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문화는 고조선 유물인가?
홍산문화 홍산문명 고조선이ㅡ 맞는가?..펌글-
● 홍산문명史 (Asadal) ●
적석총, 석관묘, 빗살무늬토기...
낯익은 유물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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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랴오닝성 링원시 우하량에 있는 적석총. 기원전 3500년 께의 유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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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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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랴오닝성 커주어의 동산취 유적. 사진 앞쪽의 원형 유적은 제단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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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 |
"당신들 어디에서 왔소?"
"베이징에서 관광하러 왔는데요."
"여기는 그냥 관람할 수 없소. 저 아래로 50m 쯤 가면 있는 사무실의 왕 선생한테 허락을 받아와요. 왕 선생하고 함께 와야 보여줍니다."
지난 9월 11일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링위안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적석총 앞. 한참을 보른 다음에야 문을 열고 나온 60대 관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는 유적지 가운데 관람이 불허되는 곳이 종종 있다. 특히 처음부터 "당신들 어디에서 왔느냐"며 심문하듯 물어보는 곳은 매우 민감한 곳이다. 우하량 유적지는 왜 이렇게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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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3000~4000년 께 중국의 주요 신석기 문화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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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방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중요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홍산문화는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다. 이 문화는 기원전 3500년 께 요하(遼河) 및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중국 고고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쑤빙치(蘇秉琦)는 "홍산문화는 중화문명의 서광"이라며 "이 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단계를 뛰어넘어 국가 형성의 초기단계에 이르렀다, 홍산문화는 중국 문명사를 1000년 앞당겼다"고 평가했다.
우하량 유적지는 도로변에 있지만 철조망이 쳐져있고 코스모스 담장이 있어 내부를 들여다보기 힘들다. 관리인의 허락을 받지못한 취재팀은 유적지 뒤로 돌아가기로 했다.
높이 6~7m 정도 되는 가파른 언덕을 여러번 오르내리고 위험한 철길을 건넜다. 20분 정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고생한 뒤 우하량 유적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중국 문명사를 1000년 이상 앞당긴 홍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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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가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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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의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 지난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네이멍구 츠펑시에서 한국을 비롯해 일본, 미국 학자 등 80여명을 불러 홍산문화국제학술토론회를 열었다. "용 문화의 기원은 어디인가"를 집중적으로 토론했다고 당시 <신화사>는 보도했다.
중국 학자들은 그들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의거해 홍산문화는 중화문명을 이룩하는 주요한 한 구성부분이라고 본다. 홍산문화 유적은 중국 중앙정부가 직접 관여해 발굴작업을 벌이고있다. 또 앞으로 고구려나 발해 유적처럼 앞으로 권역별로 묶어 대규모 관광지로 개발할 것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한국 학계의 홍산문화에 대한 태도. 일부 학자를 빼놓고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와중에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홍산문화를 고구려사 빼앗기에 이용하고 있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전욱 고양씨 집단으로 이들이 남만주로 가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바로 홍산문화의 적석총을 이어받은 것이며, 고주몽의 고씨도 전욱 고양씨의 후예여서 붙은 성씨라는 것.
홍산문화가 고조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이를 중국 문명으로 넘기면 고조선사 역시 통째로 중국사로 넘어가게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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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 유적지는 길이 160m에 너비 50m 규모로 거대한 적석총 5개와 돌로 쌓은 제단 1개로 이뤄져있다. 중국 정부가 지난 1983~85년 본격적인 발굴을 했으며 탄소측정결과 기원전 3500년 만들어진 것으로 측정됐다.
각 적석총에는 10여개의 석관묘와 함께 옥으로 만든 룡(玉龍. 돼지나 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빗살무늬 토기 등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특히 여신묘는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우하량 적석총 무덤군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여신묘는 175m×159m의 대형 유적으로, 진흙으로 만들고 눈에 옥을 박은 사람 머리 크기의 여신의 두상이 발견됐다.
대형 제단과 적석총, 여신묘 및 여신상의 존재는 이 문화가 상당 수준의 계급분화가 진행되어 이미 씨족 사회를 넘어섰으며 국가 형성 초기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하량 유적지에서 50㎞쯤 떨어진 커주어(喀左·원 이름은 '객나심좌익몽고족자치현(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의 동산취(東山嘴) 유적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있다. 기원전 3500년 께로 추정되는 이 유적은 전체 길이 60m, 너비 40m의 크기다. 동산취 유적은 직경 2.5m 가량의 원형 제단터 및 사각형 돌 무덤, 인물 소상, 빗살무늬 토기, 각종 옥 제품 등이 발견됐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궈따쉰(郭大順)은 올해 2월 발간한 <우하량유적지 고고발굴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5000년 문명의 기원이 요하 유역에 있음이 유적으로 확인됐다. 특히 지난해 우하량 적석총 제16지점에서 발견된 옥풍(玉風. 봉황), 옥인(玉人) 등을 비롯해 각종 제단과 묘, 이들의 배치는 베이징의 천단(天壇) 및 명나라 황제를 모신 13릉과 비슷해 '예(禮)'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전통 사학가들은 황하 유역을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봤다"며 "그러나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은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결코 한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요하유역은 중국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했다.
적석총, 빗살무늬 토기... '낯익은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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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하량 유적지에서 나온 사람 머리 크기의 여신의 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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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가 우리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는 것은 출토된 유물의 면면 때문이다. 적석총, 석관묘, 돌로 만든 대형 제단, 각종 다양한 옥 제품, 빗살무늬 토기….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웠던 한국 고대문화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이곳에서 많이 나왔다. 또 이들 지역은 과거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대릉하·요하 유역)에서는 홍산문화 이전에도 뛰어난 문화가 이미 존재했다. 랴요닝성 푸신(阜新) 지역의 사해(査海)문화, 네이멍구의 츠펑(赤峰)지역의 흥륭와(興隆窪)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이는 중원지역 앙소문화의 전 단계인 노관태(老官台)문화의 연대가 7200년 전이고, 앙소문화가 4500~6500년 전인 것과 비교할 때 오히려 시기가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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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문화지역에 나온 옥으로 만든 용. '중국 제일룡'으로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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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수준도 결코 중원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흥륭와 문화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해자로 둘러싸인 완벽한 형태의 촌락유적지가 발견됐다. 사해문화에서는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길이 19.6m의 용과 용문 도기가 발견됐다. 이는 중국에서 발견된 용 형상 가운데 가장 이르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임과 동시에 "용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용의 형상이 중원이 아닌 요하 및 대릉하 유역에서 가장 빨린 등장했던 것이다. 또 흥륭와와 사해 문화는 중국 문명 가운데 옥기가 가장 빨리 출현한 곳이다. 옥은 "영원 불멸"의 종교적 관념을 상징한다.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로 가면 기원전 24~15세기의 랴오닝성 츠펑시의 하가점(下家店) 하층문화, 기원전 14~7세기의 하가점 상층 문화, 기원전 14세기~서주 무렵의 차오양시(朝陽市)의 위영자(魏營子) 문화 등이 등장했다.
이 문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문제는 이 문화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한 재중동포 학자는 "중국 학자들도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조선 민족, 구체적으로 예맥족의 문화로 본다"고 잘라 말했다.
중국 랴오닝대와 지린(吉林)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복기대 박사도 비슷한 견해였다. 기원전 10~4세기 무렵의 능하(凌河)문화라는 새 유형을 주장하고 있는 복 박사는 "개인적으로 하가점 상층 문화는 산융(山戎) 것으로 본다"며 "그러나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대 문화, 하가점 하층 및 위영자 문화는 고조선 시대의 문화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는 70여개의 성이 발견되는 등 완전한 국가형태를 띠고 있으며 발굴된 인골은 인류학적으로 볼 때도 고동북인(古東北人)에 속한다는 것.
그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가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하는데 하가점 하층문화는 연대가 일치하고 출토 유물도 단군 신화의 내용과 맞아떨어진다"며 "하나라 문화인 이리두(二理頭) 문화가 기원전 2100년 께인것과 비교하면 시기상으로도 더 앞선다"고 부연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한국 학계에서는 적석총과 석관묘의 기원을 시베리아로 본다, 그러나 홍산문화지역에서는 이보다 2000년 앞서 같은 유물이 나왔다"며 "이는 우리 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묘제를 같이 썼다는 것은 문화 및 인류의 동질성까지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화문명 탐원공정은 중원문명 정통론의 부활
일반인들은 중국 문명은 오늘날 산시성(山西省) 남부 및 허난성(河南省) 서부인 이른바 중원지역에서 발전했으며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알고있다. 이른바 '중원문명 중심설'이다. 이는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화이관(華夷觀)의 바탕이기도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이런 논리는 깨진지 오래다. 황하 중상류 지역 외에, 요하와 대릉하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역, 산동성 지역, 양자강 하류 및 타이호(太湖) 유역, 광둥성의 주강(珠江) 삼각지 지역, 후난성의 퉁팅호(洞庭湖) 및 쓰촨성 지역에서도 수준이나 시기에 있어 중원지역과 맞먹거나 오히려 앞선 문화가 있었음이 증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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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화부인의 길'?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랴오닝성 링위안과 커주어의 가로수는 전부 버드나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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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오마이뉴스 김태경 |
그러나 중국이 지난 2003년 6월 정식으로 시작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은 철저하게 중원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점 발굴지역이 허난성 신미시(新密市)의 구청진(古城鎭)과 신짜이촌(新砦村)의 유적, 역시 허난성 덩펑시(登封市)의 왕청강(王城崗) 유적, 산시성(山西省) 린펀시(臨汾市) 샹펀현(襄汾縣) 타오스향(陶寺鄕) 유적 등 모두 중원지역이다.
작업 내용도 중원의 신석기 문화인 용산문화부터 하나라 초기 이리두 문화까지의 취락형태, 야금기술 및 유적 정리, 요·순·우(禹) 관련 자료의 수집과 연구 등 화하족(華夏族) 문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국 이는 중원문화 중심론, 중원문화 정통론을 다시 확립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원 이외의 다른 지역 문화는 모두 중원으로 흘러들어와 융합되었다거나 또는 중원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정리될 것이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이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 대해서는 해외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다"며 "일본이 과거 고대사의 연대를 확대하려고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결국은 역사를 왜곡하고 실패했던 교훈을 얻으라는 충고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2년 미국 아시아 학회 년회에서 스탠포드 대학 데이비드 니바이슨 교수는 하상주단대공정에 대해 '전부 틀렸다'고 비판했다"며 "또 시간적으로 연대 측정이 틀렸을 뿐 아니라 방법적으로 불리한 증거는 택하지 않은 오류가 있었다고 지적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해외 학자들은 이런 연구가 개별 학자들의 결과물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어서 그 폐해가 더 심각하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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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적의 규모를 알기 쉽게 비교하면,
여신묘는, 이집트에서 가장 큰 기자의 대피라밋에 미치지 못하지만, 평균 피라밋 규모 정도. 고구려의 강성기였던 태왕릉(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의 2배가 넘는 규모이며, 장군총(장수왕릉)의 5배 정도로 보면 쉽지요. 단순규모로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유적과 유물의 기술적 특성 등 자세하고 중요한 정보를 전혀 모르는 상황의 단순비교이며, 유적의 규모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만, 규모의 의미는 작지 않습니다.
2. 홍산문화의 탄소측정 연대 B.C. 3500년은, 서구학자들이 인류문명의 시작이라는 수메르문명의 초기발생, 나일계곡에 여명이 비추고, 인더스보다 1천년 이상 앞선 시기이며, 당연히 고조선보다 대략 1200년 앞선 시기.
3. 현재까지 이 유적을 설명할 수 있는 역사(일단 한단고기를 제외하면)에 대한 연구결과는 없습니다. 다시말해 역사라기 보다 고고학이라 볼 수 있지요.
4. 중국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고대역사 만들기는 크게 2가지 방향으로 보이네요. 만주와 내몽골 지방 유적의 지나 역사화, 그리고, 황하 중상류 지역에서 만주 몽골지역보다 더 앞선 유적 찾기(혹은 조작?! ).
5. 저 정도 규모의 유적이라면, 중요한 유물, 혹은 어떤 방식이든 기록까지도 찾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적과 유물, 과거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그 주변마을에 분명 남아있을 설화 등등. 중화주의에 어긋나면 숨기고 조작할 가능성이 분명 있습니다.
홍산문화뿐만 아니라,
[이 지역(대릉하·요하 유역)에서는 홍산문화 이전에도 뛰어난 문화가 이미 존재했다. 랴요닝성 푸신(阜新) 지역의 사해(査海)문화, 네이멍구의 츠펑(赤峰)지역의 흥륭와(興隆窪)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이는 중원지역 앙소문화의 전 단계인 노관태(老官台)문화의 연대가 7200년 전이고, 앙소문화가 4500~6500년 전인 것과 비교할 때 오히려 시기가 빠르다.]
이런 문화 유적과 해석에, 중화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홍산문화를 포함한 이 지역 유적들은 조선상고사 뿐만 아니라 인류문명 전체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이런 상고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있었으면 합니다.
중국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준 홍산문화 발견
요서지역의 선사 고고학은 20세기 20년대에 시작되었다. 1930년 양사영(梁思永)은 적봉 홍산 유적지(赤峰红山遗址)를 조사했다. 1935년에 일본학자 滨田耕作 등은 홍산 뒤에서 홍산문화 유물(红山文化遗存)을 발견했다. 1955년 윤달명(尹達命)이 홍산문화라고 이름 지었다. 60년대 초에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내몽고공작대의 유관민(劉觀民), 서광익(徐光冀) 등이 서요하 유역에 대한 체계적인 공작을 실시하여 해당 지구내 홍산문화, 부하문화(富河文化), 하가점 하층 문화(夏家店下層文化), 하가점 상층 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문화적 면모와 그 관련 문제를 점차 명확하게 만들었다.
1979년 요녕성 액좌 동산취(喀左東山嘴)에서 홍산문화의 제사 유적지 한 곳을 발견하였는데 거기서 임신한 여인 등 소조 인물상, 쌍룡수 황형 옥식(雙龍首璜形玉飾)과 녹송석식(绿松石飾)이 출토되어 1971년 내몽고 옹우기 삼성타랍촌(翁牛旗三星他拉村)에서 발견된 옥룡(玉龍), 1973년 요녕성 부신호두구(阜新胡头沟)에서 발굴된 옥기 묘장(玉器墓葬)이 모두 5,000년전의 홍산문화에 속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1981년 손수도(孫守道), 곽대순(郭大順)은 여기에 의거하여 요하 유역의 원시문명과 용의 기원 문제를 토론하고 홍산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문명의 도래를 촉진하는 요소는 예컨대 농업과 수리관개의 발전, 성보(城堡)와 성시(城市)의 형성, 문자의 출현 및 계급과 국가의 탄생 등과 같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용의 기원은 이미 원시농업의 발전의 전제로서 농사와 연관된 천문현상과 관계가 있고 원시 종교 신앙, 원시 의식(意識) 형태 원시 문화예술 발달의 산물로서 여러 문명 요소의 하나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용산문화의 용 모양의 출현을 표지로 삼아 우리들은 5천여년전 요하 유역 역사의 원류에서 이 지역의 문명시대의 서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홍산문화의 연구와 중국문명의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났고 중국문명의 기원 연구를 위하여 천지개벽하는 큰 물길(開闢了新的渠道)이 되었다. 1882년 동산취(東山嘴) 홍산문화 후기의 제사 유적지를 전면적으로 발굴한 이후 그들은 또 서요하 지역의 원시문화의 연구로 1981년 이래 소병기(蘇秉琦)가 실천한 고고학 문화구계 유형이론(考古学文化区系类型理论)으로 귀납하였고, 연산(燕山) 남북의 장성(長城) 지대의 문화 구조의 계열 탐구 중에, 1983년 9월 요녕성 능원현(凌源縣)과 건평현(建平縣)의 경계에 있는 우하량(牛河梁)에서 홍산문화 후기인 5,000여년전의 적석총(積石塚) 무리와 제사 건축지를 발견하고 요서 홍산문화 연구에 있어 중대한 돌파구를 열었다.
동산취(东山嘴) 홍산문화 후기의 제사 유적지는 石块를 가공하여 만들었는데,점유 면적이 약 2,400 평방미터,건축은 중심축을 배치하고 두 날개를 베풀었다. 중심축선의 북부에는 사각형의 제사대(역시 하나의 적석총이다)가 있는데 동서로 길이가 11.8미터, 남북으로 넓이가 9.5미터이다. 남부에는 원형의 제사대가 있으며 지름이 약 2.5미터다.
우하량은 동산취의 서북쪽에 위치하여 서로의 거리 약 50KM이며 10개의 적석총 무리와 하나의 제사 건축지로 이루어져 있다. 제사 건축지 중에서 수많은 여자 소상(塑像)이 발견되었고 가장 큰 것은 실제 사람의 3배 크기이다. 하나는 실제 인물 크기와 비슷한 머리 모양에 두 입술에 붉은 칠이 되어 있고 두 볼도 붉으며 눈 자리에는 푸른 빛의 둥근 옥 조각을 새겨 넣었다. 이 건축지에서 발견된 채색 그림 장식의 장피(彩绘图案装饰的墙皮)는 "女神庙"라고 불린다. 적석총은 제사 건축지 부근의 구릉에 분포하였고 한 곳에 몇 개의 적석총이 있다.
1985년까지 우하량 제2지점의 적석총 발굴에 대해 110여 미터 길이의 적석 안에서 4자리의 적석총이 드러났는데 사각형고 있고 원형도 있다. 한 적석총에서는 중심부의 묘장(墓葬) 주위에 수 개 혹은 20여개의 묘장이 있었다. 묘장 속에서 출토된 옥저룡(玉猪龍), 玉箍形器 등은 하나같이 정말하고 아름다운 옥기이다. 특히 큰 적석총은 지름이 60미터에 이르고 높이가 16미터이다. 1985년 이후 또 여러 지점의 적석총에 대하여 발굴이 진행되었다.
동산취와 우하량 홍산문화 후기의 대형 제사 건축지 및 적석총의 발견은 홍산문화 연구에 전혀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고 연구자로 하여금 중화문명의 기원사, 중국 고대국가의 역사 연구자로 하여금 새로운 사고를 진행하게 하였다.
1985년 10월 이러한 중대 발견의 기초 위에서 소병기는 요서의 옛 문화, 옛 성, 옛 나라 문제를 제기하였다. 당시 그가 제시한 요서의 옛 문화, 옛 성, 옛 나라라는 과제의 주요 목적은, 비록 그것을 둘러싸고 1980년대 초에 형성된 학술 연구 주류의 내용인 중화문화, 중화민족, 중화국가의 기원과 구체적인 과정 및 진행되는 탐색을 알리려는 것에 불과하였지만, 요서의 옛 문화, 옛 성, 옛 나라라는 과제를 제출할 때 형성된 관련 이론과 그 뒤 그가 전개한 중국문명의 기원 연구, 요서 홍산문화의 발견이 중화문명사를 1,000년 앞으로 끌어 올렸다는 관점은 굳건한 학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 글은 중국의 주내성(朱乃誠)이란 학자가 쓴 '중국문명 기원연구의 역정'(中国文明起源研究的历程)이라는 글 가운데 일부를 번역. 이 글을 대략 ?어만 보더라도 요하 지역에서 발견된 홍산문화 유적이 중국 역사학계에 천지개벽이라 할만한 큰 충격과 변화를 준 것은 틀림이 없는 모양입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요하 유역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돌무덤, 비파형 청동검 등 그동안 한반도 문화의 특징으로 설명되던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고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이 고대 문명이 우리 한민족의 기원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