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페이지를 넘길수록 희미해지는 나의 난장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처음 책을 펴자마자 제목 밑으로 줄줄 늘어진 것은 그리 긴 문장이 아닌데도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는 식은땀이 구레나룻 옆으로 비죽 흘러 내렸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와서야 처음으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을 접했다. 도무지 이 책에 대해들은 정보가 없던 나는 뭔가 작은 어린아이가 꿈과 목표를 찾고 행복해지는 희망적인 내용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기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처음 시작부터 주인공은 가족들과 함께 집을 잃고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던 중이었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내 주변의 가족과 별 다름이 없었다. 불안해 울고 있는 막내부터 철없는 둘째, 장남 주제에 속상한 마음에 어머니께 괜히 고기 타령을 옷 타령을 하는 나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어머니까지... 마지막으로 묵묵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아버지가 계셨다. 언제든지 아버지는 책을 읽으셨다. 심지어 철거 계고장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조차도... 내 생각에 아버지는 책의 내용을 하나도 꿰뚫고 있지 못하실 것 같다. 앞으로의 가족과 생계를 걱정하느라 그랬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집도 옛날에 이와 비슷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일 때 즈음 우리가 시장 안에서 잘만 해왔던 가게를 바로 옆에서 장사를 하던 우리가게 땅 주인이 시기를 해서 우릴 쫓아내려고 갑작스럽게 가게를 빼라며 압박을 주던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시간을 더 달라고 했지만 옆 집 가게 주인은 우리를 기어코 쫓아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나는 옆에서 엄마가 속상해 울고 있는 것을 보기만 하였고 그 당시 지금의 내 나이 즈음 되었을 언니들은 엄마와 함께 다른 보금자리를 마련해 보기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유독 아빠의 행방이 묘연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우리 아빠도 묵묵히 책 페이지를 넘기고 계시던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우습기도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엄마 못지않게 힘드셨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희미해졌을 아빠의 모습이 내 인생을 괜히 스쳐 지나간다.
우리 엄마는 표현이 솔직하고 말이 많으신 편이라 항상 우리에게 고민뿐만 아니라 아빠 욕을 있는 대로 퍼붓곤 했는데 반대로 우리 아빠는 과묵하고 속내를 전혀 보이지 않으셔서 슬픈 감정이나 좋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엄마와 아빠는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에게 박혔다.
그리고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내가 아빠를 보는 그 시선은 단 한가지였다. ‘과묵한 사람’이라는 내 멋대로 설정하고 저장한 편견과 그 편견 속에 녹아 없어져버린 아빠의 책 페이지 넘기는 소리. 그 너머에는 많은 아빠의 눈물과 아픔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 어려서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차마 용기가 없어 외면해왔던 것일까.
나는 나중에서야 '책 페이지를 넘길수록 희미해지는 나의 난장이'는 스스로 자처해서 희미해져 갔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70년대의 한국 사회의 모순 그리고 빈부와 노사의 대립 등의 알아듣기 힘든 단어들 보다 지금 내게 더 중요한 깨달음이었다.
2214조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