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전기 중학입시의 '무즙파동'
학교교육에서 평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교육목표나 수업목표가 어느 정도 도달되었는지 혹은 학생 개개인은 어느 정도의 성취 수준에 다다랐는지 그리고 교육 투자에 대한 효과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판단하고 확인하며 그 결과를 피드백함으로써 교육이나 수업을 개선하고 새로운 교육 계획을 수립하는 필수적인 영역이 평가이다. 따라서 평가 도구를 잘못 제작한다든지 평가 운영을 잘못하여 나타나는 문제는 일파만파의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 일쑤다. 역사에서 보면 우리가 他山之石로 삼아야 할 평가 도구의 제작 문제 가운데 하나가 1964년 전기중학입시의 '무즙파동' 사건이다.
당시에는 중학교 역시 입학 시험을 치루어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따라서 명문 중학교 입학을 위해 초등 학생까지 학교에서 야자수업을 받았고 과외를 받아야 했던 때였다. 1964년 12월 7일. 서울시내 전기중학입시 공동출제 자연 18번 문제로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이라는 사지선다형 문제가 출제됐다. 정답은 '디아스타제'.
하지만 한국 학부형들의 유별난 교육열이 그냥 넘어가게 둘리가 없었다. 학부형들은 "무즙도 정답이다"라고 주장했다. 학부형들은 실제로 무즙을 며칠씩 고아서 엿을 만들어 서울시교육감에게 가져가 "엿인지 아닌지 먹어보라"며 시위를 벌이고, 자연 과목의 백지화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이는 등 커다란 사회 문제로 파급됐다.
학부형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당국에선 「디아스타」제만을 정답으로 인정하고 합격자를 발표하고 말았다. 한 두 문제 차이로 등락이 결정되던 시절이라 이 학생들은 당시 최고 명문이었던 경기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흥분한 낙방생 38명의 학부형들은 65년 2월25일 무더기로 입시합격 확인 소송을 서울고등법원에 제기하기에 이르렀고 같은 해 3월30일 원고 승소 판결로 무즙을 정답이라고 적었다가 불합격한 38명의 학생들은 5월에 모두 응시한 중학교에 추가 입학되었다.
그후에도 '무즙 소동'은 계속되었다. 당시 추가 입학된 학생은 경기중 30명, 서울중 4명, 경복중 3명, 경기여중 1명인데 이틈을 타 15명의 학생이 뒷문 입학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다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청와대의 두 비서관, 문교부의 차관 및 보통교육국장, 서울시교육감, 학무국장 등의 무더기 인책 사임으로까지 확대된 끝에 7개월만에 결말을 지었다.
당시 국가고시제로 실시되던 중학 입시는 이 소동으로 이듬해인 67년부터 학교 단독 입시제로 바뀌었다가 뒤이어 터진 '입시 문제 누설 소동('65)' '초등학교 학구위반 사건 ('66)' '창칼파동('68)'으로 인해 결국 1968년 정부의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 도입 방침에 따라 추첨제로 바뀌게 되었다.
시험 문제 하나가 이처럼 대형 사회적 문제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교원, 정책당국이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