 밖에서 웬 풍만한 여자가 나를 맞이했다. Hucke는 2번 이혼상태이므로 이 여자는 현재 애인인 모양..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웃으며 다짜고짜 내 등을 꽉 잡더니 자기 가슴에 꽉 안는 게 아닌가!!! ‘뭉클.’ 깜짝 놀라 급히 머리를 떼고 어찔어찔한 상태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우리 부부가 집 안으로 들어가서 앉아보니 지도교수 외에 아까 그 여자분과 젊은 남자 1명과 젊은 여자 1명이 둥근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나와 내 아내를 소개한 다음, 지도교수가 앉아 있는 세 사람을 소개하는데... 아까 풍만한 여자는 현재 자기 애인, 젊은 남자는 첫 번째 마누라 아들, 젊은 여자는 두 번째 마누라 딸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때가 1980년대 초반이라 한국은 아주 보수적인 때이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혼한 자식들 간은 철천지원수인 사이. 나와 아내는 그 자리가 불안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들은 깔깔 웃으면서 서로 어깨를 밀치면서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닌가??? ‘이건 뭐지?’ 우리 부부는 그 광경에 처음은 어색했지만, 나중은 그 분위기에 익숙해져 서로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하였다.
그렇게 즐거운 시절을 보내는 중, 나는 딸을 얻게 되었다. 딸이 태어날 때 제왕절개를 하였는데 미시간 병원에서 역대 2번째로 큰 4.5kg이었다. 출산 전 담당 의사가 정상분만이 힘들다고 했었다. 1984년 12월 14일 새벽 3시에 아내가 너무 고통스러워하길래 대학병원으로 급하게 갔더니 병원 입원실에서 간호사가 임시 조치를 해주었다. 그렇지만 아내는 조금 후다시계속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병원에서는 모르는 척...
그러다가 16시간이나 지나고 밤 7시쯤, 간호사가 오더니 이제 제왕절개 수술하려고 하는데 나보고 수술실로 같이 들어가겠느냐고 묻는다. 들어가겠다고 하고 수술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무려 10명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나중 한국인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그때 들어온 사람은 ‘그날 주치의, 평소 주치의, 마취 담당 의사, 수술 담당 의사, 소아과 의사 2명, 간호사 4명을 포함한 모두 10명’. ‘아이고 병원비가 엄청나겠구나’ 생각하고 수술실에서 기다리니 한참 후 제왕절개가 끝나고 소아과 의사들이 태어난 아기가 정상인지 아닌지 아기 몸을 여기저기 검사하더니 (미국은 비정상적인 아기가 많이 태어난다고 들었다) 수술을 끝냈다. 한국인 간호사에게 어떻게 바로 수술하지 않고 입원 후 16시간이 지나서야 수술하느냐고 물으니, 자연분만이 안되고 수술이 꼭 필요했다는 증거를 남겨야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며칠 후 의료비를 보니 그 당시 가격으로 1,300만원 정도.. 그 당시 미리 보험에 들어 놓았지만, 보험을 공제하고도 350만원이나 되었다. 그때 한국에서 최고로 높은 연봉이 360만원 정도였는데.. 하는 수 없이 한국의 주소를 남기고 귀국하여 장문의 편지로 깎아 달라고 하니 100만원만 내라고 하며 깎아 주었다. 이렇게 귀한 딸을 낳았으므로 수표 100만원을 부쳤다. 귀국 하여 2년 후 영남대학교 병원에서 똑같이 제왕절개로 아들을 낳았는데 의료비가 모두 25만원 나왔다. 그리고 아내는 수술 후 아무런 후유증도 없고 잘 활동하고 다녔다. 그제야 우리나라 의료 기술이 세계 최고이며 의료비도 아주 저렴함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논문을 완성하고 발표가 가까이 닥쳐왔다. 박사과정에서 논문의 심사는 최소 3번 진행되는데 지금 생각하면 또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다. 전번 지도교수 A의 분야가 내 박사논문의 전공 분야와 비슷하므로 심사위원으로 교수 A를 넣었더니 현재 지도교수인 Hucke는 “내 생각은 (전) 지도교수 A를 심사위원에서 빼는 게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바보 같은 고집으로 교수 A를 심사위원 명단에 넣었다. 그런데 3번의 논문 발표 내내 교수 A가 아주 사소한 내용으로 사사건건 물고 넘어지지 않는가? ‘내 참!!’ 드디어 2번째 발표 때 사건이 터졌다. 전 지도교수 A가 사소한 내용을 문제 삼아 물고 늘어지자, 내 지도교수 Hucke는 드디어 화를 크게 내면서 “최순돈군은 내가 아는 학생 중 가장 우수한 학생이고 한국에 가서 이 분야에 크게 기여할 학생이고 논문도 우수한데 아무것도 아닌 내용으로 그렇게 물고 넘어지면 돼느냐??!!!!”고 말하니 (전) 지도교수 A도 맞서서 고함을 질렀다. 서로가 고함 지르며 싸우는데.. ‘저렇게 두 교수가 격하게 싸우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나인데..’ 나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학과의 전체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보는 앞에서 최종적으로 논문 내용을 발표하는데 (전) 지도교수 A가 보이지 않았다. 발표를 끝내고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Hucke가 부르길래 갔더니 내 논문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보여주었다. 교수 A의 평가만 빼고 모두 평가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전) 지도교수 A의 평가를 보니 ‘내 참!!’ ‘not exciting subject’ 그러나 점수 평가는 보통 이상으로 주었다.
박사학위 취득 후 지도교수인 Hucke가 미국의 좋은 곳에 직장을 구해준다고 하였지만 나는 거절했다. 돌이켜 보면 미국의 생활이 즐거웠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이 불편한 점들도 많았다. 내가 느낀 미국이 한국에 비해 나쁜 점 3가지... 첫 번째 의료비가 워낙 비싼 것. 위에서 언급된 내 딸을 낳을 때 미국은 보험 공제하고도 350만원, 한국은 25만원 정도. 두 번째는 총기 소유. 간혹 들은 이야기로는 초등학교 학생조차 학교 내에서 총을 발사한 적도 있다고 한다. 세 번째는 미국의 땅이 워낙 넓어 부부가 같은 지역에서 직장을 다니는 것이 어려운 상태. 의사처럼 이동이 쉬운 직업은 관계없지만 그 외 직종은 부부 중 한 명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면 이혼하는 것이 다반사. 예로 LA에서 부부가 같이 살다가 그중 한 명이 뉴욕으로 발령 나면 일 년에 서로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운 형편. 공무원들은 국가에서 같은 지역에서 일을 하도록 배려해 준다고 하지만... 한국은 한 명은 서울에 살고 다른 한 명은 부산에 살아도 주말부부가 가능하다. 언젠가 펜실베니아의 농촌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유학생들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 할아버지는 나에게 한국은 3대가 같은 집에서 살고 있으니 무척 부럽다고 하였다. 자기 자식은 LA에 있는데 일 년에 단 2번 “I love you”라고 전화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게 무슨 사랑이냐?”라고 반문한다. 또한 그는 도심지에서 약간 벗어난 외곽에 사는데, 그 지역의 집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나이 많은 노인이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그 지역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 오후 늦게 집 밖의 의자에 앉아 석양을 멍하니 쳐다보는 데 그렇게 수년을 지내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을 때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친다고 하였다. 이유는 그 집에 우편물이 쌓이기 때문... 그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고독사’ 상태.
3. 영남대학교 교수 시절의 안식년 기간
1985년 1월 학위를 끝내고 영남대학교에 다시 복귀한 후에도 지도교수 Hucke와 룸메이트였던 존과 전화를 하기도 하고 편지도 주고받았다. Hucke에게 전화하니 그 당시 만난 식구들은 모두 서로 헤어지고 새로운 애인과 대서양에서 배를 타고 즐겁게 지낸다고 하였다. 나는 Hucke에게 한국에 놀러 오라고 하며 한국의 어디를 구경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휴전선”이라고 대답했다. ‘웬 휴전선??’ 하긴 전 세계에서 같은 민족이 분단된 나라가 한국밖에 없고 그 지역을 가본 한국 사람도 극히 일부분... 그 뒤 휴전선 근방에 북한에서 땅굴을 파는 사건이 발생해 휴전선 근방에 가볼 기회가 생겼는데, 가서 보니 전망이 아주 좋았다. 그 뒤 Hucke는 샌디에이고로 거주지를 옮긴 후 연락이 끊어졌다.
영남대에서 근무 중 존에게 전화하였다. 존은 학부 졸업 후 law school에 가서 변호사로 시애틀에서 근무 중이라고 하였다. 그러던 중 1997년 7월 안식년일 때 국비 지원으로 미국 Indiana 주 West Lafayette에 있는 Purdue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1997년 말에 IMF 사태가 발생하였다. 나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습관이 되었던 터라 IMF 전에 국비를 미리 전부 받아놓았길래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타격은 없었다. 그렇게 퍼듀대학에서 재미나게 보내는 중 자동차 사고가 발생하였다. 언덕길에서 약간 속력을 줄이는 데 뒤에서 한 젊은이가 운전하던 차가 내 차를 들이박고 도망을 가 버렸다. 경찰에 신고 후 며칠이 지났는데.. 그 친구가 거꾸로 나를 고발한 것.. 하는 수 없이 존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결국 흐지부지 그 사건이 끝나고.. 귀국 날짜가 가까워져 오는데 존이 시애틀에 있는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전화하였다. 한두 번 정도는 예의로 말하는 줄 알았는데, 3번째 전화 오니 가기로 결심했다. 시애틀에서 머무를 방을 구하다가 현지에 도착해서 찾기로 하고 귀국 2주 전에 우리 가족 4명 모두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로 가서 존의 집에 들렀다. 그런데 그가 자기 집 열쇠를 주는 게 아닌가? 그가 하는 말 “I am rich. 여기서 얼마든지 너의 집 같이 오래 머물러도 돼! 그리고 여기 시애틀에서 같이 놀러 다닐 때 사용하는 경비는 내가 모두 낼 테니까 너는 내지 마!!!”. ‘이런!! 이젠 완전 한국식으로 생각이 바뀌었네..’ 두 가족이 일주일 동안 시애틀을 한 바퀴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 후 우리 식구는 인근 국립공원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차를 렌트하여 Glacier National Park에 들려 멋진 계곡을 구경하고 Yellowstone National Park에서 자연 용출 분수를 보면서 일주일간 캠핑하고 돌아와 존의 집에서 2박 한 후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번 편지를 주고받았다.
2025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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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옥고 감사드립니다. 연말연시라 일정이 바쁘다고 걱정하시면서도 예상보다 일찍 서둘러 주심에 감동했습니다. 글을 보내시면서, 수정부탁 한다고 하셨는데, 구조도 철저하고, 또 솔직하고- '너무 솔직했나'라고 반문도 하셨지요-.., 그리고 세밀하게 기억해 내셔서 읽는 이들이 자신이 겪었던 경험들을 기억해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글의 기능 완벽 수행??!!..... 글쓰는 것은 집짓는 일과 같다고 합니다. 편집위원장이 졸라서 했던, 주제가 정해지면, 구조를 설계하고, 그곳에 가장 알맞는 '언어의 벽돌'을 갖다 채우는 체계적인 작업이라고들 합니다. 교수님이 사용하신 구조나 벽돌이 ..... 역시 공과대학 교수님이시라서 설계와 사용하신 소재가 틈이 없구나 싶었습니다. 지난 <사제동행> 글을 쓰시고는 "이런 글 처음 써본다"라고 하시더니, 이번 글을 내시면서, "덕분에 글 쓰는 게 점점 익숙해진다"라고 하셔서, 정말 반가왔습니다. 이번 글에서 남겨 놓은 내용으로 곧 또 세번째 글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글을 쓰는 필자나 글을 읽는 동료나, 댓글을 다는 사람들,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의 글쓰기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