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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SFC 형성의 실체가 된 수양회
YFC를 지도하던 한부선 선교사와 신앙협조회를 지도하던 한명동 목사의 의견일치로 수양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한명동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렇게 매월 매 월요일마다 청년신앙운동 집회가 우리 고려파적으로 모이고, 둘째 주일, 넷째 주일은 성경연구회로 그렇게 해 나가는데, 이와 별도로 고려신학교 주최로 한부선 목사님과 내가 의논해서 1년에 한 번씩 대 집회를 하기로 했다. 우리 고려파의 젊은이들의 신앙 훈련을 위해 대집회를 하기로 하고 '제 1회 기독 소년 하기 수양회'라고 해서 1948년 8월 2일~6일까지 했었다.
이렇게 시작된 수양회에는 학생신앙협조회와 부산청년신앙운동, 성광회와 고려신학교 학생들 그리고 고려파를 지지하는 교회의 학생들이 연합하였다. 이것이 결국 전국학생신앙운동의 실체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1) 제1회 수양회(1948.8.2~7)
제1회 수양회는 고려신학교 주최로 1948년 8월 2일부터 7일까지 고려신학교에서 열렸다. 이 당시는 아주 간단한 기록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한 진행 상황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제6회 수양회지에 이원홍 공보부장은 '수양회의 역사, 기억을 더듬어서'를 기고했는데 여기에는 수양회 약사가 소개되어 있다.
1948년 여름 숨이 막힐 듯한 신학교 강당에서 땀으로 옷을 적시면서 한 시간을 아멘으로 보냈다. 이것이 바로 제1회 하기 수양회였다. 박윤선, 한부선, 한명동, 최의손, 마두원, 송상석, 노진현, 이상근, 이인제 여러 목사님들을 강사로 모시고 1948년 8월 2일부터 7일까지 신학교 강당에서 열렸던 것이다. 참석인원은 고등학교 남자 31명, 여자 6명, 중학교 남자 68명, 여자 18명, 국민학생 10명, 기타 22명이었다. 수양회 위원은 접수부 홍반식, 서무부 이근삼, 음악부 임옥희, 운동부 김영진, 식사부 박영규, 기숙사부 이용규, 정리부 김진섭으로 대부분이 고려신학교 학생들이었다.
2011년 8월 4일 고신총회회관에서 모인 초창기 선배들의 간담회에서 황창호 동문은 제 1회 수양회 참석자 수와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지금과 그때는 전국적인 인구나 학교 수에서 차이가 있다. 당신 부산 시내에 중, 고등학교가 12개 정도였고, 한국사람 위주로 다닌 학교는 5개 정도였다. 그래서 학생들이 다 모여도 300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러나 수양회는 영적으로 감격적이었다. 당시 수양회 분위기에 대해 강수명 동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려신학교는 거의 불구덩이었다. 박숙희 학생이 특송을 하다가 울면서 더 이상 특송을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분위기는 정말 불구덩이 같았다.
2) 제2회 수양회(1949.1.11~16)
제2회 청소년 수양회 프로그램을 보면 새벽기도회, 오후연합 예배, 저녁 예배가 있었고, 오전 오후에 성경공부가 있었다. 새벽기도회는 한부선 선교사의 십계명 강해가 있었고, 오전에는 오종덕 목사의 교회사 강의와 박윤선 목사의 성경연구 시간이 있었다. 오후는 이인재 전도사의 성경연구가 있었고, 저녁예배는 최의손 선교사, 노진현 목사, 이수필 목사가 강사로 참여하였다. 기도회, 예배, 성경공부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교회사 같은 신학 강좌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에 개 교회에서는 듣기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수양회는 참석 학생들이 영적인 영양분을 섭취하는 기회였다.
제2회 청소년 수양회에 참석한 교회를 분석해 보면 경남, 경북, 대전 세 개 지역에서 주로 참석하였는데 경남지역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개 교회의 참석은 부산 영도교회가 41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것은 당시 영도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한명동 목사의 영향으로 학생신앙협조회 회원들이 많이 참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명동 목사가 부산남교회로 목회지를 옮긴 후에는 전국교회 가운데 매년 가장 많이 참석하는 교회가 되었다.
회원 수는 남자 145, 여자 51, 총 196명이었다. 교회 수는 경남이 39, 경북 2, 충남 1, 이었고, 학교 수는 대학교 2, 중,고교학교는 남자 43개 학교, 여자는 14개 학교였다. 경남 지역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고, 중학생이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여자 보다는 남자가 3배가량 많았다.
2회 수양회에서는 특별히 1차 전도행사를 가졌다. 부산 시내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전도했으며 또한 전도 집회도 가져서 많은 결신자를 얻게 되었다. 수양회에서 전도 활동을 통해 전도의 불이 붙은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각 지역으로 돌아가서 지역과 학원전도를 통해서 학원 복음화에 열심을 냈다. 이와 같이 수양회는 전도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였다.
3) 제3회 수양회(1949.8.3~9)
제3회 수양회는 고려신학교에서 하기 수양회로 모였다. 참석 인원은 남자가 141명, 여자가 61명으로 202명이 참석 하였고 학교는 대학교가 4개 대학, 남자 중학교(당시는 5년제) 36개교, 여자 중학교가 13개교였다. 참석한 교회는 4개도 6부 11군에서 45개 교회가 동참 했는데 부산이 12개 교회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경남 지역은 39개 교회, 대구-경복이 4개 교회, 그리소 서울-개성에서 각각 1개 교회였다. 경남지역에 위치한 교회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당시의 참석 교회를 보면 SFC운동이 부산-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아직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양회회지에서 각 지역의 활동란을 보면 SFC운동이 경북지역과 다른 지역으로의 확산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회지의 광고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구 서문교회에서는 학생 성경반을 조직하여 약 120명의 회원이 매주일 성경연구, 월말 통상회, 월정 연구회로 모이며 신앙과 진리지식의 실력양성을 기하고 있다고 한다.
(2) 대구지방에 학생신앙운동을 시작, 1949년 5월 26일에 조직되어 매주 토요일 밤에 정기회로, 매 주일 오후에 성경공부, 매 15일 밤음 신앙의 밤으로 청년학생의 신앙운동을 맹렬히 전개하고 있으며 악대는 노방전도도 하고 있다고 한다.
(3) 대구제일교회 학생회에서는 영어 성경반을 시작하였고, 매년 전국 기독학생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금년에도 9월초에 있다고 한다.
(4) 경주읍 교회에서는 나병환자 위문예배, 소년 면려회에서는 매주일 오후에 노방전도와 개인전도, 아울러 나병환자와 예배도 보고 공부도 가르친다고 한다.
(5) 진주지방에서는 봉래, 성북, 성남 각 교회 학생회는 연합회를 조직하고 약 250명의 회원으로 앞으로 많은 희망을 가지고 특히 신앙적 불을 받기 위하여 30여명의 학생이 수양회에 참석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6) 마산지구 기독학생 연합회는 전국 기독학생연합회(KCCC)가 신신학운동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여 거기서 탈퇴하고 독자적 학생운동을 맹렬히 시작하리라고 한다.
(7) 밀양읍교회 소년회에서는 전도와 교회봉사에 힘쓰며 회지<산돌>을 발간하고 문서운동도 하고 있다고 한다.
4) 제4회 청소년 수양회(1950.1.9~14)
제4회 수양회는 16개 부군에서 34개 교회가 참여 하였으며 남자 회원이 94명, 여자 회원은 50명, 총 144명이 등록하였다. 학교별로는 남녀 대학교가 각각 1개교였고, 남자 중학교가 27개교, 여자 중학교가 10개교였다.
제4회 청소년 수양회 시간표를 보면 탁구와 배구대회 등의 체육행사와 웅변대회도 있었다. 이후의 수양회에서도 이런 프로그램은 계속 되었다. 성경공부와 설교, 강의 중심에서 문화적인 부분이 첨가된 것이다.
특별히 수양회 회지에는 '국제기독교연합회(ICCA)에 드림'이라는 성명서를 게제하고 있다. 프리스톤 신학교 교장인 맥케이 박사와 에밀 부룬너를 초청하여 한국에서 신학 강좌를 하고 다닌 일에 대하여 신신학과 칼 바르트를 수용하는 신학자들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만큼 당시의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보수적인 신학은 SFC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4회 청소년 수양회에서 특별한 일은 제2차 전도운동이 전개 된 점이다. 제4회 청소년 수양회에서 약간의 변화는 그 동안 수양회 참석교회는 부산지방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었는데, 대구, 진주, 마산, 김해 등의 교회 참석자가 수가 조금 늘었다는 점이다. 같은 영남권 안에서도 수양회를 통한 참석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5) 제5회 수양회(1951.7.23~29: 전국남녀 학생 부흥대회)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8월(하기 수양회)과 1951년 1월(동기 수양회)에 예정된 수양회는 개최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51년 7월 23일부터 29일까지 제5회 하기 수양회가 열렸는데 350명 정도 참석하였다. 제5회 수양회는 회지가 보존되어있지 않아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지 않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수양회가 열렸는데 <개혁주의> 회지에서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1951년 7월 23일부터 개최된 제5회 수양회(전국남녀 학생신앙 부흥대회)는 피난민의 무리로 장사진을 이룬 무리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부산의 거리는 공포와 죽음과 혼란이 뒤섰여 춤추고 인파의 부산거리는 날마다 이채로운 광경들로 가득 찼다. UN군들의 왕래와 전선으로 나아가는 힘찬 청년들의 모습! 피난 살림에 갈증을 만난 민간군! 총, 칼, 싸움, 죽음, 상이군인, 학원, 친구, 도적, 살인, 강도 ... 정말 혼란의 파도 그것뿐이었다. 정말 사망의 행렬이었다.
초창기 고려신학교 주최로 열리던 수양회는 5회를 끝으로 6회에서 11회까지는 부산남교회당에서 열렸다. 수양회 주최도 고려신학교에서 SFC로 이양 되었다. 한명동 목사가 제일 영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남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건축(1952년 기공, 1953년 9월2일 입당)을 한 이후로 SFC 수양회는 부산남교회에서 계속 개최되었다. 이는 부산 남교회가 한동안 SFC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이면에는 한명동 목사의 역할이 컸다.
6) SFC 수양회가 지역과 교회에 끼친 영향과 한국교회 부흥운동
<<회개운동과 기도의 불>>
<학생신앙운동 20년사>에서는 수양회를 불의 운동으로 규명하며 "고려신학교가 주최하는 기독 소년(학생) 하기 수양회를 전후하여 불의 운동이 일어났다." 고 적고 있다.
첫째는, 회개운동과 기도운동의 불이었다. 둘째는, 전도 운동의 불이었다. 셋째는, 부흥운동의 불이었다. 이렇게 수양회는 참석한 학생들과 청년들의 가슴에 뜨러운 불을 붙였다. SFC 동문인 김진경 교수는 초창기 수양회는 "삼분의 일이 철야기도였다. 고함치고 기도하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주로 회개 운동이었고, 고교생과 대학에 갓 들어간 학생들이 주동이었다." 라고 영적인 분위기를 증언하고 있다.
이런 영적인 힘이 조그만한 기도의 모닥불을 거대한 SFC로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제일진해교회 50년사>에서는 SFC에서 수양회가 차지하는 비중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그만한 기도의 모닥불이 지금은 거대한 조직의 SFC로 발전하게 된 밑거름은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개최되는 수양회였다. 이 수양회를 통해 한국 학생들의 신앙이 자라고 교회가 튼튼해졌다고 해도 과언ㅇ니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수양회를 빼놓고는 학생신앙운동을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수양회에 다녀 온 본 교회 학생신앙운동원들이 보여준 수양회를 향한 뜨러운 열정은 전국의 어느 교회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였다.
<<수양회와 전도 열정의 확산(지역과 학원의 복음화)>>
수련회 기간 동안에 '전도의 시간'을 가졌다. SFC 수양회의 뜨거운 분위기는 전도의 열정으로 나타나서 운동원들이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 지역과 학원에서 열심히 전도하였고, 이들을 통해서 교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 전도운동에 대해 <학생신앙운동 20년사>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46년 YMCA 회관에서 모였던 청년신앙운동의 모임에 관계한 한 미국인 병사가 미국에서 한부선 선교사를 통하여 백 불이 전달되었다. 이 돈으로 전도지를 인쇄를 하였다. 그리하여 부산 시내 5만여 호를 대상으로 청년과 학생들이 복음을 전하였다. 이 전도가 끝날 무렵 출옥성도 고 손양원 목사를 강사로 YMCA회관에서 부흥전도 집회를 개최하였다. 천 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장소가 협소하여 중앙 교회당까지 사용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산의 시민에게 심어주는 위대한 선물이었고 그 결과 결신자 5백여 명의 수확을 얻어 해방을 주신 주께 영광을 돌렸다.
하지만 이 정도 대회의 내용에 대해서 황창호 동문은 다른 사실을 증언하였다.
기록과는 차이가 있는데 부산 시내에 전도지를 배부한 것은 두 번인데 첫 번째 전도지는 고려파에서 만든 것이 아니다. 그 당시 학생 조직으로 KSCF(전국기독학생회연합)가 있어서 우리는 부산지부에 속해 있었다. 1948년에 본부에서 전도지를 받으러 오라는 통지가 있어서 내가 부산 대표로 서울에 올라가 종로 2가에 있는 사무실에 가서 전도지 2만장을 받아 한명동 목사에게 전해주었다. 2차로 배부한 요한복음은 한부선 선교사가 준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새로운 역사적 사실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1차 전도운동의 전도지의 출처에 대한 내용과 YFC가 KSCF의 지부로 가입했었다는 사실이다.
2차 전도운동은 제4회 수양회 때 있었다. 이때에는 2회 수양회 때봐 규모도 더 크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2차 전도운동에 대하여 <학생신앙운동 20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49년 벌어진 전도운동의 즐거운 소식을 한부선 목사가 미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기쁨으로 전하였다. 물론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소식을 전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부산에서 일어나는 학생 운동의 즐거움을 고국의 형제와 같이 나누자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뜻 밖에도 미국의 그 형제는 1111불이라는 큰 액수를 한부선 선교사에게 보내 왔다. 한부선 선교사는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아 본 일이 없었다. 한 목사는 너무나 뜻밖의 일에 감사하고 이 돈을 모두 전도 운동에 사용했다.
이 돈으로 요한복음(쪽복음)을 10만부 인쇄했다. 1949년 학생들은 이 복음(책자)을 들고 부산 시내 출호전도를 개시했다. 그리고 시내 목사님들을 모시고 3개 처 초증학교를 빌려서 강연회르르 개최하여 부산 시민에게 예수 그리스도르르 심어 주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전도에 남다른 열심을 가져 진해지역 전도대회에 초청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한부선 선교사의 유창한 한국말을 듣고 그를 한국인으로 오인하는 이도 있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개혁주의 신학의 공급처로서의 수양회>>
수양회 기간 동안에는 고려신학교 교장인 박윤선 교장을 중심으로 고려신학교 교수들이 개혁주의 역사와 신조 등을 가르치며 개혁주의 신학을 공급하였다.
<<학원 복음화의 비전과 동력으로서의 수양회>>
수양회에서 은혜를 받은 학생들은 뜨거운 열정으로 학원으로 돌아가 전도 활동과 학원 모임을 조직하여 활동하게 됨으로 학원 복음화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 문화 창출로서의 수양회>>
수양회 기간에 성경암송대회, 한글-영어 웅변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수양회 기간에는 공보부에서 수양회 회지를 발간하여 강사들의 강의 내용과 학생들의 글을 실기도 했다. 그리고 지방 소식도 실어서 각 지방의 활동 상황도 전달해 주었다. 이러한 활동은 문화 활동 공간이나 기회가 적었던 당시에 문화적인 재능을 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SFC 수양회 공보부에서 활동했던 이원홍은 후에 문공부장관에 발탁되기도 했다.
SFC 전국위원장을 역임한 이만길은 수양회에서 활동한 공보부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수양회 하면 잊지 못한 공보부의 눈부신 활약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주일을 꼬박 뜬 눈으로 개우며 매일 매일의<타임즈>는 물로 폐회 전까지 우리들의 손에 회보를 돌려주기 위해 프린트 기계와 씨름하던 김동철, 주경업, 양상만, 문소일 등의 동문들이 있었다.
이렇게 수양회 기간 동안 공보부에서 수양회의 상황을 취재해서 알려주던 수양회 소식은 수양회 참석다들에게 수양회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연할을 했다. 이렇게 모아진 회보는 SFC 수양회지 영인본 1,2로 편집되어 출판되었다.
<<SFC 조직화를 이루는 수양회>>
전국 SFC 수양회를 통해서 SFC는 각 지방의 조직이 결성되고, 각 지방조직으로 확대 되어 갔다. 전국 SFC 수양회를 통해서 SFC는 전국과 각 지방에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52년 제6회 수양회(1952.7.21~28)에서 전국학생신앙운동 조직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1954년 1월 9일에서 14일까지 부산남교회당에서 모였던 제4회 전국학생신앙운동 임시대회에서 전체적인 조직표를 만들게 되었다. 초창기 SFC는 조직과 관련하여서 선 조직 후 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조직을 먼저 한 다음에 활동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선 조직이 수양회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수양회를 마치고 각 지방으로 돌아가서 교회연합 조직과 학원SFC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인재 양성의 수양회>>
SFC 수양회를 통해서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는데 고신 교단의 지도자들 가운데 SFC 출신 동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고신교단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인정받는 지도자들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신학자로서 고려신학교의 2세대 교수들인 오병세, 이근삼, 홍반식, 그리고 김병원, 허순길은 교수 사역을 통해 많은 목회자들을 양성했다. 다른 신학교나 일반대학에서 교수사역을 한 동문으로는 김진경, 이만열, 손봉호, 차영배, 김영재, 이종윤, 홍치모 등 다수가 있다. 목회자로서는 김상복, 옥한흠, 석원태, 신성종 등이 한국에서 이름 있는 교회의 목회자로 사였하였다. 의사로는 박영훈, 이화동 외 다수가 있으며 정-관계에는 손명순(대통령 여부인), 이원홍(장관), 손주환(장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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