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3년 백제 개로왕은 백제의 북성 위례성이 내려다 보이는 아차산 기슭에서 처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개로왕이 끔찍하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쉐라톤 워커힐 동남쪽 끝자락에서 바라본 위례성 북성이다.
한강을 천호대교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면 오른쪽에 전개되는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 북성이다.
무분별한 개발로 북성의 서쪽 벽 둘레는 토스토 모양의 극동아파트 등 각종 시멘트 구조물이 열병하듯
빼곡하게 들어차서 이제는 도저히 옛 모습을 상상키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바로 문화유산 보존 현주소를 실증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백제총공격사령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쉐라톤 워커힐 호텔 서남단 언덕이다.
지금 워커힐 호텔이 자리한 아차산 자락이 고구려군 총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한다.
위례성 북성이 눈아래로 보이는 곳에서 개로왕은 처참한 죽음을 맞은 것으로 전한다.
그곳은 쉐라톤 워커힐 호텔 북서쪽 산마루라고 추정한다. 그 산마루에는 지금은 이탈리아 레스토랑 '피자 힐'이 있다.
지금도 '피자 힐' 2층에서는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 북성을 바로 눈앞에 두고 볼 수 있었다.
한강에 북서쪽에 광진교 남동쪽에 천호대교가 놓여 있다. 그 다리를 건너면 위례성 북성이 있다.
직사각형의 극동아파트가 강변도로를 앞에 두고 턱 버티고 있다.직사각형의 시멘트 구조물 아파트가 연이어 있다.
그 아파트 군(群)뒤에 풍납토성 한성이 숨어있다. 북쪽 성벽의 나무가 풍납동토성이 있는 자리임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 주위의 아름다운 아차산 산기슭은 호텔 건물과 도로 건설 등으로 잘리고 헐려 이 언덕만 남아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남침한다.
그때 백제 500년 수도가 함락된다.
백제 개로왕은 체포되어 밧줄에 묶여
끌려가 처참하게 피살된다.
그 역사적인 비극의 그 현장이다.
개로왕과 왕실가족들은 남성(현 올림픽공원)에서
생포되어 배에 실려 모두 아차산 사령부로 끌려온다.
"(서기 475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을 포위하였다.
임금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병사를 네 방면의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임금은 상황이 어렵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고구려 병사가 추격하여 임금을 살해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이 기록은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 경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고 덧붙이고 있다.
결국 한성에 있던 백제왕실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모두 체포되었다.
한성에서 나룻배에 실려 강을 건너 아차산으로
끌려갔다.
장수왕은 백제왕과 그 가족을 고이 죽이려 하지 않았다.
개로왕의 죄목이 나열되었고,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그 처형의식에 할애하였다.
형리가 포박된 그를 잡아채서 모루 위에
그의 머리를 고정시켰다. 연장은 둔탁한 소리를 냈다.
피가 떨어지는 머리가 땅바닥에 뒹굴었다.
백제 개로왕과 그의 가족이 한순간에 몰살당한 것이다.
장수왕은 모두 보라는 듯이 그렇게 한 맺힌 그 한 풀이를 한 것이다.

불에 탄 성문이 무너지고 고구려군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고구려군이 성을 점령한 이후 대대적인 수색이 뒤따랐다.
개로왕의 부인과 그 자식들을 검거하기 위해서 얼굴을 아는 자들이 앞장을 섰다.
변장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함락 직전에 이르자 개로왕은 수십 명의 기병을 이끌고 북성을 빠져나갔다.
개로왕은 북성 건너 남성(현재 올림픽공원)으로 피신한다.
고구려 군 내부에는 그의 얼굴을 아는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이 있었다.
남성으로 탈출한 개로왕은 백제에서 도망을 간 그들에게 발각됐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고구려로 망명한 백제장군이었다.
적에게 투항한 배신자의 가족이 무사할 리 없었다. 그들은 백제왕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개로왕은 그들에 의해 곧바로 체포됐고, 포박되어 얼굴에 침 세례를 받았다.
그것도 3번씩이나 말이다.

475년 초겨울(9월) 장수왕이 고구려군 3만명을 동원하여 백제의 수도를 급습했다.
단번에 한성을 포위하였다. 백제의 개로왕은 성문을 열고 나아가 고구려 군대와 대결할 자신이 없었다.
고구려 군대는 4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2개의 군단은 한성의 배후 요새인 북성(北城)을 공격했다.
성벽을 사방에서 7일 밤낮으로 공격했다. 거대한 돌이 날아오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 후 고구려군들이 성벽에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기어오르는 것이 반복되었다.
수비하던 백제군들은 이렇게 진이 빠져갔다. 북성이 먼저 함락됐다.
이제 고구려 군대는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이미 포위된 개로왕이 살고 있는 남성(南城)을 공격했다.
겨울바람이 북서쪽에서 불자 그것을 정면으로 맞는 성문 쪽에 장작을 가득 쌓았다.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워버릴 작정이었다.
바람을 타고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시시각각 공포는 고조되었고 저항의 의지가 꺾여서 항복하려는 자도 나타났다.

쉐라톤 워커힐 안밖이 백제 아차산성터임을 밝혀주는 사실(史實)이 드러나고 있다.
2003년 송파문화원이 발간한 '서울의 백제왕성 풍납토성'은 쉐라톤 워커힐 일대가 아차산성의 중심이었다고 밝힌다.
그 내용의 일부를 아래 옮긴다. 이 '한성백제연구총서2'는 당시 선문대학교 이형구교수(사학과)가 집필한다.
사적 제234호인 아차산성이다. 그 아차산성은 주로 쉐라톤 워커힐 구역안에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아차산 중북 이상의 부분에 약 1킬로미터 넘는 성벽을 구축한 이른바 테뫼식 산성 아차산성이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삭토법에 의하여 성곽의 형태를 갖춘 다음 그 상변에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루를 쌓아가는
일종의 토석혼축법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62년 워커힐 건축으로 동남쪽의 성벽이 모두 헐리고 매몰되었다.
산성의 일부는 철조망을 치고 일반의 접근을 금하고 있다. 철조망 안에서 산성의 남쪽 부분으로 한강의 광나루를 건너
북성과 남성을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수구지 또는 남문지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이곳에 워커힐에서 취수장으로 만들고 시멘트로 배수구 공사를 했다고 전한다.
당시 성주탁 교수가 현지 조사차 나갔다가 공사로 파헤쳐진 곳에서 백제의 고배편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워커힐에서 철조망으로 통제시키는 이외에는 아무런 보호나 보수대책이 없다.
1979년 시멘트로 만든 취수장이 계속 사용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산성의 동남쪽 중간지점부터는
아예 절단되어 '워커힐골프연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