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내편>
제물론: 만물은 동등하다
3-1 그것들1)이 아니면 내가 없고, 내가 아니면 그것들이 의지할 것이 없다. 이 말은 진실에 가깝지만 나는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2 참된 주재자2)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조짐을 찾을 수 없고, 작용은 아주 분명하지만 그 형체는 볼 수 없으니, 작용의 실상은 있으나 그 모습은 없다.
3 인간의 몸은 백 개의 뼈와 아홉 개의 구멍과 여섯 개의 내장을 갖추고 있는데, 나는 그 중 어느 것과 친한가? 그대는 그것들 모두를 똑같이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 중 어느 하나를 특별히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 모두를 임금이 아끼는 신하나 사랑하는 첩으로 여겨서 똑같이 좋아하는가?
4 그런데 신하와 첩은 역할이 다르므로 서로를 다스리지는 않는다. 그러면 그것들이 돌아가며 서로 임금과 신하가 되어 우리 몸을 다스리도록 한다 해도, 우리 몸을 다스리는 참된 임금이 따로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참된 임금의 모습을 찾든 찾지 못하든 간에 그 임금의 참됨에는 아무것도 더하거나 빼지 못한다.3)
5 그러니 일단 온전한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났으면 그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이 자연히 죽기를 기다리자. 그런데도 사람을 서로 해치고 서로 쓰러뜨리면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마치 말 달리듯 빨라서 어느 누구도 이를 멈추게 할 수 없으니, 이 또한 슬프지 않은가!
6 또 사람들은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해도 성공을 보지 못하고, 파김치가 되도록 지치더라도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모르니, 애처롭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들이 아직은 죽지 않았다고 말한들, 이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7 몸이 죽어 흙으로 화하면 마음도 몸과 함께 사라질 텐데, 크게 애처롭지 않겠는가! 사람의 삶은 본래 이처럼 어리석은 것이구나! 아니면 나만 홀로 어리석고, 남들은 어리석지 않단 말인가!4)
주1) 앞 장에 이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그것들[彼]’은 앞 장에서 말한 희로애락 등의 마음의 여러 작용을 말한다. 결국 마음이 없으면 나의 육신이 있더라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동식물), 나의 육신이 없으면 마음도 표현할 의지처가 없다는 말이다.
주2) ‘참된 주재자[眞宰]’는 ‘내가 나를 잃었다[吾喪我].’의 ‘나[吾]’를 말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본래면목의 나로서 집착에서 벗어나 만사만물을 텅 빈 상태--만물의 총합은 0이고, 양자역학적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에너지파동이다--로 인식하는 나이고, 칼 융의 분석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온전한 자기(Self)로서 마음 전체의 중심으로 가정된 나이다.
‘나[我]’는 감각과 생각에 이끌려 만물에 대한 분별의식에 사로잡힌 채 부, 명예, 권력, 육욕 등에 집착하는 번뇌망상의 나이고(불교), 의식 속에 존재하는 자아(Ego)로서 개인의 의식적 행동이나 인식의 주체이다(융). 장자 자신은 마음의 ‘참된 주재자’를 알지 못하겠다고 했으나, 불교나 현대 심리학에 의해 그 정체가 밝혀졌다고 하겠다.
주3) 3~4절에서는 화제를 마음에서 몸으로 돌려 몸의 ‘참된 임금[眞君]’에 대해 말하고 있다. 뼈나 구멍과 내장 등 인간 신체의 각 부분은 그 어느 것도 몸의 참된 임금이 될 수 없다. 신체는 각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전체가 한 몸으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현대 의학적으로 말하면 두뇌(마음)가 몸 전체를 주관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두뇌는 진화론적으로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척추신경의 앞부분이 발달한 것일 뿐이다. 두뇌도 몸의 각 부분의 영향을 받아 작동하므로, 우리 몸의 참된 임금은 몸 전체일 뿐이다.
4)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줄 아는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잊고 삶에 집착하며 욕망과 욕심에 바둥대는 모습은 모든 인간이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장자의 절규가 가슴을 친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참전한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장자>를 애독했다고 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청춘에게 죽음이야말로 그들이 초극하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유일신에 대한 신앙으로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 전통이 붕괴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유럽의 정신적 풍토--18세기에 시작된 역사적 예수 즉 인간 예수 탐구의 계속, 니체의 신의 죽음 선언, 19세기부터 본격화한 성서에 대한 역사문헌학적 비판, 고고학 발굴로 성서의 허구성 입증, 진화론과 맑스주의의 등장 등--에서 <장자>는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동양인들은 대자연의 품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구원으로 여겼다. 결국 대자연의 전체적 흐름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모습만 바꾼 자연일 뿐이다. 이러한 생사일여관으로 생사를 초탈하여 삶의 우연에 기뻐하고 죽음의 필연에 슬퍼하면서도 담담하게 생사를 맞을 수 있었다.
- 이번 번역과 해설은 김정탁님의 <장자 내편>과 왓슨 역 <장자>(아래)를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