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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잊혀진 대학살
2. ● 무고한 보도연맹원
3. ● 학살의 이유
4. ● 잔인한 학살의 전개
5. ● 우리 모두가 피해자
6. ● 책임자는 누구인가
7. ● 경산 코발트 광산의 침묵
8. ●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인 사람들
9. ● 진정한 비극, 일사분란한 침묵
10.● 마지막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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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대학살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밀물처럼 내려오던 그날 오후, 내무부 치안국장 장석윤은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모든 불순분자를 체포하고 상부의 지시가 없는 한 절대로 풀어주지 말 것”이라는 명령서를 각 경찰서에 하달했다. 새끼줄로 두 손이 묶여서 고개 숙인 채 끌려가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피난민들에게 자주 목격됐다. 이 사람들은 후퇴하던 정부군과 경찰에 의해 대부분 학살되었다. 학살은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어 전쟁이 대치 국면으로 접어든 7월부터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9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낙동강 이남의 대구·부산·마산 등지에서 특히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각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도 처형됐고, 4·3제주도민항쟁으로 이미 초토화되어 ‘보도연맹’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제주도에서도 이른바 ‘불순분자 예비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피살됐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최소 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6·25남북전쟁이 끝난 뒤 50년이 넘도록 철저히 은폐되어 온 이른바 ‘보도연맹원 대학살’의 개요는 이와 같다.
‘보도연맹’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것은 1999년, 여순군사반란을 취재할 때였다. 여순군사반란이 일어난 1948년 당시보다 6·25남북전쟁이 터진 뒤에 벌어진 보도연맹원 대학살로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는 증언을 여러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보도연맹’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다. “좌익 언론인들의 모임인가? 당시에 무슨 필화 사건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러한 우문은 사건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경악과 공포로 바뀌고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일이 50년이 넘도록 철저히 은폐될 수 있었단 말인가?
● 무고한 보도연맹원
보도연맹(保導聯盟)은 1949년 6월 5일 정희택·장재갑·오제도·선우종원 등 이른바 반공 검사들이 주도하여 만든 단체로, 좌익 전력이 있는 인사들을 ‘보호하고 이끌어’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포섭한다는 취지였다. 당시는 4·3제주도민항쟁과 여순군사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한 이승만 행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무자비한 숙군(肅軍) 총살을 다그치는 등 좌익에 대한 뿌리뽑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미국군 철수를 앞두고 38선에서는 이미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이승만 행정부는 최대의 정적 백범 김구를 살해하고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하는 등 권력 기반을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보도연맹은 이러한 시기에 창설됐다. ‘대한민국 절대 지지, 북괴 정권 절대 반대, 공산주의 타도 분쇄’ 등 강령에서 알 수 있듯, 보도연맹은 이른바 ‘좌익 전력자’들을 묶어서 만든 반공의 행동 부대였다. 적지 않은 좌익 전력자들이 연일 신문에 전향 광고를 내고 이 단체에 가입했다. 실제로 정백 등 거물급 남로당원도 가입했다. 그러나 좌익과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가입을 권유하고 설득하는 작업도 병행됐다. “이 단체에 가입하면 사상적으로 의심받지 않을 수 있다”며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는 통에 문화예술인도 많이 가입했다. 양주동·백철·황순원·이태준·김기림·정지용 등 쟁쟁한 문인들도 가입했다. 시인 정지용의 아들 정구관은 “오제도 씨가 하는 말이, 내가 보도연맹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여기 문화실장 맡으실 분이 없으니 이름이나 걸어놓고 바쁘시면 안 나오셔도 되고, 놀러 나오셔도 되고, 하기에 (선친께서)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보도연맹에 드느냐’ 했더니, (오제도가) 그냥 이름만 걸어달라고 했다”고 했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연극인 고설봉도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과거를 묻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문학·미술·연극 분야는 모두 단체로 가입했어요”라고 했다.
시골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가입했다. 식량 사정이 어려울 때였으므로 곡물을 배급해 준다는 약속에 솔깃해서 가입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우리는 농사짓느라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끌고 갈 줄도 몰랐죠. 무슨 죄가 있나요? 아무 죄도 없지.”(청도의 이분통, 남편이 끌려가서 희생됨)
“전혀 부역 안 한 사람도 가입하면 비료 준다, 쌀 준다 하니까 다 가입한 거죠.”(문경의 채의진)
“있는 사람들은 돈 가마니 갖다 내고, 돈 가진 사람은 차에서 내려주고, 찌꺼기들만 개 잡듯 다 죽여버린 거죠.”(청도의 이수기, 아버지가 희생됨)
● 학살의 이유
보도연맹 창립자 중 한 명인 사상 검사 장재갑은 “박헌영(당시 북한 부수상)은 김일성에게 남한에는 1백만명 이상의 남로당원이 있으므로 서울만 빼앗으면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전국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했다. 각 지방에서 그 1백만명이 봉기를 일으킨다는 뜻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보도연맹원을 학살한 것이 대한민국을 위험에서 건져줬다고 할 수 있다”고 항변했다.
인민군이 남침을 강행하자 이승만 행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대한민국 내부의 소요 사태였다는 것은 맞는 말로 보인다. 이승만은 이미 2년 전의 여순군사반란 당시 대다수 민중이 단 하루 만에 ‘인민공화국 지지, 이승만 정권 타도’로 입장을 바꾼 것을 목격하며 두려움에 몸을 떤 기억이 있다.
그러나 취재 중에 만난 사람들의 증언은 달랐다. 1949년까지 이미 10만여명의 남로당원들이 죽거나 월북하면서 남로당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천에서 아버지가 학살된 이천재와 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노동운동가 이일재의 공통된 주장은 “남로당 봉기설은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뻔뻔스런 거짓말”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남침을 부추긴 박헌영의 발언 또한 “자기 입지를 넓히기 위한 터무니없는 과장”이었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피학살자 유족들의 증언을 들어도 당시 학살된 사람이 ‘의식있는 남로당원’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승만 행정부는 전쟁이 터지자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하여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모두 검속하여 총살한 것이다. 당시의 신문 기록과 오제도·선우종원의 증언에 따르면 6·25남북전쟁 직전의 가입자 수는 33만 5천여명. 다양한 증언과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이들 중 최소한 3분의 2에 해당하는 20만명 가량이 학살됐으리라는 추론이 나온다.
전쟁이 터지자 서울을 사수한다고 방송하고 제일 먼저 도망간 이승만.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보호한다고 약속한 수십만명의 국민을 단지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도 없이 처형한 셈이다. 이는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정부의 명백한 약속 위반이자 반윤리적인 전쟁 범죄 행위인 것이다.
● 잔인한 학살의 전개
취재 중 입수한 미국군 문서는 이러한 대규모 학살은 ‘최고 지도자만 명령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다음은 당시 검사였던 선우종원의 재미있는 증언이다. 이승만은 도망갈 때 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간 게 아니라 전용 비행기 편으로 일단 진해로 갔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그곳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의 신속한 개입으로 반격의 기틀을 잡자 다시 대전으로 올라왔다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갔다는 것이다.
취재 중 입수한 문건과 증언을 시기 순으로 훑어봐도 전쟁 발발 초기의 긴박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전쟁 당일, 서대문형무소는 군중에 의해 문이 활짝 열렸고, 수감자들은 모두 살아서 나왔다. 남한군으로서는 서대문형무소의 수감자들을 학살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 인천형무소의 상황은 달랐다. 남한군이 형무소 문을 연 뒤 “인민군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해방되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수감자들이 “만세”를 외치며 뛰어 나오기 시작했고, 남한군은 이들을 모두 기관총으로 난사한 뒤 후퇴했다. 6월 28일 경기도 이천에서는 농협 창고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총살한 뒤 가매장을 시도하다가 중단하고 후퇴했다. 충북 오창에서는 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일일이 총살할 시간조차 없었는지, 창고 속에 수류탄을 던져 넣고 황급히 후퇴했다.
그러나 학살이 본격화된 것은 7월 이후였다. 대전형무소 재소자 4천여명을 학살한 7월의 골령골 사건에 이르러 학살은 체계적인 ‘집단 학살’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미국군의 입회하에 사진도 찍고, 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헌병 정복을 한 군인들이 총을 쏘고, 확인 사살도 하고, 제복을 갖춰 입은 의용소방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매장을 하는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 이후에는 저인망식 색출과 학살이 장기간 지속됐다. 부산·대구·청도·경산·마산 등지에서 학살이 많이 일어난 것은 남한군이 더 이상 후퇴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차분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우종원에 따르면 이때 색출 작업에 참여한 반공 검사 오제도가 “사람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사람을 잡아들였다가 풀어주면서 돈을 챙겼다는 얘기다. 오제도 입장에서는 “보도연맹을 만드는 바람에 오히려 좌익들을 조직화해 준 것이 아닌가? 호랑이 새끼를 키워준 것 아닌가?”라는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으므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빨갱이 사냥’에 나서야 혐의를 벗을 수 있었고, 그러다가 그만 도가 지나쳐서 ‘금전적 부패’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우리 모두가 피해자
부패한 집권 세력이 벌인 학살극의 피해자는 물론 죽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번 잡혀갔다가 가까스로 풀려 나오면 또 다른 사람에게 잡혀가기를 되풀이하는 악몽의 나날을 겪다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피해자는 유족들이다. 그들은 졸지에 가장을 잃어버린 채 험한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청도에서 만난 고운 얼굴의 정남조 할머니는 “자식들 공부도 못 시켰어요. 고생이야 말로 다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양산에서 만난 정기순 할머니는 울부짖었다. “너무 억울해요. 스물넷에 그 일 당하고 지금까지 옆길 한번 안 보고 살아온 납니다. 풀어주세요. 이 한을 풀어주고, 영혼도 풀어주고, 보상도 다 해주세요. 임 그립고, 돈 그립고, 한평생 살아온 납니다.”
피해자의 자녀들은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울어야 했고, 성장해서는 연좌제에 묶여서 정상적으로 취업할 수도 없었다. 지금 유족회를 조직해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연좌제의 피해자라고 보면 된다.
이들의 부도덕한 살인 행각은 인민군에 의한 보복 학살이라는 악순환의 빌미를 주었다. 개전 초기만 해도 ‘조국 해방 통일전쟁’이라는 도덕적 우월감과 자부심에 차 있던 인민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경찰과 우익 인사들을 대량 학살했고, 이는 다시 북상하는 남한군에 의한 부역자 색출과 학살로 이어졌다. 남한과 북한의 증오를 증폭시키고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원한을 깊게 만든 악순환이 이 보도연맹 대학살에서 비롯된 것이다.
● 책임자는 누구인가
이제 50년 동안 망각됐던 왜곡된 역사의 원인과 책임을 얘기할 때가 된 것 같다. 육본 특무대는 보안사를 거쳐 지금의 기무사가 된 방첩대로, 당시에는 CIC라는 영문 이니셜로 불린다. 피난지 대구에 본부를 두고 있던 CIC의 지휘관은 김창룡 대령이었다. 당시 이승만 행정부 내의 역학 관계를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전국적인 학살의 현장 지휘자로 김창룡을 지목했다. 육본 정보국의 전투정보과장 김종필은 “그거 CIC, 김창룡이 다 했지. 나는 그럴 위치에 있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군 조직상 김창룡의 직속상관인 장도영 육본 정보국장에게 당시 김창룡에게 학살 명령을 내렸느냐고 묻자 “알 수가 없어요. 3개 과를 제가 지휘했다고 해도 참모로서 한 거지, 후방의 감옥소나 좌익들은 관할하지 않았어요. 바로 코앞에서 인민군이 우리한테 총을 겨누고 내려오고 있었어요. 상대를 안 죽이면 우리가 죽는 거야, 알았어요? 지금 기준으로 그때를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라고 했다. 선우종원은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들려주었다. “정보국의 김창룡, 그 사람이 왕초거든. 이 박사하고 직거래했어요.”
전쟁 당시 미국군 CIC에 근무하면서 한국 CIC 내부의 정보를 종합해 미국군에게 보고하는 업무를 맡았던 김영복의 말이다. “김창룡, 이 사람이 독자적으로 이 대통령에게 군 정보도 주고 재가도 받으면서 일을 했습니다.” 김창룡이 공식 명령 계통을 뛰어넘어 이승만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정부 내의 공식 책임 계통에서 경찰 담당은 내무부 장관 조병옥, 군 담당은 국방부 장관 신성모, 형무소 담당은 법무부 장관 이우익이고, 그 총책임자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곁에는 그의 직접 지시를 받는 특무대의 김창룡이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8일, ‘비상사태하 범죄 행위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했다. 이적 행위자에 대해 재판 없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한 초헌법적 법안이었고, 이는 김창룡에게 살인 면허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무대에 소속되어 김창룡의 직계 부하로 보도연맹 학살에 직접 가담한 여수의 배학래는 솔직하게 학살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었다. “재판이 뭐야. 그냥 총살이지. 자백은 받아요. 때리면 다 불게 돼 있어요. 자백하고 나면 배에 싣고 나가서 배 꽁무니에서 총살해서 바다로 떨어지면 경비선들이 빙 둘러서 있다가 거기서 확인 사살하고, 그랬지.”
김창룡은 1956년에 허태영·송용고 등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긴 세월이 흐른 뒤 움직일 수 없는 증거와 함께 다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 경산 코발트 광산의 침묵
경북 경산시 변두리 평산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코발트 광산. 이곳에서는 특무대가 대구형무소 수감자와 경북 지역 보도연맹원 등 3천 5백여명을 총살해서 깊이 1백미터의 수직갱에 떨어뜨렸으며 그 상태로 5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다. 이미 열려 있는 수평굴에 들어가보니 몇 구인지 짐작도 할 수 없이 많은 유골들이 널려 있었다. 눈에 보이는 유골보다 더 많은 수천 구의 유골들이 수직갱 가득 차곡차곡 쌓여 있을 거라고 주민들은 말했다. 참담한 현장이었다. 학살의 전형적인 증거가 바로 그곳에 있었고, 50년 동안 망각을 강요당한 채 고스란히 방치된 비극의 역사를 코발트 광산은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발굴하려면 예산과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발굴에는 여러 가지 기술적 어려움이 따랐다. 광산이 무너질 위험이 있으므로 안전장치를 갖추고 발굴해야 했다. 발굴 결과를 분석하려면 유전자 감식을 해야 했고, 발굴 후에 어떻게 이 현장을 보존하느냐도 큰 문제였다. 최소 2억이 넘는 예산이 필요했고, 발굴 기간도 최소 1년은 잡아야 한다는 전문가의 의견이었다. 취재 중 최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서 부분적으로나마 발굴을 시도했다. 콘크리트 벽으로 막아놓은 수평갱 입구를 뚫고 들어가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발굴에 앞서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취조한 특무대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사한 사람들을 등급별로 분류해서 처형한 기록이었다. 코발트 광산의 학살이 특무대에 의해 자행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대구·경북 지역의 보도연맹원들, 그리고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대구 근교 월배, 가창댐 수몰 지역, 그리고 이곳 코발트 광산 등으로 분산되어 처형되었다. 1950년 8월 초, 약 열흘에 걸쳐 수십 대의 트럭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이곳으로 끌고 와서 간단한 조사를 마친 뒤 사살했다. 당시 코발트 광산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김종철(2005년 사망)을 만났지만 그는 한사코 말하기를 거부했다. 되돌아보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한참 뒤에야 그는 조금씩 입을 열었다. “그때를 말하려면 얘기가 길어요. 보도연맹이야 요샛말로 하면 이장이 가입하라고 해서 한 거지. 그 당시에는 다 공개적으로 가입했어요.” 어떻게 살아남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행동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을 구분하기에 나는 안 했다고 끝까지 주장했고 그걸 인정을 해 주어 살아났지” 했다. 그리고 그들을 잡아간 건 CIC였다고 한다.
김종철의 증언을 들으니 CIC가 그래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고 취조를 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학살의 문제점과 전체 그림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발굴 조사에 착수하기 위해 유족 대표와 경산 지역 활동가, 김종열 연세대학 법의학과 교수 조사팀, 충북대학 중원문화연구소 발굴팀, 광산 토목 전문가 권오목, 경산시 공무원 등 모든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발굴 팀을 꾸렸다. 준비 작업에 착수한 지 한 달여 만인 3월 11일, 다이너마이트로 콘크리트 벽을 깨고 들어가 수백 구의 유골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발굴 결과는 뉴스에 보도되어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대중은 뉴스를 통해 ‘보도연맹 대학살’이라는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
●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인 사람들
보도연맹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후 4·19민중혁명으로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나자 피해 유족들도 조심스레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의 활발한 유골 발굴과 진상 조사 작업은 대구에 사는 이광달이 제공한 자료들, 이도영·이복영·강창덕 등의 증언, 그리고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5·16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은 최소한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다시 군홧발로 짓밟았다. 잘못을 뉘우치고 화해를 도모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소속된 군의 비위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진상 규명에 앞장선 이원식 등 주동자들에게 그들은 ‘반국가행위자’라는 낙인을 찍고 사형·무기징역 등 극형을 선고했다.
5·16쿠데타의 주역 중 대표적인 생존자 김종필. 6·25남북전쟁 당시 육본 정보2과에 소속되어 북한 관련 정보를 담당했던 그는 학살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옆 부서인 정보4과(특무대) 김창룡의 행적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2000년 4월, 제주 백조일손묘 유족인 이도영과 면담하면서 “그거 다 김창룡이 한 짓”이라고 고성을 지른 바 있다. 그는 학살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5·16쿠데타의 주도 세력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4·19혁명 이후의 진상 규명 노력을 좌절시킨 장본인이므로 책임이 있다. 게다가 연좌제를 통해 피해 유족들의 생존을 위협한 것도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의 상관으로 계엄사령관과 혁명최고회의 의장을 지낸 장도영. 학살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그 역시 김종필과 마찬가지로 진상 규명을 좌절시킨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 진정한 비극, 일사분란한 침묵
학살 자체보다도 더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의문은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철저히 은폐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아버지 세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도 아무도 얘기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취재를 마친 후 내린 결론은, 너무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입에 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놀랄 만큼 일사분란한 침묵 뒤에는 ‘입 열면 다친다’ ‘바른 소리 하면 손해 본다’는 집단적 가위눌림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 갔다가 살아 나온 또 한명의 증인 권재효. 이 분을 인터뷰하는 동안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은 내내 불안한 듯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때 얘기를 하면 또 잡혀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창고에서 집단 학살이 일어난 충북 오창. 거리에서 만난 노인들은 취재진이 이 사건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때 사람 많이 죽었지”라고 말을 꺼내려다가 경계의 눈빛을 보내면서 “그런 건 왜 물어?” 하면서 입을 닫아버렸다
방송이 나간 뒤 자기 가족이 보도연맹으로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제보 전화가 무수히 걸려왔다. 이 사건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던 것이다.
잊혀진 과거를 무엇 때문에 파헤치느냐는 질문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답변은 간단하다. 이 엄청난 학살 사건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가해자가 아무 반성 없이 부와 권력을 누려온 반면, 피해자들은 연좌제로 억눌리고 레드 콤플렉스로 가위눌린 채 50년 이상을 살아왔다. 요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위선과 기회주의가 판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같은 중대한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기를 주저해 왔기 때문이다.
● 마지막 절규
지금은 영화〈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보도연맹’이 언급되는 등(비록 왜곡된 형태였지만)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2000년 가을, 취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전후 세대 사람들 중 ‘보도연맹’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계도 연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논문도 하나 없었다. 학살 피해가 극심했던 영남 지역의 극소수 기자들이 열심히 증언을 채록하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알릴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친일파가 해방 이후에 온존했다’는 역사책의 표현은 과연 맞는 것일까? 친일파들은 정부와 군경의 요직을 모두 차지했으므로 ‘온존했다’는 표현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8·15해방 후 민중의 친일파 숙청 요구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던 친일파, 특히 고등계 형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빨갱이’라고 뒤집어씌워 강력하게 민중을 탄압했다. 아무나 죽여놓고 ‘빨갱이를 죽였다’고 말하면 모든 게 양해되는, 오히려 고속 출세의 밑천이 되는 시대였다. 대구에서 만난 이광달은 그 시대를 가리켜 주저 없이 ‘악마의 시대’라고 했다.
학살 책임자들의 대다수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군림하며 살아왔다. 반면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들의 죄과에 대해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도연맹원 학살과 같은 끔찍한 일을 목격하고 나면 말조심을 안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침묵은 기득권 세력의 안녕을 위해 아주 편리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셈이다.
보도연맹에 대한 이러한 추적은 해묵은 상처를 들춰내자는 게 아니다. 누구를 단죄하자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인정하고, 정당한 사과와 용서를 이끌어내고, 그 토대에서 겸허하게 미래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방송이 나가고 4년 반이 흐른 2005년 여름, 최대의 학살 현장인 경산 코발트 광산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망각과 무관심의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진상 규명과 화해를 위해 힘을 써야 할 정부·국회·언론·시민단체가 무관심한 이 현실 속에서 PD인 필자마저 침묵한다면 필자 또한 이 ‘무책임의 사슬’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발트 광산 현장으로 다시 달려갔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피해 주민들의 마지막 절규가 골프장 건설의 굉음 속에 파묻혀 사라지는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2005년 12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필자 또한 한두번의 방송으로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국 인간은 시간과 망각에 지배당하는 존재니까.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은 진실을 말하고 알리는 게 우리 유한한 인간의 도리라는 생각에 지금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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