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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47. [역경의 열매] 김형민 (1-13) 8년만에 마주친 ‘매질’ 담임… “용서하라!”
나의 어린 시절은 한 마디로 별 볼 일 없었다. 남들보다 잘 하는 것도 없고 공부도 별로 신통찮았다. 거기다 조용한 성격이라 항상 선생님의 관심에서 벗어나 지냈다.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학교에 일찍 가서 정돈도 하고, 걸레 청소도 해보았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열한 살 때 어린 소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했다. 담임선생님이 내 몸을 더듬는 성추행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이 드러날까 겁난 선생님은 날마다 트집을 잡아 매질을 해댔다. 어린 마음에 너무나도 억울했지만 두려움에 참고 견뎌냈다.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나의 순수한 마음은 바닥에 짓밟혔고,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외로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미션 스쿨의 여고를 들어갔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나로선 예수님의 희생, 사랑, 십자가 등의 기독교 개념들이 너무나도 멀고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채플 시간에 참여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채플 시간이면 거의 옥상에 올라가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분식집에서 친구들과 놀았다.
여고를 마칠 즈음 비교적 안정권의 대학을 택해 입시를 치렀음에도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억울함보다도 죄책감이 들었다. 대학 입시 낙방이 채플 시간을 빼먹었던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합격자 발표 며칠 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자꾸만 눈물이 흐르면서 하나님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분에게 꼭 사과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교회가 보이면 바로 내려야지 마음먹고 있는데, 마침 큰 교회가 나타났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기에 덩달아 내렸다. 사람들 사이에 휩쓸려 따라가니 ‘여의도순복음교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교회라곤 초등학교 3학년 때 피아노 선생님을 따라서, 중학교 2학년 때 동네 아줌마를 따라 가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한데 거기서 내 인생을 180도 바꾸는 계기가 생길 줄이야. 어떤 깨달음이 있어서도, 목적이 있어서도 아닌, 단지 3년간 채플을 빼먹은 죗값을 치러보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나는 그날 예배당에서 하루 종일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울면서 말씀을 듣고 기도했다.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바닥에 딱 붙어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내 입에서 전혀 뜻하지 않은 말이 나왔다. “주님, 저도 강대상 위에서 설교하시는 저 목사님처럼 쓰임 받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보내주세요! 그러면 제 일생을 바쳐 주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날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리고는 몇 개월 지난 어느 날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났다. 초등학교 때 나를 괴롭혔던 바로 그 담임선생님이었다. 너무나 놀라 온 몸이 분노로 떨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옛날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마음속에서 어떤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용서하라!”
누구의 음성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님의 자녀가 됐다면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자각 같은 게 생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속에 떠올리며, 그의 뒷모습을 향해 나의 죄 또한 용서받았음을 울면서 선포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큰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세상 속에 들어가 더욱 담대히 예수님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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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형민 (2) “스쿨! 스쿨! 스쿨!” 외마디 영어 부탁에 주님께선
예수님을 영접하고 1년쯤 지난 뒤 나는 집에서 좀 더 가까운 동네의 작은 감리교회를 출석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전도를 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제게 큰 북을 하나만 빌려주세요.”
“김 선생, 큰 북은 어디에 쓰려고?”
“전도하려고요. 전도는 일단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어야 하는데, 제겐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요.”
당시 초신자였던 나는 전도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사람들이 ‘마가 다락방’이라는 복음성가를 부를 때도 나는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빵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 내가 갑자기 찾아와 전도를 위해 북을 빌려 달라고 하니 담임목사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목사님에게서 북을 받아 든 나는 온 동네를 돌면서 ‘진짜 사나이’를 불렀다.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어린 처녀가 군가를 부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풀빵 장수 아저씨, 세탁소 아주머니 등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 진기한 구경거리라도 만난 것처럼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자 100여 명의 사람들이 내 뒤를 따라 교회로 들어왔다. 물론 모두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첫 수확이자,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이었다. 비록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전도하겠다는 진지한 마음만 있으면 주님께서 언제든지 모든 길과 세세한 방법까지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는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전도를 하러 다니던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다방에 들어서려니까 캐럴 송이 너무 크게 들려서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이 세상 모든 아기들이 살기 위해 태어난 이날 아기 예수님만은 우리 죄 때문에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마음의 감동이 밀려왔다. 이런 마음의 감동을 거부한다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딱 한 사람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바로 나의 남편인 오영택 목사다.
그렇게 만난 오 목사와 결혼, 몇 달 후 유학길에 올랐다. 남편의 유학을 위한 것이었지만, 나는 늘 가슴 한 구석에 학업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나는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실에 십자가 하나 걸어놓고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주여! 학교에 보내 주시옵소서. 학교에 보내 주시면 내 평생 하나님의 일에 힘쓰겠습니다.”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 밤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빨강색 조깅띠를 하고 있는 어떤 키 큰 백인 할아버지가 잠시 비를 피할 수 없겠냐고 물어왔다. 기도를 하다 흘린 눈물로 눈가가 젖어 있었던 내게 그분은 “왜 우느냐?”고 물었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딱 세 마디로 대답했다. ”스쿨! 스쿨! 스쿨!“
그렇게 짧은 말에 담긴 모든 뜻을 그분은 이해하는 듯했다. “내일 내 사무실로 오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분은 떠났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로 찾아간 내게 그분은 4년간 그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장학증서가 담긴 하얀 봉투를 주셨다. 내가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명예박사를 받은 유서 깊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공부를 잘 하지도 못하고, 집안 배경도 좋지 않았던 내게 하나님께서 공부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유학생 비자도, 2만 달러가 넘는 학비도, 토플 점수조차 없었던 내가 ‘하나님 빽’ 하나로 명문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분은 바로 이 대학의 총장님이셨다. 그날 밤 예수님은 대학 총장님을 통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던 내게 찾아오신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민 (3) 유학 중에도 하루 7시간이상 기도… 전도 또 전도
대학원 진학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오전에는 공부, 남는 시간에는 파출부 생활을 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부촌이었다. 집에 가면 항상 멋진 옷을 입은 키가 큰 백인 여주인을 볼 수 있었다. 작은 키에 구세군에서 구입한 1달러도 안 되는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나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정체성은 단순히 파출부가 아닌,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늘 복음 전할 생각만 했다. 쿠키 가게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취직한 가게에 쿠키를 드시는 예수님 그림이 있어서, 그림을 떼어내고 소중히 간직하던 성화로 교체해 놓았다. 예상대로 주인에게 야단을 맞고 쫓겨날 뻔했지만, 화를 내는 주인에게 나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담대히 전했다. 그리고 내가 매상을 올리면 예수님을 믿겠느냐고 물었다. 의외로 주인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가게 주인을 전도하기 위해 가게 문을 닫는 밤 8시를 훌쩍 넘겨 밤 11시까지 주인 몰래 과자를 팔았다. 예수 믿는 사람이 들어오니 확실히 다르다면서 좋아하던 주인은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도 나가고, 여전도회장까지 맡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유학생활이었다. 공부와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느라 몸은 늘 지쳐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매일 밤 대학원 뒤 동산에 올라가 새벽 두세 시가 넘도록 기도했다. 하루에 7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이 생활화되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기도를 지속하다 보니, 그 지역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느 장로교회에서 집회를 맡게 되었고, 그날 우연히 집회에 참석했던 한미라디오방송 PD는 큰 은혜를 받았다면서 덜컥 나를 상담프로의 진행자로 추천하였다. 파출부와 아르바이트 생활의 고달픔을 이기기 위해 날마다 철야기도를 했던 내게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기도생활은 기숙사비가 떨어져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기도해야 한다는 감동을 주시면 언제 어디서든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어느 날에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그런 감동을 주셔서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많은 미국 학생들이 기도하는 내 주변에 동그랗게 모여 들었다.
“What are you doing here?”
여기서 뭐하냐고 누군가가 큰소리로 물었다. 나는 당장에 눈을 뜨고서 “보면 모르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다급한 기도였기 때문에, 그냥 엎드려 있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 믿고 지켰다.
저녁에 예배드리러 교회에 갔더니 한 집사님이 봉투를 건네는데, 정확히 기숙사비만큼 들어 있었다. 교회 전도사님의 병원비로 쓰려고 했는데, 그분이 이미 퇴원을 해서 어떻게 할까 기도하던 중에 내게 갖다 주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그 음성을 듣고 “주님, 그분은 제가 도와줘야 할 만큼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을 텐데요?”라고 되물었지만, 계속 그런 마음을 주셔서 순종했다고 했다.
오래 전 학창시절의 이 간증을 듣고, 개척시절 교회 학생들은 개인용 비닐돗자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이 다니는 캠퍼스에서 중보기도를 했다. 학생들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름방학 내내 수도권의 대학을 돌며 ‘불타는 돗자리’ 기도회를 담대하게 해냈다. 캠퍼스 안에서 돗자리를 깔고 그 학교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불타는 돗자리 정신은 낮춤, 순종, 담대함으로 대표되는 대학연합교회 리더십의 기준이 되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민 (4) 불치병 남편과 떠난 사우디 선교… 신유의 기적이
도저히 공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님의 크신 은혜로 무사히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잘 풀리는 듯했는데, 한국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오영택 목사의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꼽 아래 부분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뜨거운 물과 찬물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샤워를 하면서 살갗이 벗겨질 지경이었다. 병원에서 원인도 치유 방법도 없는 불치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았다. 중추신경이 벗겨지면서 눈과 귀가 멀고, 마침내 뇌를 마비시켜 식물인간이 되어 죽는 병이라는 것이다.
설교할 때 자신의 힘으로 강대상에 올라가지 못해 성도들이 기도하는 사이 장로님들이 업고 올라가서 겨우 강대상을 붙잡고 설교를 하고, 다시 업고 내려와야 했다. 하루는 운전 중에 그만 차 안에서 실수를 해서 갈아입힐 옷과 세숫대야를 가지고 고수부지로 갔다. 너무도 서러워서 그곳에서 남편의 옷과 몸을 씻으면서 둘이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불치병의 남편을 지켜보면서 그 곁에서 그저 무기력하게 간호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서울중앙병원 영안실 앞에 차를 세워 놓고 한 달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했다. 한때는 내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개의치 않고 욥기를 읽어가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런 나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오해가 이어졌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달간의 기도를 마친 후 돌아오자 남편은 “아내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고 원망하며 화장실에 들어가 버렸다. 그러더니 30분이 지나도 도무지 나오질 않았다. 하도 이상해서 들어가 보았더니 산만한 덩치의 남편이 엉엉 울고 있었다. 그러더니 자신이 16세 때 신현균 목사님 부흥회에서 하나님께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나는 남편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은 목숨이다. 하나님께 드린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죽어야 한다. 당신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우리 부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한 분뿐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박국서 말씀을 붙잡고 결단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죽을병에 걸린 사람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조차 서 있기 어려운 열사의 땅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자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가능에 맞선다는 것과 나에게 쏟아질 비난의 화살도 두려웠지만, 그렇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임을 확신했다.
마침 사우디아라비아에 계시던 한 지인의 소개로 우리 부부는 무슬림의 종주국을 향해 선교사로 떠나게 됐다. 그곳에 가면 하나님께서 낫게 하실 것이라는 대가를 바라는 계산적인 마음은 결코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휠체어를 비행기에 싣고 사우디아라비아로 갔다. 하루에 9번씩 먹어야 하는 약은 공항에서 전부 버리고 전적으로 주님께 의탁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혼자 계단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뛰고 축구까지 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그때 남편에게 신유의 은사가 생겼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급성 백혈병을 앓고 있는 16세 학생이 치유되고, 천식과 심장병 환자 등 수많은 이들이 남편에 의해 고쳐졌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순종하자 하나님께서는 목숨도 건져주시고, 신유의 은사라는 큰 축복까지 주신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민 (5) 사활 건 중동선교의 교훈 ‘담대함을 잃지 말라’
남편 오영택 목사의 병이 낫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지하교회는 날로 부흥되어 갔다. 현지에서 몇 년간 사역하면서 중동선교가 어려운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유창하게 아랍어를 구사하고, 복잡한 이슬람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선교사를 어릴 때부터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중동문화권에 맞는 느긋한 성품과 무장된 무슬림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담대함을 갖춘 전문선교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중동선교만 전문적으로 훈련시키는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결단했다.
신학생들을 현지에서 훈련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이를 위한 신학교와의 네트워크를 준비 하고, 건물 임대와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집회를 하면서 유럽신학교 연맹과 미국의 신학대학과의 협의도 이끌어냈다. 중동선교훈련을 여름학기 커리큘럼에 넣고 사우디 현장에서 신학생들을 훈련하기로 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던 중 우리가 성경 배포 작업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미국 CCC가 영화관이 없는 중동 땅에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비디오를 배포해 달라고 부탁해왔다. 우리 교회에서 복제 기계의 구입을, 네덜란드 선교사가 비디오 복사를, 그리고 교인들과 필리핀 선교사들이 배포를 담당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에 함께 동역하던 네덜란드 선교사 한 분이 비디오를 복사하던 지하공장에서 체포됐다. 사우디의 지하 감방에 구금돼 있던 그 선교사는 이후 우여곡절 끝에 미국 CIA에 의해 구출됐다.
연이어 동역하던 집사님 한분이 체포됐다. 쪽복음 성경을 비밀리에 현지인들에게 배포하다가 사우디 종교성 산하의 정보부에 들킨 것이다.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던 중 기적적으로 미국 상원의원 두 사람과 연락이 닿게 됐다.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짠’하고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우디 정부는 성경을 가르치던 필리핀 노동자 두 명에게 마약 혐의를 덮어씌워 할라스 광장에서 공개처형했다. 본격적인 기독교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혀 굴하지 않고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 즉 주일예배를 비롯한 새벽예배 금요예배 수요기도회 성경공부모임 등을 가동했다. 금방이라도 발각될 위험에 처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제자들이 마가 요한의 집에 모여 합심해 기도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모여 기도에 힘썼다.
새벽마다 전 교인들을 독려하자 주일학교 어린이들까지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주일학교 어린이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할 얘기가 있다던 그 아이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내게 다가와 “할라스 광장에 붙잡혀 가도 저는 끝까지 예수님 부인 안할 자신 있어요. 목사님, 하지만 저희 아빠는 어떡하지요? 아빠는 신앙이 아직 약하니까, 예수님 부인하지 못하게 목사님이 끝까지 붙잡아 주세요”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이다. 초등학생의 이러한 담대함은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새벽기도 정신은 지금까지도 대학연합교회 최고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후 경찰이 급습해 교회가 폐쇄되자, 우리 모두는 광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도 우리는 매일 모여 기도에 힘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미국무부 차관보가 사우디에 와서 종교성 장관을 만나게 되었고, 종교성은 우리 교회에 예배를 허락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랍 국가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5)
***[역경의 열매] 김형민 (6) ‘대학연합교회’ 창대함의 첫발은 40일 돗자리기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한 후 얼마가 지난 뒤인 2000년 서울시내 K대학 교수 신우회의 요청으로 학교 교목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예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수와 학생들의 헌신으로 날로 예배 참석자 수가 늘어갔다. 하지만 내게는 더 큰 꿈이 있었다. 하나님께 서원했던 전 세계 열방으로 나아갈 젊은이들을 육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대학 캠퍼스에 돗자리를 깔고 40일 동안 교수 세 분과 함께 기도를 시작했다. 40일 기도 끝에 하나님으로부터 ‘학교 총장을 찾아가라’는 기도 응답을 받았지만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거듭 요청하자 마침내 총장실의 문이 열렸다. 초면이지만 주님께서 주신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물론 주님을 영접하지는 못했지만, “다음에 다시 와도 될까요?”라는 말에 총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총학생회가 등록금 투쟁에 돌입하면서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 머리 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이 바로 총장님을 다시 만나 전도할 때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총장님이 피신해 있던 도서관장실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작은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복음성가를 불러 드렸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찬양을 듣자 총장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때다 싶어서 복음을 전하자 총장님은 곧바로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후 총장님은 나와 우리 교회의 절대적 지지자로 바뀌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빈 강의실을 전전하는 열린 예배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의실에서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목요예배는 너무 많은 제약을 갖고 있었다. 무거운 악기나 음향시설을 매번 옮겨 다니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밀려오는 학생들을 양육하기 위한 안정된 공간이 절실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비기독교 학교 내에 교회를 세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기독교인들의 반대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저 앉아서 때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것이 확실한 주님의 뜻이라면 실행에 옮겨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일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캠퍼스 안에 폭 3m, 길이 9m 크기의 컨테이너 박스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교 신자였던 총무처 직원이 출동했다. “김 선교사, 지금 뭐하는 거요? 여기에 당신 아방궁 짓는 거요, 뭐요. 당장 철거하도록 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강제로 철거하겠소!”
단호한 명령을 내리고 승용차에 올라타는 그를 쫓아간 나는 무조건 차문 사이로 황급히 몸을 넣었다. 깜짝 놀란 그는 “지금 뭐하는 겁니까?”라고 소리쳤다. 그를 그냥 보내면 절대로 학교 안에 교회를 세울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나는 “갈 때 가더라도 기도 한 번만 받고 가세요”라며 그를 붙잡았다. 비에 흠뻑 젖어 생쥐 꼴이 된 나는 눈물로 기도를 했다. 한동안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너무 측은해 보였던지 눈을 감아줬다.
그와 헤어진 뒤 두어 시간 지났을까, 총무처로부터 연락이 왔다. 컨테이너 박스를 철거하지 말고 그 자리에 두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쉽게 그리고 한 순간에 모든 것들이 해결됐다. 할렐루야!
학생과 교수들은 부둥켜안고 울면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컨테이너 깡통교회이지만, K대 개교 50년 만에 처음으로 학교 안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 소식을 들은 교직원 신우회에서도 “개교 이래 수십년 동안 교회 설립을 위해 기도해왔는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축하해 주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민 (7) 학생들 헌신으로 깡통교회에서 성수성전으로
기적적으로 캠퍼스 내에 컨테이너 깡통교회를 세운 후 70명 넘는 학생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큰 부흥이 일어났다. 하지만 학내 문제와 비신자 교직원들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혀 또 다시 철거명령을 받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다급한 나머지 컨테이너 교회를 학교 내 어디로든 옮기기로 했다. 속수무책으로 교회가 철거당하면 학교 안에 다시 성전을 세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2년 4월 5일 학교 안에 있는 산중턱 숲속으로 컨테이너를 옮기는 무모한 작업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작업을 하던 중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일어났다. 기울어진 지형을 다듬기 위해 들여 놓은 포크레인이 나무 몇 그루를 손상시킨 것이다. 결국 교회를 지키겠다는 계획은 무산되고 오히려 더 좋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교회에 출석하던 교수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다가 현장에서 작업을 지휘하던 두 교수가 고발당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나와 두 교수는 그해 고난주간에 형사 사건으로 법정에 섰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았다. 변호사가 아닌 검사의 이의제기로 집행유예를 받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한 장애인 단체에 컨테이너를 기증하고 정든 캠퍼스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 후 더 많은 은혜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았던 두 교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헌신했고, 그 중 한 분은 1년 후 서울시에서 최고의 과학자에게 부여하는 120억원 상당의 프로젝트를 맡았다.
캠퍼스에서 철수한 후 나와 학생들은 몇 달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예배를 드려야 했다. 때론 야외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는데, 성도들이 비를 맞아가며 예배드리는 모습은 정말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학생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일들을 하고 모금을 해 고생 끝에 학교 앞 상가에 40평 남짓한 성전을 얻었다. 입당 예배를 드린 후부터 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돼 주일이면 자리를 못 잡은 교인들이 상가 밖에서 TV모니터를 통해 예배를 드려야 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거리에 나선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 것이다.
문제는 돈이었다. 교회 건물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하다가 결국 성수역 근처 상가의 5, 6층을 찾아냈다. 마음에 들어 일단 계약부터 했지만 20억원을 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학생들에게는 무조건 잘 해결될 것이라고 선포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주일예배 때 학생들이 자원해서 50만원, 100만원씩 헌금 작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몇몇 의대생은 5000만원의 거금을 건축 헌금으로 작정했다.
물론 학생들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그저 이쁘기만 했다. 당시 의대와 간호대 학생들이 국가고시에 합격하면 은행에서 큰 돈을 대출해 주었는데 그것만 믿고 그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작정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됐다. 달동네 출신인 의대생 김재열 형제는 당시 간절한 도움을 필요로 했던 가족들보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먼저 지켰다. 만류하는 내게 내놓았던 그의 고백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의사면허증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도 제 것이 아니고요. 찢어지게 가난한 제가 의대를 무사히 마친 것도 기적이고, 의사고시에 합격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의 헌신을 필두로 헌신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학생들의 이러한 놀라운 헌신을 듣고 많은 분들이 거액을 쾌척했고 마침내 성수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컨테이너 깡통교회에서 시작된 대학연합교회의 성수성전 입당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는 어떤 헌신도 불사하겠다는 젊은이들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신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민 (8) 미래완료형 기도로 일군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 1등
서울 시내 여러 대학에 캠퍼스 교회를 개척하던 중에 만난 학생들 가운데 이윤정이라는 자매가 있었다. 어묵 장사를 하는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어렵게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그녀는 주말마다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특송을 불러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이 자매를 불러서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벌자고 교회를 상대로 돈을 버는 것은 옳지 않다”고 타일렀다. 그 후 그녀는 모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았다. 그리곤 신림동 집에서 교회까지 지하철로 오가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찬양하면서 전도하는 ‘이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주일 2부 예배 중에 갑자기 주님께서 감동을 주시기에 강대상에서 그대로 선포했다. “이윤정은 앞으로 카네기홀에서 공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수미보다 더 훌륭한 성악가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자매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기에 내가 “너, 왜 아멘이라고 하지 않니?” 하자, 그녀는 믿음 없는 대답을 했다. “조수미는 아무나 되나요? 카네기홀은 그런 사람들이나 공연할 수 있는 곳이에요.”
나는 그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성경에서도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고 하지 않았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과거,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는 미래의 우리 소망도 이미 이루어졌다는 미래완료형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녀는 비로소 바람직한 말을 했다. “아멘! 목사님, 그렇게 믿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 상금의 반은 무조건 하나님께 바칠게요.”
그 이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출전한 KBS 콩쿠르, 한미 콩쿠르, 엄정행 콩쿠르 등 유수의 성악 콩쿠르에서 연이어 1등을 했다. 그리고 세계 5대 콩쿠르 중 하나인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 도전, 결선까지 올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결선 날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도무지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상황에서 그 자매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바로 찬양이고, 찬양은 바로 미래완료형 감사”라는 내 말을 떠올리면서 무조건 주님을 높이겠다는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찬송곡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반복해서 두 시간 가까이 부르자 어느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진정으로 주님을 높이며 찬양하자 성령의 임재와 함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성령과 함께 한다는 믿음으로, 결과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무대에 올랐다. 놀랍게도 그녀는 대상을 차지했다. 조수미씨가 2등에 머물렀던 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차지한 영광이었다. 심사위원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면서 “브라보”를 연호했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이 콩쿠르 역사상 처음으로 우승자에게 카네기홀에서 공연할 수 있는 부상이 주어졌다. 용돈이라도 벌어보겠다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 자매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교회에서 충성으로 봉사할 때 그녀의 모든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는 약속대로 정확하게 상금의 반인 700만원을 자신처럼 어려운 학생들에게 써달라고 헌금으로 냈다.
자기 삶의 주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인정하는 순간 그 자매의 삶은 180도로 변화했다.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성령께서 자신의 삶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드리는 그녀에게는 매일 매일이 기적이다. 얼마 전 독일 함부르크 대학은 개교 이래 처음으로 그녀를 위해서 성악박사 과정을 개설해주어 그녀에게 박사 학위를 받도록 했다. 거기다 스위스 최고 극장의 오페라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김형민 (9) 새벽기도는 영적 정상에 오르는 지름길입니다
대학 내 컨테이너 깡통교회 개척 초기에는 일반 교회와 같은 새벽기도를 드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학생들의 등교 시간에 맞춘 아침 8시에 아침기도회를 가졌다. 보통 8시에 시작해서 첫 수업을 시작하는 9시까지 한 시간 정도 함께 기도했다. 수업이 없는 학생들은 구역별로 혹은 개인별로 계속 기도를 했다.
학생들은 학교와 교회를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공동체는 물론 개인의 필요까지 채워 주시는 중보기도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침기도회로는 기도의 갈증을 다 채우지 못했던지 중국에서 온 교포 학생 하나가 다른 교회 새벽기도회에 나갔다. 이 소식에 안타까움을 느꼈던지 학생들은 스스로 어느 초겨울 날 새벽 5시30분부터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내게 찾아와 “선교사님, 저희 새벽기도 시작했어요”라며 자랑스럽게 소식을 전했다. 나는 학생들의 모습이 자랑스러웠지만, 주일예배 한 번도 나오기 힘들어하는 대학생들이 과연 새벽기도를 이어갈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때부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날마다 새벽기도를 이어갔다. 이들은 날마다 부어주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기도의 기쁨을 체험했다.
새벽기도를 본격적으로 드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새벽기도는 영적 정상에 오르는 지름길입니다”라는 구호를 강대상 위에 붙여 놓았다. 내가 말씀을 전하고 전체 기도를 한 후 구역별 기도, 개인 기도의 순서로 진행하니, 5시30분에 시작한 예배가 8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새벽예배라고 하지만, 거의 일반 교회의 철야예배 수준인 셈이다.
이 정도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는 성도가 생길 법도 한데, 오히려 새벽예배에 출석하는 성도수가 날로 늘어 출석 교인의 80%에 이르렀다. 새벽예배 출석 학생들이 각종 시험이나 고시에 합격하는 모습을 지켜 본 학생들은 ‘새벽기도는 하나님께 직통으로 응답 받는 길’임을 몸소 체험했다. 이때부터 대학연합교회에서 새벽예배 출석은 주일 성수나 십일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학생 구역장들은 구역 식구들을 깨우러 다니며 예배에 참석시켰다.
한 학생은 새벽까지 기말고사 준비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중에 학생들을 깨우기 위해 기숙사를 돌고 있던 신기현 교수(현 장로)를 만나 그분의 권유로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한 번도 교회에 나가보지 않았던 학생이 새벽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고, 다음 날 다른 친구까지 전도해서 교회에 등록시키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구역장은 물론이고, 각 구역 담당 목회자들은 새벽 3∼4시부터 성도들을 직접 깨우고 차로 교회까지 실어 나르는 사역을 하고 있다.
새벽예배가 일어나면서부터 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성도를 붙잡기 위해선 선물이나 프로그램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새벽예배가 더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새벽기도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은 대학생들을 뼛속까지 변화시켰다. 지속적인 새벽기도를 통해 자기중심적이었던 젊은이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법칙은 젊은이들만이 아닌 장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많은 사람들은 새벽예배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현상 정도로 치부하지만, 그 의미는 이보다 훨씬 더 크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주일 성수로는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을 이겨낼 수 없고, 새벽기도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의 삶도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김형민 (10) “청년을 예수 제자로” 국내외 대학에 예배처 29곳을
교회가 자리를 잡아 나가면서 나는 이 시대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국내외 대학에 교회를 세워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 현재 국내 대학 캠퍼스에 교회 8개, 캠프 7개를 개척했고, 해외 대학 캠퍼스에 교회 8개, 캠프 6개를 개척했다. 작은 교회 하나가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교회들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성령이 역사하신 결과다. 여기서 그 개척과정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학교들의 사례를 통해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나누고 싶다.
대학 교회의 시작은 서울시립대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서울시립대 앞에 교회를 개척해 한 학기 만에 주일 100명 출석의 부흥을 이루었다. 이어 국민대 캠프에 한동대 교수인 라원기 목사를 초빙해 독립 교회를 세웠다. 그러던 중 경희대 신우회의 교수 수련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17명의 교수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나를 비롯한 참석 교수들 모두 성령에 취해 너무도 흥분해 있었던 탓에 원래 건강 세미나를 열기로 했던 시간을 넘겨 집회를 이어갔다. 세미나를 담당하기로 했던 한림원 회원인 한의대 이혜정 교수는 그 자리에서 한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했던 어깨 질환이 기적적으로 나았다는 놀라운 간증을 했다.
경희대 교수들은 오랜 기간 교내에 교회를 세우는 염원을 품고 있었지만, 이미 학교 병원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하지만 수련회를 계기로 교수들은 다시 교회 설립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교수들은 대학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매일 새벽 7시에 음대 학장실에 모여 40일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매일 늘어가는 새신자 학생과 교수들로 인해 처음에는 문을 닫고 예배를 드렸지만, 점차 문을 열고 복도에까지 늘어서서 예배를 드리는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다. 물론 다른 연구실의 교수들로부터 원성을 사긴 했지만, 예배를 향한 이들의 뜨거운 열망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학교 강당에서 개척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고, 이때 총장님과 단과대 학장님들도 참석했다. 집회를 하던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나는 총장님을 단상으로 올라오게 했는데, 이때부터 그분은 눈물 콧물을 쏟으면서 회개하고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성령 체험 후 너무 큰 감동을 받았던지 그분은 단과대 학장들까지 모두 단상 위로 올라오게 했다.
경희대교회에서 나는 기존 교회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사역을 진행했다. 그러다 목양 책임자로 최영준 교수를 세우고, 신학대학을 다니게 했다. 교회가 자리를 잡은 뒤 나는 경희대 사역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본부 성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회로부터 개척 예배, 양육에 이르는 모든 단계가 한 학기 만에 이루어졌다. 경희대 열린 예배는 학생 구역장이 교수를 포함한 구역원들을 양육함으로써 학생들의 영성과 사기를 높이는 신개념의 교회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는 대학연합교회의 모범사례다.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는 경영대학장 강용무 교수와 교수신우회의 초청으로 개척 집회가 열렸고, 본부 성전 순회 목회자들의 1년 파송으로 사역의 터를 놓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강 교수 부부가 사비를 내 작은 성전을 마련하였고,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사역자를 파송해 정식 교회로 세워지게 되었다. 대학교회 개척의 새로운 전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에는 타향살이에 지쳐 있는 외국 학생들을 위로하고 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예배가 필요하다는 성균관대 한 석좌교수의 요청으로 개척 때부터 헌신했던 대학연합교회 첫 장로인 신기현 교수를 파송해 외국인학생 교회를 개척했다.
***[역경의 열매] 김형민 (11) 성령임재 없다면 교회 간판 먼저 붙이지 말라
2007년 호주로 파송하기로 했던 지혁종 이영신 집사 부부를 캄보디아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호주와 캄보디아는 사실 하늘과 땅 차이인데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내기가 참으로 미안했다. 어느 날 설교를 마친 후 조금은 걱정스럽게 이들을 보았는데, 뜻밖에도 얼굴이 환한 해 같이 빛났다. 호주로 가라는 말이 오히려 지옥에 가라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 같은 결정을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주님께서는 캄보디아의 왕립대학 교수인 얌 교수를 본부에 보내주셨다. 대학연합교회 집회에서 강하게 성령체험을 한 그를 통해 캄보디아 교회 개척은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아산병원 간호사였던 영신은 2000대1의 경쟁을 뚫고 승진된 최고의 자리를 한 달 만에 내려놓았으며, 남편 혁종 또한 GM대우 과장 자리를 내려놓고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마저 주님께 드리고 선교사로 떠났다.
미국의 김수미 박사가 칼텍 연구원의 자리를 내려놓고 목회자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 또 전국 수능 1위, 서울대 전체 수석입학의 이력을 가진 최우순 박사가 남가주 대학연합교회에서 선교사로 섬기듯 많은 엘리트들이 줄지어 주님의 제자로 길을 떠났다.
나는 영신과 혁종을 먼저 보내고 한 주 후 개척 사역을 돕기 위해 캄보디아로 따라갔다. 개척을 위한 집회 때,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장장 11시간 동안 밥도 먹지 않고 기도회가 지속되었지만 현지 학생들 중 어느 누구도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지금까지 너희들이 섬기던 신이 참 신이라면 킬링필드와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우리 조국도 전 세계 최빈국이었으나 예수 믿고서 오늘날 선진국이 되었다. 캄보디아 젊은이들도 예수 믿으면 국가의 미래가 바뀌고 너희 장래가 바뀐다. 이런 좋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느냐”고 초청했다.
그 때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앉아 있던 한 불교 신자 여학생이 믿겠다고 대답할 때 캄보디아어가 아닌 태국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곳에 있던 많은 청년들이 이런 초자연적인 성령의 임재 및 방언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확실히 영접했다. 이후의 네팔, 폴란드, 태국, 그리고 베트남의 개척사역 또한 캄보디아와 동일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교회를 개척할 때마다 적용하는 확고한 원칙이 있다. 성령의 임재가 없다면 교회 간판을 먼저 붙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 건물이라는 하드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증만이 교회 개척의 키워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항상 중국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던 나는 주일 대사와 주영 대사를 지냈던 우석대의 라종일 총장님을 만날 기회를 얻고 바로 중국인 대학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이갑헌 교수의 발빠른 움직임으로 개척사역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유학 온 학생들을 무장시켜 중국으로 역파송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은 것이다. 마침 대만과 중국에서 유학했던 정일도 목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나는 그에게 나를 발판 삼고 뛰어 넘어가라며 그를 붙잡았다. 중국인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능숙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그는 12세 때 기적적으로 백혈병에서 치료받고 중국 선교사를 서원했다. 그는 우석대에 이어 전주대 안에 중국인 채플을 세우고 전북대에서도 무섭게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인 사역이 남부에서 시작되자 서울에서도 중국인 교수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중국인 학생교회가 태동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중국인 학생들을 위한 집회를 인도할 때 있었던 일이다. 중국 공안들이 감시차 집회에 왔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체험까지 하게 되었다. 그들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울며 회심할 때 나는 확신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주님의 약속이 중국인들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역경의 열매] 김형민 (12) 교회개척 성공 포인트 “먼저 지도자를 육성하라”
지난 10년 동안 대학교회 개척 사역을 하면서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었다. 교회를 개척하고 본부로 돌아왔을 때 최악의 경우 간판만 대학연합교회인 경우도 있었다. 개척한 교회를 맡을 만한 사람, 특히 나와 같은 비전과 열정을 가진 지도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어떤 경우엔 고생 고생하여 교회를 세우고 맡겨 놓았지만, 아예 성장이 멈추거나 최악의 경우 간판만 대학연합교회인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가면서 또 하나의 지역교회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많은 고민과 반복적인 기도 끝에 교회 스스로 지도자를 길러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대안학교다. 유아, 초등, 중학교 및 신학 고등학교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무장된 다음세대를 일으키고, 목사와 선교사를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비전에 칼을 대었다. ‘교회 개척이 먼저가 아니라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우선이다.’
올해 대학연합교회에서 운영하기 시작한 대안학교인 샤인랜드 초등학교는 2년 전 우연하게 시작됐다. 심방 중 가정의 어려움으로 급히 서울 할머니 댁에 올라오게 된 한 초등학생이 시기를 놓쳐 전학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연을 듣고 그 아이를 위하여 학교를 열어주게 된 것이다.
교회 청년 전도사들을 다 모아 초등학교 2학년에 맞는 커리큘럼에서부터 식단까지 최고로 짜도록 했다. 아빠에게 받은 아이의 상처는 급속도로 치유되고 얼굴의 어두움도 어느새 사라졌다. 이를 계기로 대안학교를 만들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희한하게도 샤인랜드 스쿨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자 해외유학파 선생님들이 제 발로 교회로 찾아왔다. 그 중 최용록 선생은 버지니아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회사에 입사했다가 전도에 너무 매달린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된 사람이다. 한국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는 비전을 받고, 학교를 찾고 있던 그는 내 설교를 듣고 교회로 찾아왔다.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어야 한다. 훌륭한 선생님을 통해 동심이 지켜진다. 어릴 적 나처럼 선생님을 잘못 만나면 동심을 빼앗긴 사람이 되고 만다. 동심을 지켜주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평생토록 행복한 삶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최 선생과 같은 실력 있고 순수한 교사들이 학교로 몰려왔다.
10년 전 세계적인 예언자인 신디 제이콥스 목사가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국내 목회자 600여명과 함께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해외 사역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마침 지금은 치유사역으로 잘 알려진 손기철 장로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 번은 제이콥스가 설교를 하다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며 다 함께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갈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지금 제게 성령께서 큰 감동을 주십니다. 이 학교 안에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를 통해 마지막 때 큰 부흥과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집회를 마치고 손 장로는 내게 전화를 해서 흥분된 목소리로 이 소식을 전했다. “혹시 이 교회의 지도자가 있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하기에 목사님 대신에 제가 단상으로 나가 축복의 안수도 받고 우리 교회에 대한 예언도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 10년 간 가슴 한 구석에 묻어두고 있었다. 창립 10주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큰 부흥을 맞았고, 이제 다시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다.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대안학교인 샤인랜드 스쿨은 10년 전 제이콥스가 건국대에서 시작한 대학연합교회를 향해서 했던 예언을 실현할 수 있는 큰 발판이 될 것으로 믿는다. 이 학교에서 배출된 아이들이 열방으로 나가 마지막 때를 예비할 주님의 7000용사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민 (13·끝) 지난 30여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께 감사
내게는 사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그리고 캠퍼스 사역에서 늘 일직선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던 두 분의 멘토가 계신다. 한 분은 침례교단의 원로요 부흥사이자 내 시아버님인 오관석 목사님이다. “너는 설거지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 강단에 서야 할 사람”이라며 목사가 되도록 이끌어 주셨던 분이다. 또 다른 분은 CCC의 총재이셨던 고 김준곤 목사님이다. 사역 초기 여자 목회자로서 겪어야 했던 수모와 오해들로 깊은 낙심에 빠져 있을 때, 내 곁에서 용기를 주셨던 분이다. 한 대학의 CCC주최 동아리 연합집회 때 일이다. 한 지도자가 나를 강사로 세우는 데 대해 반대하자 목사님은 벌컥 화를 내시면서 “김형민 목사는 내가 보장한다. 복음 함량 100%의 사람이다”라고 두둔해주셔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경희대교회 개척 때,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시던 노구를 이끌고 강단에 올라오신 목사님은 모인 교수들에게 “김형민 목사 좀 도와주시오. 철새처럼 여기저기 떠돌지 말고 이 교회 오셔서 김 목사에게 힘을 실어주시오!”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볼 것 없던 나를 어떻게 그토록 지지해 주셨는지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가끔은 당신이 가지고 계셨던 책도 보내주시고, 정월 1일에는 반나절 이상을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와 순교한 따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눈물을 훔치곤 하시던 다정다감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장례식장에서 CCC 대표 박성민 목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김수환 추기경만큼이나 김준곤 목사님의 삶이 대한민국과 교계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추모 행렬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던 것에 대해 비기독인 방송 PD들이 “개신교가 얼마나 개인주의적인지 알겠다”고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정말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다.
또 한 명의 잊지 못할 친구는 얼마 전 하늘나라로 떠난 이민아 목사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딸로 세상과 하직하기 전 많은 청년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었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초대를 받아 몇 번 집에 갔을 때, 이 목사는 말기암의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를 극진히 대접했다. 한번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던 상식을 초월한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는 함께 안방에 누워 서로의 발을 올려놓고 서로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한번은 어떤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김형민 목사를 사랑하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세요”라며 30여분을 울며 기도했다.
내 몸에 전세계의 깃발이 꽂혀 있는 환상을 보았다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는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병이 나으면 대학연합교회에 와서 청소년부를 맡아 동역하기로 했는데….
한 달 전, 나는 시와 에세이를 묶어 한권의 책으로 냈다. ‘친구’라는 이 책을 이 목사에게 가장 먼저 선물하기로 약속했었는데, 역경의 열매를 통해 먼저 떠난 친구 이민아 목사에게 이 시를 바치고 싶다. “천국에 가면 네가 날 사랑한 기록, 내가 널 사랑한 기록만 있다. 사랑만 해도 부족할 우리의 시간…. 우리 서로 이 땅에서 그리워한 만큼 천국에서 다시 만날 좋은 그날에 정답게 손을 잡고 마음으로 열어보자.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던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
지난 30여년 예수님을 따라간 시간들을 표현한다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양으로 고백하고 싶다. 하나님의 인자하신 눈빛을 바라보며 심판대 앞에서 구원의 감격으로 두 손 모아 이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은 것이 지금 내 소원의 전부다. 말씀을 전하거나 전도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수천 번도 넘게 불렀던 이 노래는 하나님 앞에서 부르기 위한 연습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나를 사랑해 주시고 평생을 곁에서 머물러 주셨던 가장 좋은 친구이신 오직 주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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