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삼천년 넘는 탐라국 역사는 사라졌는가?
양을나의 탐라국은 108분의 왕이 대대로 삼천년 넘게 이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하게 역사적 우여곡절과 정치적 시련으로 인하여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을나의 탐라국은 한반도 3국을 통일한 신라의 탐라 경략으로부터 큰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679년 2월 신라의 경략으로 태자가 볼모로 육지에 끌려오자 탐라의 주도권은 고씨들의 대단한 위협이 시작 되었고, 양을나의 실질적 지배권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912년에는 실권 없는 허수아비의 탐라왕까지 고자견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108대까지 삼천년 넘게 이어온 양을나의 탐라국은 제주에서 지워졌습니다. 역사는 최후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흔적마저 철저히 지워졌습니다. 이것이 양을나의 탐라국이 제주 역사에서 사라진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1105년 고려 숙종 10년에 고려에 완전 복속되어 탐라국의 격은 강등되어 탐라군(耽羅郡)이 된 후, 1153년에 탐라현(耽羅縣)이 되었읍니다. 고려는 1260년에 원나라의 침공으로 부마국이 되었습니다. 고려의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의 상례와 성종의 즉위식에 참여하였다가 원나라에 탐라를 되돌려 줄 것을 간청하여 되돌려 받으며 1295년에 탐라현은 제주목(濟州牧)이 됩니다. 이는 고려가 탐라국의 역사를 깨끗이 지우고자 탐라가 확실히 고려의 땅이라고 선언하는 용어로 ‘저 물 건너 땅’제주(濟州)라고 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1300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면서 멸망하는 1367년 100년 가까이 원나라와 고려의 양속지배(兩屬支配)를 받는 큰 시련을 당합니다. 고려는 탐라를 두고 원나라와 탐라·제주로 끈질기게 옥신각신하여 골머리를 앓게 되면서 탐라는 생각도 하기 싫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삼천년 넘는 양을나 탐라국 역사는 깡그리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육지에 오른 양씨들은 후기 신라와 고려시대에 대단한 세력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성혁명으로 유교의 조선이 세워질 때 동참하지 못하여 이방원 등에 의해 양씨들의 역사는 이 세상에서 제거되고 모두 불 태워졌습니다. 근세조선 초·중기에는 살아남기 위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피신하여 은둔 생활을 하므로 타인 또는 스스로에 의해 그 자료는 사라져야 했습니다. 조선 초·중기 역사 기록에는 양씨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태자 한라군의 종실이었던 나의 16대조 할아버지께서도 1545년 을사사화 때 천년의 세거지 양과동을 통째로 버리고 화를 피하여 지금의 전남 영암에 은거하여 그 후세를 겨우 이어야했습니다.
네 번째는 남의 땅에 어이없는 연고권을 주장하고 한반도 역사를 미개한 소국으로 폄하하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사람들에 의해 짓밟힌 식민사관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침략자들의 은혜를 입은 비굴하고 어리석게 친일을 하였던 매국노들과 이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그대로 받아들인 몇몇의 강단사학자들에 의해 양을나의 탐라국 역사는 슬퍼하며 세상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섯 번째는 한국전쟁과 제주 4·3사건 등을 거치면서 그 나머지마저 불태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