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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자양분 대구고등 3년
이 상 욱(법학전문대학원)
옛말에, 늙으면 지난날을 많이 그리워한다고 했던가(人老多懷舊). 70을 넘고 보니 옛날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일이 잦아지는 듯하다. 라틴어 격언에도 「노년은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게 한다(Senectus praeterita in memoriam reducit)」고 하였으니, 늙으면 자연히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듯하다. 중국의 옛시인은, 「내 젊었던 시절 돌이켜 보면, 늘 신이 나고 즐거웠다(憶我少小日, 易爲興所牽. : 東園玩菊. 白居易.)」라고 회상했으며, 「인생살이 고작 백 년 남짓, 덧없이 훌쩍 지나가 버리니, 우선 몸이 편안하고 한가한 것이 중요하고, 그다음으로 마음이 즐겁고 쾌적해야 한다(人生百年內, 疾速如過隙, 先務身安閒, 次要心歡適. : 詠懷. 白居易)라고 읊으며, 즐겁고 쾌적한 노후 생활을 강조하였다. 특히, 나이가 들어 즐길 수 있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회상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앞만 바라보느라 별 관심을 두지 못했던 「회상의 즐거움」이 나이가 드니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회상에의 탐닉은 「삶이 어떻게 끝날지 몰라서 두렵다」는 확실한 사실에 더 이상 맞서 버틸 필요가 없을 때, 더 즐거운 일이 된다고 하였다(빌헬름 슈미트, 나이든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 장영태 옮김, 책세상., p.70).
사설이 길었지만, 내 경우 가장 먼저 떠 오르는 회상의 즐거움은, ‘처음으로 고향 집을 떠나 객지에서 공부하던 고등학교’ 시절이다. 서울에서 응시했던 고등학교 합격자 발표날, 공고된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자, 동행한 그 학교에 재학 중이던 중학교 두 해 선배가 ‘臥薪嘗膽’ 네 글자를 써주며 격려하는 바람에 그에 고무되어 집에 내려오지 않고 한 해 더 해보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어머니는 중학교 졸업앨범을 가져가 사진을 찍어 대구고등학교에 원서를 제출하고는 전보를 쳐서 시험에 응하게 하셨다. 부랴부랴 시험 하루 전날 완공된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속버스(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단정한 제복을 입은 안내양의 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며 어둑어둑해지는 해 질 녘에 대구에 도착하여, 낯설고 생경한 대신동 버스정류장에 내렸던 기억도 선명하다. 사실, 대구고등학교와의 첫 만남은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시골 상주에서 서울로의 진학에 실패하여 아릿한 가슴을 안고 대구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던 날, 아! 그날의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첫 시간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에 우르르 떼거리로 몰려나와 ‘5번 답이 뭐고?’, ‘문제가 와이래 헷깔리노!’ ‘야! 12번 답이 3번 맞나?’ 등등, 시험 시간이 마칠 때마다 삼삼오오 복도에 모여서 종일 소란을 피우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그 전 서울 시험장에서는 수험생 모두가 한 시간을 마쳐도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앉아 조용히 다음 시간을 준비하는 숙연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3월(1971년), 한 줄 굵은 흰색 테두리의 청색 울모 모자에, 오각형 푸른색 뱃지를 달고 대구고등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듣는 미토콘드리아의 모습을 붉은색 푸른색 분필로 화려하게 칠판에 그려주신 생물 선생님(1학년과 2학년 담임을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평소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셨고, 잔소리라고는 일절 하지 않으셨다. 다만,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종례 시간으로 기억되는데,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셨던지 한 학생을 앞으로 나오게 한 뒤, “할 말 있나?”라고 물으셨다. 그 학생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교단 위로 올라오게 한 후, 칠판을 마주 보고 두 손을 칠판에 얹어 비스듬히 서게 하고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밀대 걸렛 자루로 엉덩이에 빳따를 치신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은 그 후에도 아마 몇 명의 학생을 상대로 서너 번은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는 평소의 선생님 인품으로 미루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어서인지 그 배경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맞은 학생도 별다른 불만이 없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은 교육에 대한 소신과 철학이 분명하셨던 것 같다.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시내 어느 중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봉직하고 계실 때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 적이 있는데, 얼마 후 지병으로 예순을 못 넘기시고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삼가 명복을 빕니다).
듬직한 몸집에 비해 실눈이시지만, 잡담 한마디 하는 법 없이 한 시간 내내 어려운 방정식 문제를 척척 풀어 주시면서, 실전 수학 문제 풀이 능력을 한층 더 높여주신 수학 선생님. 중간고사 때, 선생님께서 출제하신 수학 문제를 모두 다 풀었었는데, 선생님은 100점을 주시지 않고 99점을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왕년에 서울대학교 수학 시험 문제를 2문제나 적중하셨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3학년으로 올라가던 해에 시내 유명 학원에 스카웃 되셔서 학교를 떠나셨다(그 뒤부터 수학에 대한 나의 흥미와 관심은 반감되었다). 2학년에 올라갈 때 나는 문과를 지망하였다(법대를 가야 한다는 부모님의 무언의 압력이 있었다). 그런데 1학년 말에 교과서를 받아보니 이과반 수학 교과서가 문과반이랑 너무 차이 나게 두꺼워 보여,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과반으로 가겠다고 변경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과를 지망한 다른 학생이 문과로 오겠다고 희망하여야 서로 교차 변경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그 말씀에 무척 낙담하여, 주위에 문과반으로 갈 친구가 없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가까이 지내던 같은 반 친구가 자신은 이과반을 신청했지만 나를 위해서 기꺼이 자청하여 문과반으로 옮기겠다고 하여 의외로 쉽게 이과반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 친구에게 무척 고마웠는데, 아쉽게도 이후 학교에서 그 친구를 볼 수 없었다(그 친구는 2학년에 올라오지 않고 이웃 학교로 갔으며, 훗날 국회의원을 여러 번 하고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역임하였다).
그 시절 정규 수업과 관련된 선생님들이 회상된다. ‘밑이 터진 꼬장주란 바지는 연산군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수업 시간 1년 내내 그렇게 강조하시던 국어 선생님. 얼굴에 주름은 많았지만 헌칠한 키에 시골 할배 마냥 푸근한 인상으로 칠판 글씨도 길죽길죽하게 쓰시던 지리 선생님.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즉흥적으로 수업과 전혀 관계없는 질문, ‘지네를 영어로 무엇이라고 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조금도 당황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앞에 앉은 학생의 영한사전을 잠깐 보자고 하시더니 이내 명쾌하게 답을 해 주시던 영어 선생님. 우린 그 선생님을 약간의 경외심을 섞어 ‘모노’라고 불렀다(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졸업하던 해 경상남도의 어느 대학 교수로 부임하셨다). 늘 장난기가 넘치는 표정에 마냥 스키타이 기마 민족을 강조하시던, 미간에 있는 큼직한 검은 점이 인상적이었던 국사 선생님. 문제 풀이 보다 깔끔한 서체의 필기와 이론적인 설명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시던 미적분 선생님(약간은 지루한 수업이었지만, 별 모양을 예쁘고 정확하게 그리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한 학기 내내 친구의 엉덩이 밑으로 머리를 처박고 스크럼을 짜게 하며 럭비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가르쳐주신 체육 선생님(이따금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모든 학생의 눈을 감게 한 후, 1분이 지났다고 생각하면 손을 들라고 하는 등, 약간은 철학적인 면모도 있었지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갈 때, 몰래 기차 안에서 담배 피우는 학생을 잡겠다고 눈을 부라리며 이 칸 저 칸 다니시던 모습은 보기 민망했다). 전혀 군인 같지 않아 ‘공자’라고 불렀던 교련 선생님. 늘 넥타이 차림의 정장을 입으시고 근엄한 표정으로 국민윤리를 가르치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련 선생님으로 전락(?)하시어 국방색 군복을 입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던 국민윤리 선생님. 성악을 전공하셨던지 피아노는 잘 치지 못하셨지만, 헨델의 라르고(Ombra mai fu) 등 가곡은 열심히 가르쳐 주신 음악 선생님.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쓰면 영락없는 멕시코 시골 사람 같은, 배도 불뚝하고 약간은 코믹한 풍모에 집중력마저 떨어지는 무미건조한 수업을 하시면서, 거의 매시간 수업 태도가 불량하다고 판단되는 학생을 앞으로 불러내서는, “니, 와 단추가 열렸노”(그 암구호는 매번 바뀌어 불려 나온 학생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 한마디에 학생이 머리를 약간 숙이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퍼벅 소리와 함께 양 볼때기에 불이 번쩍 나게 순식간에 양손을 휘두르시는 초능력의 소유자 영어 선생님. 우린 그 선생님을 ‘산쵸’라고 불렀다. 지구 중심부에는 마그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림을 그려가면서 알려주셨던, 작은 키에 코는 큼직했던 지학 선생님. ‘아보가드로 법칙’만큼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화학 선생님. 우리 앞에서 너무 수줍어하셨던지 작은 목소리라 수업 내용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던 물리 선생님. 늘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으셨던, 젊고 상당히 세련된 모습의 기술 선생님은 수업 시간 중에 자주 우리에게 토론할 기회를 제공하셨다. 이를테면, 수업 시간에 즉흥적으로 당시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경부고속도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얘기해보라고 하셔서 학생들이 앞다투어 진지하게 발표했던 적도 있다. 3학년 때 담임이셨던 영어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시고 곧바로 오신 듯, 가르치시려는 의욕이 지나치게 넘쳐 유사한 관용구나 단어를 무척 많이 칠판에 나열해 주셨다(선생님께서도 우리가 졸업한 지 몇 년 후 대구의 모 대학교수로 부임하셨다). 3학년 때의 국어 선생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시다. 2년간 접했던 약간은 황당했던(?) 수업과 달리, 정말 ‘국어란 이런 것이구나!’를 실감하게끔 착실한 수업을 진행하셔서 은근히 국어 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하였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선배들 때부터 ‘오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셨는데, 사통팔달 막힘이 없는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로서, 늘 검은 뿔테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빛이 번득이셨다. 특히, 선생님 특유의 약간은 느릿하면서도 인자한 음성으로, ‘천자문의 마지막 글자가 무엇인지 아느냐?’ ‘어조사 야이다’라고 하시면서 칠판에 ‘也’를 큼직하게 써주시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avoir 동사와 être 동사 변화를 아예 달달 외우도록 채근하신 불어 선생님. 당시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셔서 졸업과 동시에 우리 학교로 부임하셨다고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학기 중에 아기를 출산하셨는데, 우리는 그 아기는 태어나면서 ‘꿸레르 에띨(Quelle heure estil : 지금 몇 시냐)’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1983년,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 가톨릭대학교)에서 결혼을 조건으로 한 해 유보되었던 전임교수 발령을 받았을 때, 선생님도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시게 되어 입사 동기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사실 우연히 불어반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때 선생님 덕분에 기초를 철저하게 다지게 된 불어 공부는 계속 연면히 이어져 대학원 진학할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지망하는 득을 보았고, 그 후 프랑스 민법을 연구하는 계기가 되면서 어쭙잖게도 손꼽히는 국내의 프랑스 민법 연구자라는 과분한 호칭까지 듣게 되었다. 조금 더 부언하자면, 1996년 프랑스를 다녀온 뒤, 당시 프랑스 판례가 선도적으로 인정하게 되면서, 상당한 논의를 거쳐 입법으로 연결되어 결국 프랑스 법에 명문으로 규정된, ‘계약체결 전의 정보제공의무(L'obligation précontractuelle de renseignement)’에 관한 법리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이어서 1999년 6월, ‘민사판례연구회’에서「채권자의 보증인에 대한 신의칙상의 고지의무」를 발표하였는데〔민사법학 제18호(2000.5.)에 게재됨〕, 그 내용이 도화선이 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보증인 보호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2008년 3월 21일)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2015년에는 민법전에 ‘채권자는 보증계약을 체결할 때 보증계약의 체결 여부 또는 그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채무자의 채무 관련 신용정보를 보유하고 있거나 알고 있는 경우에는 보증인에게 그 정보를 알려야 한다’는 내용의 「채권자의 정보제공의무와 통지의무(제436조의2)」가 명문으로 규정되었다. 그뿐만 아니다. 영남대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맞게 된 세 차례의 연구년 중, 두 번을 프랑스 Lyon Ⅱ 대학(어학연수)과 ParisⅠ 대학 및 Cergy-Pontoise 대학에서 연구 교수의 신분으로 생활하게 된 행운(1995년 6월 ~ 1996년 8월, 2017년 8월~ 2018년 8월)까지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정규 수업 이외에도 특별한 추억이 더 있다. 먼저 1학년 초라고 기억되는데, 어느 날 교장 선생님께서 우리 반 수업을 맡아 교실에 들어오신 적이 있었다. 어느 과목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담당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유고로 대신 들어오신 듯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지금의 나보다 더 대머리였는데 무척이나 인자한 모습이었다. 전에는 수학 선생님이셨던지, 칠판에 ‘ax + b=0일 때, x=?’ 이라는 수식을 쓰시고 우리를 돌아보셨다. 나는 내심 뭐 이런 쉬운 문제를 하며, 별다른 생각 없이 ‘x는 마이너스 a 분의 b 아니야?’ 라고 중얼거렸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대 반전이 일어날 줄이야. 교장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a가 0이냐 아니냐’부터 먼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그제야 나는 ‘아차!’ 하는 탄식과 함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부끄러웠다. 나름 그래도 수학은 좀 한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던 차에 멋지게 한 방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대학의 강단에서 법학을 강의하게 되면서, 사례(case) 문제를 접할 때 요구되는, 이른바 ‘legal mind’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수식을 사용하게 될 줄이야. ‘a가 0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바로 그 논리가 사례 문제에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주요 쟁점을 정리할 때 꼭 유념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인용하였다. 이를테면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내가 받으러 가야 하나, 아니면 친구가 갚으러 와야 하나’라는 간단한 문제를 두고(물론 요즈음은 송금으로 해결하지만), 쉽게 답하려 하지 말고, 한 템포 숨을 들이쉬고, 먼저 돈을 빌려줄 때 친구랑 어떻게 약속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면(0이 아니라면) 민법의 규정상 친구가 갚으러 와야 한다는 식이다(우리 민법은 지참채무를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민법 제467조 제2항). 즉 ‘a가 0이냐 아니냐’를 살펴야 하듯,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이 내용은 ‘고시연구’ 2002년 4월호에 게재되었는데, 그 후 2008년에 출간된 ‘법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전재하였고, 또한, 2021년 8월 ‘정년퇴임 기념 피아노 독주회’에 참석하신 분들에게 나누어 드린 글 모음집, ‘논문쓰고 강의하고 설거지하고 피아노치고’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 하나의 추억은 안병욱 교수님의 특강이다. 어느 날 모두 강당으로 모이라고 해서 아마도 1학년 모두가 우르르 몰려갔는데, 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님이셨던 안병욱 교수님의 강의가 있었다. 당시 연세대학교의 김형석 교수님과 안병욱 교수님은 쌍두마차처럼 살아가는 지혜나 처세술 등과 관련해서 에세이 풍의 가벼운 책을 많이 내셨는데, 전국으로 강연도 다니셨다. 똥똥한 단구에 까만 사각형의 큼직한 뿔테 안경을 쓰신 풍모의 안 교수님은 강연 첫머리에 대뜸, ‘The most important thing to learn in life is How to Live’라고 칠판에 쓰셨다. 그리고 난 후, 졸업의 여신이 여러분의 문을 베토벤의 ‘운명’처럼 쾅쾅쾅 칠 때, 여러분은 문을 열고 그 여신의 바구니에 무엇을 담아 줄 것이냐는 질문을 하셨다. 무엇인가 꼭 담아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나아가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죽음의 여신이 역시 쾅쾅쾅 문을 두드릴 때, 그 바구니에는 무엇을 담아 줄 것인지 잘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겐 그 문구가 가슴 깊이 와닿았던 듯하다. 그 후에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집에 뒹굴던 ‘The Use of Life(John Lubbock)’란 책을 집어 들다가 위의 글은 그 첫머리에 나오는 문장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강단에 서게 된 후, 신입생을 맞이하는 첫 강의 시간에는 예외 없이 위 문장을 소개하며 역시 똑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어떻게 살 것인가!(How to Live!)’. 여러분들은 대학 4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등등. 사실 이 화두는 지금까지 나 자신에게도 여전히 유용한 질문이지만, 39년하고도 6개월(효성여자대학교 8년. 영남대학교 31년 6개월) 내내 첫 강의 시간에 한 학기 과목의 운용 계획과 개략적인 내용을 소개한 후, 어쩌면 주제넘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어김없이 곧바로 이 이야기를 인용하곤 하였던 것이다(이 내용은 ‘How to Live’라는 제목으로 2004년 3월 2일 ‘영대신문’에 게재하였다).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그 시절 학교 오갈 때 탔던 시내버스가 떠 오른다. 아양교 앞에서 탔던 입석 버스(좌석버스는 비싸서 탈 엄두도 내지 못했다) 126번과 127번 버스는 늘 학생들로 붐볐다. 유니폼을 입고 모자까지 갖춘 버스 안내양이 양손으로 차 문의 끝을 잡고 온몸으로 밀면서 문을 닫을 때, 버스 옆구리를 손으로 탕탕 치면서 “오라이”라고 외치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버스를 탈 때는 그래도 비교적 여유가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버스 안은 교복으로 가득 차서 몸을 돌릴 수도 없었다. 버스가 경명여고를 지나고, 제일여상과 경북여고를 지나면 버스 안이 제법 헐렁해지는데, 나는 명덕 로타리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야 했다. 3년을 똑같은 시간에 버스를 타다 보니 눈에 띄는 경북여고 여학생도 있었다. 나보다 한 학년이 낮은(그때는 학년에 따라 머리 모양이 달랐다), 무척 착하게 보였던 그 여학생은 늘 허둥지둥 버스를 탔다. 어떨 때는 교복 치마의 흰 옆줄이 3분의 1가량 떨어져 아래로 처져 있었는데, 아마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 외모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가보다 여겼다. 나는 3년을 언제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시간에 등교하였다. 그러다 보니, 졸업을 앞두고 한 친구가 말하기를, 경북여고에 다니는 같은 학년의 4촌 누이가 있는데, 아침에 학교로 걸어가는 길에 늘 마주치는 대구고등 학생이 한 명 있다면서, 그 학생과 마주치게 되는 지점에 따라 그날 등교하는 시간이 빠른지 늦은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모자는 눌러쓰고 앞만 보며 빠르게 걷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는 모르겠다).
집에 올 때는 친구들이랑 길을 건너 명덕 로타리까지 걸어왔는데, 그 중간쯤에(지금의 성 토마스 성당 부근으로 기억된다) 젊고 예쁜 두 자매가 운영하는 우유 가게가 있었다. 가끔 우유를 한 잔씩 사 먹었는데, 늘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서 팝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때 처음으로 팝송 「Top of the World」를 들었으며, 이내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때 그 발랄하던 두 자매가 생각나곤 한다. 가사를 조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Such a feelin's coming over me / There is wonder in most every thing I see / Not a cloud in the sky, got the sun in my eyes / And I won’t be surprised if it’s a dream / Everything I want the world to be is now coming true especially for me / And the reason is clear it’s because you’re here. You're the nearest thing to heaven that I've seen / I'm on the top of the world lookin' down on creation ~”
추억은 우리 안에 남아 우리의 뇌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작용하고 사고방식이나 체계를 자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추억은 소년 시절의 여름을 소환하는 어떤 노래, 홍차에 푹 담근 마들렌의 맛에 힘입어 되살아날 수 있다.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의 말마따나 추억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안에 “존속된다”(샤를 페팽, 삶은 어제가 있어 빛난다, 이세진 옮김, 푸른 숲., pp.30-31).
이제 졸업한 지 50년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대구고등학교 3년은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회상의 즐거움과 함께 실로 내 인생의 큰 자양분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Memoria est thesaurus omnium rerum et custos.”(Marcus Tullius Cicero)
: 기억은 모든 것의 寶庫이자 수호자이다. -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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