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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차 문산 문화탐방 및 사하문인협회 봄 문학기행 스케치
■ 일 시 : 2010년 5월 29일 09:00~
■ 행선지 : 사하구청 → 교대 앞 → 황학대 → 죽성리 해안 → 죽성리 해송 → 죽성 →
삼성대(윤선도 시비) → 오영수문학비 → 난들농원 → 간절곶 → 연화리 →
반송 앵두농원 → 연산지하철역 → 서면 → 사하구청
■ 참석자(총 38명)
엄계자, 김지은, 정정희, 문경희, 윤승희, 박희선, 박선자, 탁영환, 강정화, 송만판, 백영희
손순희, 정옥금, 장광자, 강영옥, 김흥규, 김광수, 노옥분, 정한길, 전일희, 감윤옥, 이남기
김영준, 박영환, 방재곤, 윤옥자, 문석경, 이수문, 최화수, 최만조, 김상곤, 김금아, 정은영
배병채, 고금란, 이영애, 정은정, 황원준
■ 결산보고
● 수입 1,370,000원
- 찬조(12명 850,000원)
장광자 100,000원 강영옥 50,000원 정한길 100,000원 전일희 50,000원
최화수 100,000원 최만조 50,000원 김상곤 50,000원 박달수 100,000원
이세경 100,000원 김덕침 50,000원 문석경 50,000원 황원준 50,000원
- 회비(26명× 20,000원 = 520,000원)
※ 물품찬조 :
- 감윤옥 떡 2되 사탕 3봉지, 문경희 캔 커피 1박스
● 지출(1,370,000원)
- 차량대여비 500,000원, 점심 300,000원, 술 1말 80,000원, 멸치회 350,000원
과일, 물, 커피, 사탕, 비닐봉투, 찐빵 126,000원, 자료 복사 14,000 원
■ 행사 스케치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위에 소개한 두 단락은 금아 피천득 님의 ‘오월’이라는 수필의 시작 부분과 끝 부분입니다. 금아琴兒, ‘거문고 금’, ‘아이 아’입니다. 이름 그대로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듯이 어린아이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다 가신 분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한 평생을 오월로 사셨습니다.
‘스물 한 살의 청신한 얼굴, 앵두와 어린 딸기…’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니 오월은 젊은이들의 입맞춤 같은 계절이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흔히들 앵두 같은 입술이라고 표현하지 않던가요? 앵두는 붉고 촉촉한 입술이요, 어린 딸기의 까실까실하고 연한 표피는 수많은 미뢰味蕾로 조합이 된 부드러운 혀입니다. 전나무 바늘잎조차 연한 살결 같이 보드라운 신록의 오월에 입 맞추며 사는 선생님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내가 오월 속에 있는 한,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온갖 번뇌로 답답하기만 했던 일상에 청량한 한줄기 바람을 느끼곤 합니다.
때는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이 가고 있는 은총의 층계 어느 언저리였습니다. 사하문인협회와 문인협회 산우회가 공동으로 차를 한 대 대절 내어 문학탐방의 길을 나섰습니다. 사하문인협회 회장이시자 문산의 수석 부회장이신 최화수 선생님의 인사말씀으로 시작한 그날 우리들의 궤적을 스케치해 봅니다.
황학대
제일 먼저 당도한 곳은 기장군 죽성리의 ‘황학대’였습니다. 죽성리는 작은 어촌마을입니다. 전교생 36명의 죽성초등학교 앞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가면 이내 바닷가 마을이 나오고 마을 중간쯤에 30여 그루의 해송이 자생하고 있는 자그마한 언덕배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황학대라는 곳입니다. 황학대는 고산 윤선도 선생님이 이곳 기장 죽성리에 유배되어 왔을 때 긴 유배생활의 아픔과 시름을 달래는 장소로 삼았던 곳입니다. 고산은 이곳에서 바라본 섬들이 석양 무렵이면 금방이라도 금빛 나래를 펼치고 날아오르려는 학의 모습과 같다며, 중국 양자강하류에 있는 이태백, 도연명 등 많은 시객들이 찾아 놀던 ‘황학루’에 비견하여 이곳을 ‘황학대’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고산은 불의를 용납지 못하고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성품 탓에 많은 유배를 당하였답니다. 그리하여 전국 곳곳에서 그가 유배를 당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유배길은 함경도 경원과 삼수에서 경상도 기장과 영덕, 전라도 광양까지 길게 뻗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장에서의 유배기간이 6년으로 가장 길었다고 합니다. 고산은 이곳에서 갈매기와 파도소리를 벗 삼아 <견회요>와 <우휴요> 등 주옥같은 시 여섯 수를 남겼다고 합니다.
고산하면 흔히 보길도를 떠올리곤 합니다만, 가까운 우리 고장 기장에서도 조선시대 정철, 박인로와 함께 3대 가인으로 시조문학의 최고봉을 이룬 고산 윤선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참 반가웠습니다. 문화재 가치는 그 이면에 얽혀 있는 정신적인 자산을 유추하고 살펴 봄으로써 우리네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고 볼 때, 잘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입니다. 명승고적을 둘러 볼 때마다 관리상태가 허술한 것에 느껴지는 비애가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황학대를 구경하고 나면 바로 삼성대로 옮겨 고산 윤선도 시비를 관람하는 것이 고산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겠습니다만, 청산리 벽계수가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다시 오기 어렵다 하듯이 사람도 한 번 지나가면 같은 자리 다시 오기 어려운 법인지라 언제 올지 기약 없는 황학대 일원의 볼거리들을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죽성리 해안길 산책
오월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죽성리 해안을 산책하였습니다. 드라마 ‘드림’을 촬영한 조그만 예배당과 등대 세트가 바다를 배경으로 그림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포말이 맥주거품처럼 이는 곳에 갈매기가 날아올랐습니다. 저들도 먹이를 찾다가 힘이 들면 가끔 맥주 한 잔쯤은 마시는 모양이었습니다. 끼룩끼룩 그들의 건배사를 듣자니 이생진 시인의 <술에 취한 바다>에 나오는 ‘술은 내가 마시는 데 취하는 것은 바다’라는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시인보다 술이 더 취했지만 죽성리 해안길에서는 갈매기보다 우리들이 더 취하였습니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주변의 경관에 취하여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주체할 길이 없더군요.
두모포 어사암과 거북바위
이곳 죽성리에 두모포라는 아주 작은 갯마을이 있지요. 작다고 얕볼 수 없는 마을이지요. 저 유명한 동해안 별신굿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두모포 풍어제터를 알리는 비석 앞에 서면 왼편에 ‘어사암’이라는 조그만 바위섬이 있습니다. 조선 고종 때 일이랍니다. 군량미를 싣고 부산포로 가던 세운선이 풍랑에 밀려 마을 앞에서 침몰되자 극심한 가뭄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죽성리 주민들이 양곡을 건져 허기진 배를 채웠답니다.
기장현에서 나라의 양곡에 손을 대었다고 어민들에게 죄를 씌우고 조정에 그 전말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어사 이도재를 현지에 보내 조사를 하였습니다. 어사 이도재는 기근에 시달리는 죽성리 백성들의 딱한 사연을 듣고 모두 석방하고 술과 음식을 내어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답니다. 이 일을 고마워한 죽성리 주민들이 배가 좌초한 부근의 바위섬을 ‘어사암’이라고 부르고 바위 벽면에 어사 이도재의 이름을 새겨 그의 선정을 기렸다고 합니다.
어사암 부근의 방파제 위에 올라서면 마치 뭍으로 헤엄쳐 나오려는 거대한 거북을 닮은 바위도 볼거리입니다. 머리를 쳐든 거북의 장쾌한 형상은 파도가 거셀수록 더욱더 역동적으로 보입니다. 일출 무렵 거북의 입가에 붉은 해가 걸리면 전설의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토하고 머금는 모습과 비견되어 보는 이의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경주에는 토함산吐含山이 있어 바닷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구름을 토(吐)하고 머금는(含)다고 한다는데 이곳 두모포의 거북바위는 일망무제의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해를 토하고 머금는 장대한 호연지기가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일설에는 이 바위를 새鳥바위라고 한다는데 필자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거북바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글을 쓰는 데에는 다른 이의 시각과는 달리 ‘낯설게 보기’가 필수라는데 저는 이 바위를 나만의 거북바위로 정해 온지 오래입니다. 처음 대면하고 난 후 그 느낌을 졸작으로 문예지에 발표한 적도 있으니 저로서는 더욱 더 애착이 가는 바위입니다.
죽성리 해송
황학대와 죽성리 왜성의 중간쯤에 시 지정 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는 장대한 해송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한 그루의 나무 같지만 여섯 그루의 나무가 모여 마치 한 그루의 큰 나무처럼 보입니다. 수령은 약300년으로 추정되며 수관 직경 30m, 높이가 약 10m에 달하는 거대한 노거수입니다. 또 이곳에는 서낭신을 모신 국수당이 있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로서 민속학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세월의 무게 탓일까요. 더러는 눕고 더러는 휘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천년의 바람’ 속에서 제 맡은 책무를 다하고, 이제는 고요히 쉬고 있는 듯합니다. 이 노거수가 마치 우리네 부모님 같다는 생각에 미당 서정주님의 ‘무등無等을 보며’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 오후의 때가 오거든, /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 더러는 앉고 /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나무끼리 서로 안고 있는 연리지도 사랑의 귀감이요 표상이라지만 오랜 세월 알맞은 자리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로 구속하거나 속박하지 아니하면서도 오랜 세월 같이 살아 온 여섯 그루 해송의 징하게 은근한 사랑이 눈물겨웠습니다. 눈을 들어 가지의 밑둥을 쳐다보고 길게 누운 둥치를 쓸어도 보니 과연 나이를 먹으면서도 아름다워지는 것은 나무뿐이라는 이야기가 실감이 났습니다. 우리도 이 나무들만큼만 곱게 늙어 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죽성리 왜성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장수인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것으로, 임진왜란ㆍ정유재란 중 왜군이 조선ㆍ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주둔하기 위해 쌓은 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1594년(선조 27) 봄에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전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왜군은 1594년 5월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이하 20여명의 장수로 하여금 서로 협력하여 성을 쌓게 하였는데, 죽성리 왜성은 이 때 쌓은 왜성입니다. 우리나라 축성법과 일본식 축성법을 비교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는군요.
잘 정비된 나무계단을 올라 성축에 서니 죽성리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오목하게 안으로 굽어진 포구와 마을의 전경은 물론, 바닷가 조그만 교회와 등대, 어사암, 그리고 거북바위까지… 거북바위는 멀리서 보니 더욱 더 생기가 넘칩니다. 바람이 저 멀리 수평선에서 여기까지 거칠 것 없는 듯 말 달리며 내는 긴파람 소리에 온 마음이 다 시원하여졌습니다.
기장하면 차를 타고 주마간산하듯이 휑하니 바다구경이나 하고 싱싱한 횟감이나 즐기는 맛만 전부인 줄 아신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오랜 기간 사람이 살아 온 흔적이 구석구석 다양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경승을 배경으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곳입니다. 오늘 문화탐방에 참석한 여러 선생님들은 그동안 기장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견문에 접한 만족감 때문인지 얼굴 표정만은 무척 밝았습니다.
고산 윤선도 시비
일광해수욕장 끝머리에 위치한 삼성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고산 윤선도 선생님의 시비를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621년 고산은 이곳 삼성대에서 유배지를 찾아 온 동생과 작별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동생은 오랜 유배생활로 고생하는 형이 안타까워 당시 권문세가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돈을 주고 유배를 면하는 납전해배納錢解配를 권유하였지만, 고산은 불의와 타협할 수 없다며 끝끝내 고사를 합니다. 그 일을 근거로 이곳 삼성대에 동생과 작별하며 지은 시를 새긴 윤선도 시비를 세운 것입니다.
시비에 새겨진 동생과 헤어지면서 지어준 시 두수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네 뜻을 따르자니 새로운 길 얼마나 많은 산이 가로 막을 것이며 / 세파를 따르자니 얼굴이 부끄러워짐을 어찌 하리 / 이별을 당하여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 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아롱지는구나.’
‘내 말은 내달리고 네 말은 더디건만 / 이 길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 있으랴 / 제일 무정한 건 이 가을 해이니 / 헤어지는 사람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네.’
첫 수에 나타난 것은 납전해배를 완곡히 거절하는 내용이며 둘째 수에는 이별이 아쉬워 눈물을 뿌리며 무정한 가을 해를 나무라며 형제간의 살뜰한 정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이 시는 지금도 일광의 바닷가에서 바람으로 쏟아지며 많은 사람들의 흉금을 울립니다. 고산의 생애는 이렇게 유배와 출사 은둔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 근본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었고 이를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여 우리에게 귀중한 유산으로 남겨주었습니다.
난계 오영수의 갯마을 문학비
오영수 님의 문학비는 삼성대에서 해안바다 길을 따라 가다보면 일광천과 일광바다가 만나는 강송정 공원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강송정은 강가에 조그만 솔밭의 이름입니다. 문득 그리스 출신의 여가수 나나무스쿠리가 노래했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청순한 목소리와 서정적인 노랫말이 듣는 이들의 마음에 잔잔히 적셔 주던 아름다운 곡이지요. 오영수 님의 문학비는 강가, 그리고 솔밭에다 바다까지 겸비한 멋진 곳에 있었습니다.
비碑에는 ‘아낙네들은 해순이를 앞세우고 후리막으로 달려갔다. 맨발에 식은 모래가 해순이는 오장육부가 간지럽도록 시원했다. 달음산 마루에 초아흐레 달이 걸렸다. 달그림자를 따라 멸치 떼가 들었다.’ 라는 그의 단편소설「갯마을」의 일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위에 화강암으로 세워진 사람들 조각물은 갯마을의 후리장면을 형상화한 듯 했습니다. 집행부에서 미리 부탁드린 문산 김광수 부회장님이 문학비 앞에 서서 해설을 시작하셨습니다.
‘난계 오영수 님은 향토와 인근의 바다와 산과 들, 농촌과 도시, 어디에서든 시대의 아픔에 신음하는 조국의 민초들을 다양하게 이야기한, 가맛골(釜山)이란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라는 데 이설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갯마을」과 「박학도」를 통해 오영수의 문학정신과 고향과 사람, 즉 민중에 대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중략>…
단편소설「박학도」는 1955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의 문학적 가치와 특이성은 3인칭이 3인칭을 관찰하는 소설의 시점과 구성법으로 이런 시도는 한국소설사상 최초 아닌가 싶습니다. 6·25이후 소시민의 파탄을 그린 것으로, 전쟁은 인간의 자존심에서부터 인간의 마지막 보루인 수치심마저도 앗아가 버린다는 절망의 메시지가 주제입니다.…<하략>…’
해설 중에 길 잃은 갈매기처럼 날아든 선거홍보차량이 소음을 일으켰지만 문산의 향학열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말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 조금의 동요 없이 문학공부에 집중하였습니다. 그 모양에 압도되었던지 마침내 선거홍보 차량이 우리들의 건투를 빈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자리를 비켜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도 행운이 함께하기를 빌어 봅니다. 해설이 끝나자 김광수 부회장님의 열성을 다한 명강의에 참여자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습니다.
감꽃 아래서 그대와 함께 - 난들농원
‘난들’ 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가까이에 있는 텃밭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하네요. 동해안을 따라 기장, 일광, 동백을 지나면 칠암횟촌을 못가서 ‘신평’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신평마을 회관 옆으로 농로를 따라서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지요. 그 삼거리에서 왼쪽 편의 길을 따라 계속해서 주욱~ 가다보면 감나무가 많은 집이 나옵니다. 바로 난들 이영애 선생님의 농원입니다.
이때쯤 감꽃이 만개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 번 다녀가시라.’는 난들 선생님의 뜻에 따라 감나무 밭에서 식사도 하고 작은 음악회도 열 계획으로 이번 코스에 포함시켰더랬습니다. 난들농원은 ‘감꽃아래서 그대와 함께’라는 현수막을 대문 위에 걸고 우리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올해 이상기후로 인해 감꽃은 때가 일러 아직 피지 않았지만 신록의 싱싱한 감잎이 푸른 향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감꽃, 결코 튀지 않는 꽃입니다. 푸른 꽃받침에 연노랑의 꽃빛은 그저 잎인 듯 꽃인 듯 그렇게 피어 있습니다. 우리 어릴 적 감꽃을 실에 엮어 사내아이들은 왕관을 만들어 쓰고 계집아이들은 감꽃목걸이를 엮었습니다. 감꽃목걸이를 엮어 들고 집 앞을 지나는 소녀를 기다려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감꽃 지는 소리가 낙숫물 떨어지듯 후두둑거리면 고개를 외로 꼬고 ‘오마지 않는 이를 기다리며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길을 보내던 그때가 기억나십니까?
아무튼 시장한 차에 난들농원에서의 만찬이 이어졌습니다. 오리야채불고기와 배추된장국, 찰진 밥과 나물들… 야외에서 벌어진 우리들의 성찬은 필설로 형용치 못할 미각을 제공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음식은 조금 천천히 씹어서 삼키라는 말은 영양학적으로는 공감이 가지만 미각적으로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빈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털도 아니 뽑고 삼킨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만큼 맛이 있으니 털 뽑는 시간도 아까운 게 아니겠습니까? 커다랗게 쌈을 싸서 입안에 밀어 놓은 다음 두어 번 대충 씹고 꾸울떡 넘기면 눈알이 튀어 놓을 것 같이 느낌이 드는 그 맛을 아십니까? 채 씹히지 않은 음식덩이가 식도를 훑어 내리는 시언(?)한 맛을 아십니까? 맛있는 음식은 그렇게 대충 씹어도 입안을 행복하게 합니다. 혀뿐만 아니라 목구멍으로도 맛을 느끼는 정도가 되어야 미식가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실컷 먹고 물 한 사발 꿀떡꿀떡 삼키고 나면 배가 부르다 못해 배꼽 속에 때가 밀려 나오는 듯 포만감을 느껴 본 적 있으십니까? 그렇게 배꼽으로도 맛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미식가라 할 수 있지요. 다들 맛있게 포식을 하였습니다. 거기에다 문산 공식주까지 두어 순배 돌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신록 짙은 감나무 그늘아래에서의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오찬을…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식욕 다음에 피어오르는 또 다른 욕구를 음악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난들농원의 작은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첫 번째 손님은 소설 쓰는 오카리나리스트 고금란 님의 연주. 농익은 ‘사랑’도 좋았지만 CD반주에 맞춘 ‘타이타닉’은 가히 프로급이었습니다. 자신의 연주가 마음에 들었는지 연주 후 환호와 함께 외다리로 팔짝팔짝 뛰는 세레모니도 볼거리였습니다. 이어진 순서는 시를 쓰는 하모니카레이서(? 아님 하모니카니스트) 이남기 님의 연주. ‘난들농원’에 잘 어울리는 ‘과수원 길’에서부터 뽕짝을 넘나드는 연주에 모두들 흥겨워 함께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며 따라 부를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어지는 앵콜앵콜……
이날 문산주에 얼큰해 지신 원로 정한길(진채) 님도 테이블스피치에 이은 ‘봄날은 간다’ 라는 노래로 흥을 돋우셨습니다. 신명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옥금 시인님, 장광자 수필가님도 흥을 보태셨지요. 이어서 난들농원 최대 후원자이신 방재곤 수필가 내외 분의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난들을 놓치고 산천을 헤매다 지금 아내와 맺어졌다는 방 선생님의 넉살과 아내이신 김영희 님의 애절한 ‘정선아리랑’이 일품이었습니다. 난들 선생님의 반려이신 최을홍 선생님은 방재곤 님의 폭탄성 발언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의 여유일까요. 특유의 미소만 흘리시며 열심히 우리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기에 바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진 이남기 선생님의 하모니카 연주 순서였습니다. 늘 신선한 말솜씨로 ‘툭툭’ 한 마디씩 쳐 올리시며 분위기를 잡으시는 강정화 선생님의 독려로 참석자들이 모여 원을 그리는 군무를 선보이며 난들농원에서의 작은 음악회는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건 ‘동래한량춤’의 애호가이신 장광자 님이 허리를 다치시는 바람에 그 멋들어진 춤사위 구경을 놓친 것입니다.
강 일병(선생님) 구출기
어째 근간에 일들이 너무 잘 풀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행사도 너무 순탄했습니다. 그 때문에 방심한 탓일 겁니다. 원래의 계획대로 간절곶 해변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간절곶에 도착하여 보니 바람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간절곶은 늘 오는 곳이니 생략하고 다른 일정을 잡아 보자는 긴급동의가 들어 왔습니다.
그러잖아도 오늘 처음 문산의 행사에 참석하는 신입회원 감윤옥 씨가 우리 행선지가 당신의 농장 가는 길과 겹친다면서 시간이 허락하면 그곳에도 들려 보면 좋겠다는 제의를 받아 놓은 참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지금 앵두가 한껏 열어 마음껏 따먹을 수 있다는 솔깃한 이야기에 귀가하는 길에 들려볼 계획을 미리 공지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이날 재무를 맡았던 정은정 선생님께 오늘 회비와 찬조금 중간결산을 확인해 보니 가용 잔액이 좀 남아 있답니다. 이 날 행사가 단독행사가 아니고 공동으로 치러진 행사이니만큼 남은 경비도 어떻게 해야 할지 문제가 되었습니다. 남은 경비를 적당히 나누는 것도 그렇고 해서 가는 길에 모두 소진을 하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기장 어느 해변 횟집에 가서 간단한 뒤풀이를 하고 반송에 있는 앵두나무 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열화와 같은 박수로써 호응해 주었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은 계획이 새로 생기자 일행들은 신이 나서 움직였습니다. 남은 경비 범위 내에서 뒤풀이가 가능한 기장군 연화리 등대횟집이 거의 다 와 가는 중이었습니다. 빈자리에 있는 가방에 핸드폰이 자꾸만 울었습니다. 누구 핸드폰이냐고 가방을 들고 묻는 순간, 아… 강 모 선생님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황급히 가방을 열어보니 핸드폰과 지갑은 물론, 교통카드까지 가방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간절곶에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동안 화장실에 다니러 간 그 분을 아무도 생각지도 못하고 차가 출발을 했던 것입니다. 큰 일 났습니다. 지갑이 여기에 있으니 수중에 가진 돈도 없을 테고 핸드폰도 안 가지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다급한 마음에 먼저 이영애 선생님의 난들농원으로 연락을 취하였지요. 하지만 선생님인들 연락조차 안 되는 데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아득했지만 가만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연화리 등대횟집에 도착을 해서 긴급히 배병채, 정은영, 정은정 선생님으로 편성된 ‘강 선생님 구조반’이 출발하였습니다. 마침 그날 행사에 뒤늦게 합류한 배병채 선생님이 차를 가지고 오셨더랬거든요.
남아 있는 우리는 114에 전화를 걸어 간절곶 등대관리소를 통하여 마을 이장님과 어촌계를 소개 받아 미아(?) 찾는 방송을 해 주십사고 부탁도 드렸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뒤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기적과 같이 우리 구조대가 강 선생님 구출작전에 성공하였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강 선생님이 수중에 남은 돈을 살펴보니 천 원짜리 몇 장이 있었답니다. 그 돈으로 우선 난들농원으로 가셨고 그 상황을 이영애 선생님이 우리 구조대에 연락을 취하였던 거죠.
구조대의 개가였습니다. 발 빠르게 자발적으로 구조대를 자청한 배병채, 정은영, 정은정의 혁혁한 공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 봄이니까 그런 거야. 이런 실수도 사람이 그런 게 아니고 봄이 그랬던 거야.’ 하시며 자칫 어색해질 분위기를 걱정하시며 재치 있게 위로해 주시던 강정화 선생님도 참 고마웠습니다. 아무튼 행사인원들의 안전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사무국장의 실수를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지요. 다시 이런 일이 재발치 않을 것임을 천명하오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쨌거나 기장에 오셨으니 멸치회는 맛보고 가셔야죠. 이 시기를 놓치면 또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문산주가 싱겁다시던 정한길 전 문협회장님을 비롯한 전일희 시조시인협회장님도 김영준 원로시인님도 시원소주의 알싸한 맛과 매콤달콤한 멸치무침의 맛에 탐닉하셨습니다. 신명이 나신 정옥금, 탁영완, 강정화, 윤옥자 선생님의 젓가락 장단에 노래가 흥겨웠습니다. 사실 연화리 등대횟집은 정원이 아름다운 집입니다. 다음에 개인적으로 그 집에 한번 들려 보십시오. 다시 와 보시면 그 난리를 치는 바람에 놓치신 게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해프닝이 생각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실 것입니다.
앵두나무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는 노랫말 때문일 겁니다. 내 생각 속에 앵두나무는 우물가에 관목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앵두를 채취하는 것도 수월할 줄 알았습니다. 산속 깊이에도 앵두나무가 자라며 나무가 저토록 높고 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주인장 감윤옥 씨는 나를 보고 나무 위에 올라 앵두가 많은 가지를 톱으로 끊어 내랍니다. 에구구 이게 무슨 봉변(?)인가요? 삽질 한번 낫질 한번 제대로 못해 본 ‘남산동 딸깍발이’인 내게 톱질이라니요. 하지만 아니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엄마 따라 장에 간 아이들이 먹을거리를 보고 손짓을 하며 조르는 것처럼 높이 달린 앵두를 보고 손짓하는 분이 하나 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에구구. 그래요. 그래요. 이게 다 마음이 소녀 같은 누님들을 모시는 행복(?)에 겨운 내 팔자 때문이지요.
힘들게 톱질로 수차례 가지를 끊어 내었는데도 아무도 내려오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상외로 앵두의 수확이 쉽지 않자, 앵두를 마음껏 따먹을 수 있다면서 선배 문인들을 청했던 주인장이 몹시도 다급해진 모양입니다. 애꿎은 국장 더러 이쪽저쪽 더 잘라내라고 채근이 대단합니다. 마침내 서툰 톱질이 왼쪽 팔목을 찍었습니다. 뜨끔 놀랐지만 사내 녀석이 톱질도 제대로 못하냐고 힐난하실까봐 아무 일도 없는 듯 입 닫고 있었습니다. 몇 가지 더 끊어 내는 차에 이제 그만 가자는 몇몇 분의 말에 반색을 하고 나무에서 내려 왔습니다.
돌아오는 도중이었습니다. 주례를 보시느라 오늘 행사에 참석치 못하신 박달수 회장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함께 가자고 초청해 놓고 정작 본인이 참석치 않았다며 불평(?)하시는 원로를 모시고 서면의 모 처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행사도 궁금하시고 국장의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 오랜 친구의 불만을 다독거리려는 속셈이셨을 겁니다.
약속장소에 가려고 차에서 내렸더니 탁영완 선생님이 소녀처럼 빠알간 앵두가 달린 나무 가지를 안고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 지요. ‘꽃보다 남자’라더니 ‘앵두보다 소녀’라며 선생님을 보고 내 엄지를 세워 주었습니다. 일부러 생색을 내진 않았지만 그 가지도 제가 끊어 낸 것이었을 겁니다.
그것으로 됐습니다. 상처를 입어도 아무도 몰라주던 것에 쬐끔 서운했던 마음이 싹 풀렸습니다. 내가 조금 상처를 입는다 해도 저렇게 예뻐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으로 됐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박달수 회장님께서 부어 주시던 소주에 회장님도 모르게 상처를 씻어내고 남은 소주를 맛있게 털어 넣었습니다.
참석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이 서툰 통제에도 일사불란하게 따라 주신 넉넉한 마음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에는 더욱 알차고 좋은 행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음을 약속드립니다. 더욱이 행사를 알차게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물심양면으로 찬조해 주신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만 행사를 소묘한 스케치 북을 덮습니다.
첫댓글 국장님, 저희 3총사는 맛있다는 멸치회 못 먹었사옵니다. 선처 해 주이소 무슨 찐빵 값이 126.000원 아리송 국장님 혼자 그 많은 빵을 다 드셨을리도 없고 ....
과일~찐빵 값이 126,000원이란 이야깁니다. 어째보이 햇갈리게 적은 것 같네요. 양해하세요. ^^ 멸치회는 끝물이라 하얀맘님 이야기대로 내년에라야 맛 볼수있겠네요~
앞엣것은 못 보았네요. 찐빵에 눈이 멀어서....죄송합니다
피같은 술로 손을 씻어도 '몬한다카믄 쪽 팔린다 아이가' 하시는 폼생폼사 정신에 한 표를 던졌습니다...조만간 그때 낭비한 소주 게워내시겠죠?..............ㅎ
배병채, 정은영, 정은정 선생님으로 편성된 ‘강 선생님 구조반 멸치회~~ 내년에 기약 합시더~ 수고 많았습니다.
아~~~~~~~~~슬프도다. 하필 그날 영감이 만나자고해서 그 좋은 구경도 못하고....맛있는 멸치회도 못먹고 ,멸치회는 다음에도 있겠지만 그날 그맛이 날까요. 다음달에는 더 좋은 곳으로......
선생님. 낭군님께서는 여전하시죠? 때가 되면 재회할 수 있으니 너무 외로워마세요. 그래도 견우와 직녀처럼 일년에 한번 정도는 둘이서 만나시잖아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