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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 속리산 이름의 유래 8개의 봉우리와 8개의 석문에 8개의 대로 이루어진 속리산 8봉 : 천황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 8문 :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8대 :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봉 황대, 산호대 * 옛 문헌(동국여지승람)에는 아홉봉우리가 뾰죽하게 일어섰다 하여 구봉산이라 부름
▒ 문장대 해발 1054미터의 봉우리. 봉우리 위에는 50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겹쳐져 있다. 정상이 언제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어 운장대라 불렸으나 세조가 오른 후 문장대라 불리운다. 전해오는 이야기 세조가 속리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월광태자라 자칭하는 귀공자가 꿈에 나타나 동쪽으로 시오리 올라 가는 곳에 영봉이 있으니 그곳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세조가 신하들을 데리고 온 종일 올라가 보니 하늘 위에 오른 것처럼 사방이 구름과 안개 속에 가린 영롱한 봉우리가 보였다. 그러나 위태로운 바위라 올라갈 수 없어 철못을 박고 밧줄을 늘어 정상에 올라보니 널따란 박석위에 책 한권이 놓여 있었다. 세조가 집어보니 오륜과 삼강을 명시한 것이라 세조가 크게 감동하고 하루종일 그 자리에서 글을 읽으며 신하들과 강론을 하였다. 그 뒤부터 이 봉을 문장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관음봉 법주사 북쪽 계곡 안쪽에 있는 봉우리로 문장대 서쪽으로 큰 골 건너에 있음. 관음이란 관세음보살을 말한다. 보살은 대자대비하여 중생이 고난중에 열심히 그 이름을 외면 구제하여 준다는 보살이다. 문장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봉우리이다.
▒ 청법대 문장대 왼쪽으로 신선대와 사이에 있는 봉우리. 문장대에서 신선대쪽으로 향하다 문수봉을 지나 뒤를 돌아 바라다 보면 잘 볼 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 절경에 영혼을 잃고 방황하던 중 이 봉우리에서 불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제 정신을 차렸다 하여 청법대라 부른다.
▒ 신선대 법주사에서 동북쪽으로 약 5.7킬로미터지점, 경업대 바로 뒤, 입석대와 청법대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암석 덩어리의 산봉우리 전해오는 이야기 아득한 옛날 속리산에서 절경에 혼을 빼앗긴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없이 날아와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은 고승이 평생 원하는 선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지나 신선들과 놀고자 그곳으로 달려 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이곳을 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를 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으로 달려갈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입석대 문장대에서 천황봉을 향하다보면 신선대를 지나 만나게 되는 바위이다. 전해오는 이야기 조선 인조때 (1623~1634)에 임경업장군이 이 곳에 이르러 6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장군의 기상을 닦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단련이 그의 체력한계가 되는지를 알길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시험해 보고자 했으나 기준조차 알 길이 없어 매우 당혹하게 여겨오고 있었는데 하루는 석굴에 않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임경업이 정신을 모아 그 말을 들으니「마주 바라다보이는 석벽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을 비석처럼 세워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하는 내용이었다. 임경업은 곧 경업대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일으켜 세우는데 아직도 힘이 부족했다. 이에 임경업이 그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체력을 단련하기를 1년 마침내 7년째 되던 해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 데 성공을 했다. 그 후부터「돌을 세웠다」고해서 입석대(立石臺)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경업대 경업대는 입석대 좌측 아래쪽에 있는 바위신선대를 내려와 천황봉과 법주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법주사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만나게 되는 바위이다. 이곳에서 바라다 보는 입석대의 모습이 제일 아름답다. 전해오는 이야기 조선시대 인조때 임경업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라 경업대라 부른다. 이 경업대로부터 5보지점에 뜀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임경업이 심신을 단련하고 있을때, 어느날 밤에 하늘의 별을 향해 구국하는데 신력을 내려줄 것을 빌고 있던 임경업은 바람처럼 계곡을 날라오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태연하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 정체를 확인하고자 암석위에 버티어 서서「요괴는 무엇이냐」고 고함을 쳤다. 그러자 난데없이 산 계곡에서 강풍이 몰아치는데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을 만큼 심했고 자칫 잘 못하면 하늘로 날아가 벌리듯 했다. 그러나 임경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암석위에 버티어 서서 그 강풍을 막아냈다. 이윽고 바람이 멎으면서 바랑을 진 도승 하나가 사뿐하게 암석으로 날아올라왔다. 임경업이 그 동작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알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신력(神力)을 내려주도록 부탁을 했다. 도승은 그 스스로가 독보대사(獨步大師)라고 말 하고 언제든지 이 암석을 둘로 갈라 놓고 그 사이에 길을 만들어 놓는다면 그 때 비로소 신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석굴곁에 있는 물을 하루에 다섯 번 씩 마시면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임경업이 수행을 하는데 그 곁에서 전략과 학식등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난 후 만 5년이 되던 해 가을 임경업은 혼신의 힘을 쏟아 마침내 거대한 암반을 두 조각으로 갈라 놓는데 성공을 했다. 그 후 이 곳이 관음암으로 통하는 곳이 하나의 명소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 중간에 경업이 정신수양을 하던 석굴이 있으며 임경업이 5년 동안을 마시고 힘을 기른 물이 해발 800m의 경업대에 오늘날도 마를 줄 모르고 흘러나오고 있다. 그 물은 차고 신묘(神妙)해서 한 모금을 마셔도 몸이 상쾌해서 악질을 쫓는다고 하며「임경업 장군이 마신 물」이라 해서「장군수(將軍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음암으로 가는 둘로 갈라놓은 바위, 바위사이로 길이 나 있다.
▒ 비로봉 천황봉에서 문장대쪽을 향하다보면 처음 만나게 되는 봉우리. 속리산에서 보기 드물게 넓은 평원으로 되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만나게 되는 진표율사가 속세를 털고 많은 불제자들과 더불어 이 곳에 들어온 다음해 새벽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방문이 환해지면서 밝은 햇빛이 방문 가득히 비쳤다. 대사가 어쩐 일인가 하고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 편 산봉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무지개를 띠고 사방팔방으로 비치고 있었다. 이에 대사가 황급히 합장배례를 하고 그 곳에 이르러보니「비로사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천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 그후부터 대사가 비로사나불을 직접 배례하고 또 비로사나불이 머물다 간 산봉을「비로사나불」의 이름을 붙여 비로봉(毘盧峰)이라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천황봉 법주사에서 동쪽으로 약 5.7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해발 1057미터의 속리산 최고봉으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의 근원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의 근원이 되며,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한강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데 이를 삼파수라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산마루에 옛날엔 대자재천왕사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천왕신이 해마다 가을 10월 범의날이면 법주사에 내려가서 45일 동안 머무르다가 상봉으로 도로 올라오는데 그 동안에 이 산 아래 사는 모든 주민들까지 그 신을 맞이하여 음악을 잡히고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속리산의 주봉은 천황봉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천왕봉이었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천황봉으로 바뀐 듯 하다. 대동여지도를 비롯하여 구한말에 만들어진 실측지도에도 천왕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 배석대 천황봉에서 상고암으로 내려오는 길가에 있는 바위. 사람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함 전해오는 이야기 608년에 왕비 마야부인과 공주 덕만(후에 선덕여왕)이 왕자 법승을 데리고 속리산에 와서 국원의 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기도하였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매일 아침마다 현재의 배석대 바위 위에서 국왕이요, 아버지인 진평왕이 계신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우람한 바위가 하루는 덕만공주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넙죽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배석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보현봉 절에 들어서면 일주문 다은에 만나는 무이 금강문인데 금강문에는 금강역사와 함께 두명의 보살이 있다. 지혜를 상징하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인데, 둘은 항상 같이 있다. 속리산에도 문수봉과 보현봉이 같이 있고, 보현보살은 항상 코끼리를 타고 있고,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있다. 하여 보현봉은 코끼리봉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문수봉자락에는 중사자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 걸방바우 속리산 수정봉 뒷산에 있는 바위. 수정초등학교 뒷산에 있는 바위인데 수정봉 왼쪽에 있는 바위이다. 전해오는 이야기 이 바위는 옛날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모집할 때 강원도 설악산의 울산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설악산 경치에 매료되어 산새를 구경하다가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구성하는 데 참여를 못하고 설악산에 머물렀다 하듯이 속리산의 걸방바위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현재의 위치에 와 쉬면서 속리산 경치를 구경하다가 늦어서 속리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전설은 조선시대 인조때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서 7년 간 수도를 할 때 큰 암석을 걸방으로 져서 놓았다 해서 걸방바위라 칭하는데 그 바위에는 걸방끈 자국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 목욕소 법주사에서 복천암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웅덩이속리산 법주사에서 복천암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좌우 양옆으로 울창한 노송이 즐비하게 서 있고 사이사이에 절벽과 괴석이 솟아 있는 사이로 맑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 냇물에 10여인이 편히 쉴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 깊지도 않고 그렇다고 얕지도 않은 웅덩이가 있는데 ‘목욕소’라 부른다. 전해오는 이야기 세조는 속리산에서 피부병에 대한 요양도 할겸 고승들에게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법회도 갖도록 하였다. 특히 북천암에는 당시 유명한 학조대사와 신미, 학열등 법사들이 모여들어 대법회를 열었다. 세조는 법회중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러 신하를 물리치고 홀로 산책을 하다 이 웅덩이 앞에 이르러 갑자기 목욕을 하고 싶었다. 발이 시리도록 찬물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맑은 물에 심취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목욕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세조 앞에 미소년이 나타나더니 “마마 소생은 월광태자올시다. 약사여래(중생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주는 부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대왕의 병은 곧 완쾌될 것이니 너무 고심치 마옵소서”하고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미소년이 서 있던 곳에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신비스러운 일이었으나 세조의 마음은 가볍기만 하였다. 세조가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때 보니 그렇게도 흉칙하던 종기가 깨끗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조가 목욕을 하고 병을 고쳤다 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된 곳이다.
▒ 수정봉 법주사 서편 가장 가까이에 있는 봉우리. 수정봉이라 하는 이유는 법주사를 중심으로 남쪽에는 남산이 있는데 남쪽은 화기가 있는 곳으로 법주사는 모든 건물이 목조로 되어 있어 남산의 화기 때문에 화재가 자주 일어날 우려에서 법주사 뒷산을 수성을 가진 수정으로 산 이름을 지어 남산의 화기를 눌러 법주사에 화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수정봉이라 하였다 한다. ▒ 거북바위수정봉 정상에 있는 넓고 편편한 큰 바위. 전해오는 이야기 옛날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다가 세숫물에 큰거북 그림자가 비치었다. 이상히 여긴 태종은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되 동국(한국)명산에 큰 거북의 물형이 당나라를 향하여 많은 당나라 재보를 동국으로 들어가려 함이니 사람을 보내어 동국 방방곡곡을 탐색하여 큰 거북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태종은 도사의 말대로 사람을 보내어 사방을 찾다가 마침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돌을 발견하고 돌거북의 목을 자르고서도 안심이 안 되어 돌거북 등어리 위에 10층의 석탑을 쌓아서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한다. 그리하여 목은 끊어지고 탑에 눌린 돌거북이 되고 말았다.
▒ 은폭동 신라 문무왕 10년(670 경우)때에 당나라 고승 혜우(慧愚)가 이 곳에 들려 그 아름다운 절경에 심취되어 신비경을 헤매다가 학소대(鶴巢台)가 마주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 곳에서 평생을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죽기로 작정을 했는데 한 가지 그의 적막을 방해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높이 10여척의 폭포수였다. 혜우도사는 이 곳에는 필시 저 폭포소리가 나지 않으면 더욱 신비경을 이룰 것이라 생각하고 산상(山上)에 올라가 기도를 드리기를 백일만에 도를 터득해 학소대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법경을 외웠다. 그러자 별안간 폭포수가 상류로부터 바위속으로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이 곳에 있던 폭포수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바위속으로 흘러 떨어지므로서「숨은폭포」라고해서 은폭동(隱瀑洞)이라 불리워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상환암(上歡庵)에서 약 1km 올라가는 곳에 새로운 은폭이 발견되어 이 곳을 신은폭동(新隱瀑洞)이라 불리우고 있다.
▒ 추래암 법주사 서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 그아래 열반굴이 있고 굴속 바위벽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여래를 새겼음. 바위위에 한 그루의 노송과 돌탑이 있고 바위 벽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 새겨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옛날 수정봉의 산신이 산봉우리를 정리하다 보니 커다란 바위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변경하였는지라 괘씸하게 생각하여 “너는 이 수정봉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다.”하고 산봉우리 밑으로 굴려 버렸는데 그 바위가 현재 위치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하늘나라의 궁전에서 정원사가 돌사이에 낙엽이 쌓여있으므로 그 낙엽을 걷어내고 바위를 옮겨 놓다가 실수를 하여 지구상에 떨어지게 되었고 정원사는 기왕에 떨어질 바에야 명산인 속리산에 떨어지도록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떨어져 내려온 바위라 하여 추래암이라고 한다.
▒ 학소대 태봉 동북쪽에 있는 바위. 전해오는 이야기 이곳의 맑은 계곡물을 따라 청의동자와 백의동자가 올라가다가 창공에 우뚝 서있는 기암괴석을 발견하게 되자 청의동자가 크게 기뻐해서 이곳에 서식처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백의동자가 기암절벽을 비롯해서 그 주변을 살펴보고 나서「살기에는 좋으나 영구히 서식할 수는 없는 곳이다」라고 반대를 했다. 그러나 청의동자는 심산유곡에 자리잡은 기암절벽인데 누가 이 곳을 침해할 수 있겠는가 하며 그 곳에 집을 마련하고 종족을 번창하니 그것이 곧 청학군(靑鶴郡)이었다. 그러나 백의동자는 그 곳을 지나 경북 상주 땅에 들어가 둥지를 트니 그가 곧 백학군(白鶴郡)이었다. 그런데 그 후 조선초에 이르러 이태조가 이 곳에 들려 기도를 드리다가 청학 떼로 말미암아 맑은 계곡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자 그것을 막기 위해서 암벽에 있는 청학서식처를 헐고 막아버림으로서 청학이 딴곳으로 옮겨가게되어 백의동자의 말이 적중되었다고 전한다.
▒ 태봉 천황봉 남쪽에 있는 산. 조선시대 23대 순조 6년에 이곳에 왕의 태를 봉안하였는데, 1927년 10월 서울로 옮겼다 함. ▒ 은구석 정이품송을 지나 법주사를 향하다 보면 은구석 공원을 만나게 된다. 공원이 끝나는 부분, 커브길에서 다다르기전 만날 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 세조(世祖)가 악질(惡疾)로 인해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이곳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에서 요양을 하고부터 병에 차도를 느꼈다. 왕은 속으로 몹시 기뻐해서 많은 불전(佛錢)을 올려 승려들로 하여금 불교숭상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질환에서 쾌유됨을 경하하는 자리에서 왕은 속리산에 있는 승려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 이곳에 와서 부처님의 은덕으로 악질을 고치게 되었으니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함이니 복천암 앞에 있는 돌을 끌고다니다가 힘이 빠져 멈추는 곳을 경계로 해서 산천전답을 모두 절 소유로 인정하겠다」고 했다. 이에 모든 승려들이 크게 기뻐하여 밖으로 나가 그 커다란 돌에 밧줄을 매어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고 해서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복천암에서 내려와 법주사를 지나 사내리를 벗어나자 보은 땅을 차지할 생각으로 말티재(馬峙)를 향해 돌을 끌었다. 그런데 상판리「새목이」쯤에 이르자 모두들 기진맥진이 되어 더 이상 돌을 끌어갈 힘이 없어지고 말았다. 좌상주지스님이 앞에서 호령을 하면서 다시 한 번 힘을 내도록 독려를 했으나 이제 돌은 더 이상 움직이질 않았다. 이것을 본 왕은 미소를 지으며「세상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 이제 그 자리를 한계선으로 정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며「그만하면 공양미와 승려들의 량도(糧度, 식량)가 족할 것이다.」라고 하며 사전(寺田) 문서를 작정해 주고 돌을 끌어온 자리에 놓아 주도록 했다. 이리해서 돌이 있는 곳에서 속리산쪽 전부의 땅을 법주사에 내주었다. 주간예보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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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속리산 신청합니다.
총무님
이경은 두사람
중간으로 좌석 배정해 주세요.
이경은님
참석합니다.
함께해서 방갑습니다~~
저두 가유~ 작전역에서 타유....
방가방가
환영합니다.
일요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